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6:6-11 |
---|---|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6장 6절-11절.
6절-7절: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 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또 다른 안식일입니다. 아까 안식일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거기 어떤 사람이 있었다고요? 손 마른 사람. 손 마른 사람이 글쎄 몸이 약해서 손이 마른 게 아니고 이게 지금 손의 병인 것 같아요. 손에 병이 들어 손 마른 사람 별로 못 본 것 같아요. 손 마른 사람이 있었어요.
손은 뭐하는 손이요? 일하는 손, 먹는 손이요. 손이 먹어? 먹여주는 손. 그렇죠? 때리는 손, 받는 손, 주는 손. 예, 손은 주고받는 손이지요. 손은 일하는 손이고 봉사하는 손이고. 근데 손이 말랐으니 받을 수도 없고 줄 수도 없고 일을 할 수도 없고 봉사도 할 수도 없고. 지금 그 면을 말을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손은 있는데 남 보기는 손은 멀쩡한데 주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하고 봉사도 하지도 못하고 한다면 손이 말랐구나. 이제 무슨 뜻인지 알았습니까? 그래요. 그거 알아차려요. 그래가지고 사람이 사람 가운데서 사는 맛이 있겠는가?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미안하고 불편하고 답답할까? 그렇지 않겠느냐 그 말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게 관찰을 잘 했습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앉아 듣고 있는지? 그 앞에서. 어떤 사람들이 엿보고 있었어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모세오경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 믿고 부활 천사 다 알아요. 다 알아요. 오늘날 기독교인들 다 알지요? 워낙 성경 안 봐도 워낙 들으면 몇 십 년 들으면 많이 알아요.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는 그 자들이 교권을 등에 업고. 그들의 교권은 굉장한 겁니다.
생각을 해봐요. 세계에서도 없는 세계 제일의 율법사 서기관들이요 박사들이고 그래요. 지금 말하자면 한국의 기독교로 말하자면 원어를 잘 아는 사람들,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 성경을 표면적으로 액면적으로 빠삭하게 잘 아는 사람들. 설교할 때 그냥 구절에 구절로 그저 막 둘러 붙이는 사람들. 여호와의 증인들도 잘 알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는 잘 모르잖아요. 그 사람들은 성경을 외우다시피 해요. 우리는 못 외우잖아요? 그런 식으로 보면 우리가 그런 사람들보다도 믿음이 없지요? 훨씬 없는 겁니까, 아주 없는 겁니까?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그들이 교권을 등에 업고 한 건 잡으려고 노리고 앉았습니다. 기독교 안에도 뭐 거짓교인들, 기독교 안에 장감성 뭐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또 뭐가 있어요? 뭐 할 것 없이요? 다 끄나풀이 있어요. 끄나풀 알지요? 다 있어요. 그 때나 지금이나 다 똑같아요. 이단자들도 다 있어요. 없는 거 아니요. 그 때도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의 큰 교단, 세계에서 제일의 성경을 안다는 사람들 그 밑에 다 있다. 그리고 건물로 말하자면 그 성전을 가지고 있단 말이요.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요? 성전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면 저기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이 성경에서 계시적으로 말하는 이 성전이냐? 그건 아니에요. 그러나 그 성전은 또 필요해요. 왜 그러냐? 일반계시로써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려고. 예배당은 성전은 아닙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에요. 성전이라고 할 때는 원래 원칙대로 하나님께서 설계한 그 설계가 있어요. 그 성경에 있지요? 그 설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룰구원을 잘 이룰 수 있는 그 설계로 들어가 있어요. 우리 속사람을 당신의 온전자로 만드는 설계로 그렇게 들어가 있어요. 모형이. 근데 예배당 설계는 이건 아니잖아요? 제 멋대로 짓는 거고 높이 올리려면 올리고 넓게 지으려면 짓는 거고 그렇지. 인간설계지 뭐요? 예배당이에요. 성전이 아니란 말이요. 잘 생각을 하세요. 큰 교회, 작은 교회? 아니요. 그런 거 아니요. 교회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요 영이 중생된 성도들의 무리. 이게 교회요.
이제 궁극교인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교인들과 이렇게 뭐요? 이를테면 사람 자기 명찰이 달리듯이, 이름표가 달리듯이. 우리교인들이 산에서 예배 보면 그 궁극교인이요. 궁극교인은 또 이게 질적인 면에서 신앙의 성격과 성질상으로 봤을 때에 주님과의 직통적 질적인 관계를 가져야 그게 옳은 교회입니다. 그걸 아셔야 돼요. 신앙사상이 세상성이 들어가서 푸른 교회니 물댄 동산이니 또 뭐 보니까 119교회도 있더라고요. 허허허. 나 깜짝 놀랐어요. 이거 참 기발하다. 이거 참 기발한 아이디어다. 119교회. 참 하여튼 재밌는 세상이고 참 웃기는 세상이야. 어쨌든.
허기야 예배당 간판이야 있든 없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뒤에 뭐 십자가 붙었든 안 붙었든 그거 중요한 게 아니에요. ‘목에 목걸이로 십자가 달고 다니나, 안 다니나’ 그거 중요한 게 아니고, ‘목사가 금배지 십자가 붙였나, 안 붙였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요. 그런 걸 자꾸 신경 쓰면 예수님 당시 때의 외식자들처럼 그렇게 들어가 버리게 돼. 위주가 그렇게 돼요.
원래 기독교인들은 무슨 옷이나 무슨 머리나 무슨 그거 표시가 없습니다. 근데 하나님 앞에 표시는 뭐냐?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주님처럼 닮은 그 실상이 자기 속에 있어야 돼. 그거 없으면 이건 거짓이고 이건 가짜고. 지금 제 말의 의미가 ‘지옥 간다, 천국 간다’ 지금 그런 표현으로 말하는 거 아닙니다. 학교 다니는 학생 같으면 그 학교의 품위가 있어야지. 학생으로. 그런 것처럼 교인이라면 자기 내적인 면에 인격 면에 성품적인 면에 자기 실상이 이게 거룩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들어가 있어야지. 그게 사람의 가치지. 무슨 머리 빡빡 깎고 무슨 하얀 두루마기 입고 고무신 신고 그런 식으로 표시하려고 그러지 말아라. 그거 다 외식자들이요. 뭘 모양 형태 뭘 둘러쓰고 긴 옷 입고 자꾸 그런 거 아예 흉내 내지 말아요. 외식자요.
제가 말씀 드렸지만 옷 입고 다니는 것은 일하기에 편리하고 활동하기 편리하도록. 물론 평소 때 입는 옷이 있고 손님이 되어 가는 옷은 따로 있고 잠자리 옷 따로 있고 다 그렇잖아요? 그런 건 예를 지켜줘야지. 이를테면 결혼식장이나 초상난 집에 슬리퍼 질질 끌고 짧은 청바지 반 잘라서 입고 가면, 요새 살 나오는 청바지도 있대요? 살 나오라고 문질렀는지 허얘가지고. 그거 참 왜 사람들이 그렇게 신경을, 참 나도 모르겠다. 허허허.
안식일은 거룩한 날 곧, 안식일의 주인으로부터 거룩성으로 고침을 받는 날이고 거룩한 사람으로 고침을 받는 날이다. 여기서 보니까. 맞지요? 고침을 받는 날이고. 거룩한 말씀을 들으면 거룩하고 신령한 생각이 들어가고 거룩한 일에 수종들고 싶은 마음이 나오는 것인데 그러나 그들은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 그 말이요. 맞잖아요? 여기 그런 분들 있어요?
8절: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님은 사람마음을 다 알아요. 그렇지요? 지금 우리 마음도 알까요? 확실히? 예배 끝마치는 길로 백화점에 가서 뭐 사가야 되겠다는 그것도 알까? 모르지요? 하나님도 사람 많은 틈에 쑥 들어가 있으면 못 찾아. 어떻게 찾아. 허허.
예, 손 마른 사람을 보고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 한가운데 서라.’ ‘가에 있었는데 가운데로 가서 서라’ 그 말인가, 아니면 ‘가에 앉았는데 그대로 서라’ 그 말인가, 아니면 손 마른 사람이 가운데 있었는데 옆으로 피해버렸나 그러니까 ‘가운데 서있으라’ 그런 건지? 어쨌든 한 가운데 일어선다고 하는 것은 사방에서 다 보이게 한다 그 말이요. 이해되시죠? ‘한 가운데 일어서라’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냥은 아니다. 가운데 앉았기 때문에 ‘가운데 서라’ 그게 아니고 어디에 앉았던 우리에게 계시적으로 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다 보이게 서라고 하는구나. 가운데 서라고 하는구나. 이해가시죠?
다 보이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를 보라는 겁니다. 어떤 역사를 하느냐? ‘안식일에 무슨 역사를 하시는지 봐라’ 그게 하나 들어있고, 그리고 ‘너희들이 직접보고 깨닫고 판단해 보라’는 겁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무엇을 해왔느냐? 손 마른 사람을 그대로 두고 무엇을 해 왔느냐? ‘직접 너희들이 봐라’ 그 말이요. 이제.
9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요렇게 나열을 시켜놓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을 쉽게 할 수 있지요? 나열시키지 않고 예수님이 지금 이 말씀을 하지 않고 ‘안식일에 무슨 일하면 좋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막막할 거란 말이요. 안 그럴까요? 그들에게 묻기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악은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 멸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 선을 행하는 게 뭐냐? 유익을 주는 것? 지금 여기서? 악을 행하는 게 뭐냐? 해를 끼치는 경우.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거. 그 다음에 생명을 구하는 거. 목숨을 구하는 거. 멸하는 거. 죽여 버리는 거. ‘어느 것이 옳으냐?’ 하고 물었지만 그들은 대답을 못했습니다. 답은 분명히 나오는데 왜 대답을 못했느냐 그 말이요 이 참 답답할 노릇 아니요? 이렇게 물을 정도로 그들은 그만큼 악하다는 거요. 훤하게 아는 걸 묻는다고 하는 것은 네가 그만큼 악하다는 것. 그만큼 악하기 때문에 네가 대답을 못하는 구나.
묻는 의도성이 쉬운 것을 묻는 것과 어려운 것을 묻는 것이 있는데 어려운 것을 묻는다고 그러면 그 대답하는 상대가 차원이 높은 거지요. 맞잖아요? 아주 쉬운 것을 묻는다는 것은 어른들도, 아이들 인터넷 틀어놓은 것 보면 그 뭐요? 구구단도 잘 못 외우는 어른들도 있나 봐요? 2단부터 외우면 물론 하나 하나 가면 잘 하겠지만 갑자기 물으면 엉터리 대답이 나오거든? 그러니까 아주 쉬운 것을 물을 정도로 한다면 ‘그 사람의 신분 위치 학력정도가 어느 정도로구나’ 이거 느낄 수 있잖아요. 예수님이 그들에게, 바리새인 서기관들에게 물었어요? 이거 누가 대답을 못해요. ‘어느 것이 악하냐? 어느 것이 좋으냐? 옳으냐?’ 우리는 알 수 있지요? 몰라요? 아, 이렇게 쉽게 물었는데?
10절: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고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메말랐던 손이 회복되면 받을 줄도 알고 줄줄도 알고 일할 줄도 알고 봉사할 줄도 알고. 그런 사람은 참 기쁘고 즐겁습니다. 사는 것이 행복하고 이룰구원을 잘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도 좋고 듣는 사람도 좋고 누가 봐도 좋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보기 싫다는 가요? 외식자들은 보기 싫다는 거요. 그런 게.
외식자들이 어떤 태도로 돼버렸습니까? 11절 읽어봐요.
11절: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 하니라.
참 이거, 말이나 되는 말입니까? 무슨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 있는지 몰라. 어떻게 자기 손 다 말랐어요? 건강해요? 자기 손? 손 가지고 있으면 가정에서도 부엌에서도 어디서든지 봉사할 줄 알고 일할 줄 알고. 이 건강한 손이요. 손은 가졌지만 이게 그렇지 못하다면 손이 말랐구나. 그러니 다른 사람이 볼 때 답답하고 미움이 가고. 어디 사랑이 가겠어요? 그거? 안 그래요? 어떻게 그런 사람들에게 야단하면 그 사람 입이 한 댓 발 안 나올까요?
느리고 게으른 사람을 게으름뱅이라 그러지.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껠백이라 그래. 신종용어. 우리 집에서 신종용어가 많이 나와요. 우리교회서도 게으르고 손 마른 사람은 껠백이구나. 사전에 없어요. 사전에 없는 말 많이 써요. 그런 소리 안 듣게. 사람이 건강한 사람은 정신도 마음도 신앙 면에서도 건강하고, 모든 면에서 사람이 빠르면 사람이 얼마나 사랑받고 좋을까? 자기 먹을 것도 갖다 먹을 줄도 모르고 줄 때까지 가만있고, 잠자고 나면 자기 이불 갤 줄도 모르고 남이 개기를 바라고, 먹고 난 뒤에는 그대로 그릇 있고, 파리가 달라붙고.
그 오래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일본에 살 때 좀 어릴 때지요. 한 다섯 살쯤 되나?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그 때 들을 때 숙모하고 삼촌하고 왜 이렇게 싸우냐? 그 때 가만 얘기 들으니까 한 번 갔어. 가보니까 마루에 상이 이만하더라고요. 식구가 많으니까. 그러니까 거기에 먹은 그대로 그냥 파리가 붙고. 숙모가 어디로 갔냐? 워낙 치울 줄 모르고 그냥 이게 먹고 나면 치우지 않고 마실 가고. 그러니 늘 싸웠어. 삼촌하고 늘 싸우더라고. 정말 그래놓고 어디 살맛이 나겠나? 그거. 참 불행을 만드는구나. 불행을 만들어가면서 사는구나. 어릴 때 내가 보더라고 너무 했다. 이거.
혹시 우리교인들 가정에 빨래 한 3일 처박아 놓으면 냄새 나지. 걸레도 안 빨고 하루 지나니까 썩은 냄새나더라고요. 행주도 또 그러면 그 균이 얼마나 많겠어. 병 안 걸리겠어요? 분명하다. 손잡이 뭐 싱크대 화장실 변기 이거 시커멓다. 전부. 손으로 잡아 돌리려면 쩍 달라붙고 미끄덩하고 균이 얼마나 많겠어? 분명히 그런 집은 어린애부터 어른까지 만날 설사, ‘장이 안 좋네. 뭐 어쩠네.’ 틀림이 없다. 틀림이 없어. 깨끗지를 못해서 그렇다.
근데 목사가 참 하나 좋은 게 뭔가 하니 아무 소리를 할 수 있다는 거. 허허. 그런데 우리 집 소리겠지. 날마다 빨래를 돌려. 그러니 우리 아파트에서 우리 집 수도세가 제일 많아. 한 편 좋은 점은 뭐냐? 깨끗하다는 거. 늘 하루 입고 벗어놓고. 그러니까 난 입었으면 쓱 벗어가지고 보고 때가 약간 이러면 한 번 더 입자. 근데 우리 아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냥 벗어. 하루 입으면 그냥. 맞지? 장단점이 있어. 좋은 점은 깨끗해서 좋고 나쁜 점은 물 값이 나간다는 거. 어쨌든 깨끗해서 좋다. 깨끗하게 살아요. 안 그러면 사람이 이게 병이 늘 붙어 다녀. 그러면 안 된다.
우리가 성경연구하다 보면 성경에 문자로만 돼있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에게 일반적인 그런 생활 사고방식까지도 성경 안에 다 넣어놨어요.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그런 정신 사상적으로. 그러니까 행동은 자동적으로 ‘하라. 마라’ 할 것 없이 따라가는 거요. 행동을 강조하게 되면 이건 외식이 돼버려. 은밀한 뜻은 없어져버려.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내 입술만 보지 말고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러면 겉도 깨끗하리라.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거요.
예, 이 악한 꾀를 내는 자들이 누구냐? 그때 당시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는 자들이고 교권 세권 큰 종교단체입니다. 금식도 잘하는 자들이라. 스스로 신앙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라. 신앙 있다 자부하면 안 돼요. 그건 다른 사람으로 칭찬이 돼 있어야지. 그 뱃속에서부터 예수 믿고 나왔다는 말 표현 비슷하게 뭐라 그래요? 모태신앙? 자기가 뱃속에서 믿은 것처럼. 아니요. 난 모태신앙 안 알아줘요. 이건 건성건성 해가지고요.
그런데 사실은 그들의 속이 신앙 면에서의 인격이 손이 마른 사람처럼 그렇다는 겁니다. 손 마른 사람 일으켜 세워서 그들의 눈에 보이게 해서 ‘너희들이 바로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베풀 줄도 모르고 봉사심도 없고 일을 할 줄도 모르고. 그들이 그렇게 메말랐다 그 말이요. 너희들이 메말랐다. 마음의 눈이 있고 마음의 귀가 있듯이.
마음의 손이 메마르면 은혜를 베풀 줄도 모르고 입으로 사람을 해코자 하고 진리의 사람들을 헐뜯습니다. ‘어떻게 처치해 버릴까?’ 악한 꾀를 생각하는 자들이 언제나 교회 안에서 많이 일어나고 목사님들 세계서도 많다. 정말로 많다. 주일날 말씀 선포자들이 영인성장적인 면에서 고쳐주는 일이 아니란다면 궁극적 결과적으로 진리를 헐뜯고 자타의 이룰구원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봐지게 되는 겁니다. 이해됐습니까?
영인성장적인 면에서 비뚤어진 거 바로 잡고 꼬부라진 거 펴고 모르는 거 알게 하고 눈이 어두운 거 밝게 해주고 귀 어둔 거 밝게 해주고 듣게 해주고, 영인성장 면에 그게 다 들어가야 되는데 예수이름 가지고 일을 시켜먹겠다고 하는 것은, 충성봉사로만 치닫게 되면 그 교회는 이건 병자들이다. 귀 먹고 눈멀고 헐벗은 줄 모르는구나. 이거 병자들이다. 머리통 속에 병이 가득 든 이걸 고쳐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보내서 전도하게 하실 때에 고쳤어. 죽어가는 것을 살리도록 했어. 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http://cafe.daum.net/909kk)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