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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예찬
전도서 9:1~10
시인 엘리엇(1888~1965)은 <황무지>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황무지>(1822)는 누구나 한번은 들었음직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로 시작하는데 모두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시에는 단테와 세익스피어와 보들레르 등 33명의 작가의 작품을 인용하고, 라틴어와 헬라어와 산스크리트어 등 외국어가 삽입되어 있고, 각종 신화와 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문학으로서뿐만 아니라 인류학 연구에 대한 자료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의 서두에 있는 글이 인상적입니다.
쿠마의 한 무녀(Sibyl)가 조롱 속에 매달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아이들이 무녀에게 물었다. “넌 뭘 원하니?” 그녀가 대답했다. “난 죽고 싶어.”
뛰어난 지혜를 가진 여인 시빌을 사랑하는 아폴론이 ‘한 가지 소원들 들어줄테니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시빌은 한 줌의 모래를 들고 와서 ‘이 모래만큼 생일을 갖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빌은 긴 생명만 요구하였지 젊음을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아폴론은 자신의 여인이 되어준다면 젊음을 주겠다고 유혹하였지만 시빌은 정결하게 남는 편을 택했습니다. 시빌은 세월이 흘러도 죽지 않았고 육체의 크기만 줄어들어 나중에는 목소리만 남았습니다. 축복은 견딜 수 없는 저주가 되었습니다. 시빌의 이야기는 영생을 꿈꾸는 인간에 대한 풍자처럼 들립니다. 엘리엇 이전에도 시빌은 예술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성당 천장에 근육질의 노파 시빌을 그렸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예언서를 펼쳐 보는 시빌을 통해 모름지기 성도를 보호하는 어머니로서의 교회를 강조한 듯합니다.
엘리엇이 ‘4월을 잔인하다’고 한 것은 죽은 나무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자연 질서에 대한 일종의 시위처럼 보입니다. 삶은 불공평하고 죽음은 공평합니다. 삶은 부자와 가난한 자, 의인과 악인, 권력자와 노예 등 누구에게도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종교는 죽음을 다룹니다. 기독교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시공간에 갇혀 있는 우리가 죽음 너머의 세계를 확실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능력과 그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 너머를 보는 안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현재 시점으로 끌어와 지금 여기서 그 나라를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무섭습니다. 죽음 그 너머를 바라보는 안목을 가진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공의와 평화를 불공평하고 부조리하고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세상 속에서 살아내려고 노력합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통하여 삶을 다룹니다.
잘 사는 것이 화가 될 수 있는 세상, 심은 대로 거두지 못하는 세상살이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자세로 스스로 성찰하여 지혜에 이르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께서 동행하시기를 빕니다.
하나님, 삶은 죽음이 있어 의미를 갖습니다. 종말론적 구원이야말로 현재적 하나님 나라 실현의 동력입니다. 이 믿음을 견지하겠습니다.
찬송 : 575 주님께 귀한 것 드려 https://www.youtube.com/watch?v=d3jBa1GmBfM
2022. 12. 13 화
그림설명:
미켈란젤로 <쿠마의 시빌> 1510, 벽화, 시스티나성당, 바티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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