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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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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08289 |
갈급한 영혼
눅 18:1-8, 창조절 여덟째 주일, 2019년 10월20일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세계 교회력에 따른 오늘의 복음서 읽기는 눅 18:1-8절입니다. 이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모르는 기독교인은 별로 없습니다. 설교자인 저도 이 본문으로 여러 번 설교했습니다. 이 비유의 서사는 아주 간단합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한다는 표현이 2절과 4절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권력자에게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태도입니다. 개인으로는 인격적이라고 하더라도 권력 속성상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입니다. 권력은 악을 제압하라고 주어진 칼입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칼을 사용하다가 거기에 길들면 왜 칼을 사용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줄고 칼의 효용성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나쁜 경우는 3류 칼잡이처럼 칼을 쓰는 재미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교수와 의사와 기업가, 영화감독에게도 일종의 권력이 있습니다. 목사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목사직이 인간 영혼을 파괴하는 권력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전문 지식과 지위가 봉사직이라는 사실을 놓칠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전문가로 인정받는 사람들은 이런 점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해야 합니다. 자칫 하는 순간에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 됩니다.
또 한 사람이 비유에 등장합니다. 과부입니다. 과부는 재판장과 대척점에 선 사람입니다. 당시 과부는 가장 힘이 없는 사람에 속했습니다. 죽은 남편이 아주 큰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으면 초근목피 신세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과부를 구제의 첫 번째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이 과부는 재판장에게 가서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이 과부가 무슨 억울한 일을 당했을까요? 사기꾼이 이 과부의 남아있는 재산을 속임수로 빼앗을 수도 있고, 이 과부의 어린 자녀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여자의 주변에는 손 내밀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재판장에게 매달렸습니다. 재판장은 이 과부의 하소연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과부는 계속해서 재판장을 찾았습니다. 이 재판장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4절과 5절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이 재판장이 실제로 이 과부의 원한을 해결해주었는지 아닌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본다면 들어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우리나라 대법원 건물 중앙 현관에는 한복 차림의 ‘정의의 여신상’이 서 있다고 합니다. 원래 헬라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상인 ‘디케’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디케 상은 눈을 가리개로 가렸지만, 한복 차림의 여인상은 눈을 떴습니다. 디케는 한 손에 저울을 들고 다른 손에는 칼을 들었지만, 우리나라 여신상은 한 손에 저울을 들고 다른 손에 책을 들었습니다. 그 책은 법전이겠지요. 오리지널인 디케 여신이 눈을 가린 이유는 피고가 가난한 사람인지 부자인지, 사회 하층 사람인지 상층에 속하는지를 염두에 두지 않고 법과 원칙에 따라서 판단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게 법 정신입니다. 아홉 명의 도둑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은 만들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자조적인 주장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전관예우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비유가 주목하는 대목은 불의한 재판장의 행동이 아닙니다. 과부로 인해서 시달림을 받는 게 귀찮아서 재판장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독자들이 재판장을 정의롭다거나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가 주목하는 대목은 과부의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이야기 끝에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불의한 재판장도 번거로운 일을 피하려고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이런 구절에 근거해서 ‘강청 기도’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조건 매달리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말씀을 세상살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일상, 즉 좋은 집을 사야겠다거나 결혼하거나 아기를 낳아야겠다거나 자녀들의 입시와 취업을 위해서 이 과부처럼 매달리듯이 기도하라는 겁니다. 그런 기도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 기도를 우습게 여기는 기도 냉소주의는 기독교 신앙에서 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기도를 일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마술적인 도구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매달린다고 해서 문제가, 특히 억울한 문제가 다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얼마 전에 드러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아실 겁니다.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사람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미 그런 일들은 지난 세월에 많이 벌어졌습니다. 그런 일을 당한 사람들은 대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매달리듯이 자신들의 무죄를 강변해도 검사와 판사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예수도 그런 방식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고발을 피할 수 없었으며, 공권력을 행사하는 빌라도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었습니다.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으로 사형당했습니다.
본문의 과부는 아무 데도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갈급했습니다. 이런 갈급한 영혼에서만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우러나옵니다. 기도의 영성은 갈급한 영혼을 토양으로 자랍니다. 이와 달리 우리가 경험한 세상은 의지할 때가 많아야만 성공한 인생이라고, 그리고 행복한 인생이라고 훈계합니다. 의지할 대상이 무엇인지는 여러분이 다 아십니다. 우리 교우들도 가능하면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의 두 딸도 그렇게 살았으면 합니다. 이런 삶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게 인지상정이긴 합니다. 다만 그런 조건이 우리 인생에서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그런 의지할 대상이 많을수록 우리는 영적으로 나태해집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영적으로 느슨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의지할 데가 없어서 하나님만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설교하는 당신은 어떤데, 하고 질문하고 싶으신가요? 세상살이에서 의지할 대상을 지금 당장 포기하고 온전히 예수의 제자로 사는가, 하고 묻고 싶으신가요? 물론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저도 상대적이나마 풍족하게 삽니다. 텃밭을 가꾸고 테니스를 여전히 즐깁니다. 담임 목사로서의 삶도 편안합니다. 의지할 데가 전혀 없는 본문의 과부와는 완전히 다르게 삽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저에게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압니다. 돈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저의 학문적 업적도 저의 관심이 아닙니다. 가족도 의지가 안 됩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는 순간에 의지할 대상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살아있는 지금 이미 우리의 실존은 고립무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과부의 신세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인생을 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냐, 우리의 인생은 조금만 준비되면 황홀할 정도로 행복하다고, 그런 인생을 즐기는 일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니 시간 있을 때 마음껏 즐기자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바로 앞에서 짚었지만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재미있게 인생을 살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삶을 정말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도 여러분이 지금 과부처럼 고립무원이라는 사실을 뚫어봐야 합니다. 이 사실과 연관해서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내용을 상기시켜드리는 겁니다.
첫째, 우리가 사는 지구는 외로운 별입니다. 지구가 속한 태양은 은하계에 있는 천억 개의 별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은하계가 우주에는 천억 개 이상입니다. 천억 곱하기 천억을 해보십시오. 계산하기도 벅찹니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우주 어딘가에 생명체가 존재할까요? 그냥 생명체가 아니라 우리와 소통할 수 있는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할까요? 그런 외계인이 존재하더라도 우리와 만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먼 미래의 우리 후손들이 외계인과 만나는 일이 벌어지면 너무 기뻐서 놀랄 것이며, 만나지 못하면 너무 낙심하여 놀랄 겁니다. 지금 우리는 저 우주 한구석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아주 작고 푸른 별에 살고 있습니다. 고립무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둘째, 지금 우리 각자는 혼자서 이 세상을 대면해야 합니다. 문학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홀로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여행하는 중입니다. 모든 문제를 혼자서 결정해야 합니다. 가끔 다른 우주선과 같은 방향으로 날아가는 순간도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혼자서 날아갑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외면합니다. 옆에 누군가 자기와 함께 한다고 여깁니다. 그런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 일거리를 찾습니다. 그런 흥밋거리는 한 찰나로 끝납니다. 산티아고 순례를 생각하면 됩니다. 혼자서 걷습니다. 혼자서 하늘을 보고 구름을 보고 새를 봅니다. 혼자서 꽃과 나비를 봅니다. 우리가 어두운 어머니 태에서 혼자 지내다가 세상에 나와서 많은 사람과 어울려서 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 혼자입니다. 같은 침대에서 자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혼자입니다. 옆에서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이 있어도 결국은 자기 혼자서 밥을 씹어서 혼자 느끼면서 먹어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계속해서 누군가를, 그리고 무언가를 찾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또는 우주 앞에서 혼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 사실로부터 오늘 본문의 과부에게서 볼 수 있는 영혼의 갈망이 시작합니다. 이런 사람만 하나님을 향해서 한 발 두 발 나아갑니다.
밤낮 부르짖은 이들의 원한을 풀어준다는 표현이 적나라하게 들립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원한을 풀어주신다는 것일까요? 원한이 풀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걸 제가 어떻게 눈에 보이듯이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홍수에 떠내려가면서 살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사람처럼 갈급한 영혼으로 사는 사람만 경험할 수 있는 그 어떤 구원 경험은 말로 설명이 안 됩니다. 설교자는 말과 문자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말로 설명해야 할 운명에 떨어진 사람이니 제가 용기를 내서, 그리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 의지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과부의 상황을 다시 보십시오. 그녀는 억울한 일을 당하여 원한에 사무쳤습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 원한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해결해줄 수 있는 대상은 재판장 한 사람뿐입니다. 그에게 매달렸습니다. 여기서 재판장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게만 매달리는 사실 자체가 바로 원한의 해결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행위 자체가 구원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결속되었으니 실제로 문제가 해결되었는지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설명이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생명을, 또는 인생을 추상적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또는 인생을 실질적으로 정확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시인들입니다. 함민복 시인의 시 ‘사과를 먹으며’ 전문을 읽겠습니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
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마비를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에서 울던 새소리를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
사과나무 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를 지탱해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자양분 흙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흙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보려다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사과를 먹는다
사과가 나를 먹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즉 생명의 근원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찬식 소재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를 예수의 몸과 피로 믿고 먹습니다. 예수와의 일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다는 신앙입니다. 함민복 시인은 사과 한 개에 은폐된 우주론적인 생명의 깊이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실행된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과 한 개에도 생각할 내용이 많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생각할 내용이 많습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무한에 가깝습니다. 그에게 일어난 생명 구원을 갈망하는 삶이 곧 구원입니다. 그런 영혼의 갈망에 들어간 사람은 다른 것에 묶이지 않습니다. 원한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정도로 우리 운명을 지배하는 죄로부터 해방됩니다.
우리가 사과 한 개의 우주론적 차원을 느껴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집중해도 실제 세상살이에서 겪는 어려움은 해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직장을 얻지 못하거나 지병으로 고생하고, 젊은이들은 실연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순례자로 사는 인간 모두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그런 어려움마저 없기를 바라는 것은 환상이자 비현실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해서 영혼이 갈급하다면 하나님이 그런 세상의 문제를 헤쳐나갈 힘을 주실 겁니다. 그런 문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소해진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될 겁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에 나온 과부처럼 한편으로는 갈급한 영혼으로 살고 싶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부로 표상되는 그런 처량한 신세에 떨어지기 싫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여러분의 실제 삶은 여러분이 알아서 챙기기를 바라고, 저는 설교하는 목사로서 원한에 사무친 과부의 신세에 떨어질까 ‘미리 걱정하지 마시라.’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 전체 인생에서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영혼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오늘 설교 본문의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이런 갈급한 영혼으로 살려는) 믿음을 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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