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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5: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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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8.9.25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
구원이란 무엇인가1
신30:19-20,요1:4,
고전15:45
캄캄한 밤입니다. 어디선가 “사람 살려!!!” 하는 외마디 비명이 들려옵니다. 위급한 상황인 거죠. 이 소리를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그 소리 나는 방향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혹시 겁이 나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력함과 비겁함에 대하여 양심의 문초를 당할 것이겠고요. 이 경우에 사용된 ‘살리다’라는 동사는 오직 우리말에만 있는 소중한 낱말입니다. 다른 나라 어느 언어에도 우리말의 이 ‘살리다’에 해당하는 낱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령 영어에서 “사람 살려!”라고 외치는 것은 “도와줘!” 라는 뜻으로 "핼프-Help!"이고 독일어에서도 똑 같은 방식으로 "힐페-Hilfe!"라고 한답니다. “사람 살려!”라는 외침은 누구의 외침인가요? 그것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의 외침입니다. 이것은 어떤 죽은 사람을 살려내라는 제3자의 외침이 아닙니다. 또한 이것은 천수를 다 누린 노인이 임종 자리에 편안히 누워서 마지막 단말마(斷末魔)의 고통 속에서 좀 더 살고 싶은 욕심에서 터져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외쳐야 하는 사람은 한 순간에 목숨이 끊길 위험에 직면해 있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상황은 급박하죠. 이러한 외침을 듣는 사람은 촌음(寸陰)을 다투어서 즉각 현장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혹시 머뭇거리다가 상황이 끝난 후에 현장에 도착한다면 깨진 그릇에 이미 엎지르진 물을 도로 주어 담지 못하는 격이 됩니다.
이 위급한 사람은 누구를 향해서 이 외침을 발하는가요? 그것은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 들으라는 외침입니다. 누군가 들으라는 것이고, 들으면 오서 살려달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기의 외침을 들을 사람이 어떤 인물일지도 모르며 알 필요도 없습니다.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면 제일 중요한 필요조건을 갖춘 셈입니다. 왜 그런가요?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 “사람 살려!” 하는 외침을 듣고서 그것을 묵살한다는 것은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죠. 사람이란 무엇인가요? ‘사람’은 살고 있는 몸입니다. 살고 있는 또는 살아 있는 현상, 작용, 힘을 가리켜 생명(生命)이라 합니다. 생명은 받은 것입니다. 생명을 스스로 창출해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가진 생명은 어느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생명은 공짜로 주어졌지만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한다는 엄숙한 명령이 붙여져서 주어졌습니다. 나의 생명이 어느 누구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사실은 생명이 무한대의 연쇄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생명은 나 개인이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것을 소중하게 키워야 신성한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이 의무는 단순히 나 하나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도 포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 살려!”라는 외침을 듣는 사람은 여기에 반응하기 위하여 이 외침을 발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또는 누구의 위협에 직면해 있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생명이 급박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그 단 하나의 사실에서 그는 거기에 응답해야 할 엄숙한 의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웃’을 정의할 때 드렸던 ‘거부할 수 없는 원리’같은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나의 생면이든 남의 생명이든 구분 없이 다 같이 살려야 한다는 명령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또는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하고 비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시퍼런 칼날을 목덜미에 들이대거나 뻥 뚫린 총구를 가슴팍에 들이대면서 위협하는 폭행자에 비는 간청입니다. 아무리 무례한 폭행자일지라도 그도 사람인 이상 목숨을 살라달라는 애절한 호소에 마음이 동하리라는 가냘픈 한 가닥 희망에 최후로 매달리는 것이죠. 이런 것을 영어로는 "스페어 미-Spare me." 라고 하거나 "해브 머씨 온 미-Have mercy on me."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제발 살려 주셔요”, “자비를 베풀어 주셔요”입니다. “사람 살려!”라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살려 주셔요”라는 경우에도 ‘살리다’라는 동사가 사용되지 아니 했다는 것이 우리말 표현과 전혀 다른 특징입니다.
우리말에서 ‘살다’라는 말과 ‘살리다’라는 말은 동일한 어근에서 조성된 자동사와 타동사입니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내가 아는 한, 세계의 주요한 거의 모든 언어에서는, 히브리어와 라틴어는 예외이지마는, ‘살리다’라는 타동사가 ‘살다’라는 자동사와 동일한 어근에서 작성되지 아니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영어의 리바이브-revive, 비버파이-vivify, 리써쓰테이트-resuscitate 같은 타동사는 우리말의 ‘살리다’의 용법과는 전혀 달리 ‘소생시키다’ 즉 ‘죽은 것에 생기를 넣어서 다시 살려내다’를 뜻합니다.
우리는 팽이가 돌아가는 것을 일컬어 “팽이가 살아 있다”고 하죠. 잘 돌아가던 팽이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나중에는 비틀비틀 거립니다. 그대로 두면 팽이는 쓰러집니다.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팽이가 죽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팽이가 비틀거리고 있을 때에 얼른 팽이채로 후려치면 팽이는 또 힘차게 돌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팽이를 살렸다”고 합니다. 접시돌리기를 하는 곡예사가 있습니다. 접시를 돌려서 막대기에 받쳐 놓습니다. 이렇게 두개, 세 개, 네 개....자꾸 늘어세웁니다. 그러는 동안에 맨 처음에 돌린 접시는 이제 막 넘어지려고 비틀거립니다. 조마조마 합니다. 그런데도 곡예사는 접시를 새로 하나 더 세워 놓은 뒤에 처음 접시에게로 가서 힘차게 돌아가게 만들어 놓습니다. 접시 수효가 점점 늘어감에 따라서 접시가 넘어질 위험이 도처에서 발생합니다. 그렇지만 곡예사는 계속해서 새 접시를 세워 가면서 넘어지려는 접시들을 아슬아슬하게 살려냅니다. 만일에 혹시라도 곡예사가 시기를 놓쳐서 접시가 바닥에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시가. 그래서 그 곡예사가 떨어진 접시를 주어서 다시 돌려놓는 것을 우리는 “곡예사가 그 접시를 살렸다”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소매(의 길이)를 살리다’는 말은 소매의 접은 부분을 펴내는 것을 뜻하지 잘라낸 부분을 잇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불씨를 살리다’다는 것은 불씨가 꺼져버리기 전에 그것을 이용하여 불을 피우는 것을 뜻하지 불씨가 없어진 후에 새로운 수단으로 불을 일으키는 것을 뜻하지 않듯이 말이죠. 우리말의 ‘살리다’는 이런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신약성서가 기록된 문자인 그리스어에는 ‘살다’라는 우리말에 대응하는 자동사는 있지마는 이 자동사의 어근에서 만들어진 타동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야성서에서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다’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일으키다’(에게이로-egeirō)라는 동사를 빌려와서 사용하고 간혹 ‘세우다’(아니스테미-anistēmi)라는 동사를 빌려와서 사용해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다”라는 표현은 ‘일으키다’라는 동사나 ‘세우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표현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나셨다/부활하셨다”는 표현은 ‘일으키다’는 동사의 수동태형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일으켜졌다”라고 표현했으며 또 아니스테미-anistēmi라는 동사는 타동사로도 사용되고 자동사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일어서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전파하는 구원(救援)에 관한 기쁜 소식을 복음(福音)이라 합니다. 복음의 핵심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라’입니다. 몇 마디만 더 덧붙여 기술한다면,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보내신 인류의 구원자이시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이라는 선물을 가져오신/제공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를 제약회사에 비유한다면,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내놓은 제품은 ‘복음’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의약품인 셈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의약품의 내용물입니다. 어떤 제약회사가 신기한 효능을 지닌 신약(新藥)을 발명하면 그 회사의 주가는 아침에 급상승합니다. 제약회사가 내놓은 신약이라는 것은 그 효능 면에서 과거의 것들과 비교해서 월등하게 새롭다는 것이지 사람들이 전혀 희구하지 않던 어떤 새로운 효능을 지녔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라는 제약회사가 제공하는 신약(新藥)의 발명과 제조 과정, 판매 실정 등에 관한 이야기는 신약성서(新約聖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성서’라는 용기 속에 ‘구약성서’(舊約聖書)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러니까 신약성서의 신약(新藥) 이야기는 구약성서에 기술된 여러 가지 치료제 즉 약(藥)들에 관한 이야기들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지 구약성서의 치료제들이 치유하려고 했던 문제들과 전혀 관계가 없는 새로운 어떤 문제를 치유하려고 개발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구약(舊約/舊藥)의 이야기를 모르고서는 신약(新約/新藥)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으며 신약의 내용을 모르고서는 구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구약성서의 내용을 ‘약’(藥)이라는 비유를 사용하여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했습니다. 신약성서와 구약성서라는 용어 속에 들어 있는 ‘약’(約)이라는 말은 ‘계약’(契約)이라는 말의 줄임말입니다(우리말 개역성서에서는 이 ‘계약’이라는 용어를 ‘언약’으로 번역했음). 이 계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채결된 것입니다. 이 계약은 하나님 편에서 솔선권을 쥐시고 채결하신 것인데, 그 내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구원자가 되시고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것이었어요. 신구약성서의 거의 대부분 즉 창세기 12장에서 시작하여 네 복음서가 끝나는 데까지는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관련된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한 세속적 인간의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인물들과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증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구약성서의 내용을 통틀어 ‘구원사’(救援史, Salvation History)라 부르기도 하는 겁니다.
구원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행하신 구원 사건들이 무엇이며,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된 또는 제공된 구원의 내용이 무엇이며, 그 약속의 내용이 언제, 누구에게서 또는 무슨 사건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되었는지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구원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구원’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올바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있습니다. 다시 제약 이야기로 돌아가 보지요. 의약품의 거의 대다수는 갖가지 질병을 고치는 데 사용되는 치료제입니다. 그런데 의약품에는 치료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유지하거나 증진하는 데 사용되는 이른바 건강제도 있어요.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이 두 가지 기능을 통합한 종합 의약품이 나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을 증진하는 데는 개인의 신체에 필요한 영양제를 공급하는 의약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기 청정기와 같이 건강하게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건강 기구도 있습니다. 의약품이나 건강 기구는 모두 인간이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건강을 누리면서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좋은 의약품을 복용하여 병이 치유되고 건강이 증진되어서 집안에 공기 청정기를 설치해 놓아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하더라도 가족 사이에 불화가 있다거나 내일 회사에서 해고되거나 근처의 원자로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거나 전쟁이 돌발하여 전장에서 전사하는 신세가 된다면 이른바 개인적 신체의 건강을 통한 행복 구축이라는 것은 한 순간의 헛된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교가 오늘 이 세상에 제시하는 ‘구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구원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인간이 희구하는 궁극적인 상태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별개가 아닙니다. 인간은 참으로 복잡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인격체로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독자성을 가진 개체적 존재이면서도 남과 교제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계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건강, 의식주. 자유와 같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도 충족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사귐, 인정, 우애, 사랑, 존경과 같은 인간 상호간의 문제도 충족되어야 하며 억압, 착취, 차별, 폭력, 가난, 소외와 불의가 없는 사회적 환경도 조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측면의 문제가 원만히 작동하려면 인간과 초월자 사이의 종교적 관계의 문제 해결이 이 세 가지에 선행하거나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거기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가 인간의 궁극적 행복을 위한 완벽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하더라도 별로 효용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아무리 좋은 제안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따를 만큼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저마다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자기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느라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끝없는 경쟁, 분쟁, 투쟁, 갈등에 휘말려 들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하나의 이상적 청사진을 마련하는 것도 불가능하겠지만 설령 그러한 청사진이 마련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와 같은 제안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청사진을 시행할 주체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사실은 그리스도교가 그러한 청사진을 했으며 그리스도 교회가 그것을 실현할 주체로 위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그 청사진을 편리하게 변개시킴으로써 그 본래의 책임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본래적 구원이 무엇인가를 구명하는 작업에 들어가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전체와 부분,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이분법적 순환론에 빠지게 됩니다. 어느 의사의 처방전이 신통한 효력을 발휘했다면 그 처방전은 그것이 발부된 특수한 그 환자에게만 효력을 발휘한 것이지 그 처방전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똑 같은 신통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러한 종류의 처방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시대의 모든 종류의 인간이 공통의 병을 앓고 있다고 가정하고 이 공통의 병을 포함하여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의 모든 종류의 병을 단 번에 치유할 수 있는 신통력 있는 명의(名醫), 그러한 명의가 나타날 것이라고 약속되었고 그러한 약속이 과연 성취되었다면, 그러한 명의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제시한 처방전은 개개인에게도 적용되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으로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 전체에게도 적용되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러한 명의라는 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제공하신 구원이란 무엇인가요? 나는 앞에서 신약(新約/新藥)이 무엇인지는 구약(舊約/舊藥)이 무엇인지와 연관해서 이해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제공하신 구원이 무엇인지는 구원사라는 큰 틀 속에서 파악될 수 있습니다. 구원사는 편의상 일반적으로 시대적으로 예수 이전까지의 유대교 시기, 십자가 처형까지의 역사적 예수 시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이후시기로 구분하여 관찰 할 수 있습니다. 구원사의 이 세 시기 구분은 구원을 보는 상이한 관점을 지칭할 따름이지 구원의 내용이 서로 단절되었다거나 구원의 내용이 시대적으로 다른 것으로 전이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주일에는 세 시기의 구원의 내용이 세 개의 본문(신30:19-20,요1:4,고전15:45)을 통해서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2 신30:19-20,요1:4,고전15:45 (2018년10월7일) 신명기 30장 19-20절은 시내산 계약에서 수여된 율법 선포의 맥락에서 선포된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생명과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율법 수여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주요한 구원사건인 출애굽 사건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율법 준수는 구원을 비로소 얻는 수단이 아니라 출애굽 구원 사건을 통해서 이미 얻은 구원 현실 속에 머물러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준수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복을 상실하지 않고 계속 누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생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요약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은 곧 사람들의 빛이었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뜻하는 셈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써 이제 살리는 영, 곧 살리는 능력을 행사하시는 영적 존재가 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 본문이 구원의 내용으로 제시한 공통 요소는 생명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이며 생명은 과연 신구약성서의 구원의 내용을 표현하는 적절한 개념일까요? 우리말에는 ‘죽다’는 자동사와 ‘죽이다’는 타동사가 동일한 어근에서 만들어졌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자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는 ‘죽음’ 또는 ‘죽기’이고 타동사의 명사형은 ‘죽임’ 또는 ‘죽이기’입니다. 우리말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어에도 동일한 어근에서 만들어진 ‘죽다-죽이다’, ‘죽음/죽기-죽임/죽이기’의 대응 짝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리스어나 라틴어에 동일한 어근에서 조성된 이러한 종유의 대응 짝이 없기 때문에 번역 과정에서 히브리어에 담긴 본래적 의미가 많이 손실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30장 19절의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다”는 말씀을 ‘살리기와 죽이기와 복 내리기와 저주하기’를 이스라엘 백성 앞에 두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원문의 의미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32장 39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면 상하게도 하고 낫게도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활동을 명사형으로 바꾸어 표현하면 죽이기와 살리기와 상하게 하기와 낫게 하기가 아니겠어요? 신구약성서에서 생명의 반대는 죽음이라는 정태적 상태가 절대로 아닙니다. 성서에서는 천수를 다 한 후에 다다르는 죽음을 생명을 부정하는 반대로 보지 않고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였습니다. 늙은 노인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팔에 안고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이 종을 세상에서 편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습니까?(눅 2:29) 성서는 순탄한 자연적이 죽음 자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가 제공하신 구원의 내용을 표현하는 주요한 용어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생명에 들어가는 것’, ‘생명을 가지는 것’, ‘영생을 얻는 것’과 동의어이며 예수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생명을 얻게 하는 것,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이며 그의 살과 피는 생명/영생을 주는 양식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예수의 선교 활동의 주요 내용을 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과 대조적으로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 대신에 ‘영생’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영생에 들어가다’는 표현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마 18:8,9; 막 9:43; 10:17,30; 눅 10:45). ‘영생’은 양적으로 무한히 연장된 생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질적으로 참으로 충만한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살리는 영이 되셨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리스어에는 ‘살리다’를 뜻하는 하나의 고유한 타동사가 없어요. 그리스어에는 ‘생명’이라는 명사와 ‘만들다’라는 동사를 합성하여 만든 주포이에-zōopoieō라는 타동사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 사상에는 그리스도교의 부활이라는 개념이 없으니까 이 낱말이 죽은 사람을 ‘살려내다’는 의미를 나타낼 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 그리스어 낱말은 ‘살아 있게 하다’, ‘활기차게 하다’를 뜻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장차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데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논거로 끌어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에 있을 죽은 사람들의 부활의 첫 열매인데 그는 부활하신 분으로서 살리시는 영이 되셨다는 겁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문맥에서 ‘살리다’라는 그리스어 낱말은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표현한다고 풀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도 참 생명으로 살리시는 능력을 행사하고 계시는 것이죠. 그렇다면 ‘살리다’는 낱말의 의미의 폭을 여기서 원래보다 훨씬 더 확대시키는 것이 적절하겠지요? 요 5:21; 롬 4:17; 고전 15:36; 벧전 3:18에 사용된 이 낱말은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을 뜻하며, 요 5:21; 요 6:63; 롬 8:11; 고후 3:6; 갈 3:21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살리는 것을 뜻한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무기력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받은 구원의 내용물을 그들의 생시에는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은행 금고에 예치해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구원의 내용물을 사후(死後)에 영혼이 천당에 들어가는 비자 획득에 사용할 금전으로 환전하여 저 요단강 건너편 천당 입구에 있는 은행에 맡겨 둔 채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받은 구원의 내용물은 그들이 영혼이 천당에 입당할 때에만 효력이 발생할 터이지마는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는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변질된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하여 생기게 되었을까요? <햇님 달님>이라는 우리나라 전래 동화가 있습니다. 어린 오누이를 짐에 남겨두고 엄마는 산 너머 이웃 마을 부자 집 잔치에 가서 하루 종일 품일을 해주고 그 품삯으로 저녁에 떡 한 보따리를 얻어서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산 고개를 하나 넘을 때에 갑자기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잡아먹으려고 으르렁대었어요. 엄마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떡 하나 줄 테니 잡아먹기 말라”하고 호랑이와 거래하고 떡을 하나 던져주었어요. 또 한 고개를 넘을 때에 그 호랑이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도 엄마는 떡 하나를 던져주고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런데 그 호랑이는 매번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나타나서 위협합니다. 그 때마다 엄마는 떡 하나를 던져주고 나니 이제 떡이 다 떨어지고 없었어요. 또 고개를 하나 넘고 있을 때에 그 호랑이가 또 나타났습니다. 몸에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자기의 왼팔을 잘라서 호랑이에게 던져주고 살아났습니다. 또 호랑이가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오른팔을 달라 던져주었습니다. 또 호랑이가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왼쪽 다리를 잘라서 던져줍니다. 호랑이가 또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오른쪽 다리를 달라서 던져주었어요. 손발을 다 잘라버린 엄마의 몸뚱이는 죽은 몸뚱이처럼 꼼짝달싹 움직일 수도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언덕 위에서 데굴데굴 굴러서 짐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간에 다다른 엄마의 몸뚱이는 한 토막 죽은 시체일 따름이지 오누이를 돌보고 지켜줄 살아 움직이는 옛날의 그 엄마는 아니었습니다. 이웃 마을로 일하러 나선 엄마를 그리스도교에 비긴다면 엄마를 잡아먹으려고 매번 나타난 호랑이는 그리스도교의 최대 적대자에 비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대항해서 싸워야 했던 이 호랑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교적인 로마제국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이라는 이름의 괴물이었습니다. 첫 고개 마루에 도달하기까지는 엄마의 보따리 속에는 자녀들이 먹고 살아갈 먹을거리가 풍성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원시 그리스도교가 처음 출발 할 시절의 사정이 이와 꼭 같았습니다. 첫째 고개 마루는 제1 세기에서 제2 세기로 넘어 시기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매 고개를 넘을 때마다 그리스도교는 그 본래의 정신을 하나씩 내버렸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손발이 완전히 잘려나가서 기형체로 바뀐 것은 5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서방 그리스도교를 대변하던 시절입니다. 어거스틴이라 불리는 인물 말입니다. 원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풍토에서 태어나서 결국에 유대교적 폐쇄적 민족주의의 껍질을 깨치고 나와서 범세계주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방 세계로 진출하였습니다. 비유하자면 유대교의 토양에 갓 뿌리 내리기 시작한 연약한 나무를 뽑아서 풍토가 전혀 다른 이방 세계라는 황량한 들판에 옮겨 심은 것과 같은 셈이었습니다. 이렇게 선교의 삶의 자리를 옮김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는 얻은 것도 많았던 반면에 잃은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신약성서 시대 즉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와 복음서 저자가 네 복음서를 저술한 시대인 1세기 후반기 동안에는, 비록 그들이 이방 세계에서 활동하면서 그리스어로 집필을 했지마는, 역사적 예수가 일으키신 인간 구원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다른 문화 속에 이식할 때에 복음이 문화를 변혁시키느냐 문화가 복음을 변질시키느냐는 문제를 놓고 갈등이 야기하기 마련입니다. 그 당시에 이방 세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대표적인 철학 사상은 플라톤주의였다. 플라톤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실재를 이데아계와 현상계 이분하는 이원론이었습니다. 불변적인 영원한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이고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현상계는 가변적인 것이므로 허무한 것이라는 겁니다. 초기 교부들 가운데는 플라톤을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으로 치켜세운 사람도 있지마는 대다수의 그리스 계열 교부들과 라틴 계열 교부들은 플라톤 사상에 직접으로 물들게 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가 플라톤 사상으로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영지주의라는 하나의 지혜문학적-종교적 사상운동이었습니다. 영지주의의 내용이 정확하게 무엇이며 출생 시점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를 현재로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영지주의의 사상적 뿌리가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에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플라톤의 이원론에 입각하여 영지주의는 인간을 영-육 이원론으로 해석했습니다. 인간은 그의 선한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 일시적으로 감금되어 있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구원이라는 것은 영혼이 육체의 감옥을 박차고 나와서 영원한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인 셈입니다. 영지주의의 유명한 모토는 “몸은 감옥이다”(sēma sōma)였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영지주의와 맞서 싸워야 했어요. 이러한 영지주의가 언제부터 그리스도교의 적대자로 등장했는지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바울 서신들과 복음서에도 반영지주의적 논증의 흔적이 있음이 확인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영지주의가 본격적으로 발호하기 시작한 것은 2세기 중엽부터라고 할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도교 바깥에 있는 적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내부에 깊숙이 침투한 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교 내부에는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 사상이 횡행했습니다. 이것은 싸우면서 닮아간다는 격언과 같이 그리스도교가 외부의 영지주의와 맞서 싸우면서 영지주의에 자기도 모르게 물들게 된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교가 몸과 영혼의 통합적 존재로서의 전인적(全人的) 구원 사상을 은근슬쩍 내버리고 그 대신에 영혼불멸설과 함께 개인 영혼의 내세 구원관을 받아들인 것은 영지주의 사상에 굴복한 것과 다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의 소중한 유대교적 유산을 폐기 처분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곧 묵시문학적 종말 사상이었습니다. 종말사상은 그리스 사상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종말 사상은 인간의 또는 세상의 궁극적인 구원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역사의 미래에 있다고 희망하는 믿음입니다. 종말 사상의 폐기와 더불어 그리스도교는 역사 변혁의 의지도, 능력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개인주의 종교, 내면적 이기주의 종교, 몰역사적 피안주의 종교로 전락하여 역사의 현장으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했던 것이죠. ‘식인종’이라는 것은 서구 사회가 조작해 낸 허위의식입니다. 식인종이라는 인종의 존재를 개관적으로 입증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식인종이라는 것은 서구인들이 야만인 세계를 마음대로 정복ㆍ약탈해도 된다는 구실로 이용되었습니다. 이러려고 식인종 스토리를 지어 낸 것입니다. 서구인이 이른바 식인종 추장에게 조롱 섞인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왜 사람을 잡아먹소?” 추장이 대답했습니다. “아 그건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러지요. 당신들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소. 우리는 먹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지만 당신들은 왜 전쟁을 먹지도 않을 사람들을 수천 명, 수만 명 씩이나 쓸데없이 죽이는 것이오?” 우리는 과연 식인종을 경멸할 자격이 있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큰 바위나 나무나 해나 달을 향하여 절하고 빌지 않는 것은 자랑할 만합니다. 그러나 남의 사찰에 몰래 들어가서 불상의 머리를 자르거나 학교 교정에 세워 놓은 단군상의 머리를 자르는 행위는 부끄러워해야 할 짓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우상숭배의 죄로부터 자유로운가요?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모시는 것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소유욕, 명예욕, 권력욕, 지배욕, 독점욕, 이기주의, 물신숭배, 편의주의, 재물 등등 수많은 정신적, 물질적 우상들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지 아니한가요? 다시 식인종 추장의 말을 되씹어 보십시다. 우리는 식인종이 아니라고 해서 살인 행위로부터 깨끗한가요? 전투에 직접 참가하여 적군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해서 살인 범죄에서 깨끗한가요? 공해 물질의 배출, 생활쓰레기 양산, 무분별한 농약 사용, 과도한 에너지 소비, 소비주의, 성장지상주의, 너 죽고 나 날자는 식의 무한 경쟁, 패권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쾌락주의, 제도적 폭력, 사회적 불의 등등의 해악을 묵인하고 방관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살인 행위에 가담하는 것이 아닌가요? ‘생명’은 오늘날 인간이 당면한 문제 중에서 맨 첫째가 되는 화두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자연의 자정 능력을 능가하는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핵전쟁이나 핵사고 등의 가능성으로 인하여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전 생명이 멸절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생명운동은 ‘웰빙 운동’처럼 단순히 건강하게 잘 살자는 식의 한가한 운동이 아닙니다. 생명운동은 사느냐 죽느냐의 양자택일을 놓고 결단해야 하는 급박한 문제입니다. 생명운동은 단순히 생명의 보존이라는 한 가지 문제 해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문제의 근본, 즉 인간해방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교회가 생명을 그 선교 사명의 화두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하면 ‘생명선교’라는 이해가 보편화 되어야 합니다. 사람숫자 말고 생명 말이죠. 그리스도교회가 생명운동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의(時宜)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복음의 본래적 뿌리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팽이가 돌아가는 현상을 일컬어 팽이가 살았다고 합니다. 팽이가 살았다는 것은 팽이라는 물체와 더불어 있는 현상이지 팽이를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어떤 현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구원을 생명 또는 영생이라는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인간 구원으로서의 인간의 생명, 인간의 영생은 영육으로 구성된 인간이라는 현실적 존재와 더불어, 그 존재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 인간의 몸을 떠나서 존재하는 어떤 현상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을 영혼의 구원으로 보는 것은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상에 오염되어 생겨난 그릇된 가르침입니다. 오늘날의 생명운동은 인간의 구원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의 생명의 구원도 목표로 합니다. 인간의 생명과 자연의 생명은 별개가 아니고 하나의 거대한 생명 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연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것은 자연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본래적 권리를 회복시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이 성취되는 그 날에는 인간만이 구원을 받아 어느 허공으로 이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갖가지 짐승들, 곤충들, 새들, 물고기들, 그리고 꽃동산으로 변한 사막에서 피어난 갖가지 아름다운 식물들과 함께 춤출 것입니다. 오늘날 “생명 살려!” 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 소리 없는 절규를 들을 귀를 가진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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