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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2: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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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성 목사 |
참고 : | 말씀의 숲 교회(대한예수교 장로회) |
그분의 능력은 가까이 있습니다 (막2:1-12)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녀본 사람들이라면, 오늘 말씀을 참 많이 들었고, 재미있게 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가버나움 지역에서 가르치실 때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몇몇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네 사람이, 예수님께 중풍병자를 고쳐 달라하기 위해 메워 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접근 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이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 그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달아내려, 예수님으로부터 치료를 받게 하는, 마치 드라마와 같은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지요.
그동안 우리는, 참 이 본문을 통해 많은 설교를 듣고,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설교나, 이 본문의 대부분의 초점은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참 많이 들었던 설교는 이런 거였어요. “여러분~~, 이 네 친구들은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엄청 사랑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고, 그 친구들로 인하여 병이 나았어요. 여러분들도 친구를 사랑하고, 예수님께로 데려와야 해요” 라는 말씀을 가장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중 고등학교 때는 전도사님이, “여러분~~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바라보기 보다는, 하나님만 바라보면 되요. 어렵지 않~~아요!! 이 네 명의 친구들처럼,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세요” 은혜 받는 자리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된다고, 결론을 내리지요.
여러분, 사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성경에는 이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을, 어디를 찾아봐도, 그의 친구들인지 조차, 말하고 있지 않아요.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성경에 사실 친구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냥 네 사람, 영어로 Four Men이라고 만 되어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아주 친한 친구로 되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친구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죠? 과연 친구가 아니면, 누가 그 지붕을 뜯어서, 그 중풍병자를 내릴 수 있겠는가? 친구가 맞다!!
그래서 친구가 어는 순간부터 된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친구였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동네 사람들이 데리고 왔을 수 있고요. 예수님께 모여든 사람들 중에서, 중풍병자를 지붕에서 내릴 수 도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는 잘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이지요? 5절 말씀에 있습니다. 뭐라고 되어있지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네 죄가 용서되었다!) 예수님이 선포하셨다는 것이지요.
아니, 왜 이렇게 뜬금없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냐! 이것이죠. 만약 그 상황이라면, 분명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셔야 맞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너의 네 명의 친구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 너는 이제 낳게 되었다!” 라고 말씀하시던가, 아니면 “너의 중풍병이 나았다, 이제 걸어가라” 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뜬금없이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라고 하셨냐는 것이죠.
사실 오늘 성경에 보면, 중풍병자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어요. 그 중풍병자가 믿음이 있다든가? 아니면 병 고침을 간절히 원하는가? 하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오늘 본문에 항상 중심이 되는 사람은 바로,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명의 친구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지요. 그러니까 그 네 명의 믿음이 그를 살리게 된 것이죠. “예수님이시면 고칠 수 있어, 그래 예수님에게 가자!” “어 막혔네, 지붕 뚫어야지!” 한마디로 그들의 믿음은 대단한 믿음으로 평가 되고 있지요.
여러분, “네 친구의 이 대단한 믿음” 과 예수님의 뜬금없는 이 말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저는 모르겠어요. 왜 이렇게 뜬금없는 관계가 될까?
그러다가,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쉽게 놓쳐 버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나를 중심에 놓고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지요. 성경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신데, 그 중심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두지 아니하고, 내가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경의 모든 중심을 나에게 두니까, 오늘 본문의 중심은, 네 명의 친구에 맞춰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나도 이 네 명의 친구처럼 열심히 믿음을 보이면, 하나님이 그 은혜를 나에게도 주신다” 는 것이죠. 그래서 많은 분들이, “여러분, 예수님에게 간절한 믿음을 보이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의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이시면 이 해석은 달라진다는 거지요. 성경은 과연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보이기 위하여 그들을 이 본문에 주인공으로 세웠을까요?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은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아요. 그것은 어떤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나온,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오늘 본문은 예수님에게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에게 뭔가 의도적으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는, 9절과 10절에 보시면 그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시작)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람을 받았으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는 말에서, 우리는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질문이 일어나도록 하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사함을 받았다”라고 예수님이 말씀이시니까? 사람들의 반응이 정~~말 즉각적으로 나타났어요. 그 반응이 바로 7절 말씀에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아주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오죠.
여러분, 사실 예수님은 이 반응을 기다리신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사람의 병을 그냥 낫게 해 주실 수도 있는데,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뭔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도가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실 때, 서기관들이 수군대죠.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죄를 사한다는 것은,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일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해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말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제 조금 더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다가온 중풍병자에게 바로 병을 고쳐 주시는 대신,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답도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시작)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는 분임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면, 지금 그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내가 바로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땅에 온 하나님이다”라는 점을 나타내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죠. 그 영이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동일하게 죄 사함의 능력과, 병 고침의 은혜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들 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시야는, 병 고침을 받는 중풍병자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명의 친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 이시라는 것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늘 보좌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그 사랑을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은혜인지 아시는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이 땅에 우리 두 눈으로 보여 진다는 것이지요.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능력의 하나님이, 오늘도 나에게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가까이 계신다는 것이죠. 우리 가까이 계시고, 나중에는, 더 가까이 계시고 싶어서, 그리고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려고, 우리 안에 영원히 살겠다고 약속도 하셨죠.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가까이에 오신 하나님, 그리고 당신의 능력을 여지없이 보여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여러분에게 보여 지십니까? 하나님은 보여 주시겠다고 오늘도 약속하십니다.
예) 지금도 기억하는 한 집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의 성함은 김혜숙 집사님입니다. 영국에 있을 때, 이 집사님의 가족은 엘지에서, 영국 주재원으로 파견되었지요. 남편 분은 영국 주재원으로 일을 하고, 이 집사님과 두 여자아이는 아빠를 따라와 영국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이 여자 집사님에게, 몸에 이상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눈이 침침해 지기 시작한 것이죠. 눈이 점점 침침해 지기 시작하다가, 점점 물체만 보이다고, 결국은 모든 시력을 잃게 된다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백만 분에 1의 확률로 이런 병이 걸린다고 하지요. 그리고 유전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 집사님이 걱정하는 것이 있었어요. 눈이 점점 보이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이상 예쁜 두 딸을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더 심적인 부담감을 더 해 주었죠. 더 이상 아이들의 얼굴을 볼 수 없고, 혹시 아이들에게 자신의 병이 유전될까 걱정을 하게 되었지요.
병원에서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요. 눈의 시력을 되찾게 해달라고, 그리고 꼭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달라고 많은 성도님들과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영국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는, 거의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죠. 그리고 한국에 들어갔습니다. 한국에 들어간 후에, 한번 뵌 적이 있습니다. 참~~그렇게 기도했는데,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지요.
그래서, 그 집사님을 만나서 이렇게 한번 여쭈어 보았어요. “집사님 참 많이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군요” “이제 전혀 앞을 보지 못하시니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말씀드렸죠.
그런데, 그 집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세요. “목사님, 눈이 점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라요. 어느 순간부터 앞이 깜깜해 지면 나는 어떻게 해지?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못하는데?”
그런데, “이제 눈은 보이지 않지만, 눈을 뜨고 있을 때 보다, 나의 하나님이 얼마나 저에게 가까이 계시는지 몰라요. 늘 제 옆에 계시고, 위로해 주시고, 함께 해 주시는, 그 사랑을, 너~~무 가까이 느끼게 되요”
그리고 나서 저는 그분이 아주 근사한 고백에, 전율을 느끼게 되지요. “목사님, 내가 이제 눈이 멀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니까? 이제 하나님이 나를 만나시기 위해, 매일 저에게 가까이오세요”.
여러분~~~~, 저는 이 고백이 얼마나 근사한 믿음의 고백인지요. ‘하나님이 눈먼 나를 만나시려고, 오늘 나에게 더 가까이 오신다!!’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만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어요(아멘) 그리고 믿는 자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믿는 자 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은 중풍병자가 나음을 얻었다는 것이 중심이 아니고, 지붕을 뜯어내어, 중풍병자를 고치기 위해 그 침대를 내렸던 네 명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님인줄 믿습니다.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죄 사함의 능력을 가지신 그 하나님이, 이 땅에 나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 능력의 하나님이 내 눈에 보이시고, 늘 함께 하시겠다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나를 만나시기 위해 오늘 나에게 더 가까이 오셨다는 그 사실을 꼭 기억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누릴 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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