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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6:19-17:3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6:19-17:3.

 

16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171-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찐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1631: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나서 말할지라도 그 말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것이니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다. 거짓 영, 악령이 역사하는 말 곧, 성령님의 역사가 없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나서 말할지라도 그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말아라. 왜 그러냐? 거기에는 성령님의 역사가 없다.

 

기독교 신앙은 이방종교처럼 믿고 싶으면 믿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런 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 주관에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되는 거다 그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자기 주관적인 신앙이 많다. 그러니 구하는 것도 자기 뜻대로 이뤄달라는 것이다.

 

진리이치의 생명이치와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자기에게 믿음이 생기는 거다. 그러니까 믿음이 생기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와야 하고, 따라서 성령님의 감화 감동이라야 하고, 따라서 또 진리이치가 분명해야 하고,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분명히 갈라야 한다. 가르고 구별시키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다. 구별이 되고 분별이 된다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다.

 

부자가 불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예정 면에서 볼 때 그가 불택자이기 때문이냐, 아니면 자기 잘못으로 형벌을 받는 것이냐? 자기 잘못으로 영원한 불속에서 형벌을 받는 것이다. 신학적 예정 면으로 불택자이기 때문에 형벌을 받는다하게 되면 문제가 많다. ‘불택자이기 때문에 불속에서 형벌을 받는다고 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임에도 불택자라는 말이 된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거지 나사로를 돌보지 않아서 부자를 불속에 넣은 것이냐? 성경에 , 너는 살아서 모든 것을 받았지 않았느냐했다. 이 말은 받은 네가 좀 보살펴 주지그 말이냐? 지금 그 말은 아니다. 거지에게 밥을 주면 택자가 되고, 밥을 안 주면 불택자가 되는 것이냐? 아브라함의 말대로라면 부자가 불속에 안 갈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날마다 잔치하는 부자의 대문간에 거지 나사로가 앓으며 상 밑에서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고자 해도 채우지 못하고 결국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었다. 거지는 부자보다 빨리 죽느냐? 아무리 부자라도 빨리 죽을 수도 있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부자가 불속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기회를 그만큼 주었다. 기회란 부자의 대문간의 거지 나사로를 눕혀놓아 보게 한 것이다. 보는 그게 부자에게는 기회다. 그런데 부자는 호화롭게 연락하며 돈 쓸 기회만 알았지 나사로 돌볼 기회는 잃고 말았다. 부자가 나사로를 돌볼 기회는 그 때뿐인데.

 

부자는 세상재미를 보느라고 사람을 구원하는 기회의 문을 알지를 못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람을 구원시키는 군사를 잘 길렀다. 가군을 318명을 길렀다. 부자는 물질을 놀고 먹고 마시고 세상을 누리는데 탕진했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못 살아서 야단이다.

 

부자가 살아있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인 모세의 말씀이 있었고, 선지자들이 있었고, 가르치는 종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소리는 안 듣고 자꾸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있으면 그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성령님의 역사도 없는 거다. 네가 놀라 자빠질 일을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과, 보고 믿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고 믿으려 하고 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게 믿어지느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자리에서 죽어나갔는데 그건 믿어지느냐? 어느 쪽이 더 믿어지느냐? 살아난 것과, 죽어나가는 것과 자기 마음속에서 어느 쪽이 저울이 많이 나가느냐? 하나님께서는 살리는 게 쉬울까, 죽이는 게 쉬울까? 인간 제 보기에 다른 거지 똑같다.

 

그러면 하나님이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게 더 어려우냐, 있는 것을 없게 만드는 게 더 어려우냐? 똑같다. 어떻게 보면 없는 가운데서 전부 만든 건데, 그렇다면 있는 것을 없게 하려면 우주의 청소차가 필요할까? 하나님은 이렇게 하던 저렇게 하던 똑같다. 인간 제 보기 다르지.

 

171: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다면 있게 한 그 자에게는 화가 된다.’ 그러니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신과 온 마음을 다해서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매우 조심되는 문제다.

 

실족은 넘어지는 건데, 길을 가다가 잘못 보았다거나, 발을 헛디뎠다거나, 무엇에 걸려 넘어졌다거나 해서 넘어지면 사람이 실족한 거다. 사람이 넘어지면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평생을 불구로 살다가 죽기도 한다.

 

사람이 출생을 해서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기까지의 인생노정에서, 삶의 길로 가는 노정에서 알지 못해서 남에게 속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에게도 속고, 또 교만하여 똑똑하다고 날뛰다가 다치고 넘어지고 마음이 상하고 고통을 겪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넘어진 경험도 많고, 지금도 그런 일들을 남이 겪는 것을 많이 보고 있다. 보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어느 새 또 당한다.

 

인생의 실수 중에 뭐가 제일 큰 실수일까? 선악과 따먹은 거, 그 다음에 남을 실족케 하는 것. 두고두고 살아갈수록 자기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게 있느냐? 그게 실수다. 죽으면 쉽겠는데 그게 아니라 살아갈수록 속에서 마음이 곪아지듯이 그 마음 아픈 것.

 

성경에서 말씀하는 실족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본질대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정로로 걸어가는 여기에서 이탈되는 것을 실족이라고 한다. 그러면 예수를 안 믿는 일반사람들이 사는 그것이 바로 걸어가는 거냐, 넘어진 상태냐? 넘어진 상태다. 행복이던, 아무리 옳다 하고, 명예 영광을 얻어도 선악과 따먹은 실족된 삶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깨닫지 못해서 실족된 삶을 사는 그 사람들의 소리를 잘 듣고 간다. 하나님을 떠난 실족된 삶이요 실족된 말인데 그걸 감지를 잘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33년의 인생의 걸음걸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100% 지키신 완전 절대 온전 절대의 생명이고, 절대 영생이고, 절대 능력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절대로 실족이 없는 교훈이다. 주님이 오셔서 그렇게 살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말씀의 의도 속에는 우리로 실족치 않게 살게 해 주신다는 것이 들어있다. 이게 구원이다. 넘어지면 실족이요 형벌이요 심판이다.

 

교회 인도자들이 예수 믿어 부자로 살고, 세상에서 잘 살고하고 가르친다면 그건 전부가 실족이다. 그런데 교인들이 그게 실족인 줄을 모르고 믿고 따라가고 있다. 이건 계:에서 말하는 짐승들이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넘어지고도 넘어진 줄을 모른다. 왜 그러냐? 사람이 바로 선 것을 모르니 그렇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다. 예수님에게는 실족이 없다. 흠과 티가 없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은 넘어져 있다. 생각이 죽어있고, 행동 활동이 다 하나님 앞에 죽은 거고, 실족이고, 넘어져 있는 거다.

 

율법의 한 획이라도 세상이 없어지기 전까지 없어지지 않는다하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지극히 작은 실족이라도 안 되게 하려고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인류시조가 선악과 먹은 후 이방세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에 대해 전혀 모른 채 인생을 마치고 있다. 출생을 해도 누구도 그걸 가르쳐 주지 못하고, 부모도 알지 못한 채 그대로 땅의 것만 소원하다가 소원하다가 죽는다. 그러면 그렇게 산다고 해서 땅의 것이 다 잘 되느냐? 그렇지 않은데도 땅에서 오래 살려고 얼마나 버둥거리느냐? 남의 것이라도 뺏어서 누리려는 게 이방세상이다. 정치를 해도 그렇고.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심판이 없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땅을 못 쓰게 만들고 세상을 못 쓰게 만들면 그 자들에게 심판이 있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못 쓰게 만들어 놓은 거, 사람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곁길로 나가게 한 것에 대한 심판이 있다. ‘네가 좋아서 한다고 했지만 예수님의 얼굴에 칠이 돼버리고 교회가 똥이 되게 만들고 한 거 네가 책임을 져라그게 있는 거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이듯이 예수님도 대표로 들어가 있다. 또한 예수 믿는 모두도 대표적 성격이 들어있으니 자기 잘못으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만들면 그 자기는 심판이 있는 거다. 그래서 내가 공동의식 공중도덕을 많이 강조하는 것이다. 이건 일반이지만 아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생각해서이다.

 

자식이 부모를 생각지 못하면 불효자식이고,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면 효자가 된다. 자식이 부모에 대해 원망하고 있다면 그런 불효자식이 없다. 가난한 집안이면 그 가난 속에서 인생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지 부모에 대한 원망은 없는 거다. 오히려 그런 환경을 거치게 해서 그 사건 환경에서 나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해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구나하니 감사다.

 

자식이 부모에 대한 원망성을 가지고 있으면 부모는 절대로 그 자식에게 기대지 말라. 없는 듯이 살아라. 사람노릇 못한다.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사람노릇이 되는 게 아니다. 사람 속의 인격과 성품이 사람노릇을 하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정로로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셨다. 성경을 주신 것은 말씀대로 정로로 걸어가게 하려 하심이다. 그런데 말씀을 가지고 있어도 정로로 걸어가지 않는 자들이 많다.

 

여기서 크게 보면 성도들이 생명의 정로로 걸어가는 여기에서 이탈시키는 교회의 종들의 가르침은 즉, 목사들의 가르침은 저주받는 다른 복음임을 알아야 한다. ‘실족케 하는 일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오늘날 목사님들이 이 점을 생각을 하고 목회를 하는 건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의 온전이다. 이것이 아닌 교회의 가르침은 전부는 실족된 가르침이다. 성경말씀 자체가 성령으로 기록이 됐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 함이다. 하나님 당신처럼 만든다 그 말이다. 이걸 벗어나는 교훈은 다 실족케 한다.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형벌을 받게 한다. 이게 마귀의 수법이다.

 

이방 세상 사람들의 소원 목적에 맞는 넓은 길, 사망 길, 멸망 길은 심판을 받게 하는 다른 복음이다. 기독교 안에 사람을 실족케 하는 함정이 많은데 구국주의 사회주의 구복주의 신비주의 등이 다 함정이다.

 

말세의 교회가 거짓된 가르침을 따라 심판의 길로 몰려가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냐?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온전을 모르는 데서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거다. 그러니까 아예 실족으로 넘어져 있는 상태다.

 

기둥이 넘어진 걸 사람이 바로 세우려면 참 힘들다. 비딱한 것을 바로 세우려는 것도 참 힘들다. 비딱하게 단단하게 박히면 빼기도 힘들고 참 힘들다. 아예 땅을 파서 다른 기둥으로 세우는 게 훨씬 빠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지식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능력적인 면에서 모르는 상태에서 가르치게 되면 그만큼 실족이 많게 된다. 자기가 하나님의 지식도 모르고, 하나님의 도덕성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성도 모르고, 인간창조 원인 동기 목적성도 모르고 가르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이 넘어진 걸 완전히 밟는 격이다. 이거는 사람이 썩는 거다.

 

정답을 모르고 가르친다면 정답이 되느냐, 틀린 답이 되느냐? 전부는 틀린 답이다. 정답은 하나님이요 주님이시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영원히 가고, 질적으로 썩지 않고 영원히 가고, 고차원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 정확하지 인간의 것은 정확한 것이 없다.

 

2: 일반사람들도 자기가 죄를 지었거나 해서 얼굴을 못 들 정도면 살아생전에 이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나하고 한강에 뛰어내리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데 성경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달고 빠져 죽으라했는데도 목사가 사람을 잘못 가르쳐도 떳떳하다. 죽으라 했는데 안 빠져죽는다. 죽을 짓을 안 했다 그 말이다.

 

실족이 되면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후회거리다. 99에서 하나만 채우면 영원히 100이 될 텐데 실족된 하나가 있어서 영원히 99이다. 볼 적마다 마음이 아프다. 그 날에 가서 이루지 못한 실족성을 볼 적마다 마음이 아리다. 부모의 실수로 자식이 불구가 됐다면 그 자식을 볼 적마다 부모의 마음아픔은 죽기 전까지는 말로 다할 수 없다.

 

모르고 가르친다면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다 실족이다. 그러니 잘못 가르치는 자는 차라리 너부터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너부터 바다에 빠져 죽으라는 것이다. 얼마나 엄한 말씀이냐?

 

이 말씀이 악한 말이냐, 선한 말이냐? 이게 왜 선한 말이냐? 물에 빠져 죽는 것은 임시성이다. 그러나 교훈을 가지고 잘못 가르쳐서 실족케 했다면 영원히 영원히 두고두고 실족이다. 그만큼 그게 비중이 더 크다. 그런데 영적인 면의 살인이나 영적인 면의 기형아로 만들어 놓는 그런 면에 목사님들이 눈도 꿈쩍도 않는다. 왜 그러냐? 모르니 그렇다.

 

차라리 연자 맷돌을 달고 빠져 죽으라는 것의 또 한 뜻은 꼴도 보기 싫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죽은 시체도 떠오르지 말아라 그 말이다. 얼마나 보기 싫으면 영원히 안 보련다그 말이다. 그러면 지옥 불에 넣으면 안 보이는 거냐? 지금 그 말의 뜻이 아니다. ‘너로 인해서 실족당한 자를 보면 네 마음이 영원히 아플 것이니 차라리 네가 너에게 스스로 심판을 하라. 다른 사람에게 네 얼굴을 보이지 말아라.’ 그래서 도둑질이나 국민들 앞에 큰 죄를 지었으면 도망을 가버린다. 왜 도망을 가는 거냐? 자기 얼굴을 안 보이려는 거다.

 

네가 일반적인 실수로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해서 불구로 되었다면 그 사람을 볼 적마다 네 마음이 아플 것이다. 하물며 천국의 것으로 네가 실족을 시켰다면 어떻게 그 성도를 볼 수 있겠느냐? 그러니 차라리 네가 네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빠져 죽는 게 낫다.’ 그러니까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이 이룰구원에서 이렇게 엄한 말씀이다.

 

다 큰 자를 가르치기가 힘이 드느냐. 지극히 작은 자를 가르치기가 힘이 드느냐? 다 큰 자이다. 그런데 다 큰 자도 그만큼 알면 쉽게 알아듣는다. 다 큰 자를 때리느냐, 아이를 때리느냐? 다 큰 자에게는 말로 한다. ‘어느 면으로 다 큰 거냐하는 이걸 생각을 하라 그 말이다. 눈치 빠르고 다 큰 사람은 한 마디 쓱 하면 알아듣는다. 그런데 크지 못한 어른이 있다. 이러면 말을 해도 못 알아듣고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른다. 그런 면으로 보면 참 힘들다.

 

또 아무 것도 모르는 자에게 눈에 안 보이는 천국을 이해시키기가 힘들다. 어른들에게는 마음이 돌아가는 걸 얘기하면 어느 정도 경험이 있으니까 이해가 가지만 어린아이들에게 사람의 마음이 돌아가는 걸 얘기하면 힘들다. 그런데 어른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마음이 돌아가는 걸 감지시키려니 힘들다. 그렇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교회는 저주받은 세상 일반 윤리도덕성이나 불타질 세상소원 목적성을 가지라고 가르칠 수는 없는 거다. 그랬다가는 너부터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져 죽으라는 것이다. 교인들이 아무리 못 알아들어도 세상축복운운하면 안 되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져 죽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는 가르칠 수가 없다. 안다고 해도 매우 조심스러운 건데 모르고 어떻게 가르치고 인도를 하겠다는 것이냐?

 

3: 무엇을 스스로 조심하라는 것이냐? ‘네 형제가 죄를 범하면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이게 과연 지켜질까? 죄를 범하면 편들어 주거나 흉을 보거나 정죄하지도 말고 더 이상 확대되지 않게 권고하고 권면하고 바른 것을 가르쳐 주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하면 바른 것을 알게 되고, 바른 것을 잡으면 또 회개가 되는 거다.

 

진리의 신앙, 하나님의 뜻을 바로 잡은 신앙, 방향과 목적이 적중성이 된 신앙은 회개가 되는 거다. 권고 권면하고 가르쳐 줄 때 , 그렇다하고 바른 것으로 적중성으로 가게 되면 울고불고 안 해도 그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다. 그런데 회개하고 바로 가고 있는 데도 남의 허물을 물어뜯으며 과거의 것을 자꾸 말을 하며 용서를 안 하고 있다면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헐뜯는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줄 리가 없다.

 

방향과 목적이 하나님의 소원 목적에 안 맞고 의사단일로 적중이 아니면 회개가 안 된다. 회개는 세상 일반적인 양심을 가지고 잘못했습니다한다고 해서 그게 회개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반성이다.

 

베드로는 회개를 했고, 가룟유다는 후회만 했다. 가룟유다는 자기 양심에서 자기가 선한 사람을 나쁘게 취급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그 말씀을 붙잡고 회개를 했다. 말씀을 잡고 하는 게 회개다. 가룟유다도 말씀이 생각나서 했더라면 회개가 바로 될 텐데 그러지 못하고 배가 터져서 죽은 가룟유다를 보면 우리가 가룟유다에게 좋은 소리를 하겠느냐? ‘예수 팔아먹고 그 돈 못 먹고 배가 터져서 잘 죽었다하느냐?

 

진리 팔고 스승 팔고 인간 팔고, 이게 예수님 당시 때뿐만이 아니라 구약으로 올라가서 요셉을 판 형제들이 있는데, 이거는 인신매매다. 그러니까 인신매매는 구약에도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가 예수님을 팔아먹었는데, 물론 그 때야 사람 예수를 팔아먹은 것으로만 보이겠지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파는 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세상 것과 바꿨다는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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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복음 나사로를 내 형제에게 보내어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눅16:19-17:3  김경형목사  2023-04-02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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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7 누가복음 (계시보기)성도의 원수관. 눅18:1-  김경형목사  2023-04-01 52
17786 누가복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눅23:32-38  강승호목사  2023-03-30 116
17785 마태복음 내가 저야 할 십자가(고난주일) 마16;21-27  전원준목사  2023-03-30 261
17784 베드로전 보화 되신 예수 그리스도 벧전2:6-8  강승호목사  2023-03-29 96
17783 요한복음 나사로를 살리신 그리스도 요11:1-53  최주훈 목사  2023-03-27 117
17782 누가복음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눅16:23-31  김경형목사  2023-03-26 47
17781 요한복음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요5:1-4  김경형목사  2023-03-26 87
17780 창세기 (계시보기)창조 첫날과 넷째날의 빛의 조화. 창1:3-19  김경형목사  2023-03-25 42
17779 고린도후 성도를 세우는 아름다운 신앙 고후13;11-21  전원준목사  2023-03-25 162
17778 유다서 네 자신을 지키라 ! 유1;20-21  전원준목사  2023-03-25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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