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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적은 어디에

마태복음 강남순............... 조회 수 2145 추천 수 0 2008.08.10 00:22:45
.........
성경본문 : 마9:1-8 
설교자 : 강남순 목사 
참고 : 새길교회2003. 5.18 주일설교 
무수한문제들 한 가운데 있는 우리의 삶

어떤사람이 자신의 친구에게 '잘지내는가'라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상적인 인사를 받은 친구는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지내는가를 오랫동안 설명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그 사람은 자신의 친구에게 '자네가 절망에 빠져 있는 걸 보니 참
유감이네. 어떡하다가 그 지경이 되었나?'라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말했습니다. "내가 가진 문제들 때문이지. 자고나면온통 문제투성이거든, 난 내 문제들에 지쳤어. 만일 자네가 내 문제들을모두 제거해 준다면 무슨 대가라도 치르겠네." 친구의 말을들은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어떤 곳에갔더니 수천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더군. 그런데 그들은 아무문제도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어. 자네도 그곳에 가 보겠나?"
그 친구는 "당장 가보고 싶네. 그곳이야말로 나 같은 사람이가서 살기에 어울리는 곳처럼 들리는군."이라고 흥분에 찬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친구를 데리고 간 곳은다름 아닌 공동묘지 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여 그 사람은 친구에게말했습니다. "내가 아는 한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는 사람은죽은 사람들뿐이야."

노만 빈센트 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이 만일 아무 문제도 갖고 있지 않다면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당신이 무덤으로 향하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당신은 모르지만, 이미 무덤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만일 정말로 당신 삶에 아무런문제가 없다면 당신이 지금어디에 있든 당장 차에 시동을 걸고 집으로 달려가라. 그리고 문을 닫고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하나님께기도를 올려라. '왜 그러십니까, 주님? 절 더 이상 신뢰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에게 어서 몇 가지 문제를 내려 주십시오.' 하고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제거되고 아무런 문제가없어야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고 있는삶의 짐과 실패들, 그리고 문제들 때문에 마음의 평화나 행복을찾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나 실패가 없는 삶. 이것이 대부분의우리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입니다. 그러나 정작 인간의 삶이란 어떠한직업을 가지든, 어떠한 환경 속에 처하여 있든지 실패와 문제가없는 삶은 없으며, 이러한 문제들이 제거되어서가 아니라 그 한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삶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을 통해서 그러한 은총과신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행적을 담은 복음서는 예수의 첫번째 기적 이야기인 가나의 혼인잔치의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아주 다양한 기적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주신 놀라운 능력이라고 믿고, 그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능력을 바탕으로해서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놀라운 발전을 이루게 된 근대 이후,성서 속의 기적 이야기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켜 왔습니다. 도대체인간이 인간을 복제할 수 있을 만큼의 놀라운 과학의 발전을 이룬현대에, 우리의 이성과 합리적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되기 어려운 시대착오적인 것 같은 예수의 기적이야기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이러한 기적의 이야기들은 어떻게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와 연결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성서의 이야기들이 지금 여기살고 있는 우리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게 될 때에 비로소 그 성서의이야기들은 살아있는 생명력을 지닌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예수의다양한 기적이야기들은 '새로운 변화,' '새로운 삶'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기적 사건이전과 그 이후가 전적으로 다른 삶으로 나누어지는 이야기들입니다.저는 오늘 이 아침 이러한 기적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삶을 비추어보고자 합니다.

기술과학이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에 어쩌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과합리성의 세계 너머에 있는 기적이 절실히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이성과 합리적 세계 속에서는 삶의 신비와 새로운 변화에 대한 두근거리는기대감들이 자리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합리성만이 지배하는세계 속에서는 아무리 분석하고 파헤쳐도 여전히 남아있는 한 인간의아름다움과 신비함,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상상력과 사랑의
능력, 실패와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끈질긴 생명력, 어떠한 불행속에서도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들을 볼 수 있는 시각들이
남아있을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을믿는 신앙 자체가 이미 합리적 세계를 훌쩍 뛰어 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온 몸이 마비된 어떤 한 사람이 예수께로 데려와졌고,그의 병이 치유되어 병상에서 일어서게 되었다는 기적의 이야기를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매우 놀랍고 흥미로운사실을 보게 됩니다. 2절에 보니까 몸이 마비되어 치유 받기를 원하여예수 앞에 온 사람에게 예수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합니다.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라. 너의죄들이 사함을 받았다'(Take heart, son, your sins are forgiven)라고말씀하십니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 예수와 동행했던제자들은 예수의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당황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온 몸이 마비된 사람을 단숨에 일으켜 세웠다면 제자들도 매우 으쓱했을 것이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예수가 정말 신적인 능력을행사하는 사람이라고 경외심을 단숨에 표했을 텐데, 예수는 사람들의기대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십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너의 죄들이 사해졌다."

예수가 보시는 우선순위와 사함 받아야 할 죄들

저는 여기에서 두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우선, 도대체 예수께서 왜 몸이 마비된 육체적 병 때문에 고통 당하여 온 사람에게 '병고침'이 아니라 '죄사함'의 선언을 먼저 하셨을까 라는 점입니다. '죄사함'이란 분명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영역의 문제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온 몸이 마비된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것은 그 병이 치유되는 '육체적인 영역'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는 영적인 영역'과 '육체적인 영역'의 우선순위를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정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예수가 육체와 영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나누고 영(정신)은 육체보다 우월하다는 이원론적 사유방식을 지닌 분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에게서 인간은 영과 육체가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복음서의 여러 가지 예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두 세계의 우선순위 매김을 통하여 근원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중요한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눈, 다른 사람을 보는 눈, 하나님을 대하는 눈-이러한 사물을 보는 방식에 따라서 사람은 어떠한 동일한
상황에서도 매우 다른 반응을 보이고 그 상황에서 삶에 대한 태도도 매우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밀턴은 "마음이란 스스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란 자기 자신에 의하여 형성되고 해체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눈을 가지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무수한 문제들과 실패들 한 가운데에서도 은총을 발견하는 기쁨과 감사의 삶일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이미 다양한 것으로 축복해준 삶의 한 가운데에서도 늘 불행한 의식과 절망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보는 눈, 다른 사람을 보는 눈, 하나님을 대하는 눈이 이미 냉소적이고 부정적으로 고정이 되었다면 아무리 외적인 육체적 문제가 해결되었어도 그 사람의 삶은 늘 부정적이고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수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온몸이 마비되어 온 사람에게서 우선적으로 '죄사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제가 이 본문을 읽으며 가지게 되는 두 번째 의문은 도대체 이 사람이 사함을 받은 '죄들'이란 어떤 죄일까라는 것입니다. 성서는 이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온 몸이 마비되는 병을 오랫동안 않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사실상 오랫동안 아주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처럼 의학이 발달된
시대에도 온몸이 마비되었다면 보통사람들은 절망하고 자기 자신의 삶을 원망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 옛날 의학적 치유의
가능성을 찾기 어려운 시대에 그 사람이 가졌을 절망감이란 참으로 깊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떠도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기보다는 자신의 저주받은 삶을 원망하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주변사람들을 보아도 좌절감과 원망으로 가득찬 시선으로 그들을 대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이러한 불행을 준 하나님을 원망하는 생각으로 가득
찬 시간들도 무수히 많았을 것입니다. 도대체 새로운 변화와 희망을 자신의 삶 속에서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조차 포기한지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명처럼 주어진 육체적 고통 속에서 그 사람의 영적 세계. 정신적 세계는 황폐화되고 절망감과
불행감으로 가득 차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저 지나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절대적 무력감속에 잠겨서 매일 매일을 보냈을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를 바 없고, 오늘과 내일이 다를바 없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삶에 대한 어떠한 기대나 희망도 가지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몸이 마비된 사람을 들여다 보면서, 그의 육체적 치유보다 더 우선적으로 중요하다고 본 것은 이러한 영적세계의 치유였던 것입니다. 희망이란 항상 존재한다는 강한 믿음을 포기하는 것, 새로운 변화가 가능하다는 신념을 포기하는 것, 자신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는 것, 자신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신앙을 포기하는 것,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외면하는 것-이것이 사실상 몸이 마비된 사람이 사함을 받아야 했을 가장 커다란 죄들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중풍병에 걸려 예수앞에 들려온 사람의 이야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성서는 이 중풍병자의 기적이야기를 통하여 이 자리에 모인 우리도 이 중풍병자와 같이 예수의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존재들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육체적으로는 마비 되지는 않았어도, 우리의 영적 세계와 정신세계는 중풍에 걸린 사람과 같이 마비되어 있는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나 가능성을 모두 포기한 사람들이라면, 오늘과 내일은 단지 어제의 연속일 뿐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나 자신 속에서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 속에서 어떠한 새로운 존재로의 태어남을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중풍병자이며, 죄 속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야말로 예수의 '죄사함'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의 기적은 어디에

예수의 기적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과 변화의 가능성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적이란 수 백억 원의 복권이 당첨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 새로운 변화가 가능하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기적은 아무런 새로운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에 전적으로 반기를
드는 것, 현재와 미래는 단지 과거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전적으로 거절하는 것, 진정으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시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용기를 가지는 것, 깊은 절망과 불행감을 딛고
일어서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적으로 믿는 것, 이러한 것들 속에서 기적은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래서 희망이란 항상 존재한다는 믿음-이것이 기적의 뿌리입니다.

생김새가 똑 같은 일란성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언제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다른 한 아이는 늘 슬프고 절망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걱정된 부모는 아이들을 데리고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부모에게 아이들의 성격에 균형을 가져다
주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아이들의 생일날 아이들을 각자 다른 방에 넣고 선물을 열어보게 하십시오. 늘 희망에 찬 아이에게는 거름을 선물상자에 넣어주고, 절망과 불만에 가득찬 아이에게는 최고의 선물을 넣어주십시오." 의사의 제안대로 부모는 두 아이들에게 각기 다른 선물을 하고 아이들의 방을 살며시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컴퓨터, 계산기, 자동차등 최고의 선물을 받은 아이는 큰소리로 불평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컴퓨터는 색깔이 마음에 안 들어. 이 계산기는 틀림없이 금방 고장이 날거야. 이 게임은 정말 싫어. 내가 아는 다른 아이는 이것보다 휠씬 크고 좋은 자동차를 갖고 있단 말야." 실망한 부모는 거름만을 넣어준 선물상자를 받은 다른 아이의 방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신이 나서 거름을 공중에 내 던지며 소리내어 웃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거름이 있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엄마 아빠가 당나귀 한 마리를 사 오신 거야!" 이 두 아이들은 사실상 우리가 이 삶에서 가지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휴 다운즈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은 어떤 특정한 환경속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특정한 마음자세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문제나 실패들이 하나도 없어야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사실은 아닙니다. 다양한 문제들과 실패들, 좌절과 절망스러운 일들의 한 복판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내려주신 축복과 은총을 느끼고 새로운 삶에의 가능성을 향한 희망과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만이 예수의 기적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만이 예수가 왜 육체적 '병고침' 보다 '죄사함'을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기적의 사건을 직접 보고 경험하고 있던 사람들이 사실상 동일하게 그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세 부류의 사람들이 그 기적 이야기 속에 등장합니다. 첫째는 바리세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의 삶에 전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기적의 사건 한 가운데에서, 그 기적의 의미를 전혀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를 끄집어내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방관자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흥미를 가지고 이 기적 사건을 보지만, 그 기적 사건에 의하여 자신이 직접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지는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그 현장에 있지만, 그 기적 사건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셋째는 고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기적의 주인공이며, 자신의 생애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러운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온몸이 마비되어 아무런
변화도 기대하지 않았던 자신의 삶이 전적으로 변화되는 놀랍고 경이스러운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절대적 절망"이라는 죄를 벗어 던지고,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절대적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된 사람입니다. 오늘과 내일이 단지 어제의 연장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병고침을 받기 이전에, 예수로부터 '아들아 마음을 편히 가져라'는 첫마디에 이미 자신의 삶이 변한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전에 그러한 따스한 위로의 말을 해주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사람에게 심판자의 모습으로 죄사함을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아들아'라고 부르며 '마음을 편히 가져라'(take herat)라는 아주 따스한 위로의 말로 그의 모든 죄가 사해짐을 선언합니다. 그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문책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예수는 그를 따스하게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로부터 예상치 않은 이러한 놀라운 '죄사함의 경험'을 한 것-이것이 바로 중풍 걸린 사람에게는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이전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을 보는 시각, 타인을 보는 시각,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이전과 철저히 다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기적을 온 존재로 경험한 그는 이제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무수한 문제들과 실패들 한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언제나 있음을 자신 있게 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도예수는 이 성서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도 기적이 가능하다고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먼저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아야 함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눈, 다른사람을 보는 눈, 하나님을 보는 눈이 전적으로 바뀌어야 함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는 중풍 걸린 사람의 죄가 사하여 졌다고 선언한후, 네 침상을 들고 일어나 가라고 단호히 명령하십니다. 예수의 명령은 새로운 변화된 존재로 살아가라는 명령이며, 불가능한 것같이 보이는 새로운 삶이 진정으로 가능하다고 하는 선언이며, 깊은 절망 속에 잠긴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는 새로운 희망적 삶에의 초청입니다.

이아침 예수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심판자로 서 계시지 않습니다.우리를 '아들과 딸로 부르며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는 따스한 위로의 눈길로 바라보시며 "너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말씀하십니다. 예수가 이제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가는 분명합니다. 이 아침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가 예수로부터죄사함을 받고,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향하여 용기있게 일어나 걸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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