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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미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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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온라인새벽기도(2725) |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 (미가 6장 8절)
< 하나님의 뜻을 살피라 >
필자의 <온새기(온라인새벽기도)> 메일 회원은 7100여명이다. 그 중 절반 이상은 10년 이상 말씀 메일을 받은 회원이기에 회원의 친밀도와 충성도와 이해심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10년 이상 말씀 메일을 주중에 매일 받으면서 그 말씀 중에 자기 생각과 맞지 않고 때로는 반대 입장을 취하고 싶은 말씀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수신거부’를 하지 않고 계속 말씀을 받고 있다면 그것이 친밀도와 충성도와 이해심을 나타내는 표시다. 어느 공동체든지 10년 이상은 있어봐야 자신의 공동체적인 정체성과 인격성을 인정받고 리더로 세워질 수 있다.
필자는 메일 회원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고 목사 그룹, 선교사 그룹, 해외거주 그룹, 교인 그룹, 지인 그룹, 후원자 그룹, 신규 그룹 등 총 38개의 그룹으로 분류해 놓았다. 그들에게 대부분 같은 내용의 메일을 보내지만 구체적인 선교 후원과 관련된 기도제목을 알릴 때는 간혹 내용을 달리해서 보낸다.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회원에게 그런 기도제목을 알리면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공정과 차별인가? 그렇지 않다.
교인이나 옛 지인이나 친구 등에게는 선교 후원 관련 기도제목 내용을 빼고 보내기도 한다. 심적인 부담을 더 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마음 상태를 세심하게 고려해 차이를 두는 것이다. 특히 마음의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순종과 헌신을 말하기 조심스럽다. 반면에 헌신과 순종을 도전하는 말씀이 잘 수용되는 마음을 준비하면 하나님이 그 마음을 기억해주신다. 준비된 마음 지수는 준비된 축복 지수를 높인다. 늘 하나님께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을 드리려고 준비하라.
<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 >
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보다 실천적인 삶을 더 원하신다. 믿음과 생활은 분리될 수 없다. 예배가 하나님께 온전히 열납되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힘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복된 삶을 위해 하나님이 구하시는 3가지가 무엇인가?
1. 정의를 행하는 것
하나님은 “정의를 말하며”라고 하지 않고 “정의를 행하며”라고 하셨다. ‘정의로운 외침’보다 ‘정의로운 행동’이 중요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란 법적인 정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뜻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기뻐하신다. 살다보면 정의가 실종된 불의하고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상황을 많이 접한다. 예전에 누군가가 이렇게 한탄했다. “100만 원 훔치면 감옥에 가고 100억 원 훔치면 국회의원이 되는 세상이다.”
그런 한탄이 공감은 되어도 기본적으로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지 말라. 정의는 결국 승리한다. 다만 정의를 현재의 순간에 완벽하게 무엇을 이루는 것이나 정직하게 모든 것을 다 밝히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거나 필요하다면 감춰야 할 것을 감추는 것도 정의다. 부부가 오래 살면 서로의 약점을 속속들이 안다. 그것을 다 공개해서 고치려는 것이 정의는 아니다. 목회자가 성도의 감춰주어야 할 부분까지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는 것도 정의가 아니다. 말로 정의를 내세우기보다 삶으로 정의를 보여주라.
최근에 한 지인 목사가 말했다. “목사님! 말이 앞서기보다 말씀대로 살아야 함을 알면서도 그렇게 못할 때가 많고 제가 형편상 교단을 위해 큰 헌신도 못하는데 늘 정의로운 듯이 말만 해서 죄송해요.” 어디서든지 말이 앞서기보다 말씀대로 산다면 웬만한 문제는 비교적 쉽게 풀린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말이 앞서기보다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말보다 말씀을 앞세워 살고 관심을 가진 의무적인 삶보다 힘써 돕는 책임적인 삶을 앞세워 살라.
“우리 교회는 약자를 도와야 합니다.”라고 사랑이 많은 사람처럼 말하는 것에만 익숙하기보다 “제가 약자를 돕는 데 일조하겠습니다.”라고 적극 나서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까지 잘하라. 또한 내가 잘못이 없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남을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까지 잘하라. 성도라는 명칭에서 더 나아가 주의 제자가 되고 단순히 믿는 것에서 더 나아가 믿음을 생활화하라. 내가 하고 싶은 일만 다 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까지 생각하는 것이 정의를 행하는 모습이다.
2. 인자를 사랑하는 것
인자란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하는데 ‘자비롭고 친밀한 사랑’을 뜻한다. 결국 ‘인자를 사랑하며’라는 표현은 ‘사랑을 사랑하며’라는 뜻으로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 표현이다. 사랑은 성도의 기본 자질이다. 다만 사랑의 의미를 오해하지는 말라. 사랑과 은혜를 내세워 책임을 포기하거나 질서를 무시하거나 심은 대로 거두게 하는 공정의 원리를 외면하면 안 된다. 물론 사람이 완벽하게 공정할 수는 없다. 어떤 일을 맡길 때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을 선호하는 것이 무조건 불공정이나 차별은 아니다.
미국에서 대통령이 바뀌면 몇 천 개의 중요한 자리가 바뀌기에 그때 워싱턴에서 가장 호황을 맞이하는 업체가 이삿짐 업체다. 대통령이 자기 뜻과 정책을 이해하고 충실히 이행할 사람을 수석이나 장관이나 기관장 자리 등에 앉히는 것은 불공정하게 여기지 않는다. 대통령을 선출할 때는 그 권리도 위임한 것이다. 다만 대통령이 지인의 일반 회사의 사원으로 뽑게 압력을 넣으면 그것은 정도를 이탈한 불공정으로 여긴다. 예전에는 대통령이 그 정도 해주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의미에서 괜찮다고 여기고 오히려 미담처럼 여겼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옛날에 왕이 은밀하게 민정 시찰을 나갔다가 한 효자의 효성을 보고 그에게 과거 시험문제에 대한 언질을 주어 과거에 붙게 해주었다는 고사들이 있다. 효의 중요성을 강조한 고사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왕도 그렇게 하면 인자와 은혜가 아닌 불공정과 불법으로 여긴다. 시험의 공정성을 해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인자와 긍휼로 남을 세워주라는 말이 불법과 불공정을 눈감아주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무조건 평등하게 하는 것도 공평이 아니다. 심은 대로 혹은 행한 대로 거두게 하고 신실하게 드려진 마음대로 거두게 하는 것이 공평이다.
한 한인 이민교회 목사가 사랑이 많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는 교인이 교회 질서를 흐트러뜨려도 “허허! 믿음이 부족하고 교회를 잘 몰라서 그래.” 하고 겉으로 웃으며 넘어갔다. 그런데 위경련이 자주 생겼다. 교인의 무책임과 무질서로 인해 내면은 상처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사모는 남편이 사랑이 많다면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교회를 질서 있게 이끌지 못하니까 남편이 “허허!” 하는 모습에 너무 속상했고 남편이 사랑 많은 목사란 말이 듣기도 싫었다. 목회자의 그런 모습이 사랑인가? 의와 질서가 방기된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가정에서 아이를 키울 때 아이가 잘못 행동하면 야단치는 힘든 책임을 부부가 나눠서 져야 한다. 그런데 어떤 남편은 늘 선한 역만 맡고 악역을 맡지 않는다. 자녀가 잘못했을 때 아내만 야단치면 아내는 몸과 마음이 지치다가 나중에는 선한 역만 맡는 남편이 미워지게 된다. 때로는 남편도 악역을 맡아주어야 육아 부담이 덜어지는데 그런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에서 선인처럼 보이고 선인 역할만 하려는 것은 배려가 없는 삶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랜 공동체 생활을 통해 깨달으면서 사람은 점차 철이 든다.
자녀를 바르게 만들려고 지혜롭게 야단도 치는 책임적인 사랑이 진짜 사랑이다. 자녀가 나쁜 모습을 하고 나쁜 길로 가고 나쁜 언어를 쓰는 것을 그냥 놔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가정에서도 리더십이 필요하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리더십이 세워진 곳에서 하나님이 그 공동체에 은혜를 내려주신다. 겉으로 호인처럼 보이기만 하고 사랑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 인생을 살지 말라. 실제로 속은 선하고 사랑이 많지만 의를 세우기 위해 겉으로 지혜롭게 악역도 맡으면서 공의가 실종되지 않도록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3. 겸손하게 행하는 것
겸손의 복은 최고의 복이다. 많은 것을 드리고 지혜와 능력이 많고 공의를 행하는 것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덕목이 겸손한 것이다. 다윗이나 모세는 완벽한 의인이 아니었지만 겸손했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았다. 겸손은 복을 받게도 하지만 복을 보존하게도 한다. 하나님은 겸손한 만큼 복을 주시고 계속 겸손하면 계속 복을 주시고 어느 순간에 교만해지면 그때부터 낮추신다. 겸손의 한계가 축복의 한계다.
미가는 제사와 희생을 무시하지 않았지만 진실한 마음과 실천적인 삶도 수반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믿음과 생활을 별개로 삼지 말라. 교회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의 일치를 지향하라. 미가가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굴복시키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에서 의롭게 살려고 하라. 의롭게 산다면서 사랑이 없이 살아도 안 되지만 사랑한다면서 너무 무르게만 살아도 안 된다.
사랑은 “오냐. 오냐.”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들고 부모가 되어봐야 비로소 철이 든다는 말은 왜 그런가? 철이 든다는 말은 지식과 경험이 많아진다는 말이 아니라 참된 사랑의 실체를 깨닫는다는 말이다. 응석을 받아주기만 하는 것이 사랑은 아님을 깨닫는 것이 철이 든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 받는 삶보다 주는 삶을 앞세우게 된다. 누구나 사랑이 많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 목회자가 제일 듣고 싶은 말도 그 말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듣는 것 좋아하다가 의를 세우지 못하면 나도 망치고 남도 망친다.
공동체에서 의를 세우기 위해 때로는 악역의 시간도 필요하다. 주의 이름을 높이려고 내 이름이 낮아지기를 기꺼워하며 정의를 위해 악역도 자처하는 것이 충성이고 그것도 일종의 십자가다. 정의로운 악역을 남에게만 미루지 말라. 진짜 악인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사탕 발린 말만 하지 말고 사탕 발린 이미지만 보이지 말라는 말이다. 내 뜻과 이미지가 훼손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이미지는 훼손되지 않게 하라. 좋은 말만 하지 말고 좋은 일을 하고 더 나아가 좋은 삶을 살라. 약속은 힘써 지키고 말과 삶이 일치되게 하라.
사랑이 많은 것 같지만 음지의 참된 사랑이 없고 십자가를 지는 것 같지만 어느새 남에게 십자가를 미루는 모습이 강물처럼 흐르는 은혜를 막고 늘 늪에서 허우적대는 삶을 살게 만든다. 사람의 마음에 들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내면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려고 하라. 사람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삶을 꾸준히 겸손하게 살아가면 된다. 2019년도 하나님이 지켜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2020년에는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행함으로 더욱 큰 축복을 예비하며 살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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