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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6: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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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8.9.4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
우리시대의 교회가 당면한 싸움
눅6:20-22
지난 여러 시간을 통해 ‘성서’가 저들이 살았던 시대의 당면한 문제와 싸웠던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서는 수천 년 전의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시대의 당면한 문제와의 싸우기 위한 교과서와도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의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보다 우리가 사는 현재는 그 질곡이 더욱 깊어져서 성서에 등장하는 그 어느 사람이나 시대보다 더 힘든 싸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질곡의 본질은 자본주의 물질문명입니다.
지금 자본주의 물질문명은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생존의 재난들은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에서 출발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자본주의’라는 것과 ‘물질문명’은 항상 누군가와 어떤 대상을 희생시켜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허먼 멜빌은 말하길, ‘우리는 문명화된 몸을 가지고 있지만, 야만의 영혼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소설이 ‘모비딕’이고 여기서 여러분이 즐겨 마시는 스타벅스가 등장합니다.
이 시대의 바탕에는 모든 것을 경제적인 이익 추구 아래에 두는 자본주의 문명이 병적으로 도사리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산업 혁명 이후 기술 문명의 발전은 비정상적인 물질적 풍요와 늘 붙어 다니는 엄청난 위험을 우리는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삽니다. 오늘날 지구 환경의 위기는 경제성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결국 성장도 기후도 한계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리처드 하인버그라는 이가 [제로 성장 시대가 온다]라는 책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한계에 도달했고, 더는 경제 성장이 가능하지 않은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했습니다. 경제 성장, 경제적 착취의 확대와 전 지구적 자본의 확장도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시대의 경제 불황이 단순하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징표라고 합니다. 따라서 끝없는 성장을 도모하는 일은 환상이라는 겁니다. 그는 그 이유를, 자원 고갈,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 변화, 금융통화의 구조적인 실패를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언제 파국이 일어날지는 시간문제 인 듯합니다. 물론 극단적인 종말론에 기대서 ‘세상이 망하면 천국에 가면 되지’ 하는 이들이 있겠으나, 그들이 살아온 삶의 내력을 볼진대 그들도 그렇게 천국의 도래를 간절히 사모하며 살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지금이라도 탐욕과 착취와 경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걸 신앙의 실천과제로 삼고, 그것을 ‘복음’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적인 붕괴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권력 구조를 완전히 뒤엎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실제로 가능할지는 의문입니다. 오히려 그런 재난이 닥치면 사회적인 큰 힘을 지는 엘리트들이 더욱 대담하게 거대 은행과 군사체계를 지탱하려고 사회의 자원을 더욱 약탈하지 않을까 우려합니다.
결국 생존 가능성은 지역에 따라 결정 될 것이라고 하인버그는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공동체의 복원 능력입니다. 마지막에는 자율적인 인간 공동체가 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운명이라는 거죠. 그러니 우리의 삶의 질은 우리 공동체의 질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공동체적 연대가 강력하다면 아마 견딜 수 있을 겁니다. 공동체의 연대가 약하다면 시련에 꺾이고 말겠지요. 그러므로 대 파국의 위기가 닥치기 전에 준비가 필요합니다. 하인버그는 그 처음이 ‘이웃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푸드뱅크, 지역통화, 텃밭을 가꿔서 기본적인 식생물을 자립하고, 자기가 사는 지역의 물건을 사는 것입니다. 이게 네트워크입니다. 지역에 터를 잡고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것, 그것만이 생존을 위한 전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터잡은 곳에서 실제적인 기술을 연마하고 자급하고 연대하며 이웃과 신뢰를 쌓고 연대를 형성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과 아이들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것이죠.
그런데요, 이런 일들은 본래 교회가 해오던,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나라 선교초기도 교회는 가난한 이웃을 위한 공동체였습니다. 바울의 교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분화, 자본주의 성장이데올로기에 빠져들었습니다. 물질적인 번영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선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복음의 왜곡이죠. 이웃을 만나고 이웃이 되어주는 일이 진정한 기쁨이 아니라, 경제성장과 물질적인 풍요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러다보니 실상은 경제적 생존적인 위기가 아니라 믿음의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이 ‘성장신화’를 깨부수는 일입니다. 이게 오늘날의 믿음입니다. 그러려면 ‘가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옛날에는 인간의 조건을 자각하며 살았습니다. 종교와 문화란 이런 인간 한계를 받아들이면서 사는 것입니다. 주어진 인간 환경 속에서 순응하고 동시에 저항하면서 자기 한계를 깨달아 갔던 전통 사회의 일반적인 삶의 양식은 바로 가난이었습니다. ‘가난’이란 지금처럼 돈이나 귄세나 명성이 상대적으로 낮거나 없는 것을 의미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주어진 삶의 필연에 대처해 나갈 때 당연하게 따라오는 삶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통 사회에서는 가난이 그렇게 박멸의 대상이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난은 일정한 한계 안에 살아야 했던 믾은 사람들의 삶의 조건이었습니다. 종교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는 물질적인 부가 아니라 실은 바로 이 가난이 꽃피워 낸 결실입니다.
독창적인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전통 사회의 가난은 지혜로운 인간을 탄생시킨 반면, 오늘날에는 가난을 끊임없이 박멸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오히려 곤궁한 인간, 즉 늘 무언가 부족하다는 강박과 결핍갑에 빠져 안달하는 인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교회가 지금처럼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것은 그동안 교회가 가난을 죄악시 하고, 경제 성장에 대한 환상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맞바꾸며, 물질적인 이해관계를 이웃 관계와 맞바꾼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기업과 국가가 퍼뜨리는 경제성장과 물질적인 풍요에 대한 신화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과 동일시한 것입니다. 1960년대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면서부터 제어되지 않은 자본주의의 탐욕이 불평등을 구조화하고 대다수 교회는 이를 묵인했습니다. 아니 방조를 넘어 면죄부를 팔면서 권장까지 했습니다. 그걸 복음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한계에 직면한 이 시점에서 경제 성장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설교해온 교회로서는 무슨 할 말이 있을까요? 자본과 권력과 공모해온 이상 교회는 이 세상의 권력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의 대리자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금이라도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를 상상하고 제시하는데 앞장을 서야 합니다. 그러나 그게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어요.
자연과 인간의 삶은 화폐가치를 뛰어넘는 가치를 지녔다는 것은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집단 사망의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는 죽을 때까지 제 몸을 파먹는 괴물과도 같습니다. 아래 그림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엘 그레코라는 이가 1600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희망이 없느냐? 아닙니다. 살아 있는 한 행동해야 하고, 행동 하는 한 희망해야 합니다. 희망은 합리적인 계산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합리적인 계산에는 영적인 열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고통을 견디고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상상력을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저항을 위한 힘은, 상상력으로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에게서 발견됩니다. 예수를 보세요. 예수님은 로마 제국과 예루살렘 성전 체제 아래의 숨 막히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내게로 오라!”고 했겠습니까? 그런 절망과 고통의 상황에서 예수는 어떻게 했습니까? 새로운 세계 즉 ‘하나님의 나라’라는 상상력의 세계를 제시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로마의 깃발이 나부끼는 로마의 도시들에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상황을 초극하는 상상력 덕분이 아니었습니까? 이야말로 퀀텀점프(Quantum Jump)라 할 수 있습니다. 삶의 바닥에서 괴로워하면서도 삶을 이어온 수많은 남녀들이 거룩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상황을 초극하는 상상력 덕분이었습니다. 이러한 상상력이 바로 교회가 보존해 온 가장 소중한 자산인 것입니다.
상상력이란 환상을 만들어내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요즘 단테의 신곡을 읽고 있는데, 단테가 르네상스의 출발점인 이유는 그가 근대의 인물로는 최초로 ‘상상력’을 발휘 한다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사물의 겉모습이 아니라 현실의 진면목을 이해 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경험과 사실의 세계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합리적인 인식이나 노리적인 추론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아름다움, 진리, 사랑, 의미를 추구하는 우리의 삶 한가운데 있습니다. 오직 상상력을 통해서만 감지됩니다.
그러므로 상상력이란 우리자신의 운명에 직면하는 능력이고 진리와 대면하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상상력을 무시하는 문화는 자멸하는 문화입니다. 그러한 문화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성서의 예언자들은 우리 자신을 숭배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저열한 탐욕 앞에 무릎을 굻지 말라고 끊임없이 소리칩니다. 이들의 희망은 자기기만이 아니라 신성한 것들을 향한 존경에 근거합니다. 예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과 타자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신성한 차원을 향한 존경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사랑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옛날부터 교회가 보존해온 귀중한 전통(교리나 신앙의 관습이 아닌)을 지키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전통이 뭐냐? 인간은 신이 아니라는 것, 결코 인간은 전체에서 분리될 수 없으니 오만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전체의 일부로 특정 시간과 장소에 뿌리내리고 주어진 삶의 필연, 즉 유한한 인간 조건 안에서 사랑하고 희망하는 방법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경제 성장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하는 공생공락의 가난한 삶에 대한 믿음과 상상력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어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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