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4:21-27 |
---|---|
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4장 21절-27절.
21절: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 성경 역사적으로 그 옛날로 끄집어 올라가지 말고 그 역사를 지금 갖고 와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나의 귀에 응하였느니라.’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겁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 나시기 전 즉 주전745-680년, 약 700년 전 남조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예수님 나시기 약 700년 전. 선지자는 시대적으로 언제 태어났던 은밀계시적으로 현재 자기에게 이룰구원으로 보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자는 그 사람에게 역사가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이 글이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시간적 역사적으로 주전 700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 예수님 당신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이것이 너희 눈앞에 보이게 된 것이고, 그리고 이 분의 하신 말씀이 너희 귀에 직접 들려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 분의 말씀의 역사가 너희들을 온전케 한다는 겁니다. 예, 그 온전성 그 역사 그 말이요. 신의 능력을 입은 자는 사람을 온전케 하는 역사란 말이요. 이것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오늘날 각 교회마다 종들의 말씀이 그 사상이 그대로 흘러내려왔으면 그건 귀에 응하게 된 건데, 오늘날 교인들의 귀에 자기 귀에 응하게 된 건데 근데 문제는 다른 복음을 전하니까 이걸 읽어놓고 다른 복음을 전하니까 그건 응하지 않은 거라 그 말이요. 그걸 알아야 된다. 예수 믿는 축복은 현재 자기에게. 먼저 사람으로 들어간다. 사람에게 역사되는 이게 하나님의 신의 역사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 속에서 돼 들어가요. 그걸 알아야 된다.
22절: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님께서 다 증거를 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소문을 다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과 같기 때문에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이상하게 다 듣더라.
그런데 ‘이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이 생각이 왜 마음 가운데 지배적으로 들어오느냐 그 말이요. 참 이상하지요? 깨달으면 되겠는데, 자기 것으로 만들어지면 되겠는데 왜 옆에서 ‘저 목사는 어디 태생이 아니냐? 경상도 사람인데 뭐.’ 왜 그런 게 왜 들어오느냐? 육의 생각이 왜 들어오느냐? 세상생각이 왜 들어오느냐? 말씀이 옳으면 그 옳은 이치의 말씀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이치의 사람이 될 터인데 ‘저 목사가 박사증이 있느냐?’ 그런 게 왜 따라 들어오느냐 그 말이요? 참 이상하지요? ‘요셉은 가난한 목수이고 예수님의 형제들도 우리와 같이 있고 예수님은 배우지 못했고’ 왜 이런 생각이 들어오느냐? 신적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전하는 거기에 왜 세상 인간적인 그런 게 파고 들어오느냐 그 말이요. 참 희한해요.
말씀에서 은혜를 못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는 스스로 세상의 것을 끼워 넣기 때문이요, 두 번째는 만약 가르치는 자가 세상을 가르치면 이는 재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늘로부터 오는 뜻은 못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세상배경을 먼저 염두에 두기 때문에 은혜를 못 받는 겁니다. 사람들은 수박을 하나 사더라도 먼저 속을 생각하지요? ‘속이 얼마나 잘 익었을까? 곯았을까?’ 하고 두들겨 보기도 하고 귀에 대고 소리도 들어보고 무늬를 보기도 하고. 속을 생각하면서 그러지요? 수박은 속을 생각하면서 사야지 빛깔 겉보고 그냥 사면 참.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말속에서 누가 나타나서 말하는 것인지 이게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구나. 말속에 나타나는 거. 말속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거거든? 말속에 누가 나타나냐? 말속에서 그걸 잘 감각해야 돼요. 사람이 말을 하지만 그 사람의 말속에 또 나타나는 사람을 알아야 한다. 누가 나타 나냐? 표면적인 겉모양의 사람의 얼굴과는 전혀 딴 사람이 들어있을 수 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 은혜를 받으면서도 세상인간생각이 슬며시 들어온다면 절대로 은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성령의 감화 감동성이 떠나요. ‘말씀은 좋은데 어느 신학대학 나왔지? 어느 군소신학 나왔지? 말씀은 깊은데 박사증이 있느냐? 대학은 나왔냐 안 나왔냐? 외국 어디 학교 나왔고 박사증이 여러 개냐? 몇 개냐? 지금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목사냐? 세계선교회 부흥협회장 무슨 장 무슨 장.’ 이 장만 해도 일곱 개. 그런 분이 무슨 세상 육땡이 말을 해도 하나님의 보좌에서 직접 나오는 말씀으로 들리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으로 들리지. 만약 그런 분과 예수님과 같이 나란히 서 있다면 말세의 교인들은 어느 쪽이 예수님으로 보일까? 그거 있잖아요?
그 참, 그래서 이 사람을 볼 때는 참 잘 봐야 돼요. 부산 백목사님이 물론 돌아가셨지만 하여튼 얘기인즉 어느 교회 저녁집회에 장로님들과 같이 가시게 됐는데 이제 백목사님이 키가 참 작대요. 합정동 백목사님도 작아요. 형제분들이 다 작은지 모르겠어. 그런데 잠실 백태영목사님은 키가 그렇게 작지는 않던데. 어쨌든 부산 백목사님은 키가 작았던 모양이요. 장로님들은 키가 늘씬늘씬 하고 양복 짝 입으니까 암만해도 겉으로 볼 때 목사님처럼 보이지요? 겉으로 볼 때 목사님처럼 보이지요? 이 무슨 말인지 알지요? 그러니까 아무렴 목사님이 가방 안 들고 가시고 장로님이 가방 들고 갑니다. 그러니까 집회를 받는 교회에서 장로님이 나오셔서 ‘아이고 목사님, 가방’ 이러면서 들고 간단 말이요. 그러니까 뒤에 따라오는 진짜 목사님은 그 교회 장로님 눈으로 보기에 목사님으로 안 보인 거지요? 그러니까 목사도 목사님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어. 맞잖아요? 그럼 도둑놈이 도둑놈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도둑놈은 도둑놈처럼 보여요? 사람 눈은 참 이상해요. 그렇게 보인다는 거. 모르면 물으면 될 걸 자기 생각으로 생각을 해서 가방 들고 오는 장로님을 ‘아이고, 목사님’ 이렇게 했으니 얼마나 실례가 됐겠나?
그래서 앞으로 내 가방은 내가 들어야지. 신탄진이나 여주 가면 우리 젊은 청년들이 목사님 힘들다고 가방 들고 가는데. 왜 제 가방이 그렇게 무거운지 몰라. 값나가는 가방을 사줘서 이렇게 들고 다니면 가방 무게하고 책 무게하고 같이 들어가면 더 무거워요. 좀 조그맣고 가볍고 간단하고 이런 가방은 비싼 가방은 없어. 한 오천 원짜리 사면 되지. 목사님들, 오천 원짜리 들고 다녀요? 비싸요. 목사님들 가방. 허허허. 비싼 가방을 들고 다니는 목사님들이 목사님이세요. 허허허. 그 말속에 누가 나타나느냐? 말 속에 누가 나타나느냐? 이 참 중요해.
23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이 무슨 말이냐? ‘의원아, 네 자신을 못 고치면 진짜 의사가 아니다. 진짜 의사이면 네 자신부터 고쳐라. 가버나움에서 병자를 고친 것처럼 소문만 내지 말고 고향에서도 고쳐보아라. 그래야 우리가 알아주지’ 지금 그런 말투예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게 영에서 나온 것입니까, 육에서 나온 것입니까? 예, 육에서 나온 것이며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비꼬는 말이며. 비꼰단 말이요. 또 그 말을 바로 알아듣고 그들의 말대로 이루어주면 타락된 세상일이 돼버리고 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주면 그건 세상일이 돼버리고 만다. 하나님 일이 안 된다 그 말이요.
‘가버나움에서 좋은 일하기 전에 우리 마을에서부터 사람들을 고쳐주어야지.’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자기 지역발전 사회적 봉사역할을 해야 한다고 떠드는 거와 같구나. 목사님들, 개척교회 해가지고 왜 동장 찾아다니고 경찰서 지서 왜 찾아다녀요? 교회가 선다면 그들이 찾아와서 인사를 해야지? ‘동네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교회가 먼저 어쩌고 저쩌고.’ 참 잘 논다. 그게 이단이요. 이단. 사람을 고쳐야지. 사람을. 사람을 정화시키고 사람을 고쳐놓으면 가정과 사회는 절로 그냥 돌아가는 거요. 사람은 안 고치고 사람정신 사상은 하나님 앞에 바로 교정을 못 시키면서 마음을 자꾸 세상 쪽으로 끌어다가 뭘 봉사 봉사. 그게 세상교회지. 그게. 사회적으로 빛의 역할 소금역할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복음이고 예수전도라고 주장하는 거. 뭔가 착각을 하고 있구나. 착각을 하고 있어.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가면 사람이 변화가 돼버려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돼. 이게 소금역할이요. 그런데 일반 사회적 봉사로 들어가서 안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 저 교회가 좋다.’ 이게 무슨 소금역할인지 알아요. 크게 착각을 하는구나. 정말 착각을 하는구나. 그게 세상기준이지 어떻게 그게 하나님 기준이 되는 거요?
그럼 꼭 ‘사람이 착하게 살아라’ 꼭 그런 말을 해야 되는 겁니까? 안 그러면 늘 악하게 살아요? 착하게 살라는 것은 얼마든지 세상에서도 말을 하고 있는데도 그게 안 돼. 왜 안 되냐? 사람의 지식이 바로 안 되니까 소용이 없어. 사람은 자기 지식대로 움직이거든요? 지식만 바꾸면 될 걸 지식은 안 바꾸고 자꾸 행동으로 좋은 일하면 뭐 좋은 세상이 되는 것처럼. 안 돼요. 천만의 말씀이요. 아닌 말로 이치적으로 따져본다면 국민이 세금을 많이 내면 잘 살 거 같습니까? 아니요. 천만에요. 도둑놈이 있어가지고 그것도 갖고 나는 도둑놈이 따로 있다. 이 사람이 문제다.
24절: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대답입니다. 그게. 예수님께서는 타락된 세상의 육에 속한 조건을 들어주러 온 것은 아닙니다. 맞지요?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그 자가 선지자요. 오늘날 세상속화 된 목사들이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거요? 아니요. 세상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종이 아니란 말이요. 우리 인간 자기의 미래 즉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예언해주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하실 사건을 가르쳐주고 미리 준비케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성품의 온전을 위해서 역사를 합니다. 성품의 온전을 위해서 역사를 한단 말이요. 가난한 집에 들어가서 돈 한 보따리 내놓고 뭐 그런 게 아니란 말이요.
영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받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합니다. 말속의 말뜻을 깨닫기보다 늘 육신의 눈으로 보아왔던 그 기준으로 보기 때문이요. 여호와 하나님은 현재 인간 자기가 정상적인 진리신앙의 노선으로 가고 있다면 과거를 기준하여 묻지를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 정상적인 진리신앙의 노선으로 가고 있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이 뭐요? 과거를 기준해서 묻지를 않아요. ‘너 과거에 이런 죄 지었지?’ 그런 걸 묻지 않는단 말이요. 현재 바로 가고 있으니까. 말하자면 현재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 학생에게 ‘너 옛날에 공부 못했지?’ 왜 그거가지고 매를 들고 때릴 거요? 말이 이상하잖아요? 그러나 우리 인간은 생각 속에 과거를 깔고 현재 그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이건 악한 판단이다. 기준이 어떻게 된 거요? 잘못 됐다.
그래서 우리 목사님들 새겨들으세요. 목사님들 중에서 여기는 안 계십니다만 그 교회에 일가친척 부모형제들이 판을 쳐. 그럼 다른 사람들이 잘 못 붙어있어요. 정말 옳은 종이라면 그 인인적인 그런 걸 들어오게 하면 안 돼요. 예수는 같이 믿겠지만 그러면 이게 교인들마다 신앙이 백 프로 좋은 거냐? 그렇지 않거든. 어딘지 모르게 ‘형아 동생아 숙모야 이모야’ 하면서 그런 게 관계가 들어가 있으면 다른 사람 못 당해요.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가 부흥이 안 돼요. 다른 사람이 못 들어와요. 모두 다 부모형제들이 다 이모 삼촌들이 전부 다 여전도회장 하고 남전도회장 하고 다 뭐 직분을 갖고 있으면 한 번 생각을 해봐요. 그런 자리에서 다 목사님 식구들이니까 이게 말을 잘 듣느냐? 그거 안 돼요. 바꿔야 된다. 다른 목사님들하고 바꿔야 된다. 그런데 그러냐? 왜 못 바꾸냐? 왜 거기서 탈출을 못하냐? 인정정실에 매여가지고. 코 밑이 무서워서. 코 밑은 뭐요? 입질이지. 목구멍이 무서워서. 예, 목사님들 그런 사고방식 가지지 말아요.
‘아무데 이사 오면 내가 교회 나가마.’ 부모형제들이 그런 말 있을 수 있어요. 절대로 거기 속지마라. 왜? 예수님 말씀을 들어봐라. ‘고향에서는 선지자가 환영을 받지 못한다.’ 육땡이로 자꾸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다 그럴까마는 아무리 부모형제라도 진리로 확 바꿔진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참 옳은 부모형제 일가친척이 되는데 다 그러냐 그 말이요.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해야 돼요. 절대로 그런 말 듣지 말아요. 아주 명심을 하세요. 부모형제 많은데 가면 교회가 부흥발전 될 것 같아요? 천만의 말씀이요. 어떻게 말썽이 많은지.
그리고 어느 시골동리 같은데도 씨족사회 그런 게 있어요? 이씨가 많다, 박씨가 많다, 무슨 김씨가 많다. 그 동네 발전은 안 돼요. 말은 지독하게 많고요 위아래 따지는 건 참 잘 따지고요 하나도 발전 안 돼요. 그거. 그래서 가만 보면 타 지방이나 외국사람들이 제일 많이 사는 곳이 어디요? 한국에서? 어디요? 안산. 하하하. 안산이 공장단지고 그러니까 사람이 많이 살아요. 토박이들이 있는 데는 정말 애 먹어요. 그런 것도 생각해요. 토박이 있는 데는 발전이 안 돼요. 아주 육땡이 근성이 있어가지고.
그래서 이 복음이 퍼지는 걸 가만 보면 산중으로 먼저 가지 않고 먼저 항구도시가 많은 유럽으로 가요. 그래야 빨리 퍼지는 거지. 항구도시로 가서 이게 삥 돌아서 영국에서 미국으로 갔다가 미국에서 그 다음에 일본으로 들어오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렇게 들어오는 거란 말이요. 육지부터 나가면 이게 잘 안 퍼져요. 역사적인 면에서 그런 것도 봐야 돼요.
예수님께서 자꾸 제자들을 이끌고, 물론 영적면도 있지만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으로 자꾸 올라가잖아요. 이렇게 빙빙 돌면서. 그 예루살렘으로 가면 이 뭐요? 유대인들의 3대 절기. 각 국에 흩어졌던 백성들이 오는 거지요. 그 복음 받아서 또 각국으로 싹 나가게 되는 거지요. 이런 게 들어있어. 그러니까 자기가 사명감을 가졌다고 해서 무슨 저기 산꼭대기 집 하나 보고 무슨 예배당 세운다고 그런 짓들을 하지 말아요. 복음은 사람이 있는 곳에 필요한 거지 사람이 없는데 뭘. 그리고 도시개발이 되는지 안 되는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 시골에 있는데 뭐 하러 가요? 자식들 자꾸 도시로 나가지. 나이 든 사람은 거기 앉았다가 자꾸 죽어 들어가지. 빈집이 많지. 그런데 들어가지 말아요. 이 진리가지고. 죽으려거든 들어가요. 이 복음은 사람에게 필요한 거지.
25절-26절: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첫 해에 ‘하늘이 열려서 비가 올려나?’ 두 번째 해에 ‘비가 올려나’ 하고 하늘만 쳐다보이고, ‘세 번째 해는 비가 오겠지’ 했는데 안 오고,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안 오니 힘 있는 남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의미를 알아야 돼요. 하늘로부터 비가 안 오니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가 없으니 힘 있는 남자들이 다 죽었더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비 한 방울도 주기 싫다는 거요. 비 한 방울도 주기 싫다는 거.
예, 부자가 불속에 떨어져서 목이 탑니다. 나사로로 하여금 물 한 방울도 주기 싫다는 거요. 사람이 무더기로 죽어나가도 하나님은 눈도 깜짝하지 않아요. 그거 잘 아셔야 돼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인간 자기 차원을 고상하게 만들려고 하지도 않고 짐승처럼 산다면, 배부르고 먹고 마시고 사는 이런 것으로 살 것 같으면 인간의 가치는 없다. 성경은 그러는 거요. 아무리 하나님 당신이 인간을 만들었지만 말하자면 ‘지옥에 가봐라. 너 같은 인간은 수두룩하다’ 그 말이지. 가치 없다 그 말이요. 인간가치가 없다. 무더기로 죽어나가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 거요.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 살 길을 가르쳐주시는 데도 알려고 하지 않고 패역을 부리니 누구만 손해고 고통이냐 그 말이요.
한 해 두 해 세 해 삼 년 육 개월 동안 남자들 자기들의 마음이 하늘을 향하여 열리지 않고 닫아져서 일반 자연은총마저 끊어진 줄 모르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만하고 엘리야 선지자를 원망하고 잡아 죽이려고만 합니다. 결국 누가 죽는 것이냐? 첫째는 하나님의 복된 말씀을 받지 않으니 힘을 쓸 남자들이 많이 죽는다. 두 번째는 아내는 과부가 되었고. 세 번째, 남자들이 죽는데 아이들이 자랄 수가 있을까? 아이들이 자랄 수가 있을까? 가정에 슬픔이 오고 고통이 오고 사회가 어두워지고 국가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을까? 이것은 하나님의 재앙이요 앙화입니다. 하나님의 재앙이요 앙화다. 그걸 알아라.
남자들이 자기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서 나오는 섭리인줄 모르고 믿지 않으니 얻어맞으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목이 곧고 패역을 부리게 되면 죽는 길밖에 없다. 사는 길은 없다. 영적 기근을 당하면, 삼 년 6개월 영적 기근을 당하면 힘 있는 남자는 다 죽는다. 안 죽는다가 아니고 다 죽는다. 사람이 힘 있는 장사가 될 수 없다 그 말이요. 역사를 들어서 우리에게 영적 이치를 가르쳐주는 거요.
가정에서 진리신앙을 꼿꼿이 세우고 나가야지 그 가정에 진리신앙이 무너지면 그 속에는 전부 세상이라는 정신구더기가 거기서 판을 친다. 그걸 알아라. 그걸. 오늘날 자기들 가정에 남편들이 믿지 않고 있다면 그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영적 차원으로 한 번 생각을 해 보라고요. 그거. 그런 걸 실질적으로 삶에서 생각하면 이게 기막힐 일이 아닌가? 왜 하나님의 말씀이 안 믿어지겠느냐 그 말이요.
엘리야 선지자는 흉년이 오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알아야지. 목사님들 알아야지. 그 가정에 왜 흉년이 왔는지? 남자들이 많이 죽은 이유도 알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알아야지. 돈 힘으로 그 가정이 일어나는 겁니까? 아니요. 천만의 말씀이요. 사람이 바로 일어서야 모든 것은 활용 사용 응용이 선하게 의롭게 잘 이루어지는 거요. 먼저 사람. 그 사람 머리통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우리교회서는 이 처녀총각들 사람 볼 때 그 머리통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부모형제들이 시집장가 가는 걸 보고 사는 걸 가만 보면서 아주 뼈가 아프게 느끼세요. 그 지식을 바로 갖지 못하면 또 자기가 그렇게 돼버려. 안 된다는 보장 있어요?
먼저 자기 속에 아합 왕을 왕으로 삼지 말아라. 역사 속에 이제 엘리야시대 때 아합이 왕이었지요? 아합 왕 속에는 어떤 여자가 들어있었어요? 이세벨도 들어있고, 이세벨 속에는 바알의 종교 제사장이 들어있더라. 사람 속을 보니 그게 보인다 그 말이요. 그래서 이 진리 받는 자녀들은 부모형제들이 불교나 무슨 미신을 섬기거나 하면 절대로 그런 걸 따라가지 마라. 완전히 여기는 정신개혁 신앙개혁. 안 그러면 너는 죽는 거다. 개혁을 하면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탈출을 하든지 완전히 이게 개혁을 시켜놓든지 죽음을 각오하고. 왜 질질 끌려가. 끌려가긴. 하나님의 말씀이 옳고 힘이 있으면 그 성령님 역사하는 거요. 질질 끌려가고 그냥 그걸 용서해 주는 건지, 그냥 허용을 해주는 건지 질질해가지고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하루를 살더라도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게 나와야지 질질 끌려가면 이게 언제 될 줄 알아요? 죽어도 안 된다. 사람 간만 보고.
그 다음에는 갖가지 이방종교적 사상과 혼음적 행동과 활동이 나오며 진리의 성도들과 대적을 하는구나. 엘리야 때 그랬잖아요? 그 다음은 영적 흉년이 오고, 영적 흉년이 오면 그 다음에 육적 흉년은 특수은총을 안 받으니 일반은총도 주기 싫다 그 말이요. 하나님은. 세상을 만든 목적이 있잖아요. 당신의 자녀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을 만든 거지. 영적 흉년이 오고 그 다음 진노의 형벌에 사라지게 되더라.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는구나.
자기가 말씀 붙잡고 있으면 그 말씀이 너를 보호한다. 이 보호는 하나님의 보호다. 사람이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옳은 생각이 자기를 보호해요. 맞잖아요? 하나님의 보호란 말이요. 성령님의 보호한단 말이요. 그게 다. 성령님을 뭐 벌벌 떨거나 무슨 눈깔 뒤집고 그런데서 찾지 말아요. 그거 귀신 받을 때 그런 짓을 해요.
이스라엘 안에도 많은 과부들이 있었는데 왜 이방 시돈 땅의 사렙다 한 과부에게 보내졌을까? 수많은 과부들 중에 왜 사렙다 과부에게 보내졌느냐 그 말이요. 그리고 이스라엘 안에 남자들이 많이 죽고 왜 과부가 많이 생겼느냐? 여자들이 누구의 본을 따른 것이냐? 그러니까 이스라엘 과부들을 나쁘게 볼 것이냐, 좋게 볼 것이냐? 많은 과부들? 여호와 하나님은 어느 과부를 좋게 보았기에 엘리야가 그 과부에게 보냄을 받은 것이냐? 그 과부에게 장가가라고 한 거요?
그 시대에 과부라고 해서 다 같은 과부는 아니다. 참 과부는 따로 있구나. 먼저 선지자를 영접하고 자기의 목숨보다도 또 자식보다도 말씀대로 순종하니 그 흉년을 아무 어려움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넘기는구나. 그 과부를 살리려고. 그러면 아무렇게나 사는 과부냐? 그건 아니다. 많은 과부들이 있었는데 한 과부에게 보내졌어. 예수님 출생 당시 때 여자처녀들은 하나도 없었어요? 마리아 처녀 딱 하나 있었나요? 많은 처녀들이 있었지만 마리아에게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단 말이요. 왜 그런 좋은 이유를 자기가 마련하지를 못하는가? 성경을 보면서도 그런 면에는 욕심이 안 나느냐 그 말이요?
주님은 아십니다. 환난 때에 어느 성도를 보호하실지 이걸 알아요. 주님은 아세요. 오늘날 모두 자기를 알까요? 하나님이? 보호를 해 줄 성도인지, 이건 도매금으로 어떻게 치워버릴 건지 이거 알고 있을까요? 인간 자기는 몰라도 하나님은 아실까요? 아시는 그 면으로 적중성으로 자기 신앙이 들어가야지. 도매금은 그래도 그건 괜찮아. 도매금을 주고도 요건 덤으로 주는 그런 데로 끼어들면 이게 쓰겠느냐? 그것도 참 그렇지.
27절: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 안에 웬 문둥병자가 그렇게 많았을까? 이유가 뭐였을까? 엘리야 선지자 때도 과부가 그렇게 많았었고 이스라엘 안에는 과부세상이고 문둥이 세상이구나. 이거 어찌 된 거냐? 이게. 왜 그렇게 됐다고 봅니까? 왜 그렇게 되었다고 봅니까? 세상을 소원 목적하여 욕심을 내고 이방나라를 의지하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죄를 지적해주는 선지자까지 죽이려드니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이 내려진 거다.
그런 역사가 사실인지 아닌지 한 번 자기가 연습을 해봐라. 이를테면 자기 집에 성경책 있는 거 찢어서 불속에 넣어버리고, ‘오늘부터 나 교회 안 나가고 예수도 안 믿는다.’ 하기야 믿음도 없는 주제에 한 번 그렇게 해보지요? 그리고 교회 가는 사람들마다 꼬집고 헐뜯고 어느 교회 목사 헐뜯고 한 번 그렇게 해봐요. 아니, 한 번 실험을 해보라고요. ‘자기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나’ 하고 한 번 실험을 해봐요. 안 믿어지거들랑. 어떻게 실험을 해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에게 플러스로 작용을 할는지 마이너스로 작용을 할는지? 어때요? 그러면 꼭 그렇게 해야만 되는 겁니까?
자기가 적극적인지 소극적인지 하는 그 면에서는 전혀 못 깨닫는구나. 이거. 문둥병을 고쳐주려고 선지자를 보내주어도 싫다. 문둥병은 살점이 떨어져도 아픈 줄 모르고 살이고 뼈고 모두 녹아내리는 겁니다. 골각이 변형되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요. 괴물같이 돼버려요. 문둥병이 그래요. 그래서 문둥병 걸려서 오래 된 사람은 참 보면 괴물이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요. 뭐 어떻게 보면 해골보다도 더 무서워. 왜 겉으로 그런 걸 보여주느냐? 한 번 생각을 해봐요. 감각기능 마비요. 짐승은 그런 병은 없는 것 같은데 왜 유독 사람에게만 있는 것 같을까?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죄로 인한 만신창이가 된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거요. 껍데기는 금방이요. 그 속에 죄로 인해서 영적 면에서 만신창이가 된 이거. 다시 말씀드리면 아무리 진리말씀을 들어도 깨달음도 안 오고 잠만 펑펑 오고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일반적인 양심에 거리낌도 없고 그냥 마냥. 이거 뭔가 문제가 있구나. 이거 문제가 있다. 지금. 반드시 알아야 된다.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죄로 인한 만신창이가 된 영적 상태. 하나님의 형상의 인격이 없는 사람 다운 구석을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사람 다운 구석을 볼 수가 없구나. 문둥이한테는 사람 다운 구석을 볼 수가 없구나.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있나요? 할 수 없어. 다 도망 가버려. 싫다고 다 도망 가버려. 아내와 남편이 있는데도 어떻게 살아요. 그러니까 사랑이 통합니까 인정이 통합니까? 자기 자식 부모형제도 이건 안 통해요. 고립으로 살 수밖에 없어.
성격이 좋으냐? 성질이 좋으냐? 하나도 인간다운 구석이 없어. 이게 영의 눈으로 보는 영적 문둥병이에요. 못 개달으니 이제 가르쳐주는 거요. 눈으로 보게 해서 ‘이래도 네가 모르겠냐?’ 그러니까 모든 것이 나이와 함께 죽어 들어가는구나. 서서히 죽어 들어가는구나. 세상 살아있을 때 살아가면서 생명과 진리의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어요. 언제든지 살아있어요. 살아있는 말씀을 붙잡으면 자기가 영적으로 사는 것이 나오는 거다. 안 죽는 거다. 안 죽는 거. 영적 면에서는.
영적 기능과 지능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모두 나음을 얻고 살아나야 할 터인데, 그런데 나아만은 선지자를 찾아 나와서 나음을 얻었어요. 그렇지요? 성경에. 그러니까 참 잘했다고 볼 수가 있지요? 참 잘한 거요. 자기의 일반적으로도 한 번 생각을 해봐요. 자기 몸이 아프면 병원의사한테 달려가 가지고 낫게 해달라고, 어디가 아픈지 좀 진찰해 달라고 그러고. 자기가 어디가 아픈지 모르니까. 그래야 건강함을 얻고 그래야 활동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잖아. 그런 거처럼 영적 면에서 깨달음이 없으면 옳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물어. 왜 나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한 건지, 하나님께서 왜 자기 앞에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지나가게 하는지, 왜 그걸 보게 하고 왜 겪게 하는지? 그런 걸 보고 겪을 적마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하는 그게 나온단 말이요.
도둑질하는 도둑놈은 어떻게 해야 돼요? 말해도 듣지 않고 요럴 때는 이게 뭐가 잘 안 되는 거 같은데. 이 개가 사람을 잘 물어. 그럼 그 개를 어떻게 해야 돼요? 개 아파트에 모시고 사람이랑 같이 살아야 돼요? 죽이는 수밖에 없다. 소가 사람을 떠받아도 소를 죽이지요? 개가 사람을 무는데 살려요? 그게 다 비유지만 이게 사람에게도 적용이 되는 거다. 말을 해도 듣지 않으면 가둬버리는 거요.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옳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보이게 해요. 쉽게 얘기하면 ‘특수법으로 하니까 이게 사람이 안 되는구나. 안 되겠다. 너에게는 일반법을 써야 되겠구나.’ 그렇게 해서라도 된다면 되는 거고 안 그러면 자기 범죄하고 남까지 범죄를 시키니 이건 인간사회에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가둬버리는 거요. 그래서 저기 뭐야? 유치장 감옥철장도 많은 거요.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