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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5: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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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5장 8절-11절.
8절-11절: 시몬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나를 떠나소서’: 그 분 앞에 주님 앞에 베드로 자기의 무능성, 그 분 앞에서의 자기의 존재성, 자기의 형편, 자기의 헛 똑똑, 그 분 앞에 죄 된 처절한 인생의 모습이 순식간에 다 드러난 것을 시몬베드로는 느꼈더라 그 말이요. 그 분을 몰라보고 살아온 자기의 한심한 인생,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그 자기.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소원과 목적만 들어달라고 떼를 쓰고 있지는 않는가? 그 분이 어떤 분인지 모른 채 그 말이요. 감히 그 분의 일을 하겠다고 나섰고. 그 분의 일을 영원히 다 망쳐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도 시인을 안 하면서 하는 말이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로소이다’ 그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도와줄 줄 알까요? 시인도 안 하면서 말로만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로소이다.’ 이 무슨 말이냐? 자기가 세상길로 넓은 길로 사망 길로 소원 목적적으로 나가면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이 들어주겠냐, 안 들어주겠냐 그 말이요. 들어주겠어요, 안 들어주겠어요? 안 들어줘요. 그건 안 되지. 길부터 돌이켜야 이게 되는 건데 안 돌이키고 심판 길 죽음의 길 멸망의 길로 나가면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건 네 형편이 어려워지니까 도와달라고 하는 소리로구나. 안 도와준다. 이 원칙이 있어요.
예, 앞으로 목회하실 분들도 그 면을 잘 봐요. 도와줘야 되는지, 안 도와줘야 되는지 이게 있는 거요. 반드시 그게 있다. 그냥 인간형편만 보고 그랬다가는 이건 속는다. 하나님은 안 속는다. 인간은 몰라서 더러 속아요. 그래서 지나고 나면 ‘아이고, 괜히 했구나’ 그 자탄을 하게 되면 ‘내가 들어서 저 사람을 병신을 만들어 놓지는 않았나?’ 말하자면 상대를 이롭게 한 건데 깨닫고 보니 ‘아차, 이거 내가 상대를 더 망쳐놓았구나’ 그렇게까지 이제. 그러니까 신앙사상에 똑바로 적중성을 늘 가져야 된다. 오늘날 교회들이 진리의 적중성의 판단이 별로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그 사고방식의 판단을 그대로 갖고 와서 이건 안 된다. 특히 목사님들 경우 그러면 안 된다. 용납이 안 된다.
시몬베드로는 고기가 많이 잡혔는데도 주를 발견하고는 자기가 죄인인줄 알았다. 그리고 이유 없이 주를 따랐다. 그렇지요? 많이 잡히게 해주니까 주를 발견하고. 어떻게 주를 발견한 거지요? 여기서 ‘많이 잡히게 해줬다’ 할 때 육땡이 신앙은 어디로 나갈까요? 잘못된 신앙을 가지게 되면 계속 자기 고집 가지고 들어달라는 거요. 이제 자기도 들어달라는 거요. 그런데 베드로는 그 고기까지 다 내버렸습니까? 고기 짊어지고 따랐어요? 고기 다 내버리고 배까지 내버리고 따랐어요.
그러니까 뭘 발견한 거요? 고기보다 더 바로 하나님을 발견한 거다. 말하자면 자기 존재는 감히 그 분을 바라볼 수 없는, 그래서 이유 없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기 교회에 교인이 한 명이라도 들어오면 의인이고, 자기 교회를 어떻게 가르쳤던 예, 자기 교회 들어오면 이건 의인이고 안 들어오면 죄인이지요. 그런 식 아니냐 그 말이요. 교인이 우리교회 처음 들어오는 교인, 또 교인이 다른 교회로 처음 들어가는 교인. 여기서 뭘 보느냐? 그 교회 흐름의 질을 보고 ‘아, 이거 잘못 들어왔구나. 아, 이거 바로 들어왔구나’ 이게 이제 판단이 되는 거요. 알겠어요?
이 참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도망을 가다가 자기 집에 들어왔으면 이게 참 바로 인도가 돼야 되겠는데 더 몹쓸 사람으로 인도가 되는구나. 그런 게 있다. 그래서 우리 여자분들 또는 아가씨들, ‘밤에 밤 길 걸을 때에 급하다고 아무 집에나 뛰어 들어가면 그 집이 어떤 집인 줄 알고 그러겠느냐’ 그런 어떤 물음의 마크가 들어있는 거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밤에 술 먹은 사람들이나 그 가만 보면 밤에 어디 갔다 늦게 들어오면 골목길에 꼭 젊은 놈들이 담배 피우면서 무더기로 앉아있으면 그게 순순히 아가씨들이 가질 것 같아요? 필경은 문제가 있게 된다. 그러니까 핸드폰 다 있으니까 핸드폰으로 ‘아버지, 나 지금 어디 가고 있으니.’ 아니면 오빠보고 ‘오빠, 나 지금 어디 가고 있으니 빨리 좀 나와 달라’ 그렇게도 할 수 있고. 그리고 가는데 앞에 남자들이 무더기가 있어. 뭐하는지 모르게 서성거리고 있다면 그리로 가면 안 돼. 딴 데서 밝은데서 전화를 하고, 아니면 경찰 112요? 차 불러가지고 ‘나 우리 집에 좀 데려다 주세요’ 그러면 되지. 택시 값 안 들이고. 민중의 지팡이인데 뭐 그래. 내가 낸 세금가지고 다 먹고 사는데. 참 이거 참말로 무서운 세상이요. 어쨌든 지혜가 있어야 돼.
거의가 보면 그래요. 자기 교회 들어오면 의인이고 딴 교회 나가면 죄인이고. 우리는 그렇게 보면 안 된다. 옳은 교회 들어갔느냐? 그럼 옳다. 말씀대로 하는 이치는 팽개쳐버리고 목사님들이 교인이 안 불어나면 불어나게 해달라고 떼를 쓰고, 교인이 불어나야만 주께 영광이고 안 불어나면 영광이 안 되고. 그 서울 큰 교회 같은데 교인이 많습니다. 건물도 크고. 그럼 그 교회 목사님은 영광이라고 생각할까요, 영광이 아니라고 생각할까요? 영광이라고 생각하지요? 여기 계신 분들은 그게 영광이요, 영광 아니요? 영광 맞지요? 아니요? 영광이라는 사람이 있고 아니라는 사람 있는데 영광이라 그러면 어떻게? 그러면 크게 됐으니 영광이고 다른 목사님은 조그마하니까 그건 영광이 아니지요? 아니요? 그 판단이 잘 돼야지. 꼭 사람은 생각하기를 부피 덩어리 많은 쪽으로 항상 그런 생각이 있어요.
그럼 우리 입장에서 단순히 그거 보고 영광이 아니란다면 그럼 뭐가 영광이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만들어지는 것. 교인이 다 그렇다면 이건 진짜 영광이요. 그런데 주님을 하나도 안 닮았다면, 사람은 많은데 하나도 안 닮았다면 이건 영광으로 안 받지요? 그럼 뭐로 받아요? 세상 넓은 길로 많이 인도됐다면 그 어떻게 되겠어요? 그 심판이? 질을 보면 틀림이 없다. 질을 두고 판단하면 틀림이 없다.
근데 문제는 더 본인이 바로 섰는가 그 말이요. 이제 그 말하는 내 자신이 바로 섰나 이게 문제요. 우리는 그 면에 남 판단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섰나? 그 다음에 옳은 신앙의 노선으로 가고 이룰구원으로 이루고 있으면 그 다음에 다른 사람 눈에 검불도 뺄 수가 있는 거다.
교인이 불어나야만 주께 영광이고 그러면 이게 가만히 보면 그 사고방식이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이건 주님이 보내지 않은 종이다 그렇게 들어가요. 주님 보낸 종은 그런 게 아니요. 그럼 누가 보냈겠냐? 주님이 안 보냈다면 누가 보냈겠냐? 다른 말로 하면 ‘누가 너보고 목회하라고 시키더냐’ 요렇게 들어가요.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사는 목적이 세상에서 한 평생 잘 살고 잘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을 상대하여 죄에 포로 된 자를 진리로 영원히 살고 자유롭게 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동업을 해도 어느 쪽 동업이 더 가치 있는 동업입니까? 그것도 알아야 돼요. 어부들 동업하지요? 베드로가 이제 그랬었단 말이요. 예수님을 만났다. 그 다음엔 우리가 사람을 인도하려면 주님께서 사람을 왜 지었는지? 무슨 목적으로 지었으며 왜 땅에 살게 했으며 왜 죽는지? 크고 작은 사건은 왜 오는지? 왜 고난과 고통은 왜 오는지? 이걸 사람을 지으신 분으로부터 잘 자세히 배우고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사람을 가르칠 수가 있지 사람을 모르면 사람을 가르칠 수가 없다. 맞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 인도자 같으면 ‘하나님이 사람을 무슨 목적으로 지었습니까?’ 하고 물으면 다 성경으로 나와 있기 때문에 ‘내가 이런 이런 목적으로 지었다.’ 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것. 가르쳐줘서 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대로 인간 자기를 만든 목적대로 살게 하는 게 이게 복음이다. 근데 그런가 그 말이요. 이제. 그걸 안 가르쳐주고 세상 넓은 길 사망 길 심판의 길로 목사들이 세상을 가르치면서 몰고 간다면 이게 어떻게 주님의 종이요? 주님의 종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그런 종 안 보냈다. 예수님한테 물으니 ‘내가 안 보냈어.’ 마귀한테 물으니까 뭐라 그래요? ‘마귀 내가 보냈다.’
11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그 배 아직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안 가져갔으니 썩었겠지요? 썩으니까 고기는 다 도망가 버렸고. 그 고기 누가 다 가져갔겠느냐?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뒤에 고기하고 배하고 있기 때문에 자꾸 예수님 한 번 쳐다보고 고기 한 번 쳐다보고 ‘저거 누가 가져 가냐?’ 또 예수님 한 번 쳐다보고 고기 한 번 쳐다보고. 말하자면 롯의 처처럼 뒤를 자꾸 돌아보고 갔겠느냐?
그 고기 누가 잡히게 했어요? 예수님이 잡히게 하셨으니 당신이 알아서 하실 일이다. 그 면에 이해가요? 그 면에 이해 가느냐고요? 근데 인간의 생각이 들지요? 이상하게. 큰 고기 잡았으니 그래, ‘예수님, 고기 잡았으니 조금만 계십시오. 내가 회를 떠가지고 고추장하고 찍어먹고 갑시다.’ 허허.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집도 버리고 먹고 살 것 다 버리고 세상에다 두는 소원도 목적도 다 버리고 이 땅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모든 조건과 방편 모두 다 버려버렸다 그 말이요. 그게 지금. 어떻게 살아갈까? 어떻게 살아갈까요? 인간 편에서 보면 다 버린 셈이요. 오직 예수만 보고 따라간 거요. 글자 그대로 보니. 어떻게 살아가요? 그게 이제 인간의 생각이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이 이게 무슨 말일까? 우리 이 시간부터 모든 것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야 할 텐데 예수님이 어디 계셔요? 어디 계셔요? 보이면 따라가지. 말하자면. 글자 그대로. 근데 지금은 안 보인단 말이요. 그럼 어디로 가요? 어디로 갈 거요? 그럼 목사 따르는 게 예수 따르는 거요? 그럼 뭐요? 제 생각대로 기도해보고 그냥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가고 그냥 그렇게 되는 거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 글자 그대로 보면 모든 것을 딱 잘라 끊고 다 초절해버리고, 초월이 아니고 초절해버리고 다 끊어버리고 그 말이요. 그게 초절해버리고 예수님만 따랐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물론 왜 그 때는 그 표현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나? 그 속에 뭘 가르치려고 그 장면을 들었나? 그 장면을 따르라 그 말인가, 그 속에 들어있는 뜻을 따르라 그 말인가?
그래서 이게 이제 목회를 하면서 경험적으로 가만 보면 ‘저 사람은 목회를 해서는 안 될 사람인데’ 이게 나오고요, ‘아, 저 사람은 그만 직장에 다니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 요런 것도 있고요, 돈 많은 직장에 잘 다니는 사람이 다 내버리고 목회를 하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것도 해도 안 되고 저것도 해도 안 되고 아무 것도 해도 안 된다. ‘에라, 모르겠다. 목사 하라고 하는 뜻인가 보다’ 해서 목사가 되는 사람이 있고요. 그게 다 자기 생각이요. 그게 알고 보면. 그런데 이제 뭐 기술도 없고 뭐 속에 든 것도 없고 재산도 없고 그냥 이건 백수건달이요. 그렇게 해서 이제 ‘아, 목사나 해볼까’ 하고 그렇게 해서 목사가 된 사람이 있고요. 인간 눈으로 보면 그런 게 다 있단 말이요. 영감은 돈 벌어서 돈 안 갖다 주지, 어떻게 돈은 좀 써야 되겠고, 이제 뭐 나이 들어서 할머니가 다 됐는데 이거 어떻게 하나? ‘아, 적당한 신학교 들어가서 졸업해서 목사하면 되겠다. 용돈이나 타서 써야지’ 그런 게 있고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어요.
그럼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그런 것들을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목회가 될 사람이냐, 안 될 사람이냐’ 있는 거요. 회사 들어가도 그 문답 있잖아요? 뭐라 그러나? 면접 본다고 그러나? 거기서 정신 사상을 말을 하게 해야지. 면접해야지. 속에 뭐가 들었는지? 속에 든 것은 글로 쓰는 것은 얼마든지 거짓말로 쓸 수 있어. 그런데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물으면 그 속에 웬만한 건 다 들었다. 그걸 알아야 돼요.
그래, 이거 가만 보면 목회할 사람이 있고 안 할 사람이 있고 여러 가지 유형이 나와요. 앞으로 또 목회할 마음이나 또 진리에 관한 어떤 참 옳은 것을 많이 알아가지고 옳은 것을 많이 전해줘야 되겠다고 그러면 분명한 논리라든지 사상이라든지 이게 딱딱 이치가 들어맞아야 돼요. 표현이 분명해야 되고. 가령 예를 들어서 여기 서있는 목사가 아무리 영안이 밝다 해도 이를테면 이빨은 다 빠졌다. 그럼 말이 분명하겠어요? 못하는 거요. 못할 경우는 천 상 계속 필기로 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할 수밖에 없다. 근데 이빨은 다 제대로 박혔는데 이게 말이 너무 빨라가지고 말한 후에 한참 지나가서야 그 사람 간 후에야 ‘아, 그 말이었구나’ 하면 이게 어떻게 된 거요? 분명해야 된다. 전하는 사람은 말이 분명해야 한다. 표현이라든지.
말 막 급하면 안 돼요. 말 급한 사람 성격도 급해. 말 급하게 해서 상대가 못 알아들으면 이게 손이 막 나갈 거 아니요? 탁자 위의 종이도 날아가고 성경도 날아갈 거 아니요? 못 알아듣는다고. 내가 아는 사람이 한 분 계셨는데 나이가 좀 들었어. 그러니까 말씀을 하시는데 이게 목구멍에 자꾸 가래 같은 게 끼어가지고 자꾸 끓는 소리가 난단 말이요. 그러니까 듣는 내 입장에서 그게 내가 ‘에헴’ 자꾸 그러는 거요. 말은 저 쪽에서 하는데 헛기침은 내가 해. 가만 보니까 신학생들이 여기저기서 ‘에헴.’ 그거 참 말을 또 더듬으면 안 돼요. 이런 걸 녹음 했다가 자기가 잘 듣고 ‘아, 이거 고쳐야 되겠다.’ 고쳐야 된다. 안 그러면 힘들다. 알아듣기가 힘들다.
저는 용어가 좀 힘들지요. 알아듣기가. 안 그래요? 생소한 용어가 많아. 근데 첫 날 와가지고 못 알아듣는다? 아이고, 그래. 못 알아듣는 건 당연하다. 성경을 읽어봤나? 무슨 뭐 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니까 처음 와가지고 하나도 못 알아듣겠데. 그래, 그게 정상이다. 처음 왔는데 탁 알아듣는다면 이건 정말 성령의 역사다. 그렇게 오래 다녀도 못 알아들어서 잠만 자는데 뭘. 안 그래요? 제 말 잘 알아들을 수 있지요? 경상도 말이 많이 없어졌습니다만 표현적인 말을 자꾸 바로 하려고 하는데 이따금씩 경상도 억양이 나와요. 지금도 많이 나와.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는 거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는 여기에 물론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뭐 배에서 일하는 동역자들, 뭐 딴 데 보면 아버지가 있나? 하여튼 ‘다 버리고’ 그 말속에는 그게 베드로 자기 직장이요. 맞잖아요? 자기의 직장이요. 직장도 버리고 그 다음에 부모형제 인정정실 끊어버리고. 그 직장 버렸으니 돈 없잖아요? 물질성 버려졌고, 그 다음에 목숨을 걸고 나가지 아니하면 ‘네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 그랬으니 목숨까지 버려라. 생명성까지 버려야 이제 따른다는 말이 나와요. 사실 그래요. 근데 오늘날 세상목사들이 그러냐? 그렇지 않다. 다 가지고 따르고 그걸 자꾸 이뤄달라고 하는 거다.
뭔가가 예수 믿는 정신은 명확하게 쪼개져야 돼. 안 그러면 세상성이 들어와 가지고 이건 형벌이 더 커진다. 하나님 심판이 더 커진다. 사람이 살 수 있는 모든 조건은 그 방편은 다 버렸어요. 이거 어떻게 사냐? 이제. 무슨 말이냐? ‘모든 것 버리고’ 하는 이거 초절로 생각을 하지 말아라. 절의 종들은 초절이에요. 그건 초절이요. 다 끊어버려. 근데 사실 끊어지느냐? 그렇지 않아. 속에 그대로 담고 가. 그래서 거기도 텔레비전 있고 소고기 먹고 돼지고기도 먹고 여자들도 있고 그렇더라고. 병원에서 드러누워 있는데 보니까, 내 어머니가 옛날에 뇌출혈로 중환자실에 있는데 아따 그 옆에 쭈르르 누워있는데 무슨 돼지고기가 저렇게 누워있나? 이종교인이다. 기독교인이 아니고. 아따 살도 많이 쪘고요 피부도 아주 번질거리고 아주 사람이 그래요. 무슨 돼지고기 하나 툭 달아놓은 것처럼. 얼마나 잘 먹어서 그럴까요?
나도 살을 좀 빼야 돼요. 살쪘지요? 내가? 안 쪘어요? 자기가 살이 쪘는지 안 쪘는지 옷 다 해서 고개를 이렇게 해봐요. 뭐가 붙어 있어. 살이 너무 없으면 부러져버려. 이렇게 하다가. 나이 드니까 그런지 여기에 더숙이가 하나 붙어있어. 더숙이라 그러데? 더숙이란 여자가 있어요? 요렇게 하니까 뭐가 답답해. 베게 같은 게 하나 덜커덕 걸리는 거 같아. ‘아, 살쪘구나.’ 여기서 더 마르면 내가 어떻게 돼? 살찐 거 같아요? 살이 쪘는지 안 쪘는지 거기서 보실 때에 눈이 보이면 돼. 안 보이면 살찐 거야.
우리는 초절이 아닙니다. 끊어버리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바르게 살다보니 예수 따르는 거요. 그러니까 딴 게 안 보인다 그 말이요. 딴 게 안 보인다. 초월이야. 초월. 딴 게 뭐가 자꾸 더 좋은 게 보이는 그렇게 예수 믿으면 안 된다. 다 끊어버리고 초절해버리고 예수만 따랐다는 그 말처럼 들립니다. 그게 아니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라고 하는 말은 ‘떡도 먹지 말라’는 그 말입니까? ‘사람이 밥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그 말은 ‘밥도 먹지 마라’ 그 소리로 들립니까?
예,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은 세상에서 사는 목적을, 목적 말이요. 목적, 밥을 먹더라도 농사를 짓더라도 일을 하더라도 사는 목적을 하나님 제일주의로 산다 그 말이요. 이해됐습니까? 이거 바로 깨달아야 돼요. 안 그러면 자꾸 산속으로 굴속으로 들어가기 쉬워요. 이거 못 써요. 자칫 잘못하면 고행주의가 나오고 그래요. 극기주의 초절주의 이거 이방신관이요. 그럼 그 사람을 회를 쳐버려. 자기가 자기 몸을 자꾸 못쓰게 만드는 격이 돼버려요. 그거 알아야 돼요.
세상에 살면서 세상소원 목적으로 살지를 않고 하나님 말씀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며 사는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그 말하고 신앙의 질이 맞아 들어가는 거요. 어떻게 이해가 됩니까? 그 말에? 그 말에 이해가 돼요? 집에서 오실 때에 ‘교회 가야 되겠다. 하나님 말씀 듣고 깨닫고 사람이 만들어져야 되겠다’ 하고 와서 듣고 집으로 가는 것은 그 생각을 가다가 내버리고 갑니까? 그 마음 그대로 갖고 가는 겁니까? 그리고 생활하는 겁니까? 그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거다 그 말이요. 이해가요?
그러면 가다가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가 ‘야, 오래간만이다’ 하면서 데리고 가더니 극장도 데리고 가고 놀이공원도 데리고 가고. 그럼 그런 경우는 예수님을 버리고 간 겁니까, 예수님을 가지고 간 겁니까? 빠진 거 아니요? 안 빠졌으면 되지. 근데 사람이 안 빠질 수가 있나? 거기에는 벌써 지혜가 있어가지고 ‘아, 오늘은 내가 못 간다. 내일 몇 시에 만나자’ 그런 약속이 이제 있을 수가 있지요. 그런 지혜가 필요한 거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소원 목적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을 향해 가면서 부모형제 모든 이웃도 족속도 모두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의 인도대로 모세의 인도 따라서 살면서 가는 것이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거와 같다 그 말이요. 이해가요? 이해 안 되는 사람? 잠 만 오는 사람? 조금만 할 게요. 조금만 참으세요.
모든 가치판단 평가성이 먹고 사는 모든 활동이 예수로, 즉 구원으로 내려지는 것이 세상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거다 그 말이요. 어느 쪽으로 판단 평가? 구원으로 하나님의 온전으로 닮아지는 그 쪽으로 판단 평가를 내리고 사는 것이, 목적을 그렇게 사는 것이 누구 따르는 거다? 예수를 따르는 거다.
그런데 세상속화 된 신앙은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부릅니다. 그럼 요건 예수를 따르는 거요, 세상을 따르는 거요? 세상을 따르는 거. 그 세상을 내가 따라가는데 세상 것이 없다. 그러니까 예수이름을 불러서 ‘저기 있는 것을 나한테 좀 갖다 달라’ 하는 거와 같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누가 주인 되고 누가 종이 된 셈이요? 자기는 주인이 됐고 예수님은 갖다 주는 이루어주는 종이 돼버렸어. 완전히 바뀌었지요? 신앙의 이치가 바꿔지면 이건 타락이요. 죄 안 짓고 살아도 일반적으로 도둑질하고 그렇게 안 해도 그건 타락이요. 신앙지식이 이게 위치적 존귀적 순서적 바뀌면 타락이요. 그 사람.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 인간→ 물질’의 순서가 바른 순서요.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이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목적으로 사는 것이 누구를 따르는 거? 예수님을 따르는 거.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따르니 구원이 되는 거죠. 예수는 구원. 그렇게 하면 뒤처리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했으니까 그 뒤처리는 당신이 알아서 한다. 이해가요? 이게 지금? 뒤처리는 당신이 알아서 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다는 그 말을 오해하여 산속으로 들어가서 도 닦기 쉽고 신비적인 체험만 하려고 할 것이고, 교회를 그런 식으로 몰아가면 이건 사람은 망하는 거다. 죽는 거다. 그러니까 ‘사람을 취하라’ 하는 것은 구원과 하나님과 우리와 연관이 들어있는 교훈이야. 그런데 이제 초절주의로 극기주의로 살게 되면, 극복주의로 살게 되면 초절주의로 살게 되면 요건 귀신들리기 딱 알맞다. 알겠어요? 귀신들리고 산다. 그러니 가정이 바로 들어가겠어요? 사회생활이 바로 되겠어요? 사람관계가 바로 되겠어요? 안 된다.
지금 예수 안 믿는 사람들 가까이서 보면 사람관계가 바로 돼 있는 거 같아요? 아니요. 전부 자기 유익 자기 이익이 다 들어가 있어. 그게 안 맞으면 ‘다 끊고 싫다’ 그러는 거요. 전부 자기 위주로.
이게 ‘좀 자기 회사를 위해서 일해 달라’ 그것보다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해라’ 이게 참 옳은 교훈이요.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해야 돼. 맞잖아요? 일하면 돈은 나와. ‘돈’ 하면 관계성이 돼. 근데 ‘돈 벌기 위해서’ 이렇게 되니까 이게 말의 표현이 돈이 주격이 돼버려. 그러니까 돈을 위해서 사람이 망가져야 돼. 그거 알아야 된다. 밥을 위해서 사람이 먹어주는 거지요? 아니요? 사람을 위해서 밥을 먹어야 됩니까? 자기 밥 누가 먹어요? 남이 먹어요? 자기 밥 자기가 먹지. 그러니까 자기라는 사람을 위해서 자기가 먹어야지. 안 믿는 사람의 사고방식하고 완전히 이게 사고가 돌아져 있어요. 우리 입장에서는 세상 식으로 돌아가면 되는 게 아니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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