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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7: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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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성 목사 |
참고 : | 말씀의 숲 교회(대한예수교 장로회) |
(마27:11-14)
올해 고난주간은 아주 특별한 것 같아요. ‘코로나 19’ 로 말미암아 전 세계가 두려움에 쌓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고, 봄은 왔는데, 아직도 꽁꽁 얼어붙은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강원도 삼척에서는, 봄놀이 유채꽃을 보러 오려는 이들을 막기 위해, 모든 유채 밭을 갈아 없어 벼렸어요.
모든 교회의 예배가 마비가 되었고, 신*지와 이단들이 드러나고, 문제를 일으키고, 또 일부 교회들이 정치적인 편향을 가지고 한쪽으로 치우쳐 버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세상이 교회를 더욱 걱정하는, 그런 시간을 우리는 지금 보내고 있지요.
고난 주간을 우리가 지키는 이유는 뭘까요? 아마도, 고난주간을 통해 나와 예수님! 예수님과 나!를 생각하는 시간일 거예요. ‘예수님에게 나는 무엇인가?’ 또는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의미인가?’ 를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우리는 고난주간을 지키는 거지요.
목사님에게 어떤 집사님이 찾아왔대요. 이유는, ‘우리 남편 때문에 제가 도저히 살 수 없고, 남편만 보면 험악한 소리만 나오고, 죄만 짖는 것 같다’ 고 목사님에게 상담을 요청을 했대요.
한 참을 듣던 목사님은, 그 집사님에게 자신의 서재에 있는 냉장고에서, 물이 담겨져 있는, 병 하나 꺼내 주더래요. 그리고 남편이 시비를 걸 때 마다, 남편과 다툴라 치면, 이 물을 한 모금 먹는데, 절대로 삼키지 말고 입에 물고 있으라 했대요.
그래서, 남편이 시비를 걸 때마다, 목사님이 준 물을 한 모금 입에 물고 있었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싸움이 일어나지 않고, 그때마다 치올라왔던 화가 지나가고, 점점 가정에 큰 소리가 안 나오더니, 가정이 점점 화목해 지더래요.
그 후에 집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이 주신 물이 도대체 어떤 물이기에 남편과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되느냐’고, ‘목사님이 주신 물은 신기한 물’이라고 감탄을 했대요.
어떤 물일까요? 그냥 물이죠. ‘그 물은 그저 평범한 물입니다’ ‘신비한 물이 아니라, 집사님이 물을 입에 물고 있을 때, 침묵이 되고, 그 침묵이 지나가면, 올라왔던 분도 지나가고, 화도 지나가고, 침묵함으로 더 이상 남편과 문제가 생기지 않게 되는 것이죠.’ 물을 입에 물고 있을 때, 말을 못하는 ‘침묵’이 약이 됩니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죠.
구약성경에 중에 ‘이사야’가 있어요. 이사야는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지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구약 이지만 이사야 53장에서는, 앞으로 오실 예수님, 즉 오실 메시아의 고난을 미리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주 독특한 표현이 나와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분이 침묵할 것이다!’ 이렇게 예언을 해요. 이사야 53장7절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시작)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 입을 열지 아니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또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어떻게 해요?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셨다!’ 그렇게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을 하지요.
앞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실 메시야는 죽임을 당할 텐데, 그분은 그 고난과 죽음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할 것이다! 침묵할 것이다! 라는 예언을 한 것이죠.
그리고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 본문에서, 대 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예수님은, 고발을 당하시죠. 그러나 12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고발을 당하되, (어떻게 하셨다구요?)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나오는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정말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고난을 당하시는 그 현장에서 뭔가 변명하셔야 하는데, 침묵하셨다 하지요.
여러분, 예수님이 빌라도 총독 앞에서 서셨어요. 그리고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심문하죠. 그런데 이 빌라도가 ‘예수님이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크게 놀랐다!’ 라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어떠한 질문에도 대답도 않으셨고, 예수님이 불리한 상황에 있는데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이죠.
이 빌라도는 만약 예수님이 변명을 하신다면, 풀려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론하기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이 침묵하셨다!! 그것에 대해서 크게 놀라워했다! 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의 고난’을 성경이 다루시면서, 특별히 침묵! 예수님께서 침묵하신 것에, 성경이 초점을 맞추고, 강조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마주 대하시고 있는데,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셨다!!
여러분, 말을 많이 하고, 내 할 말을 다 한다고 해서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침묵한다는 것은, 때로는 우리에게 고통과 아픔과 괴로움을 줄 수 있어요. 그래서 내가 억울하고, 괴로운 일을 당할 때, 우리는 당연히 적극적으로 항변을 하고, 이해를 지키지요.
그러나, 꼭 우리가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일이 되는 것도 아니에요.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침묵하는 그 속에 모든 뜻이, 그 속에 담겨져 있을 수 있어요. 때로는 하고 싶은 말도 참아야 되고, 안하는 것이 약이 될 때 도 있어요.
여러분, 만약 우리가 힘이 없어서 침묵한다면, 그것은 슬픈 일일 거예요. 또 말을 할 줄 몰라서, 말을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가슴 아픈 일이 되겠지요. (저희 집사람이 돌보고 있는 장애 아이는 다 멀쩡해요. 정상인 같아요. 그런데 말할 줄 몰라요. 뭔가 말하고 싶은데 답답하면 자기 머리를 때려요. ‘으으으...’ 가슴 아픈 일이죠)
그러나 힘도 있고, 말할 능력도 있는데 침묵한다는 것은, 그 침묵은 때로는 ‘보석’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 큰지도 다 알고 있어요.
여러분, 예수님은 말할 줄 몰라서 침묵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았어요.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으셨어요. 예수님의 말씀에는 ‘능력’도 있으셨어요. 말씀 한마디에, 바다의 폭풍도 잠잠케 하셨고요. 말씀 한마디로 무덤에 있는 죽은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실 때, 나사로가 살아서 무덤에서 나왔어요.
말씀 한마디로,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 떼에 들어가, 수많은 돼지 떼가 호수로 뛰어 들어가 몰사했어요. 예수님은 말씀에 능력이 있으셨어요. 그런데 말할 때가 있었고, 침묵하실 때가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어떨까요? 누군가가 저와 여러분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불이익을 준다면, 우리는 소리를 치지요. 적극적으로 대응도 하지요. 그리고 이를 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에게 불이익을 준 사람에 대해 항변하고 변명하지요. 그것이 저와 여러 분이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침묵하신 이유가 뭘까요? 이사야 53장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라고 말씀하세요. 예수님이 침묵하신 이유는, 자신의 침묵으로 말미암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받아 드렸다는 의미이지요.
여러분,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하고, 그리고 자기를 방어하고, 자기의 뜻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뭐라도 말해야 하지요. 그것이 기본 아닐까요?
그런데 자기 방어를 포기하고, 말할 수 있는 변명을 포기하고, 그 상황에서 침묵한다는 것은, 나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 상황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긴다는, 어떤 강력한 신앙의 고백이 그 안에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가롯유다는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었을까요? 가롯유다가 은30! 돈이 필요해서 그랬을까요? 아니에요. 가롯유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유가 있었어요.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메시야로 등극하는 날, 이 나라의 왕이 될 것이고, 예수가 왕이 될 때, 자신은 한자리 차지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랐어요. 자기 뜻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뜻은 그와 달라요. 예수님은 메시아로 왔지만, 철저하게 죽어야만 했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어요. 그래서 가롯유다 자신의 뜻이 있었고, 하나님의 뜻이 있었는데, 가롯유다는 그것을 견디지 못했어요.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니까, 예수를 팔 생각을 했고,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 예수를 넘겨줄 말을 하고, 그 말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는, 저주의 말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자기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침묵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죠.
여러분,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달랐을 때, 그것에 실망하면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예수님을 부정하거나, 배반해요. 그리고 내 뜻과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요, 그리고 십자가에 죽여요.
여러분,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수 있어요. 그런데 내 뜻이 먼저이고, 하나님의 뜻이 나중이라면, 내 뜻을 위해서 하나님이 걸림돌이 되기에, 십자가에 못 받는 거예요. 지금 가롯유다는 그것에 걸려 넘어진 거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까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자나요. 그리고 그 기도대로 되기를, 기도하자나요. 그것이 내 뜻이지요. 그런데, 그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맞을 수 있어요. 그래서 그 기도대로 이루어져요. 아멘이에요.
그런데, 그 기도대로 되지 않을 때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것에 대한 하나님이 뜻이 있겠지요. 그러면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기다려야 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지요. 침묵하며 기다려야 해요. 그런데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지요.
내 뜻은 이것인데 이것대로 되지 않아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밀어 내는 거예요. ‘하나님, 더 이상 기도 안할래요.’ 하지요. 이것이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과, 지금 우리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가롯유다만 나쁜 사람이 아니고, 우리 안에도 가롯유다가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기독교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누구의 원대로?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가 기독교의 핵심이에요. 왜요? 내 뜻도 중요하지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더 완전하고, 실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고,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에요.
나는 실수 하지만, 나를 향한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세요.(아멘) 나는 완전하지 않지만, 나를 향한 하나님은 완전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이지요.
가롯유다만 그럴까? 우리도 내 뜻이 있구요. 하나님의 뜻이 있어요.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하지만, 그 뜻대로 안될 때가 있어요. 그 때 침묵하지 않아요.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라고 수많은 말로 항변을 하지요.
여러분,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우리는 침묵해야 해요.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를 때, 우리는 침묵해야 해요.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묻고 또 집중해야 해요. 침묵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가롯유다가 될 수 있어요.
여러분, 텔레비전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다가,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기위해서 tv 볼륨을 낮춰요. 또는 리모컨에 보시면, 뮤트(mute)라고 해서 ‘무음’이라는 버튼이 있어요. 그것을 누르면 소리가 안 나죠.
소리는 안 나는데, 화면은 계속 나와요. 소리는 안 나지만 재미있는 드라마라, 주인공이 무슨 연기를 하고 있는지, 동작이나 입모양을 보고, 열심히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짐작을 하죠.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이 ‘무음’이라고 하는 것은, 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소리가 나올 때보다 뭔가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여러분, 우리는 침묵하면서, 하나님께 집중할 필요가 있어요. 침묵하면 어쩌면 하나님의 음성을 더 구체적으로 들 수 있어요. 어쩌면 선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더 알 수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한 번씩 육일동안 여리고성을 돌라하세요. 그리고 일곱째 날은 그 성을 일곱 번 돌라 하세요. 그리고 돌 때,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마라!’
여리고성을 침묵으로 도는 것이 사실 쉽지가 않죠? 하지만 그 침묵하면서 도는 동안, 그들이 배울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에 대해서, 바라보라는 것이었어요.
정말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왜 그러셨는가? 하나님은 정말 하실 수 있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 집중하게 만든 것이죠! 그것이 바로 여리고성을 무너트릴 수 있었던, 매우 중요한 비결이요. 여러분, 침묵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고요.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거예요.(아멘) 그것이 바로 침묵의 의미라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특별히 지금 이 시간, 코로나로 인하여 전 세계의 사람들이 두려움에 있고, 모든 교회가 예배가 드려지지 못하고, 마치 고난 앞에 서있는 것처럼, 힘들어 할 때, 말하지 말고 좀 더 침묵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침묵의 시간, 기도하며 하나님께 집중하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완전하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바짝 엎드리세요. 우리가 침묵하며 하나님께 집중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말을 줄여야 합니다. 침묵하셔야 합니다. 어려울 때 더욱 침묵하셔야 해요.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해요. 이 고난 주간, 코로나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될 줄 믿습니다.
이번 고난주간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괴롭고,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입을 열지 아니하신, 예수님의 침묵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말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실천할 때 하나님은 크신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지금은 침묵할 때입니다. 더욱 침묵하며 하나님께 집중하는 한 주간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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