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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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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성 목사 |
참고 : | 네이버: 말씀의 숲 교회(서울 은평) |
예수를 믿을수록 죽음의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히2:15)
저희 집 밑에 사시는 나이 드신 분이 계세요. 교회를 다니세요. 가끔 저하고 주차장에서 만나면 교회 얘기도 하고, 신앙얘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분의 직업이 뭐냐 하면? 장례 지도사예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염을 하고, 죽은 이들의 옷을 입히고, 관에 넣는지를 가르치는 분이죠. 직접 시신 앞에서 실습을 많이 하신대요. (가끔 악수하면, 방금 시신 만진 손인데 그런 생각도 하지요) 무섭나요?
여러분, 죽음은 뭘까요? 죽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 옆에 있어 보셨어요? 우리는 그런 분들 옆에 있으면 있을수록요, 죽음에 대해 우리는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이고, 우리의 삶도 많이 달라질 거예요.
감사하게도 목사라는 타이틀은 죽는 분들 앞에 많이 서 있게 만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있어요.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에 대해 좀 더 생각하고, 그 죽음을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하심에 감사하지요.
오늘 부활절인데, 왜 기분 나쁘게 죽음에 대해서 말하냐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부활이 설명 되려면, 죽음이 설명되어야 하자나요.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어요. 그래서 죽음을 우리는 먼저 이야기해야 하고, 다루어야 해요.
예수님과 십자가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지요. 예수하면 십자가구요, 십자가 하면 예수지요. 그런데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해요. 죽음에 대한 사형 선고가 바로 십자가 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사실 ‘죽음’이라는 것이 예수님에게 사형선고 받은 겁니다.
영원히 살 수 있었지만, 우리의 죄로 죽음이 왔고요, 그 죽음이 우리를 꼭 붙잡고 있어요. 그런데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그 죽음을 향하여 사형선고를 내리신 거지요.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우리가 언젠가는 죽지만, 영원히 사는 복을 받은 거지요.
여러분,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해요. 아니라고요? 우리 생각은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우리 본능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돌아가시는 분들 옆에 보고 있으면, 숨이 멎어지는 순간이 있어요. 숨은 쉬고 싶은데, 이 육신이 말을 듣지 않는 거죠. 아무리 들숨, 날숨을 크게 해도, 육신은 점점 굳어가면서 차가워지지요. 그 순간 왜 고통이 없겠어요? 그래서 죽음의 고통이라고 하지요.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거예요.
예수님이 메시아인줄 따랐던 제자들은요. 예수님을 부인했어요.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어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보세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예수님을 모른다 했어요.
여러분, 왜 그럴까요? ‘죽을까봐요’. 자기도 잡혀 죽을까봐 두려웠어요. 잡히면 죽는다 생각하여, 살길을 찾았는데, 그렇게 3년 동안 쫓아다닌 예수님을 강하게 부인한 것이죠. 만약 그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요? 도망가지 않았을 거예요. 정말 죽음도 이겨낼 수 있는 무엇가가 있다면, 아마 도망가지 않았을걸요.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변화가 있었어요. 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에게 변화가 생겼어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초대교회가 세워질 때, 도망갔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시 돌아와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요. 대부분 순교자가 되었어요. 순교를 당하지 않는 분은 그 순교에 버금가는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 진짜 제자 되었어요.
많은 문헌들을 찾아보면, 그 제자들의 행적을 알 수 있어요. 베드로는 어느 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대요. 예수님에게 물어 보지요. 그 유명한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쿼바디스 도미네)라고 물어 보았을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가 네 대신 죽으러 간다’ 라는 말씀을 하지요. 베드로는 그때 크게 깨달아, 다시 로마로 들어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어요.
야고보는 스페인에서 순교했고, 의심 많은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그곳에서 순교했구요. 요한은 로마 황제에게, 끊는 가마솥에 던져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밧모섬에 유배되었고요. 안드레는 터키에서 붙잡혀 십자가 형을 받았구요.
빌립도 십자가 형을 받고요. 시몬이라는 제자는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 톱으로 몸이 두 동강이 나서 죽었고, 바돌로매는 복음을 전하다, 온 몸의 피부를 칼로, 벗김을 당하는 순교를 했고, 마태는 복음을 전하다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해요.
여러분,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계실 때보다, 돌아가신 후에 더 제자다워졌어요. 뭔가 저들에게 변화가 주어졌기 때문이지요. 죽음을 피해 도망하였던 그들이, 마치 죽음을 찾아가서, 순교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예요. 십자가를 통해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이제 그들 가운데 나타나, 그들의 두 눈에 보였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것이 믿어졌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살아생전 말씀하신 그대로, 다시 살아나고, 부활하신 그 사건 때부터~, 그들은 변하기 시작했던 거어요.
십자가에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두 눈으로 다시 사신 것을 보니까, 그렇게 두려왔던 죽음!, 고난!, 환난과 핍박이, 무섭지 않은 건 아닌데,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저들에게 생긴 것입니다.
저들에게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제 그들 마음에 속에 있었어요. 그 확신이 그들을 변화시킨 거예요. 그들이 정말 변하여 제자가 되고, 죽음까지도 뛰어넘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제자 중에 제자가 된 것이죠.
십자가! 그것은 죽음인데, 십자가를 통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한 죽음 끝에는, 부활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죽음을 넘어서는 방법을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신 것이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이 바로 부활이에요. 그래서 사실 예수를 믿는 것은, 그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 버리기 위한 거예요. 그 죽음의 두려움이 내 안에서 점점 작아지고, 작아져서 그것을 이겨 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짧은 한 구절 이지만), 참 많은 생각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어요. 다시 한번, 더 읽어 보아야 겠어요 (시작)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요, 죽기가 무서워서 한 평생, 그 죽음에 대해 어떻게 한다구요? 종노릇한대요. 이 말씀이 맞지 않나요?
사실 우리는 어쩌면 이 죽음 때문에, 한 평생 매어서 살아요. ‘굶어 죽을까봐 어떻게 해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또 죽을까봐 병원가고, 죽을까봐 조심하고... 한평생 우리의 삶은 죽음에 매어 있다고 하지요.
우리가 종노릇하는 그 뿌리를 찾아 들어가 보면,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이죠.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죽음의 두려움에서 조금씩 벗어나요. 예수님께서는 죽기를 무서워해서, 한평생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죽음’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는 헛것으로 만들고 마는 것이고, 우리가 믿었던 구원도 아무것도 아니지요.
여러분, 누구나 죽음이 가까이 오면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요. 그런데 그 죽음을 정말 뛰어 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똑같이 무서운데도, 그것을 정면으로 인정하고, 뛰어넘고 승리하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 믿는 사람의 품위를 잃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믿는 사람으로서 감동을 주면서 세상을 떠나는 분들이 있어요.
지금은 죽음하고 멀리 있는 것 같고, 아무 문제없을 때, 누구나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리나 어쩌면 우리가 그 죽음 앞에 직접 섰을 때, 나의 모습이 믿음 이구요. 내 앞에 다가온 그 죽음을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 그 믿음이 보여 지지요.
여러분, 돌아가신 분들 앞에 가족들이 가끔 저에게 물어 봐요. “목사님, 우리 엄마 천국 가셨지요?” “목사님, 우리 아버지 천국 가셨지요?” “우리 남편/아내 천국 갔지요?” 왜요? 그렇게 물어 보는 자체가 ‘아리까리’ 하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궁금한 거예요.
그런데 어떤 분은 저에게 와서는, ‘목사님, 제가 알아요. 우리 엄마 천국 갔어요. 우리 아버지 천국 갔어요. 우리 남편/ 아내 천국 갔어요.’ 이렇게 고백하는 분 있어요. 왜요? 그 앞에서 죽음을 어떻게 대하고 있고, 그 죽음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까지 가봐야 알아요. 그 죽음 앞에서, 나의 믿음이 어떻게 뛰어 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어요. 그래서 그 소망을 가지고, 오늘도 기도해야 해요. ‘하나님, 어느날 죽음이 내 앞에 왔을 때, 내 믿음 변치 않도록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 “나 항상 깨어서, 늘 기도드리며, 내 믿음변치 않도록 날 도와주소서 ♬ 여러분, 끝까지 이 믿음으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목사로서 한 가지 소망이 있어요. 여러분이 그동안 하나님을 믿던 그 믿음이, 그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죽음 앞에서 당당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정말 멋있게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 죽음 끝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신앙인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권사님이 계세요. 돌아가셨지요. 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기쁜 마음으로 준비하셨어요. 죽음 앞에선 그분의 모습을 보면, 참 의연하시고, 담대하시고, 끝까지 믿음의 모습을 보여 주며 가셨어요. 60대에 돌아가셨는데, 아직 자녀들도 결혼도 안 했고, 아직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고, 아쉽지요.
그러면서 저에게 그 말씀을 하셨어요. “목사님, 암이 나쁜 것만은 아니네요. 암을 주신 이유를 알겠어요” “하나님이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어요. 그래서 그동안 미안하고, 죄송했던 사람들, 다시 만나는 시간도 주셨구요. 용서를 구할 사람, 다시 만나게 해 주셨구요. 그리고 마지막 정리할 수 있는 시간까지도 주셨네요.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드릴 수 있는 시간까지도, 미련 없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저에게 암이라고 하는 선물을 주셨네요” 라는 아주 근사한 고백을 하시더라고요.
여러분 누구에게 어떤 일 일어날지 우리는 몰라요. 만약 예고 없이 찾아오는 암 때문에, 여러분이 얼마 못산다는 판정을 병원에서 받았다면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껀까요?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자기가 어떻게 믿음을 지키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그리고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용기를 주고 떠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그 힘이 어디서 나온 다구요? 그 힘은 하나밖에 없어요. 부활을 믿는 것이죠.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 한번 따라해 볼래요) 그래서 사망을 뛰어 넘는 거예요. 믿음 변치 않고 좋은 신앙의 본을 보이면서 살다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보고 두려워서 다 도망가고 부인했던 제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제자 중에 제가가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친히 목도하고, 나도 부활할 것을 믿음으로 믿어 확신한 거예요.
우리도 이 땅에 있을 때, 열심히 주를 위하여 살고, 복음을 전하며 살다가, 죽음이 왔을 때, 가뿐히 그 죽음을 뛰어 넘어 영원히 사는, 삶의 문으로 들어가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죽음의 두려움은 사라질 줄 믿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하여, 한평생 그것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가 아니라, 변치 않는 부활신앙이 내 안에 있어, 그 죽음을 뚫고 나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축원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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