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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보기)성도의 원수관.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52 추천 수 0 2023.04.01 10: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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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8:1-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이 잘 되게 하려고 육신에 고난을 주는 게 있다. 선생님이 공부를 못하는 학생을 때리는 것은 몸의 고통을 통해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하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의 몸을 치는 것은 육의 생각과 마음을 영 쪽으로 돌리라는 거다. 육신의 침을 받고도 안 고치면 고난과 압박감이 가중된다.

 

이라고 할 때 구분해야 하는데, 이것을 구분하지 않으면 죄를 지적할 수 없다. 인간의 물질적인 육, 육신, 신체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런데 육의 생각이나 육의 소원 목적이 있는데, 세상과 육신을 위한 생각을 하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그러면 믿는 사람도 일도 하고 돈도 벌어야 하는데, 이런 것을 하면서 어떻게 생각해야 영의 생각이 되느냐? 자타의 구원 쪽으로, 예수 잘 믿는 쪽으로 생각을 하며 돈도 벌고 먹는다면 이것은 영의 생각이다. 예수를 잘 믿기 위해,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밥을 먹는다면 이 생각은 영의 생각이다. 이 정신을 잃어버리면 육의 이해타산 소원 목적이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닥치는 사건과 환경과 존재 가운데서 선택적인 면에서 영을 염두에 두고 행하면 영의 생각이고 이룰구원이 되는 거지만 안 믿는 사람들처럼 세상 소원 목적을 두고 행하면 육의 생각이고, 여기에는 이룰구원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의 육신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이 육신을 자타의 이룰구원에 사용하느냐, 아니면 세상의 소원 목적을 위해 사용하느냐에 따라 영의 생각이 되거나 육의 생각이 된다. 이것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했을 때 죄가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육신을 쳐서 육적으로 고통을 겪거나 여러 가지 사건과 환경 속에서 육적으로 고통을 느낄 때 믿는 우리는 빨리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지혜를 얻어야 한다. 자기 육신에 고통이 온 것은 영을 바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인데 이것은 모른 채 하나님께 자꾸 육신의 고통을 없애달라고 하면 신앙의 이치가 틀린 거다.

 

6:1 이후에 흰말과 붉은색 말과 검은색 말과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검은색 말이 기근으로 많은 사람을 죽인다. 이것은 새사람은 살리고 옛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하는데, 이 운동을 하는 게 복음운동이다. 안 믿는 사람들은 무엇이 옛사람이고 무엇이 새사람인지 모른다. 자기의 영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르고 밥 먹고 사는 생명만 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은 학박사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볼 줄 모른다. 사람의 소원과 목적과 정신을 분별해서 어떤 효력성이 있는지 아는 게 사람을 아는 것인데 하늘의 지식이 아니면 이게 안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100% 온전이요 완전이다.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적중으로 걸어가셨다. 우리가 이 적중성의 사고방식과 이해타산을 가져야 예수를 따르는 거다. 하나의 종교인은 바람 불면 땅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다음 장에서 이 일이 나온다. 그다음에는 큰 심판이 도래한다. 이게 다 남 얘기가 아니다.

 

:6:9 이후에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고 했는데, ‘영혼이란 이룰구원 면에서 의의 병기로 쓰여지는 영과 육을 말한다. 다윗도 시:에서 내 영혼을 구원해 주소서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대부분 순교자라고 해석한다. 그러면 뭐가 순교냐? 다른 사람이 성도를 죽이는 거다. 예를 들면 스데반의 경우다. 순교하는 스데반이 뭐라고 기도했느냐?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 용서해 달라고 했다. 순교자는 자기를 죽인 사람을 원수 시 하지 않는다.

 

우리 성도들은 모든 크고 작은 사건과 환경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 섭리를 봐야 한다. 내가 순교하고 싶다고 해서 순교의 사건을 주는 게 아니다. 순교의 사건을 감당할 만한 수준이라야 이 사람에게 순교를 허락하신다. 이런 사람에게 순교의 사건을 안 주시더라도 신앙의 질이 사건을 주나 안 주나 같기 때문에 이 사람의 삶은 순생애다.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고 했는데, 한마디로 자신들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거다. 우리는 원수관을 바로 가져야 한다. 믿는 우리가 자기의 원수를 남으로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불신자와 같은 사고방식이다. 기독자들은 원수가 자기에게 있는 거다.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고 하는 것은 영의 생각이고, 영의 생각을 하는 것을 새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믿지 않을 때 가지고 있었던 이방의 풍습 습관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산다면 이것은 옛사람으로 사는 거다. 옛사람의 소원 목적은 안 믿는 사람들처럼 세상을 따라가고 세상의 이해타산을 가진다.

 

자기의 원수가 자기의 옛사람인데, 자기가 이 옛사람을 죽여야 하느냐, 새사람을 죽여야 하느냐? 옛사람을 죽여야 새사람이 잘된다. 돌려서 말하면 새사람이 잘되게 하려면 옛사람이 힘을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 즉 자기 속의 세상 소원 목적을 죽여야 한다.

 

:에 흰말, 붉은 말, 청황색 말, 검은색 말이 나오는데, 세상사람들은 이 중에 어느 말이든 따르고 있거나 타고 있다. 말을 탔다는 것은 그 말이 자기의 주체성이고 주동자라는 거다. 주님이 성령의 일곱 눈으로 이것을 밝히고 있으니 십자가를 달았고 교회간판을 붙였다고 해서 다 교회로 보면 안 된다. 가견적인 것을 기준으로 참 교회를 보는 게 아니다.

 

교회마다 인도자의 메시지에서 붉은 말을 탔는지, 청황색 말을 탔는지, 검은색 말을 탔는지, 백 말을 탔는지 드러난다. 교인들은 자기가 가진 시상대로 기도가 나오기 때문에 기도를 들어보면 무슨 말을 탔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을 알게 하고 고치게 한다.

 

제단 아래의 순교자들의 우리의 원수를 언제 갚아주시겠느냐고 했는데, 순교자들이 무엇을 죽여 달라는 거냐? 16:에 과부가 원수를 갚았는데, 원수는 재판장에게 가서 갚는 거다. 과부는 원수관이 정당했기 때문에 재판장이 과부의 청을 들어주고 판결을 내린 거지 원수관이 잘못되었다면 원수를 갚기는커녕 도리어 과부가 죄인이 되어서 감옥에 갈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자들이 제단 아래 엎드린 자들을 죽인 거냐? 지금 자기의 원수가 어디에 있느냐? 자기 속에 있느냐, 다른 사람 속에 있느냐? 예수를 믿어도 옛날의 성질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면 자기 인격이 뭐가 되느냐? 자기가 자기를 수치스럽게 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믿는 사람으로서 이게 자기의 원수다.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하셨는데, 두루마기의 역할은 입으면 속이 감춰지고 부끄러움이 감춰진다. ‘흰옷을 입혀줬다고 하지 않고 순교자들에게 주었다고 하는 것은 네 죄부터 가리라는 거다.

 

그리고 잠시 동안 쉬라고 했는데, 이 말이 일을 하지 말고 쉬라는 거냐? 쉬는 것은 회복의 시간이다. 믿는 우리에게는 말씀무장의 시간이다. ‘동료들의 죽임을 당할 수가 차기까지라고 하는 것은 아직 순교 당할 자들이 많다는 거고, 이 사람들이 다 죽어야 원수가 갚아진다는 거다. 순교자가 많이 나온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스데반과 같은 순교자가 많이 나온다는 거다.

 

순교의 사건이 왔을 때 자기가 신앙실력이 없으면 못 이긴다. 이러면 주님의 왼쪽에 있던 사람이 한 말이 나오게 된다. 오래 믿었어도, 목사의 세계에도 깡패 같은 자가 많다. 이건 자기가 안 죽어서 그렇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중생이 안 된 거다. 중복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거다. 이것은 학생이 어떤 과목은 잘하는데 어떤 과목은 못 하는 것과 같다.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하신 것을 이룰구원 차원으로 보면 순교의 제단 아래 엎드린 사람만 아니라 믿는 사람 중에 회개하고 고칠 게 아직도 많이 있다는 거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옛사람을 죽이고 온전하게 되어야 할 게 아직도 많다는 거다. 이 말씀을 이런 면으로 보지 못하고 사건적인 순교로만 보게 되면 흰옷을 준 거라든지, 잠시 동안 쉬라고 한 말씀의 뜻이 무시되어버린다.

 

성경은 비유와 비사적으로 시간 속에 들어있는 육해공을 다 동원하는데, 비유와 비사가 말하고자 하는 계시를 깨닫지 못하면 비유와 비사를 들어서 말씀하신 뜻이 없어져 버린다. 예수님께서도 시간 속에 든 것을 들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들어서 진리이치를 깨닫게 했다.

 

이치를 깨닫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니 이 뜻을 내 것으로 삼으면 여기에서 지혜지식성도 나오고, 도덕성도 나오고, 능력성도 나온다. 성경을 보면서 이게 없다면 지난 얘기를 듣는 것밖에 안 된다. 그리고 자기가 무슨 말을 타고 있는 건지, 무슨 운동을 하고 있는 건지, 주님과 어느 정도 거리인지 모른다. 자기를 말씀의 저울로 달면 어느 정도 무겁고 어느 정도 가벼운지가 있는 건데 이 생각을 못 한다.

 

자기가 출생에서 죽음의 선을 넘어가기까지 대국적인 노정은 구원의 길 하나뿐이다. 이 길에 들어서서 사느냐, 이탈되어서 사느냐? 이탈된 것은 죄 된 길이요 창조의 목적적인 길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되 곁길로 가는 게 아니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적중성으로 가야 한다. 하나를 깨달아도 적중성으로 깨달아야 한다. 적중으로 깨달으려면 하나님의 뜻이라야 하고, 하나님의 적중성은 하나님의 공의다. 다른 게 섞이면 공의가 안 된다.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

 

제단 아래 엎드린 자들을 보통 사건적 순교자로 말하는데, 이룰구원 면으로 보면 앞으로 순교 당할 자가 많다는 거고,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하는데, 이 말씀을 하시는 의도는 이 말씀을 읽는 자마다 자기에게 순교의 사건이 와도 이길 수 있는 자가 되라는 거다. 말씀의 효력을 남이 아닌 자기가 봐야 한다. 남이 공부를 잘하는 것과 내가 공부를 잘하는 것은 다르다. 진리본질에 적중성으로 들어가야 나의 언행심사가 타에게 빛의 영향이 미치게 된다.

 

3: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에 성전에 들어갔는데, 성전에 들어가서 올라가는 기도를 했겠느냐, 내려가는 기도를 했겠느냐? 올라가는 기도를 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할 때 그 내용이 올라가는 기도를 하느냐, 내려가는 기도를 하느냐? 세상 것을 이뤄 달라고 하는 것은 내려가는 기도이고 하나님의 뜻을 자기 실상화로 되게 해 달라는 것은 올라가는 기도다. 이런 기도는 금 대접에 담겨서 올라가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바 된다. 이런 기도는 자기에게서든지 자녀에게든지 반드시 이뤄진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성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은 신앙의 질이 주님의 정신과는 정반대다. 주님과 의사단일이 아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는 것은 이들의 정신을 때려 부수러 가는 거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성전을 우상시했다. 그런데 만일 베드로와 요한이 이 성전을 부숴버린다면 유대인들이 우리 우상이 없어졌구나하며 예수님을 따르겠느냐, 다른 뭔가를 만들겠느냐? 다른 것을 또 만든다. 그러니까 성전이라고 하는 건물이 문제냐, 옛사람을 쫓아가는 신앙이 문제냐? 사람을 바로 세우려면 사람의 정신을 돌려놔야 한다. 사람을 돌리는 것을 다른 면으로 보면 날 때부터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거다. 세상 소원 목적을 가진 자는 땅에 붙은 앉은뱅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에 성전에 들어갔는데, 계시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우상화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것은 그들이 우상화한 그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과거에 하나님의 척도대로 만들어진 신령한 성전으로 들어간 거다. 이렇게 보아야 사도들의 기도가 풀리는 거고, 올라가면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를 고치는 것도 나오는 거다. 이렇게 되어야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가 걷기도 뛰기도 하며 사도들과 같이 하나님께 찬송하는 일이 나온다.

 

4:에 에스겔에게 내가 그들의 범죄 한 햇수대로 네게 날 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우편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라고 했는데, 실지로 이렇게 할 수 있느냐? 그런데도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죄악으로 인해 이방인들로부터 혹독한 괴로움을 받게 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거다.

 

성경에 이처럼 말도 안 되는 표현이 많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뜻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문자대로만 보지 말고 어떤 뜻으로 이런 표현을 하시는구나이걸 잡아라.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문자의 내용 자체가 거짓이라는 말이 아니다.

 

번제단에서 짐승이 잡혀서 죽는데,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잡혀 죽는 것을 말한다. 죽을 자는 죽이고 살릴 자는 살려야 옳은 거다. 이것을 소극적으로 보면 옛사람을 죽여야 영이 잘 되는 거고, 적극적으로는 새사람을 살려야 영이 잘 되는 거다. 학교 시험에서 문제에 틀린 답을 썼으면 문제의 원리를 알아야 정답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틀린 답을 틀렸다고 내버려 두면 죽을 때까지 틀린 거고, 죽을 때까지 정답을 모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첫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말씀으로 창조했다. 세상이 말씀으로 만들어졌으니 누가 이 세상을 잘 다스리겠느냐? 말씀을 받은 자들이다. 이 다스림은 말씀대로 이익이 창출된다. 여기에서 말씀의 기쁨을 맛보는 거다. 말씀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사람 속에 지식과 지혜가 열매처럼 가득하게 차이는 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거다.

 

자기가 말씀으로 태어났다고 인정이 된다면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모든 사사건건 환경이 돌아가는 게, 만물이 돌아가는 게 말씀에 의해 되는 거고, 우리는 이 가운데 사는 거다. 그래서 인간이 말씀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을 놓고 보면 멸망 당할 짐승과 같은 거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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