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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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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토요 성경공부 |
(창세기 槪觀)
6장-9장.
6장에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했고, 노아의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라고 했고, 또한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이라고 했고, 7장에서는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취하고,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취하라고 했다. 그러니까 정한 짐승이던 부정한 짐승이던 모든 짐승이 의인 노아에게 와야 보호가 되는구나.
히브리서를 보면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당시에 죄를 짓던 사람들에게 물들지 않았다고 했다. 홍수 후에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살던 노아는 온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 여기에는 ‘지키고 통치하고 지배하라’ 하는 면이 들어있는 거다. 아들과 며느리들이 노아가 방주를 짓는 일에 믿음으로 한 마음으로 협조 동참을 하니 이들도 노아와 함께 구원을 얻었다. 즉 이룰구원이 된 거다.
6장.
1절-8절을 보면 당시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 그들에게서 딸들이 났다고 했는데, 이건 그 전에는 딸을 안 낳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들의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사랑스럽게 보이는 대로 여자를 취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건데, 노아는 그런 면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과 동행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의를 보시고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신 거다.
정하고 부정한 짐승들이 방주에 들어가서 생명을 잃지 않았는데, 이것은 선한 것이던 악한 것이던 의인 노아로 인해서 보존이 된다는 것인데, 이는 곧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선한 것도 악한 것도 보존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다시 말하면 선한 자던 악한 자던 자기가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보호가 되고 있다는 거다.
7장.
4절: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누구에게 들려주는 말이냐? 의인 노아에게. 우리 기독자들도 의인 노아처럼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인격화 되면 ‘세상은 언젠가는 불에 탄다. 언젠가는 없어진다’ 하는 것을 알고 세상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 자기 믿음을 그런 것에 두어서 그런 것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게 된다.
19절-23절: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노아가 600세 되던 때 홍수가 났는데, 물이 불어서 높은 산, 즉 세상에서 제일 높다고 하는 것들이 모두 물이 덮어버렸다. 이걸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불신세상에서 아무리 높다고 하는 것이라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라는 걸 말한다.
그 때에 물이 산꼭대기까지 올라와서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궁금한 게 없느냐? 이 때 죽지 않은 것이 있겠느냐? 물에서 사는 물고기가 죽었을까? 물고기는 방주에 들어갔다는 말이 없는데, 만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물고기도 방주로 끌어들여서 생명을 보존케 하라고 했다면 고래처럼 큰 물고기를 방주에 집어넣으려면 수족관을 엄청나게 크게 만들었어야 할 거다. 물고기들은 홍수가 나면 자기 세상이 됐다고 하며 좋아하면 했지 홍수에 죽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천지의 산꼭대기까지 물이 차도 물고기들은 죽지 않게 하셨는데, 왜 살려놓았을까? 하나님께서는 물고기도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건데 왜 안 죽였을까? 그리고 홍수 후에 물이 150일 동안 땅에 있었는데, 왜 또 150일이냐? 하나님께서는 땅이 갈라지게 해서 온 천지의 물을 순식간에 땅 속으로 들어가게 하실 수도 있는 건데 물이 150일 동안 땅 위에 있었던 이유가 뭘까?
홍수 후에 곧바로 지상의 물을 없애버리면 땅이 어떻게 되겠느냐? 홍수로 인해 죽은 온갖 시체들이 널려있게 될 거고, 이렇게 되면 온갖 병균들로 인해서 살아남은 노아의 가족들도 죽게 될 거다. 그래서 이 150일은 물고기들이 각종 시체를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기간이 아닌가 한다. 150일 동안은 물고기들이 시체들의 살점을 다 뜯어먹고, 뼈는 지렁이 같은 것들이 파먹거나 물에 녹아져서 없어지고 하는 기간인 것 같다. 만일 홍수 후에 곧바로 배에서 나왔는데 각종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고 해골이 굴러다니고 한다면 노아가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방안 청소도 제대로 못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지구 청소를 이렇게 하시는구나.
8장.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하나님께서 의인 노아에게 ‘방주를 지어라.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 라고 하신 후에 홍수로 지상의 것을 다 청소를 하고, 그 다음에 바람으로 물이 마르게 해서 사람이 방주에서 나오도록 했다.
그 지역은 밤에는 춥고 낮에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주 뜨겁다고 한다. 바람이 불면서 따뜻하기까지 하면 더 잘 마른다. 하나님께서는 바람으로 홍해가 밤새도록 갈라지게도 하셨는데, 이런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하신다는 말이다. 책임을 지신다는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의인의 삶을 책임을 지신다는 뜻이 들어있다. 그래서 권고 권면도 하시고, 방주를 짓게 하고, ‘들어가라. 나가라’ 하고 명령을 하시는 거다. 의인을 위해 이렇게 역사를 하신다. 우리는 순종만 하면 된다.
2절-5절: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오십일 후에 감하고, 칠월 곧 그 달 십칠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 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깊음의 샘’이란 땅의 샘 근원을 말한다. 또 ‘하늘의 창이 막히고’ 라고 했는데, 왜 창이라는 말을 했을까? 열고 닫고 하는 조절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 당신 마음대로 창을 열고 닫고 한다는 거다. 비를 누가 그치게 하느냐? 하나님이 하시는 거다. 열고 닫는 주권적 의미로서 창이라고 한 거다.
깊음의 샘, 즉 지하의 샘이 닫히고 하늘의 창이 막히면서 하늘에서 비가 그친 후 150일이 지나서 땅에 물이 감해지니까 방주가 아라랏 산의 꼭대기에 머물렀다. 평지에 머무른 게 아니라 산꼭대기에 머물렀다. 이게 무슨 뜻이냐? 세상이 홍수심판을 받을 때 노아는 방주 안에 들어가서 살 수 있었고, 노아의 배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니 노아는 세상을 정죄해버린 높은 수준의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노아가 세상을 정죄한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 정죄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고, 노아의 신앙사상의 수준이 세상 위에 있다는 거다.
실질적으로 우리 성도들이 이룰구원의 높은 수준의 진리생명의 이치를 가지게 되면 낮은 수준은 자신의 정죄권 안에 들어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이 정죄를 한다는 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 높은 수준은 아래의 것을 판단, 즉 정죄가 되는 거다. 여기서 조심할 것은 이룰구원의 사람들은 자기가 함부로 정죄성의 말을 하면 안 된다. 정죄성의 말을 함부로 하게 되면 이 사람은 또 노아의 의 앞에 정죄가 돼버리는 꼴이 된다.
6절-12절: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6절-7절에 보면 방주가 아라랏 산 꼭대기에 닿은 후 40일이 지나서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놓으니 이 까마귀가 물이 마를 때까지 왕래를 했다. 그러니까 방주 밖으로 나간 까마귀가 지상의 물이 마를 때까지 방주로 왔다가 또 날아갔다, 또 왔다가 또 날아갔다 한 거다. 그리고 8절에 보면 비둘기도 내보냈는데, 이 비둘기는 그 때까지 온 땅에 물이 있어서 앉을 곳이 없으니까 방주로 되돌아왔다.
그러면 까마귀가 왕래를 한 것과 비둘기가 돌아온 것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깨달을까? 비둘기가 앉을 곳이 없어서 방주로 되돌아 온 것은 그 성질이 솔직성이다. 솔직하니까 노아가 받아들인 그런 의미가 보인다. 반면에 까마귀는 자기 스스로 들락날락하니까 이건 뭔가 확실한 결정이 없구나. 그러니까 물이 없으면 방주에 들어와 있다가 물이 다 마른 후에 나가면 되는 건데 까마귀가 그러지 않고 왜 자꾸 들락날락하느냐? 이걸 새로만 보지 말고 사람의 속성으로 본다면 여기서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거다. 솔직한 비둘기를 노아가 영접을 했듯이 사람이 비둘기처럼 솔직하면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영접을 하시고, 반대로 까마귀처럼 들락날락하는 사람은 결정성이 없으니 믿지 못할 사람이 되는 거다.
10절-12절을 보면 비둘기가 기쁜 소식을 물고 왔다. 감람 새 잎사귀를 물고 온 거다. 7일 후에 다시 비둘기를 내어놓으니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3절-14절: ‘육백일 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이월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육백일 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을 한국식으로 말하면 일월 일일이다. 그러니까 노아가 방주의 뚜껑을 열고 나온 이 날은 세상 악인들이 없는 새로운 시작의 날이다.
15절-19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새로운 세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거다. 생육하고 번성을 안 하면 어떻게 되느냐? 이건 저주다. 생명의 세계에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전제가 되는 거다. ‘안 낳자 주의’로 나가면 어떻게 되느냐? 결국은 자기 저주가 돼버린다. 성경에 오난이 땅에 설정을 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 들어있는 번성을 안 하겠다는 거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죽여 버렸다.
20절: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정결한 짐승과 새로 번제를 드린 것은 악인들이 멸절된 새로운 세상에서 정결하고 깨끗한 삶으로 살겠다는 기도와 결심과 각오가 들어있는 노아의 정신을 말하는 거다.
21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노아의 제사가 하나님께 상달이 됐다. 쉽게 말하면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그 말이다. 상달이 되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말씀해 주신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노아가 앞으로 무슨 교육에 힘을 쏟으라고 하는 힌트를 주신 거다. 당신의 마음을 말씀해 주신 거다.
22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왜 이런 말씀을 했을까? 여름 겨울, 낮과 밤, 더위와 추위를 주시는 것을 영적으로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하시는구나.
22절의 말씀은 지금의 하루가 24시간인 것처럼 이 당시도 지금처럼 24시간의 하루인 것을 말하는 거다. 뿐만 아니라 처음 인간이 타락한 후에 사람들이 몇 백 년씩 산 것을 보고 창조 때의 하루는 지금의 24시간의 하루와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때도 노아 때나 지금처럼 땅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고 되어지고 있었고, 또한 6일간 만물을 창조했다고 했으니까 창조 때도 지금처럼 24시간의 하루였던 거다. 그러니까 타락 전에는 한 날이 천 년이었는데 타락 후에 하루가 24시간으로 된 게 아니라는 말이다.
9장.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주셨다. 그러니까 땅값, 집값, 학비 생각하며 자식을 안 낳자 주의로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낳아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뜻도 있는 거다. 노아가 의인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해 주신다고 했듯이 지금의 우리도 노아처럼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면 노아에게 주셨던 복을 우리에게도 주시는 거다.
2절-4절: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었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 사나운 짐승이라도 인간에게 다스림을 받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산 동물을 인간이 먹을 것으로 준다고 했으니 얼마나 풍요롭겠느냐?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의인으로 산다면 이런 축복이 내려지는 거다. 그런데 고기를 먹을 때 피 채 먹지 말라고 했다.
5절-6절: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것인데 이 사람을 죽인다면 그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걸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영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육의 생명을 살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육의 생명을 죽이면 그 사람의 이룰구원도 죽는 거다. 이런 면이 들어있다.
7절 이후로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와 세 아들들에게 무지개 언약을 하신 후에, 19절에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으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졌다고 했다.
20절-21절: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몸에 열이 나니까 방에 들어가서 옷을 벗은 것 같다.
22절-27절: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함이 벌거벗은 아비 노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자기의 두 형제에게 아비의 허물에 대해 떠벌린 거다. 셈과 야벳이 이 말을 듣고 아비의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취하여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는데, 이 때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았다. 노아가 술이 깨서 함이 자신에게 행한 일을 알고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서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는 저주를 했다.
노아가 포도나무의 열매를 생산해서 거기에서 나오는 열매를 가지고 포도주를 만들어 먹은 이게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만일 나쁜 일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이 일 후에 일어나는 일들로 통해서 노아에게 징벌을 내려야 할 텐데 그런 일이 없었다. 그리고 노아가 깨어 일어나서 세 아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했는데, 이 저주대로 되었다. 그러니까 노아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말이 되는 거다.
노아가 포도주를 먹고 취해서 자기 방에 들어가서 옷을 벗고 잠을 잔 것이 인간들 보기에는 잘못처럼 보일지라도 이게 하나님께서 보실 때도 잘못된 거냐? 노아가 술에 취해서 행패를 부렸다거나, 남의 집에 들어가서 벌거벗고 잠을 잤다거나, 악한 죄를 지으려고 옷을 벗은 것이 아니라 남이 보지 않는 자기 처소에 들어가서 옷을 벗고 누워서 잤으니 이건 죄가 아니지 않느냐? 그럼에도 어쨌든 흠을 잡으려고 하는 함이었으니, 이런 자에게 어찌 저주가 내려지지 않겠느냐?
셈은 동양 쪽, 야벳은 서양 쪽, 함은 아프리카 쪽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사람을 볼 때 눈에 보이는 것으로 기준을 세우면 안 된다. 보이는 것은 상징적 계시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면에 깨달음을 주는 거다. 함은 흑인으로서 노예가 되었고, 야벳은 우월한 민족이 되었고, 셈은 종교적인 민족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식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동양 쪽 사람이 셈족이라면 계:에서 동방에서 오는 왕족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누구냐?
내가 종족적으로는 셈족일지라도 사상적으로는 얼마든지 야벳이나 함족도 될 수 있는 거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면을 깨달으라고 계시로 보여주는 것이니 내 쪽에서 눈으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잡으면 안 된다. 남을 흉을 보는 사람은 함족이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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