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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적인 믿음

디모데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50 추천 수 0 2020.01.08 23: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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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딤전6:6-16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07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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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적인 믿음

딤전 6:6-16, 창조절 다섯째 주일, 2019년 9월29일

 

6.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1.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3.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사람이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살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게 잘 안 됩니다. 세상은 싸움을 삶의 본질로 여기는 듯이 보입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에도 싸움이 일어납니다. 크게는 장로교, 감리교 등, 전체 교단 안에서 이전투구 현상이 가끔 나타납니다. 좁게는 개별 교회 안에서도 다툼이 일어나곤 합니다. 초기 기독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런 부분을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 앞 구절에 나오는 딤전 6:4-5절을 따르면 그 교회에서 어떤 교인은 교만하여 변론과 언쟁을 좋아했습니다.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여기기에 그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이런 다툼에서 벗어나는 참된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를 딤전 6:6절 이하에서 설명합니다.


자족하는 마음


우선 6절에서 자족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자족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7절과 8절에서 일반적인 경구를 사용해서 보충 설명합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세상에 와서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세상 사는 동안에 일용할 양식과 입을 옷만 있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부자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여러 가지 시험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이를 가리켜 10절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끊어서 말했습니다. 돈 사랑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미혹을 받아서 믿음에서 떠나고 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그럴듯하지만, 비현실이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어떻게 일용할 양식만으로 만족할 수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런 주제가 나올 때마다 설교자로서 저도 마음이 복잡합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나왔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지난 주일에 저는 이 말씀이 가난을 무조건 미화하려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삶의 전체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부자이면서도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가난하면서도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제삼자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본인은 압니다. 또는 돈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상에서 적응하여 살기에 본인도 뭐가 뭔지 모를 수 있습니다. 성령만 정확하게 뚫어보시겠지요.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바로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사람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만으로 만족하는 삶은 마음을 그렇게 먹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만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월세를 사는 사람은 작은 평수라도 자기 집이 있으면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작은 집이 생기면 좀 더 넓은 평수의 집을 갖고 싶어 합니다. 넓은 집이 한 채 생기면 자식들을 위해서 한 채 더 마련하고 싶어집니다. 끝이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20명 교인이 모이는 교회는 50명을, 그다음에는 100명을 목표로 합니다. 재정적으로 힘든 교회의 신자들은 자립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게 해결되면 더 많은 걸 목표로 합니다. 지난 주간에 한국교회에서 벌어진 가장 큰 이슈는 명성교회가 속한 예장 통합 총회에서 명성교회의 세습을 용인한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입니다. 자식이나 사위 등, 친족에게 담임 목사직을 승계할 수 없다는 교회 헌법을 어기면서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부자 교회를 잃고 싶지 않다는 욕망에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일용할 양식의 영성을 오래전에 포기했습니다. 그들이 특별하게 파렴치하거나 부도덕하거나 비양심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나름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성실하게 목회하려는 사람들이지만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떨어져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약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


바울은 교만하여 생기는 변론과 언쟁이 아니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합니다. 악한 생각과 질서를 밀어내고 선한 생각과 선한 질서가 자리 잡도록 투쟁하는 겁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믿음을 선한 싸움이라고 한 이유는 믿음이 저절로 성장하거나 저절로 건강해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뜨겁고 진실한 신앙을 경험했다고 해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왜곡과 오류에 떨어집니다. 앞에서 짚은 딤전 6:4절이 말하듯이 변론과 언쟁과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마음으로 기울어집니다. 여러분 자신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저도 저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본인은 언제나 옳게 판단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투쟁하듯이 수행하지 않으면 영적인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영적인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말은 인격이 파탄 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인격은 고상해질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수준을 갖춘 교양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양을 최고 수준의 가치로 여기기에 다른 사람에게 교양 있는 사람으로 비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노력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양으로 우리 삶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교양마저 순식간에 자기 자랑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의 독일 나치 집단이 그랬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듣고 철학자를 거론하며, 그리고 이웃들에게 신사 소리를 들으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운영했습니다. 우리를 식민지배한 일본 관리들도 마찬가지로 문명인처럼 행세하지만, 속으로는 야만성이 자리했습니다. 그게 4절이 가리키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대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은 투쟁적인 믿음 생활을 외면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투쟁적인 믿음은 열광적인 믿음이라고 무시합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신앙생활 하는 게 지혜롭다고 여깁니다. 믿음을 투쟁적으로 살아낸다는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을 멀리하고 오직 교회에만 매달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완성을 향해서 치열하게 투쟁하라는 뜻입니다. 투쟁하듯이 살아내지 않으면 생명완성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이 어떤 단계에 이르렀는지를 돌아보십시오. 바울이 11절에서 따라야 할 항목으로 제시한 것을 예로 들겠습니다. 의, 경건, 믿음, 사랑, 인내, 온유가 여러분의 삶에서 더 풍부해지는지, 살펴보십시오. 이를 알 수 있는 좀 더 분명한 기준을 말씀드리면 ‘자기’에 대한 관심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자기 관심, 자기 연민이 줄어드는 게 생명완성에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거꾸로 인생을 삽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가 점점 더 강해지는 겁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게 잘못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를 나타내려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위한 생각인지 자기를 나타내려는 욕망인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구분할 수 있는 한 가지 현상을 말씀드린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시험에 떨어지면 자기 욕망에 묶여 있는 것이고, 시험에 들지 않으면 정말 정의와 진리를 위한 행동입니다. 우리 스스로 착각할 수 있으니, 평생 죽을 때까지 자신을 내려놓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제 나이가 몇 년만 있으면 70살이 됩니다. 참 오래 살았습니다. 나름으로 투쟁하듯이 치열하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로 살았는데도 실제 삶에서는 생명완성과 거리가 멉니다.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도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더 분발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의 작은 일상에서도 ‘자기’를 부정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집안에서도 내 주장을 대폭 줄여야겠습니다. 내 생각을 말하기는 하겠지만 ‘자기’를 내세우지 않아야겠지요. 굳이 아내에게 인정받으려는 생각마저 없어야겠지요. 그렇지만 상대를 진심으로 인정하는 건 필요합니다. 교우들과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마음먹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무로 떨어지는 영성에서만 가능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아무 때나 세상을 떠나도 전혀 아쉬울 게 없는 단계까지 자기가 작아지고 싶습니다. 그게 생명완성 아니겠습니까.

 

영원한 생명


자기 부정, 자기 축소, 자기 무화는 자기를 지키려는 생존 본능에 어긋나기에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싫어합니다. 자기가 부정당하면 삶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대 심리학은 자기를 강조합니다. 당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위로합니다. 긍정 심리학입니다. 심리와 정서가 불안한 사람에게는 그런 긍정 심리학이 어느 정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임시조치입니다. 아무리 자기를 긍정해도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은 낡고 늙고 사라집니다. 자기도 소멸합니다. 그 순간이 오면 긍정 심리학은 무의미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심리학의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고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바라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셨기에 하나님과의 일치에서만 영혼 구원에, 즉 생명 충만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게 12절이 ‘붙잡으라.’라고 한 영생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가까이 가야 할 하나님에 관해서 매우 독특한 언어로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당시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찬송으로 불렀던 내용입니다. 제가 천천히 읽어볼 테니 이런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가 머리에 그려지는지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15,16절입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여기에 묘사된 하나님은 머리에 잘 그려지지 않을 겁니다. 이런 대상을 생각하면 오히려 골치만 아픕니다. 성경은 우리를 피곤하고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인생과 세계와 역사의 가장 깊은 차원으로 눈을 돌려야만 생명을 충만하게 경험하고 누릴 수 있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세균을 보십시오. 현미경이 발명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세균이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현미경이 만들어진 다음에는 전염병이 세균에 의해서 전염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걸 아니까 대처 방법도 나오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실체는 아닙니다. 그 안에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힘들이 작동합니다. 물리학이 말하는 장(field)가 그것입니다. 또는 원소 같은 소립자들의 활동이 그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나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삶의 중심을 두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은 아무도 볼 수 없는 빛의 근원이시고 복의 근원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의 힘에 굴복당하지 않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돈이 생명완성의 근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공연한 변론과 언쟁과 언쟁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들을 통해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의 방향이 있습니다. 16(b)절이 말하듯이 하나님께 존귀와 권능을 돌리는 삶이 그것입니다.

 

존귀와 권능


보통은 존귀와 영광을 돌린다고 표현하는데, 본문은 존귀와 권능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가치 있는 삶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존귀하며, 하나님에게만 참된 권능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인정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아닌 대상에게 존귀와 권능을 바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무리 가치 있고 뛰어나 보여도 상대적이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대상에게 존귀와 권능을 돌리는 사람은 그 대상과 함께 허무에 떨어집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도 허무하다는 말인가, 또는 예술과 문학에 열정을 바치는 것도 무의미하다는 말인가,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사는 것 역시 우리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하고 오해하실 분들은 없겠지요. 지금 열거한 모든 삶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그렇게 살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존귀와 권능을 그 대상에게 돌리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 존귀와 권능을 돌린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예배일까요? 예배는 하나님께 존귀와 권능을 돌리는 삶에 대한 종교의식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야말로 우리가 존귀와 권능을 바쳐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실제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존귀와 권능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두 군데 성경 구절만 짚겠습니다. 먼저 시편입니다.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시 72:19). 다음은 이사야입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 6:3). 구약의 이 표현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꾸면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혹시 삶이 고단하다거나 몸이 아프다거나 사람에게 배신당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은, 즉 하나님 나라는 여기에 있습니다. 가난해도 걸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느낄 겁니다. 혼자 외롭게 살아도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겁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고후 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바울의 말을 기억해두십시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 존귀와 권능을 바치는 지경까지, 즉 생명의 신비에서 무한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지경까지 나아가는 한평생의 치열한 싸움입니다. 이는 선한 싸움이라서 싸울수록 여러분의 영혼이 거룩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바울의 심정으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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