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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고난당하시는 하나님

시편 유경재 목사............... 조회 수 1644 추천 수 0 2009.05.22 12: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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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시116 :1~14 
설교자 : 유경재 목사 
참고 : 안동교회 원로목사 / 새길교회 2008.09.07 주일설교 

emoticon시편 116 : 1 ~ 14, 베드로전서 2 : 18 ~ 25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일까요? 하느님은 절대자이시며, 거룩하시며, 선하신 유일한 존재로서 온 세계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며, 마침내 그것을 최후의 구속으로 이끄시는 분이라고 보통 대답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유한한 피조물과 대조되는 분으로서 무한하신 분이며, 영적 존재이시며, 그래서 영원하시고 그 무엇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며, 고난당하지도 않고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대답하면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그가 지으신 세계를 다스리시는 왕이시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 되십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이런 대답이 정말 정답인가’라는 의문을 가진 신학자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정말 성경이 말하는 야훼 하느님인가? 하느님은 모든 것을 만드시기는 했지만,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하느님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절대적 초월자(超越者)이신가? 하느님은 전혀 고난 받지도 않으시고,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을 보시고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으신 채 구경만 하시는 분인가? 하느님은 절대자이시기에 이 땅의 역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자기 뜻대로 모든 일을 밀고 나가시기만 하는 분인가? 하느님은 높은 곳에 계셔서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요, 거룩하신 분이어서 죄인인 인간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분인가? 우리가 늘 하느님께 기도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유치한 기도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분으로 보통 생각을 하는데, 과연 그런가? 이렇게 ‘하느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에 나오는 대답은 대체로 철학이나 신학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철학의 유신론에서 말하는 신은 전능, 불변, 무감동, 단순, 영원과 같은 절대적인 속성을 가진 존재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배우는 하느님은 그 사랑 때문에 친히 인간을 찾아오시는 분이며, 온 세계의 구원을 위해 친히 고난 받으시는 분입니다. 혼자서 독단적으로 모든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느님께서 함께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삼위일체 되신 하느님은 그가 지으신 만물을 기계적으로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의 한 부분처럼 아파하시며 고치시며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무서운 독재자가 아니라 자상한 ‘아빠’ 아버지가 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역사의 근본은 ‘심판’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거룩한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지만, 우리를 그의 형상을 본받게 하셔서 마침내는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런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질 때 우리의 신앙이 바르게 자라고, 우리의 소망이 확고해지며, 우리의 사랑이 실현될 것입니다.

  긍휼이 많으신 하느님!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 처음에 창세기가 나오고 맨 앞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느님을 창조주로 신앙 고백한 것은 훨씬 후대였다고 봅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땅과 자손의 번성, 그리고 그가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해 주신 분이었습니다. 그들이 만난 하느님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삶과 역사 속에 직접 들어오셔서 약속하시고 그 약속대로 그들의 역사를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을 믿게 되면서 그 하느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라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만난 것은 출애급의 역사에서입니다. 이집트에서 4백년 간 노예로 고난당할 때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그곳에서 구원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믿게 되었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느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십계명 전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느님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구체적인 역사를 통해서 하느님은 구원하시는 분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좀 더 분명하게 하느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은 바벨론 포로를 통해서입니다. 이 고난의 역사를 통해서 그들은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에나 계시면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역사 속에서 만난 하느님은 결국 인자(仁慈)와 긍휼(矜恤)이 많으신 하느님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16편 5절에 보면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구약에 아주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느9:17, 시103:8, 145:8, 욜2:13, 욘4:2). 하느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며, 영원불변(永遠不變)하신 분이라는 고백과는 차이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역사를 통해서 점차 변화되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긍휼이 많으신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것은 어미가 갓난아기를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과 같습니다. 요즈음 우리 집에 갓난아기가 있는데, 지난번에는 탈이 나서 설사를 하면서 많이 보챘습니다. 그 아이 엄마는 물론이고 우리까지 덩달아 애가 타서 안절부절못하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긍휼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그 백성이 잘못을 저지르고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을 보시고 채찍을 드셨다가도 그들이 고난 중에서 부르짖으면 불쌍히 여기셔서 저들을 구원하시곤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잘못 때문에 안절부절못하시는 분이십니다. 116편의 시편기자도 하느님께서 자기를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내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내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내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여 주셨으니, 나는 생명의 세계에서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 (116:8-9)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믿는 하느님은 추상적이고 막연하여 큰 기대를 갖지 않고 그냥 잊어버리고 살아갈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직접 들어오셔서 위로하시고 구원하시며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요? 그냥 하느님이 계시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라고 시큰둥하게 생각하며 그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는 그런 신앙생활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지만 그 전능하심이 나를 고난에서 건져내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별로 기도하지 않는 생활은 아닌지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역사에 하느님이 개입하셔서 그 역사를 바꾸고 계시다고는 믿지 않는 그런 신앙생활은 아닌지요? ‘공의의 하느님’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이 땅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부정과 불의에 대해서 하느님은 어떤 공의로운 조치도 취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우리 머리 속에만 존재하실 뿐 실제로 우리의 삶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 분, 결국 있으나마나 한 그런 신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결국 이런 생각 속에서 무신론(無神論)이 싹트게 됩니다. 이 땅에서 저질러지는 모든 악과 불의에 대해 무관심한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세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천재지변에 의한 죽음과 고통, 그리고 인간들의 욕망을 따라 벌어진 전쟁과 그로 인한 죽음과 고난, 그리고 불평등한 경제 구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볼 때,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그것은 하느님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결과는 머리로만 하느님을 이해하려 하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하느님을 내 생활 속에서 만나야 합니다. 설교로만 들었던 하느님이 아니라 내가 직접 만난 하느님, 신학이나 철학에서 말하는 유신론(有神論)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 속에서 경험된 하느님,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나 기억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매일매일 치열하게 기도하면서 만나는 하느님, 이 하느님이 바로 살아 계신 하느님이며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십니다.

  십자가를 지신 하느님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은 저 하늘 위에 고고하게 앉아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고난당하는 인간의 역사 속에 직접 들어오셔서 친히 고난을 당하시는 분임을 신약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유일하신 아들이 친히 종의 형체로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든 고통을 친히 체험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고통과 무관하게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그 고통을 친히 맛보시며 아파하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단순히 그 순간의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고통을 알고 계시며 아파하심을 뜻합니다. 2천 년 전에만 십자가의 고통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가 계속되면서 일어나는 모든 고난을 하느님이 아파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 안의 고통 중 하느님의 고통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와 무관하게 계신 분이 아니라 그 역사를 아파하시면서 그것을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시기 위하여 일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오늘 우리의 고통 가운데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2천 년 전 예수님을 못 박았던 나무토막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 일어나는 모든 고난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입니다. 오늘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죄악과 불의와 죽음과 고난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입니다. 그 고난의 역사에 하느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뜻합니다. 오늘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고난을 하느님이 외면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난 한복판에 하느님이 계시며, 그 고난 때문에 아파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와 생명을 파괴하는 강대국들의 정치와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세계 곳곳의 기아와 고난에 함께 하고 계십니다. 오늘 하느님은 80일 가까이 단식하며 투쟁하고 있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에, 철도공사에 직접 고용을 촉구하며 9백일 넘게 싸우고 있는 KTX 여승무원들의 아픔에, 외주화와 대량 해고에 맞서 400일 넘게 투쟁하고 있는 이랜드 홈에버 여성 근로자들의 고난에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역사의 고난과 내가 개인적으로 만난 고난 가운데 모두 하느님이 함께 계시며 그 고난을 친히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고난은 하느님의 것이며, 따라서 그냥 넘어가지 않고 반드시 하느님께서 그 고난을 치료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그 가운데 와 계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뵙기 위하여 고난이 있는 현장을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저들의 절절한 외침을 귀기울여 들을 때 우리는 거기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아파할 때 긍휼로 우리와 함께 계신 ‘아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기 가 아플 때 그 엄마가 그 곁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내가 아플 때, 내가 고난당할 때 긍휼이 많으신 하느님은 결코 내 곁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나와 함께 아파하시며 나를 지켜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면서 그 고난을 친히 끌어안으심은 인간을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읽어 드린 베드로전서 2장 24절 말씀이 이를 말해 줍니다.

그는 우리 죄를 그의 몸에 몸소 지시고,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을 친히 당하시면서 그 고통을 이겨내신 분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고통에 대한 하느님의 최후의 승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그가 이 세상의 모든 어둠과 죄악과 죽음을 극복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 땅의 모든 고통을 자기 안에 짊어지신 하느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이 땅의 모든 죄악, 부조리와 부정의 그리고 고통과 죽음이 극복될 하느님의 새로운 미래로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오늘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부활로 나아가도록 새로운 미래가 우리 앞에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이 역사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 기가 꺾였고, 새롭게 열린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는 그 세력을 뻗칠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맹위(猛威)를 떨치면서 우리를 괴롭혔던 고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열린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는 침범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다시는 죽음을 맛보지 않으며, 고통을 당하지 않으며, 다시는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을 것임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내가 당한 고난 가운데서 주님을 만날 때 그 주님은 나의 고난을 감싸 안으시는 긍휼의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그 고난을 극복하시는 부활의 주님이 되십니다. 내가 아플 때, 내가 고난당할 때 조용히 주님을 기다리면, 주님께서 그 아픔에 함께 하시면서 “너희는 세상에서 시련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고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새 날이 우리 앞에 마련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는 하느님이 정말 살아 계신 하느님이며, 머리로 아는 하느님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하느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야훼 하느님은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해서 알게 되는 신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만나는 하느님이시며, 내가 당하는 고통 속에 와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저 멀리 하늘 위에만 계셔서 우리의 고난을 잊고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인간의 고난 가운데 오셔서 그 십자가를 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고난의 역사를 떠나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고난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아파하며 투쟁할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에게 힘을 더하시고, 마침내 죽음의 세력을 꺾고 승리의 부활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절대 군주나 독재자처럼 위압적이며 무자비한 하느님이 아니시라 긍휼로 우리를 돌아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은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03:8)

  이제 내게 다가온 고난을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조용히 기다리며 그 고난 가운데 와 계신 긍휼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역사의 혼란을 한탄하며 욕만 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그 모든 죄악과 불의를 소멸하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므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이 역사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이 역사의 고난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매일 만나시므로 늘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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