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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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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토요 성경공부 |
(창세기 槪觀)
‘창세기 개관’ 분의 지난 설교 총 복습.(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1장 1절-2장 3절.
성경은 전부가 비유요 비사다. 천지창조의 기록도 실제적인 역사이기도 하지만 역시 비유요 비사의 말씀이다. 그러면 눈으로 보이는 것을 보인 그대로 기록을 했는데 왜 비유요 비사라고 하는 거냐? 인간은 유한한 존재요 물질세계에 살며 늘 물질성만을 접하기 때문에 신령하고 비물질적이고 영적이고 영원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말로 설명을 해 줘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그 영적인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영적인 그것과 가장 근사한 인간의 말을 들어서 표현한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을 비유요 비사라고 하는 거다.
1장에서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 라고 하며 빛을 만들었는데, 이 빛은 넷째 날의 해와 달과 별빛과는 다른 영적인 빛이다. 이 빛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경험한 물질성의 빛이 아니기 때문에 만일 넷째 날 물질성인 해와 달과 별빛을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첫째 날 만든 빛이 무엇인지 알지를 못하게 된다. 첫 날에 만든 빛은 물질성의 빛인 해 달 별빛이 아닌 영적으로만 알아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빛이라는 점에서 이것을 표현을 하자면 말씀의 빛이다. 그래서 눈으로 볼 수 있는 햇빛의 특성이나 역할을 생각하면서 영적인 빛을 비유로 말을 하자면 하나님은 빛이시다. 또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
그리고 첫째 날 빛을 만들어 놓고 낮이라고 했고, 또한 넷째 날 햇빛을 만들어 놓고 이 해에게 낮을 주관하라고 했으니 이는 우리로 영적인 면까지 알 수 있도록 첫 날의 빛과 넷째 날의 빛을 합해버린 거다. 이렇게 해야 만이 해가 있으면 구별 분별이 되고 사람의 모양이나 형체를 다 볼 수 있고 알 수 있듯이 영적인 빛이 있어야 우리가 영적인 면을 생각할 수 있고 영 분별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거다.
성경에 동방박사들을 아기예수님께 인도한 별이 나오는데, 별이 어떻게 사람을 인도하느냐? 역사적으로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은 진리와 성령으로라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니 그렇게 표현을 한 거다. 그리고 옳고 진실한 종들은 그 별처럼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노릇을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둘째 날에는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했는데, 물을 위의 물과 아랫물로 나눈 것은 각각의 물을 각각의 용도에 알맞게 쓰려고 그렇게 했다는 것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듯이 신앙 면에서도 위의 물과 아랫물(말씀)이 있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해서 위의 물을 먹여야 함을 말해주는 거다. 최고의 좋은 물을 먹으면 살고, 구정물 오염된 물을 먹으면 사람이 죽듯이 하늘의 말씀이 아닌 땅의 말을 들으면 영적인 면에서 죽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세상만물 전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용물로 쓰라고 만드신 것인데,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었듯이 우리가 만사를 ‘영이냐 육이냐, 천국이냐 세상이냐, 임시냐 영원이냐’를 구별 분별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혼합이 되고, 결국은 세속화 된다.
셋째 날에는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게 했는데, 이것을 영적인 면으로 보면 아래에 있을 것은 아래에 두고 위에 있을 것은 위에 두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성도는 자타가 구원을 잘 이룰 수 있도록 언행심사의 모든 것을 정리정돈을 바로 하라는 거다. 믿음이 좋은 성도들은 정리정돈도 잘 하고 믿음에 질서가 있다. 이게 도덕성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리고 셋째 날에는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게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말씀을 하셨고, 그 이후에 인간을 만들어 놓고 ‘이 모든 것들이 너희들의 식물이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인간들에게 일반은총혜로 주신 것들을 들어서 성도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특수은총이 있음을 알고 이것을 많이 받고 성장하라는 뜻이 들어있는 거다.
그 다음에 여섯째 날까지를 죽 보면 하늘과 땅의 것을 만들고 이들로 하여금 생산하고 번성하게 했는데,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로 구원이치와 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거다. 해와 지구 사이에 구름이 끼면 사람들이 해를 볼 수 없고 땅이 어두워지는데, 우리는 이것을 통해 계시를 깨달을 수 있는 거다. 즉 내가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생명의 빛을 받으려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 무엇이라도 끼워 넣으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영적으로 어두워지는 거다.
어떤 이유로서 내가 진리의 빛을 받지 않으면 나는 신앙 믿음이 병들어 버린다. 왜 그러냐? 해를 받지 못하면 식물이 자라지 못하듯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물질이라는 것이 끼어있으면 영적인 면에 열매가 없고, 성장도 안 되고, 자라지도 않는 거다. 이렇게 볼 때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면 그동안 이런 이치를 알고 교회에 다녔느냐, 모르고 다녔느냐? 물론 우리가 처음부터 다 알 수는 없으나 자기가 옳은 교훈을 하는 교회에 다닌다면 이런 걸 알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천지창조의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만들었구나’ 라고 하면서 ‘성경에서 이걸 깨달았으니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다’ 하고 말아버린다면 자기가 받았다고 하는 은혜가 자기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런 식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떤 감정적인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감정적인 것은 ‘눈으로 보고 불쌍하다. 눈으로 보고 기쁘다. 눈으로 보고 좋다’ 하는 외부적으로 오는 거지 자기의 속 성품이 하나님으로 인격화 되는 것과는 무관한 거다.
참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귀로 들어와서 그 말씀이 내 속에서 깨달음을 주면서 참과 거짓이 구별이 되니 내 마음이 기쁘고 즐겁고, 이로 인해 영적인 능력자가 되어서 모든 유혹과 미혹을 이길 수 있고, 지혜가 생기니 거짓 것에 속지 않게 되는 거다. 생명과를 먹는 사람은 이렇게 된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데, 교회에서 어릴 때부터 사람의 중심을 볼 수 있는 눈을 뜨여줘야 하는데 이걸 못 보는 상태로 자라면 어른이 되어서도 사람을 보는 거나 세상을 보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위주로 따라가니 100% 속는다. 생각을 해 봐라. 요즘은 돈 많지, 재산 많지, 학문 많지, 그런데 왜 이렇게 불행한 거냐? 이유가 뭐냐?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데 인간 자기는 생명과를 못 먹어서 사람을 바로 못 봤구나.
성경에 보면 세상적으로는 물질 없고, 무식하고, 별 볼품이 없지만 그 마음중심이 하나님께 붙들려 사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다 준비를 해 놓으신 것을 볼 수 있다. 룻의 경우를 보면 시어머니가 보아스에 대해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하면서 룻에게 보아스 가까이 있으라고 한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주님을 찾는 걸 말한다. 이 외에도 많이 있다. 반대로 왕이 되고, 물질부자가 되고, 명예 영광을 얻으려고 소돔 고모라 성으로 올라간 롯은 어떻게 되었느냐? 천추만대에 수치와 부끄러움만 남았다. 이 외에도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찾는 자에게 이적과 기사를 동원시키시면 기쁨이요 영광이지만 안 믿는 사람에게 이적과 기사가 오는 것은 멸망이고 형벌이다.
요즘은 나이가 비슷비슷한 사람끼리 결혼하는 일이 많은데,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있는 거다. 젊었다고 해서 오래 살라는 법도 없다. 그리고 죽는 모습도 참 여러 가지다. 나이 들어서 죽는 사람도 평소에 세상염려 걱정을 하며 살았다면 이 사람의 뇌 속에는 죽은 것만 들어있지 산 것은 없다. 성경에 보면 모든 병은 마음에서 난다고 했는데, 병이라고 하면 고통도 염려 근심 걱정이 다 포함되는 거다. 자기가 마음을 잘못 먹으니 자살해서 죽고, 약 먹고 죽고, 늘 감옥에서 살고 그러는 거다.
넷째 날에는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했는데, 두 광명이 낮과 밤을 주관케 했고, 또 광명으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게 했다. 천체의 위치와 입장은 하늘이다. 창조 때 하늘에 있도록 한 것이 땅으로 내려오는 일은 없다. 성도의 위치와 입장 역시 하늘이니 정신과 사상이 세상으로 떨어지면 안 된다.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징조’란 미리 보이는 어떤 낌새를 말하는데, 성도는 그 위치와 입장이 하늘의 차원이어야 하는데 생각이나 사고방식이나 이해타산이 땅에 붙어있으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겠구나’ 하는 것을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거다. 쉽게 말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생기는 게 땅으로 인해서 되는 거냐, 해로 인해서 되는 거냐? 어느 게 주격이냐?
이 예를 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체를 가지고 사시와 연한을 이루고 또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고 했으니까 이 땅에 사계절이 있고, 여러 가지 사건 환경이 교체되는 것은 우리로 구원을 이뤄가는 면에 깨닫고 사용하도록 하신 것이므로 우리가 세상의 이런 것들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구원을 이뤄나갈 수 있다는 면에서 다 징조가 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위치가, 사고방식 이해타산이 하늘의 것이어야 하는데 이게 땅으로 떨어지면, 위치 신분 사고방식이 낮으면 그 다음에는 너의 가정과 자녀들이 어떻게 돌아가나 미리 볼 줄 알아라 그 말이다.
일반적으로 집에서 부모가 맨날 싸우면 애들이 어떻게 되느냐? 집을 나가버린다. 그러면 부모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하게 되니 이 아이의 장래는 없는 거다. 고작 해봐야 세상에서 돈이나 벌고 밥이나 먹고 살다 죽는 거다.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세상에 만들어 놓은 목적이 없이 산다면 짐승과 다른 게 뭐냐? 같은 원리로 교회가, 성도가 세상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바람에 휘말리게 되면 짐승과 다름없이, 불신자와 다름없이 살다가 자기를 이 땅에 내신 하나님의 목적과 상관없이 살다 가게 되는 거다.
세상이 자기를 아무리 올려준다고 한들 장(長)자리밖에 더 있느냐? 설령 장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그것이 영원히 가느냐? 그리고 최고로 올라가게 되면 그 다음에는 떨어지는 것밖에 없다. 우리는 그저 먹고 마시고 살만하면 예수 잘 믿는 쪽으로 전력하면 그만이다.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라.’ 사계절, 1년 열두 달, 한 해 한 해 사는 동안 자기의 나이적으로 어떤 전조현상들이 일어났으며, 이 전조현상을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왔기에 지금의 나의 결과가 된 거냐? 오늘의 결과가 또 내일의 전조현상이 되는 거다. 내일이라고 하는 그 날에 맺혀질 열매가 오늘의 준비가 되고, 내일의 열매가 또 모레 준비가 되고, 이것이 계속 연속이 되는 거다. 이런 현상들이 자기에게 밝은 것으로 일어난 것인지, 어두운 것으로 일어난 것인지? 빛이 없는 삶으로 일어난 것인지, 빛이 있는 삶으로 일어난 것인지? 이걸 생각해 봐라.
다섯째 날에는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했고,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게 했다. 이에 앞서서 넷째 날에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고 땅이 드러나게 한 이유가 뭐냐? 물에서는 고기를 기르고 땅에는 식물이 나게 해서 사람들의 먹이가 되게 하려는 거다. 하늘에 새가 날게 한 것도 마찬가지인데, 이 모든 것은 성도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거다. 영과 육의 결합체로 지음 받은 인간은 영 주격으로 살면서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만들어 놓은 물질을 다 먹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먹기는 먹되 먹고서 구원의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인간의 구원에 이용 활용할 것들이라는 면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거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을 우리가 자타의 구원에 바로 사용 활용을 한다면 이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거다.
고래가 얼마나 크냐? 엄청나게 크다. 상어는 굉장히 사나워서 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들에게 만물을 다스리라고 했으니까 만일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이런 것들이 사람을 잡아먹지도 않을 거고 사람에게 잘 순종했을 거다. 문어는 다리가 여러 개인데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문어야, 다리 하나만 잘라놓고 가거라’ 하면 ‘예’ 하고 자기 다리를 잘라놓고 갈 거다.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놓으니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그런 것들이 인간의 말을 듣지 않는 거다. ‘인간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죽게 생겼다’ 하며 우리를 잡아먹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다니엘은 사자 굴 속에 들어갔어도 밤새도록 사자 털 이불 속에서 따뜻하게 지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움직이고 명령을 듣는 것이니까 우리가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한다면 만물이 우리를 거스릴 리가 없는 거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모든 만물이 번성하고 충만한 것이 좋다. 다 우리의 구원에 이용물이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아침이 되며 저녁이 되니’가 아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라고 했고, 이어서 ‘다섯째 날이니라’ 라고 한 것은 저녁이 되면 잠을 자고 밝은 아침이 오면 열심히 활동을, 일을 하라는 거다. 사람은 낮에는 활동을 하고 밤에는 잠자리에 들게 되어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정해 놨다. 그런데 인간이 무슨 이유로서 건 밤에 잠을 안 자고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육신의 생체시계가 흐트러져서 몸이 고장이 나버린다. 결론은 인간이 죽는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법칙을 어기면 죽는 거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것도 그 종류대로 지었는데, 같은 종류라도 또 나눠보면 여러 종류로 분류가 된다. 사람을 보면 같은 사람인데도 남녀가 있고, 또한 키도 몸도 눈도 각기 다르다. 짐승도 마찬가지다. 눈이 두 개 달린 것도 있고 거미처럼 여러 개가 달린 것도 있다. 그리고 눈이 이마에 박혀서 고정이 된 것도 있고, 카멜레온처럼 눈알이 튀어나와서 이리저리 굴리며 보는 것도 있다. 바다의 생물이나 땅의 곤충도 보면 같은 종류인데도 또 여러 가지로 분류가 된다.
그런데 같은 곤충인데도 왜 어떤 것은 기어 다니게 만들었고, 어떤 것은 뛰어다니게 만들었을까? 그 이유는 우리로 ‘이것보다 저것’ 하는 진가의 구별을 바로 하며 살라는 뜻이다. 많은 식당이 있지만 음식이 맛있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간다. 같은 사과라도 맛이 다르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로 영적인 면에서도 구별 분별을 하라는 거다. 영 분별은 그 어떤 것보다 최고의 분별이다. 하나님께서도 구별 분별을 하는 분이시다.
구별 분별을 바로 하는 사람은 신앙 면으로 따지는 것이 언제나 영원히 가는 것을 취하게 된다. 이 사람은 영적인 면에서의 말씀의 수준이나 차원, 진가, 소원 목적, 향기, 맛 등을 다 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닮으려면 이게 있어야 한다. 즉 판단을 했느냐? 구별을 했느냐? 그렇다면 바른 선택을 하라는 거다.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바다에 사는 뱀도 있고 육지에 사는 뱀도 있는데, 이 둘이 만나면 즐겁게 인사를 할까? 안 할 것 같다. 참 신비롭다. 새우는 새우대로, 고래는 고래대로, 물개는 물개대로. 이 모든 게 참 신비롭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대로 순종한다는 면에서, 인간이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은 거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이게 무슨 말이냐?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우리’ 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여러 분이냐? ‘우리’란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한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인데, 인간의 표현으로 말을 하면 삼위 하나님이 달라붙어서 인간을 지었으니 얼마나 철저히 계획과 설계를 해서 지었겠느냐? 삼위 하나님이 인격자이신 것처럼 당신의 설계대로 우리 인간을 인격자로 영광 육의 결합체로 지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구속을 입히는 것도 삼위 하나님의 설계대로 입힌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을 입힌 사람을 당신의 성품의 사람으로 되게 하는 것도, 성령의 사람으로 되게 하는 것도 당신의 설계대로 하는 거다. 첫 사람이 타락이 됐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대국적인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든 거다.
첫 사람 이후로 안 믿는 사람은 여전히 타락된 상태이지만 이 사람 역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요, 이 사람 속에 지정의가 들어있다. 그러나 이는 타락된 요소로 된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현재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 사람 속에서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기 때문에 신적 지혜지식성이나 신적 도덕성이나 신적 능력성인 영적인 면의 인격성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거다.
아담을 만들고 나서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서 하와를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부부는 한 몸이라는 계시가 들어있다. 한 몸인 부부는 주의 일을 같이 협력해서 잘 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타락이 됐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구원을 받았는데, 이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되는 거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구속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을 덧입어 가는 건데, 이것을 신학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입는 거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만들어지는 것인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적 도덕성을 입는다는 말이다. 교회에서는 이 일을 해야 하고, 교훈의 내용도 이래야 한다.
교회에 다닌다는 게 뭐냐? 아무 교회나 가까운 곳으로 나가고,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가고, 열심히 충성봉사를 해서 직분이나 얻고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다 벗어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쪽으로 치달아야 한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거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 목적이기도 하다.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우리는 육해공을 다스려야 한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런 특권이 주어졌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덧입는 구원을 이뤄가는 거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생기는 대로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거다. 낳았으면 믿음의 자녀로 길러야 한다.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물론 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 많은 생산을 해야 하는 거지만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면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잡아다 기르고, 짐승을 길들여서 일도 시켜야 한다. ‘다스리라’고 하는 것은 이 면도 들어있는 거다.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이 땅에 있는 식물 중에 못 먹는 것도 있느냐? 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먹을 것들이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 중에 우리의 구원에 모자라는 것이 없고, 필요 없는 것이 없고, 잘못된 것이 없다. 다 우리의 구원에 쓰기 좋도록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하는 거다. 보아서 좋고, 먹으니 좋고, 같이 있어서 좋고, 얘기가 통하니 좋고. 이 모든 게 심히 좋았더라.
가만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에이, 이건 내가 괜히 만들었구나’ 하는 게 있을까? 우리 인간이 생각할 때는 모기는 안 만들었으면 좋을 것 같다. 논의 거머리도 안 만들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걸 다 만들어 놓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하셨다.
인간이 보기에는 필요 없는 것 같은데도 이것이 먹이사슬에서 사라지면 그 위 사슬의 짐승이 먹을 것이 없어서 죽게 되는 것도 있다. 먹이사슬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문제가 생긴다. 인간들이 산에 돌아다니면서 도토리나 밤이나 돼지감자를 다 가져와 버리면 돼지가 먹을 게 없어서 사람이 사는 동네로 내려온다. 먹이사슬이 깨지니 그런 거다. 지금 먹이사슬이 깨지다 보니 어릴 때 흔히 먹던 바다생선이 별로 없다. 인간의 욕심이 결국은 인간에게 해로 돌아오는 거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이어서 2장 1절에 ‘천지만물이 다 이루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한 모든 것들을 다 만들어 놓았으니 이제 인간은 이것을 이용 활용하면서 열심히 구원을 이룰 수 있다.
그러면 왜 저녁을 먼저 겪게 하고 그 후에 낮을 겪게 한 걸까? 세상은 첫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있는 거다. 그리고 또한 세상은 천국을 비유한다. 이렇게 볼 때 물질세상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천국보다는 안 좋다. 그리고 천국에는 밤이 없다고 했는데 세상은 밤이 있다. 만물을 다 만드신 후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라고 했는데, 밤이 지난 후에 낮을 겪는 것과, 낮을 먼저 겪게 한 후에 밤을 겪는 것 중에 우리 마음 속에서 어떤 게 더 좋게 느껴지느냐?
낮이라고 하면 모든 좋은 것, 그러니까 병도 없고, 가난한 것도 없고, 온통 행복하고 좋은 것으로만 똘똘 뭉쳐진 것을 의미하는데,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이걸 먼저 겪는 것과, 밤은 환난 핍박 고통 슬픔 고독 눈물을 의미하는데, 이걸 먼저 격은 후에 낮을 겪게 하는 것 중에 인간의 마음 속에서 어느 것이 더 좋게 느껴질까? 똑같을까? 밤부터 겪은 후에 낮을 맞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밤부터 겪게 한 것이 아닌지? 실지로 우리가 고난의 세상을 겪은 후에 그 좋은 천국을 겪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좋은 그 천국이 더 좋은 게 아니겠느냐?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 만일 천국생활과 같은 것을 먼저 겪게 한 후에 내리막길로 내몬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못 산다. 원망불평이요, 자살을 할 수도 있다. 부자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가난 쪽으로 내려가면 예수 믿는 사람이야 믿음으로 이긴다고 하겠지만 일반사람들은 굉장히 힘들다. 도둑질을 하거나, 마약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빛을 만들기 전에 이 땅은 빛도 없고, 어둡고, 혼돈했으니까 이 면을 염두에 두고 밤부터 들어간 것은 아닌지?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앞에 말한 것이 우리가 신앙적으로 깨달을 게 더 많겠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 깨달을 때 ‘하나님께서 언제 뭘 만들었네. 언제 뭘 만들었네’ 이것만 보지 말고 그것으로 인해서 나의 구원에 어떤 혜택이 있고 손해가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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