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마음의 평안

요한복음 조용기............... 조회 수 3005 추천 수 0 2009.05.23 14:51:05
.........
성경본문 : 요14:27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4년 8월 22일 주일3부설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마음의 평안’ 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어떤 큰 부자가 있었는데 부귀, 영화, 공명을 다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늘 마음이 불안하고 평안이 없어요. 그래서 평안에 대한 그림 한폭을 사서 응접실에 걸어 놓고 주야로 바라보면 평안이 오지 않겠나 싶어서 평안에 대한 그림을 사겠다고 광고를 냈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평안에 대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느날 그 그림을 갤러리에 전부 전시해 놓고 이 부자가 화가들을 잘 대접을 한 이후에 그림구경을 나갔습니다. 여러 그림을 구경하는 중에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야말로 평화로다!”하는 그림이 있었어요. 그것을 보니까 깊은 산골에 상함도 해함도 없는 자연속에 싸여있는 큼직한 호수가 있었는데 물은 잔잔하고 그 호수에 주변에 있는 수양버들나무가 그림자처럼 떠있고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흰구름이 호수에 떠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습니다. “야~ 이 그림을 저분이 사겠구나!”하고 생각했는데 이분은 잠시동안 그 그림 앞에 머물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지나가다가 “이것은 정말 현실적인 평화로다!” 어느 시골 동리에 한낮인데 장닭이 날개를 펼치고 발을 딛고 서서 목을 내어밀고 꼬끼오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보니까 개는 늘어져서 잠을 자고 소는 여물을 씹고 앉아 있습니다. 아무런 불안의 징조가 보이지 않습니다. “야~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평화로운 그림이라고 했는데 이분이 그 그림 앞에서 서서 보다가 고개를 흔들고 또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것은 평화가 아니다. 이것은 불안 투성이라고 생각하는 그림앞에 부자가 섰습니다. 굉장히 큰 폭포가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로 퍼붓고 있습니다. 그 옆에 바위 투성이 속에 한줄기 나온 싸리나무에 가슴붉은 로빈새가 둥지를 틀고 알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바람이 불어오면 그 폭포에 물보라가 거리에 넘쳐와서 그냥 싸리나무는 물에 싸이고 둥지는 떠내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요란스러운 그 폭포옆에 험한 바위 사이에 겨우 나온 싸리나무에 둥지를 튼 가슴 붉은 로빈새는 둥지에 앉아서 조금도 불안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 부자가 이 그림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평화로다.“ 그래서 샀습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내가 볼 때 굉장히 불안에 꽉 들어찬 이 그림을 평화라고 샀습니까?“ 하니까 ”여보시오. 참 평화란 것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환경이 아무리 평안해도 가슴속에 불안의 바람이 불어오면 환경의 평화는 소용이 없오. 그러나 환경이 이와같이 폭포가 물을 쏟아내고 소리가 요란하고 바위에 연약한 가지에 휘청휘청하는 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이 로빈새를 한번 보십시오. 조금도 불안을 느끼지 않고 앉아 있습니다. 환경이 어떻게 되든 그는 마음속에 평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평화입니다.“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읽어본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참된 평화란 마음속에 평화입니다. 돈이있어 평화한 것, 환경이 좋아서 평안한 것, 권세가 있어서 평안한 것은 얼마있지 아니하여 다 무너집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환경의 평화는 얼마있지 아니하면 다 사라지고 마는 것은 환경의 평화가 우리에게 평화를 갖다줄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은 우리는 마음속에 평화를 가질수가 있겠습니까?

[본론]
1. 탐심과 마음의 평안

첫째로, 마음의 평화는 탐심이나 욕심이 들어오게 되면 산산히 깨어집니다.
탐심이나 욕심을 제거해야 마음에 평화는 명경지수같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보세요. 얼마나 평화로운 환경에 살지 않았었습니까?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낙원 동산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평화롭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와서 그들 마음속에 탐심을 넣어 주었습니다.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심과 탐심이 들어오자 그들의 평화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은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마음에 평화를 잃어 버리자 하나님을 반역하게 되고 하나님과 등을 돌리고 쫓겨 나오자 부부간에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가정은 불안하고 맏자식이 둘째 자식을 죽이는 큰 불행까지 다가오게 된것입니다. 여러분 탐심, 욕심이 들어오면 평화는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우리 마음속에 귀신이 탐욕과 욕심을 갖다 놓지 못하도록 경계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끝까지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사명을 다할 수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에 평안을 잃지 않으신 이유는 욕심을 갖지 않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귀가 사력을 다해서 예수님 마음속에 욕심을 심으려고 했습니다. 식욕, 세상의 욕망을 심으려고 했습니다. 명예욕을 심고 그리고 부귀, 영화, 공명의 욕심을 심으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 마음속에 욕심과 탐심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평화를 가지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충성하고 죽기까지 자기몸을 내어줄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의 주어진 삶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텔레비젼 인터뷰에 나온 탈북여성 한 사람이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아나운서가 묻기를 “북한과 대한민국의 삶을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그 여성이 하는말이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수치적으로 북한과 남한은 비교할 수가 없을만큼 북한은 가난하고 남한은 부유하게 잘 삽니다.” “그러면 남한에 대해서 당신이 충고해줄 말이 있습니까?” “있지요.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너무나 부요해서 한국 사람들은 절제하지 못하고 아낄줄 모릅니다. 예를들어 말하면 우리 북한에서는 조그만한 종이 한 장이 있으면 연필로 글을 다쓰고 그 다음에는 연필위에 볼펜으로 글을 다 씁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너무나 종이가 흔해서 여백이 많이 남아 있는데도 그것을 구겨서 내버리는 것 보면 마음이 아파요.” 맞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절제하는 미덕이 있어야 마음에 평안이 있지 물질을 한없이 공급해 주고 소유한다고 해서 물질로 말미암아 만족이 오지 않습니다. 절제하는 마음과 있는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있어야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자꾸 남과 비교하고 비교적 가난을 호소하고 탄식하면 언제나 불행해지지요. 그러나 있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 하나님은 더 주는 것입니다. 스펄젼이 말한것처럼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면 천당을 주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있는 것으로 우리가 감사해야 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기를 “없는 자에게는 있는것조차 빼앗아 버리겠다” 했습니다. 내가 항상 없는 것을 바라보고 원망, 불평, 탄식하고 욕심을 품고 발버둥을 치면은 있는것조차 자꾸 뺏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있는 것을 보고 지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감사하고 기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더 많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에 빌립보서 4장 4절로 7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하고 해를 보고 감사하고 달을 보고 감사하고 환경을 보고 감사하고 조그만한 풀한포기, 꽃한포기 보고도 감사를 할줄 알면 우리 마음속에 평안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마음속에 파동을 일으켜서 불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6절로 8절에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으로 만족할줄 알면 평안하고 불행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끔가다가 1958년도에 제가 불광동에서 교회를 개척할때를 회상합니다.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깔고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무지무지하게 춥고 먹고사는 것이 어려워서 원조물자를 받아서 밀가루로 조그마한 빵덩어리를 만들어서 그것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지 않았어요. 그때도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 웃고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양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음에 그리스도가 있어 평안하니까 그 환경이 그렇게 열악했지만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보다 그때가 더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때 비교해서 엄청나게 좋은 곳에서 살고 잘먹고 잘입지만은 그러나 그때에와 지금과 비교할 때 그때보다 더 마음속에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세계는 마음에 평화가 있을때에 유익이 되지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아무리 부요한 환경도 우리 마음속에 행복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국민 10명중 4명이 복권 대박을 꿈꾼다고 합니다. 고액의 로또복권이 발매되자 직장인의 40%가 로또복권을 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보다 복권이 일찍 시작된 미국에서 한 언론사가 1천만 달러, 한국돈으로 약 120억원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 70명을 대상으로 당첨된 후 5년후에 그들 삶이 어떤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80%에 해당하는 56명이 당첨이후 더 불행하게 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불행에 대한 첫째 이유는 가정파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큰 돈이 생기니까 얼씨구나 좋다고 좋은 차로 바꾸고 집도 좋은 집으로 옮겨가고 좋은 옷도 있고 좋은 음식도 먹어 좋은 것 같지만 얼마있지 않다가 그 돈으로 그 부인은 야금야금 친정집에 자꾸 도와 주려고 합니다. 친정 부모님, 친정 오빠, 친정 동생들에게 자꾸 돈을 주려고 한다. 남편은 자기 본가에 도와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 자기 형제들에게 돈을 드립니다. 돈 때문에 부부간에 싸움이 나서 결국에는 이혼하고 마는 가정이 허다하게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예가 있지요. 얼마전에 동거하던 남녀가 복권에 당첨되었는데 여자가 그 복권을 가지고 친정으로 도망을 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쪽에서 법원에 소송을 건일이 있었습니다. 복권 당참 안되었으면 그 부부간에 오순도순 있는 것으로 잘 살것인데 그 놈의 복권 때문에 화가 와서 행복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은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마음에 평안을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복권에 당첨 안되었을때는 밤에 다리 쭉뻗고 잤는데 복권이 당첨되었다고 신문과 라디오에 방송되고 난 다음에 도둑이 들어올까 싶어 겁이 나가지고서 문풍지 소리만 나도 깜짝깜짝 일어납니다. 불안신경증에 걸렸어요. 그리고 난 다음에 대문에 누가 손만 두드려도 놀란 가슴을 쓰러 내리는 것은 복권이 공짜로 당첨되었다고 하니까 온갖 일가친척, 친구들이 돈달라고 다 다가오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사람만 많아도 간이 덜컹 내려 앉습니다. 모두다 “너는 공짜로 복권 탔으니 그돈좀 나누어 쓰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다 원수가 되고 대적하게 되고 불행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복권의 당첨이 결국 가정을 무너뜨리고 마음에 평안을 뺏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복권 당첨같은 탐욕을 이루는데 있지 않고 주님을 믿고 마음속에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2. 죄책과 마음의 평안
둘째로, 마음에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내 마음속에 죄책이 없어야 됩니다.
죄책이 있는 곳에는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죄책이란 뭡니까? 계명을 어길 때 죄책이 다가오잖아요.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을 거짓증거 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 하나님의 계명이 마음속에 있는 이 계명을 짓밟아 버리면 그 대가로 다가오는 것은 깊은 양심의 가책입니다. 계명에 등을 돌려도 양심에 가책이 다가오고 계명이 눈에 안보이도록 천으로 덮어 버린다해도 마음에 양심엔 소리쳐 고함치는 것입니다. 법을 알고 어길 때 양심이 괴로운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2절로 24절에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양심에 가책은 마음에 깊은 곤고함을 가져옵니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마음에 괴롭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잊어버리지 싶어도 법을 어기고 마음에 양심에 가책과 죄책을 받으면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늘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에드거 알렌 포어의 작품중에는 죄책감으로 고통당하는 인간의 양심을 생생하게 묘사한 정죄하는 양심이란 글이 있습니다. 이글의 주인공은 아무도 모르게 사람을 죽여서 자기 집 지하실에 파뭏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입 닫고 모른체했는데 그날부터 시작해서 지하실에 파뭏어 놓은 그 시체의 심장소리가 귀에 똑딱똑딱 들리는 것입니다. 자려고 해도 지하실에 파뭏은 시체에서 심장 소리가 들립니다. 놀래서 그는 전등을 들고 내려가서 지하실에 파뭏어 놓은 것을 도로 파헤쳐서 그 심장에 손을 얹어 보니까 움직이지 않습니다. 파뭏어 놓고 올라오면 또 그 심장소리가 두근두근하고 들립니다. 밤낮으로 죽은자의 심장소리가 들려서 그는 미칠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알아보니까 그 죽은자의 심장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자기의 가슴속에 양심이 그 심장소리를 계속내어서 그는 견딜수 없는 고통가운데 빠졌다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을 보았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양심이 끊임없이 자신을 정죄하고 비판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양심의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통회자복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마음을 씻어내는 길밖에는 절대로 평안이 없습니다. 죄를 지은 그대로 마음에 평안을 가질수가 없지요. 그리고 또 악한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이사야 48장 22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악은 들끓는 바다의 물거품 같습니다. 물거품이 끌어 오르듯이 자기 마음속에 악이 끌어 오르면 자기도 고통스럽고 끊임없이 이웃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악한 남편은 처자식을 못살게 굽니다. 악한 아내는 남편의 바가지를 끍어서 집을 떠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악한 이웃을 만나면 하루도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악은 자기를 괴롭히고 이웃에 한없는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악도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의로움을 얻어서 회복되어야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악을 돌이키게 하시려고 어마어마한 채찍을 때릴때가 많습니다.
이사야 38장 17절에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죄와 악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변화시키지 않으면 절대로 해방될수 없는 힘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말씀한데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악은 자기를 괴롭히고 남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외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신병이 되어서 12년동안 고통당하다가 죽었습니다. 뉴욕의 지하철에 가보면 벽에 니체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죽었다고 하더라.’ 그 밑에 더 선명한 글로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가라사대 니체는 뒤졌다 하더라.’ 맞었어요. 하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죽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죄와 악을 가지고 저항을 해봤자 얼마가는 것입니까? 독일의 히틀러를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을 반역해서 그 마음에 악을 품으니까 온 구라파를 초토화하고 유대인 6백만명을 학살하고 자기 동족 5백만명을 총알받이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자기는 최후에 지하실에서 권총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악은 남과 자기를 극도의 불행속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우리 가까운 이웃 일본을 보십시오.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키고 그들이 대동아를 손아귀에 넣겠다는 악한 마음으로 얼마나 많은 우리 한국 사람들을 죽이고 고통하고 중국을 짓밟고 동남아를 괴롭혔습니까? 그 일본 군국주의 악이 결국에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원자탄 세례받고 자기들도 절망의 나락속에 떨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반역하는 곳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곳에는 무시무시한 살상과 비참한 죽음이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을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악을 마음에 품으면 평안을 결코 얻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독재자가 행복한줄 알지만 독재자는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독재권력을 휘두르면서 악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그 악이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극한 불행과 고통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셋째로, 우리가 마음속에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십니다. 우주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의 통치하에 살면서 그 하나님을 반역하고 대항하고 마음속에 평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한 가정에도 부모를 거역하고 부모에게 대항한 자식이 마음속에 평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37장 16절에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창조주를 거역하고 평안은 없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평안이 있을줄 압니까?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역사는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여러분 구라파 역사를 볼때에 앗수르가 천하를 통일하고 영원히 존재할줄 알았는데 앗수르는 바벨로니아에게 망했습니다. 바벨로니아가 영원히 계속할줄 알았는데 페르시아에게 망했습니다. 페르시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천하를 호령할줄 알았는데 그도 죽고 나뉘어 지고 로마로 통일 되었습니다. 역사에서는 가장 강력하고 방대한 땅을 가진 로마가 영원히 존재합니까?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폴레옹도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으나 무너지고 히틀러도 그 꿈이 사라지고 소련의 스탈린도 무너지고 독재를 하고 역사를 자기힘으로 주장하려고 하는 사람은 살아남을수 없습니다.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고 역사는 사람이 만들어 간다는 오만방자한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저항하고 대적하는 사람이요, 결코 그것이 실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나중인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도 어떠한 정치가의 손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손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북한의 역사도 하나님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남북의 통일도 사람의 지혜와 총명과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역사를 주관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순종해서 역사를 움직여 나가면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생사화복도 하나님이 주장하시지요. 우리가 40대 이상 살은 사람은 뒤를 돌이켜 볼때에 인생이 자기힘으로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0대 혈기방장할 때 하나님을 믿지 말고 내 주먹을 믿으라. 나 지혜와 총명과 수단과 방법으로 운명과 환경을 다스려 나가겠다고 큰소리 하지만 사람이 40대 이르러 보면 인생이 자기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인생은 자기 노력 이외에 어떤 외부적인 위대한 힘이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힘이 무엇입니까? 안믿는 사람은 사주, 팔자, 운명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 6절로 7절에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그러니 인간의 운명이 우리의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내가 더하여 주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생 주장을 우리가 믿고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권은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절대주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여러분 해도 서고 달도 섭니다. 하나님 명령하시면 바다도 갈라지고 태산이 변하여 평지가 될 수 있습니다.
역대상 29장 11절로 12절에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이 절대주권자를 내 하나님으로 삼고 이 주권자를 우리나라의 하나님으로 삼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 들어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반역하는 곳에는 평안이 절대로 없습니다.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평안을 가질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길 장사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용사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어찌 평안을 도모할 수가 있겠습니까?
시편 127편 1절로 2절처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노력하는 것은 현재 눈으로 보기에 성공같으나 지나고 보면 실패입니다. 하나님 없이 잘된 것 같으나 지나고 보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 12절로 13절에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찌어다 심히 떨찌어다 두려워할찌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인본주의에 서서 인간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서로 삶에 웅덩이를 팠으나 그 웅덩이의 물은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현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없이 잘살아 본다고요? 될것같지요? 그러나 그가 하는 모든 도모는 이미 금이 가고 구멍이 뚫어진 웅덩이와 같은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 19절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왜 세상에 이렇게 고통이 심합니까? 왜 우리나라에 이렇게 고통이 심해요. 왜 우리 가정과 내 가슴속에 고통이 끊어지지 않습니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 거기에 말하기를 “내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그것이 악이 되고 고통이 되어 그 속에 신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평안하고 복을 받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자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서 얻은 평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신을 발견하기 전에는 마음속에 안식할 곳이 없었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발견하고 하나님을 모시기 전에는 어느곳에나 가시밭이요, 백사장이요, 우리의 쉴곳은 찾아볼수가 없는 것입니다.

4.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넷째로, 마음에 평안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웃과의 평안한 관계를 가져야 마음에 평안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가까운 이웃과의 평화가 마음의 평화의 온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부모하고 화목해야 되는 것입니다. 불효한 사람, 부모를 거역하는 사람치고 그 가슴속에 평화가 있을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계명 가운데 첫째 계명으로 “자녀들아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세상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잘못되고 빨리 죽을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모에게 반역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평안을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화해해야 될것입니다.
잠언서 19장 26절에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 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
잠언서 23장 25절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마음에 평화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부부와의 불화인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싸움하고 마음평안 합디까? 저도 젊을 때 우리 집사람하고 많이 싸웠습니다. 이제는 안싸웁니다. 그런데 부부가 싸우고 난 다음에 직장에 나오면 직장의 일에 마음이 집중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모든 것이 집중할 수 없고 안정되지 못합니다. 부부하고 싸우는 사람치고 세상에 사업잘하거나 생활 잘하는 사람 없습니다. 불안하니까. 그리고 부인은 남편하고 싸워서 남편이 아침도 안먹고 그냥 그대로 직장으로 나가면 평안해요? 괜히 애꿎은 개나 발길로 내리차고 어린아기나 때리고 그릇이나 와장창 깨뜨리고 불안하니까. 평안이 없습니다. 부부간에 화평한 것이 평안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서로 동정하고 서로 인내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서로 보조를 맞추어 가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부간에 평안이 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잠언서 17장 1절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서 15장 17절에는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를 갈고 거품을 물고 싸우면 무슨 행복이 있습니까? 채소만 먹고도 오순도순 서로 사랑하면 평화롭고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예전에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던 자매님 한분하고 신앙상담을 했습니다. 그 자매님은 병이 너무 깊어서 이제는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일을 해야 자식들을 기를수가 있는데 그래서 온갖 병원에 가고 온갖 약을 먹어도 안 나아서 제게 기도받으러 왔습니다. 저도 안수기도를 자꾸해도 병이 안낫기에 자매님에게 물었습니다. “자매님! 누구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자매님이 “목사님 저는 남편을 죽일만큼 미워합니다. 내가 있으면 칼로써 찔러 죽이고 싶습니다. 미움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기도도 안나오고 감사도 안나오고 예배도 안돼요. 그래도 나는 안미워 할 수가 없는 것은 허구헌날 바람만 피우고 돈만쓰고 다니면서 처자를 돌보지 않으니 내가 애들 먹이고 기르고 공부시킬려니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서 내 몸조차 병들었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악만 남았습니다.” 이 자매님의 병은 남편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온것입니다. 물론 남편이 그 책임이 있지만 그러나 미워하는 마음이 그 마음에 이 무서운 병을 일으킨 것입니다. 미움과 분노는 마음의 파괴자입니다.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인간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정신적인 요소가 미움과 분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미움과 분노를 품고 있으면 이것이 우리에 영혼을 파괴하고 마음을 파괴하고 육체에 질병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말하기를 “적을 위한 불을 너무 활활 태우지 말라. 그 불이 너 자신을 태우리라”고 했습니다. 미움과 분노의 불길이 마음에 활활타면 적을 태우기전에 내가 먼저 불타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식과 불화하면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자식과 참 평화하기가 힘들잖아요. 요사이 자식들은 옛날과 달라서 부모말 듣습니까? 요사이 가장 어려운 것은 어른이 없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어른을 몰라봐요. 제가 얼마전에 우리 동창들 모여서 왜 요사이 애들이 아버지말을 안듣느냐. 그 이유를 설명하다가 어떤 동창 한사람이 말하기를 “이유가 있다. 수염이 없어서 그렇다. 옛날에 어른이 수염을 턱 기르고 어험~하면 애들이 오면 야~ 나하고 다르구나 나는 수염이 없는데 저분은 염소같이 수염이 이렇게.. 그러니까 권위가 서서... 우리가 수염을 깍아 버려서 요사이 애들이 순종 안한다.” 그러니 다른애가 하는말이 우리 동창중에 육군 대장이 있었는데 “너는 애들이 순종 잘하냐?” “나는 대개 순종 잘한다.”하니까 다른 동창이 하는말이 “이유가 있지. 권총을 차고 있기 때문에..” “너는 아침 저녁으로 권총을 탁 차고 있으니까 애들이 그것을 보고 놀래 가지고서 순종하는데 우리야 권총 아니라 나무 막대기도 안차고 있으니까 순종할 턱이 있느냐.” 여러분 요사이는 어른을 몰라주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어른을 몰라주는 자녀들이 학교가서 선생을 선생으로 취급합니까? 사회에 나가서 선배를 선배로 취급합니까? 지도자를 지도자로 취급합니까? 다 너나 나나 한패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큰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와 화목하기가 힘이 들어요. 너무나 부모말에 불순종하고 부모와 다른 생각을 하고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찌하든지 자녀를 잘 훈계하고 위해서 기도하고 돌봐서 평화를 가져야 부모의 마음속에 평화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웃과의 평화가 얼마나 필요합니까? 이웃과 불화하면 평화가 없습니다.
잠언서 10장 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절로 3절에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말씀대로 사나요?“ 우리 모든 사람들은 율법의 자를 가지고서 인생을 살아갈때가 많습니다. 율법의 자로 재면은 언제나 율법을 어기는 남의 허물을 봅니다. 남편이 율법주의적인 남편은 사사건건이 아내의 잘못을 들춰내고 벗기고 상처입히고 책임을 덮여 씌우고 짓밟습니다. 율법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율법적인 아내는 늘 남편의 못된것만 보이고 못난것만 보입니다. 늘 남편을 원망하고 남편에게 상처를 입히고 남편을 짓밟습니다. 율법 때문에 그런것입니다. 우리사회가 오늘날 편가르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남북이 서로 갈라져서 서로 편가르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동서가 갈라져서 편가르기 하고 노사가 갈라져서 편가르기 하고 노인과 젊은이가 편가르기 하고 지식인과 무식인인 편가르기 하고 있는자와 없는자가 편가르기 하고 우리나라의 현실의 비극은 전부 편가르기 하는 것입니다. 네편 내편에 가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율법적인 자를 가지고 ”너 내 자에 맞지 아니하면 너는 나의 원수다. 내 자에 맞춰.“ 어떻게 자기 자에 모든 사람을 다 맞게 만들수가 있는 것입니까? 자기에게 맞지 아니하면 벗기고 할퀴고 흙칠하고 짓밟는 것입니다. 그러면 함께 망하지요. 성경은 뭐랍니까? 설로 물고 찢으면 함께 망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집안이 나누어지면 그 집안이 망하고 나라가 나누어지면 그 나라가 망한다고 한것입니다. 우리의 국가는 서로 자꾸 편가르고 나누어질것으로 하지 말고 어찌하든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화해하고 하나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어 단결해서 나가도 오늘날 국제경쟁에 살기 힘든데 우리나라가 서로 미워하고 서로 적대감을 가지고 서로 나누어져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사이 우리 정치인들이 하는 것 보십시오. 우리가 뉴스를 볼 때 국회에서 정치인들이 서로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며 화합하고 일치되어서 국민에게 꿈과 환상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밤낮으로 물고 찢고 싸우고 편가르기 합니다. 니편 내편. 너는 나쁘다. 나는 좋다. 편가르기 하고 국민들은 마음속에 상처를 입고 방황하는 목자없는 양같이 허덕이고 경제는 어려워지고 앞날이 캄캄해서 희망과 꿈을 잃어버리고 힘을 잃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편가르기 하지 말아야 됩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 바울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뒤엣것은 잊어 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자. 우리 한국의 과거사 정리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학자들에게 맡기고 정치인들은 우리 현재 살길을 열어 줘야 되는 것입니다. 과거사 문제를 정치가 그것을 끌어앉고 미전투구를 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 한국의 과거사가 얼마나 험난한 과거사입니까? 일정 36년에 6.25사변에 군사정권에 그 모든 것을 지금 정치적으로 다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학자들에게 맡기고 오랜 세월을 통하여 역사를 정리정돈하는 것은 좋은일이지만은 현실은 우리에게 생계가 급박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국제경쟁력을 상실해 가고 생활이 어려워지고 경제가 도탄에 빠졌는데 정치권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꿈을 주지 않고 과거사 문제나 들추고 서로 벗기고 서로 상처입히고 서로 책임전가하고 서로 짓밟으면 국민은 어디로 갑니까? 이것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큰 근심이 있고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정욕 때문에 정치적인 동기와 목적 때문에 서로서로 편가르고 서로 대결하고 싸우면 함께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절에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말한 것입니다.
언젠가 저는 일반인과 대학생이 모여 토론하는 모임에 참석한 일이 있는데 그런데 대학생들이 대표가 일어나서 기성세대는 하나같이 부패했고 이중양심을 가졌고 보수, 꼴통들이라고 그러니 기성세대인 우리는 앉아서 입만 딱. 그때에 제가 일어나서 한마디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 성령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저들은 아직 세상을 잘 모른다. 그래서 율법의 눈으로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거야. 네가 저들을 잘 이끌어 주지 않고 오히려 흥분해서 같이 율법적인 판단을 하면 저들이 더 삐뚫어지게 된다고 말씀하시기에 저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런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기성세대를 논하지만 우리는 일정 36년에 짓밟히고 6.25의 피난살이에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우리는 헐벗고 굶주리고 못입고 단칸방에 살면서 이 나라를 건설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여러분은 모릅니다. 얼마나 한국강산이 잿더미가 되고 우리는 살길이 막연했습니다. 모두다 꿀꿀이죽에 원조물자의 옷을 입고 원주물자의 음식을 먹고 피와 눈물과 땀으로 이땅을 건설했습니다. 그 과거를 여러분은 알아줘야 돼요. 무조건하고 기성세대는 바보, 천치, 이중잣대를 가진 사람들, 꼴통들이라고 그렇게 매도하면 안됩니다. 물론 우리 기성세대가 잘못한것도 많아요. 제일 잘못한 것이 여러분 잘못 키운 것이 제일 잘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부모를 이해해줘야 돼요.” 그 대화를 마치고 난 다음에 한 학생의 어깨를 제가 두드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생, 그래도 우리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그리고 당신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힘써 노력해서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세상보다 더 훌륭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주세요.” 그랬더니 그 학생을 나를 딱 처다보더니 “훌륭한 사람이 되고 안되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왜 당신이 참견해요.” 도무지 율법적으로 우리를 비평하니까 할말이 없고 입이 딱 닫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학생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한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주안에서 올바르게 자라고 훌륭하게 되어 이 나라를 더욱 빛낼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서로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가 갈등을 일으켜서 좋을것이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좋을것이 없습니다. 서로서로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으니까 서로 덮어주고 서로 치료해주고 서로 맑혀주고 서로 일으켜 세워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편가르기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 편갈라서 좋은일이 없습니다. 서로 끌어 안아줘야 돼요. 서로 덮어줘야 돼요.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일으켜 세워주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적인 관계를 맺지 말고 은혜적인 관계를 맺어야 돼요. 여러분 남편도 은혜의 눈으로 아내를 보세요. 아내도 남편을 은혜의 눈으로 보고 부모도 자식을 젊은이는 부모를 은혜의 눈으로 보십시오. 은혜는 덮어주고 치료해주고 씻어주고 살려주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눈을 보십시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넉마같은 인생인데 율법으로 심판을 했더라면 우리는 쭉 발가벗고 지옥으로 곤두박질 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사 우리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흘려서 그 보혈로 우리를 씻어서 덮어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우리를 정결케 해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되 풍성하게 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은혜 입었으면 나도 이웃에게 은혜를 입히는 우리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만 은혜를 받고 나는 다른 사람에게 율법적으로 심판하고 율법적으로 대해서는 결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화탕 이야기 들어본적 있습니까? 퇴계 이황 선생이 기록한 건강비법에서 활인심방에는 만병통치약인 중화탕의 비방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만병통치약입니다. 중화탕은 30가지의 약재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만병통치약은 의술로 고치기 힘든 병도 고칠수 있으며 원기를 돕고 사기를 물리쳐 건강하고 오래살수 있다고 하는데 그 중화탕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약방에 가서 돈주고 재료 살 필요없이 제가 중화탕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 드리면 오늘부터 건강을 가질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성된 약재내용이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 단단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퇴계 이황선생의 말입니다. 욕심을 적게 내라. 시기하고 질투하지 말라. 성을 내지 말라. 사악한 생각을 하지 말라. 자기 본분을 지켜라. 탐욕을 경계하라. 청렴하고 조심할 것.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야 된다. 사랑을 지녀라. 고요함을 지녀라. 이러한 교훈을 30가지로 해서 중화탕을 만들었습니다. 이 탕을 먹고 마시고 살면은 어떠한 병도 다 낫고 고침을 받는다고 퇴계 이황 선생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죄악과 세속, 욕심을 멀리하고 이웃과 화목할 때 우리의 마음은 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가득하게 되고 마음에 평안은 만병 통치약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생긴다고 합니다. 이 복잡한 세상에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온갖 만병이 다 생기는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이 평안해지면 모든 병이 다 사라지고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의료 선교사요, 탐험가였던 데이빗 리빙스톤이 1856년 아프리카에서 큰 위험을 만난적이 있습니다. 평소에 자신을 헤치려 하던 언부로 말하는 원주민 추장의 땅을 통과해야만 했는데 그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밤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로 20절 말씀을 그는 깊이 묵상하며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1856년 1월 14일 일기에 ‘이 말씀은 나에게 불안의 종식을 의미한다. 세상 끝날까지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지금도 예수님은 나와함께 계신다. 그러니 나는 평안하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말씀을 믿은 리빙스톤은 마음에 큰 평안을 가지고 담대하게 그 추장의 동리를 지나가는데 조금도 해를 받지 않고 평안이 지나갈수 있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말씀은 영적인 양식입니다. 세상양식도 먹어야 힘을 얻잖아요. 저는 어릴 때 아프면 우리 할머님이 죽을 끓여 오셔서 자꾸 나보고 떠먹이는데 안먹겠다고 하면 할머님이 “얘, 얘~ 쌀 한톨이 귀신 100명을 내어 쫓는다. 너 이것 먹어야 병마가 쫓겨 나간다.” 우리 할머님은 무식한 분이지만 우리 할머님이 주신 말씀이 제 인생을 변화시킨 일이 많습니다. 나는 이것도 늘 기억이 돼요. 요사이도 밥맛만 없으면 낟알 하나가 귀신 100명을 내어 쫓는다. 내가 먹어야 힘이 된다. 정말 우리가 낟알을 먹어야 육체의 힘을 얻는 것처럼 영적인 말씀의 양식을 먹어야 영적인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지 아니하고 자꾸만 여러분 흥분만 하기로 해서 박카스만 마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부흥회가서 자꾸 춤이나 추고 말씀은 내놓고 자꾸 흥분하기만 원하는 것은 내내 박카스만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돼요. 말씀을 먹어야 힘을 얻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고 정말 평안을 가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매일매일 살면서 마음에 평안을 위한 노력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노력을 해야 늘 마음에 평안을 가질수 있지요. 말씀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찬송하고 예배해서 하나님이 늘 내안에 안주하시도록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있어야 도둑이 안들어 오지요. 주인이 없는 집에는 온갖 도둑이 다 들어오지만 온갖 개와 짐승들이 다 들어오지만 주인이 딱 버티고 있으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고 집이 깨끗하게 보존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을 주인으로 딱 모시고 있으면 세상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므로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죄악과 세속 욕심을 경계해야 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족할줄 알고 살면 하나님이 더 주십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욕심을 부리면 에덴 동산에 갖다 놓아도 마음에 평안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좋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서 가정에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부모와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부부간에 화해하고 늘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부모, 자식 이웃간에 화목하고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면 만사가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라가 화목하면 그 나라가 부강하고 잘되게 되는 것입니다. 평화를 추구하고 화해를 추구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적인 관계를 갖지 말고 은혜를 만사를 바라보고 어찌하든지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고 남을 치료해 주고 남을 씻어 주고 남을 일으켜 세워주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같이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할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벗기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상처입히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발로 밟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씻어 주시고 덮어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깨끗하게 해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되 풍성히 주시는 역사를 베풀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만물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에
인간을 의지할 수 없사옵니다. 오직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의 마음속에 놀라운 평안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평안이 없으니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됩니다.
부귀, 영화, 공명이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 줄 수 없고 행복을 가져다 줄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주인으로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계실 때
참 평안과 행복을 누릴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575 갈라디아 성령으로 시작했으면 갈3:1-3  강종수 목사  2009-05-31 1965
1574 마가복음 운명과 자유 막10:32-34  정용섭 목사  2009-05-30 1898
1573 민수기 야훼의 자기 증거 민20:1-13  정용섭 목사  2009-05-30 2105
1572 골로새서 세계의 토대 골1:15-20  정용섭 목사  2009-05-30 1841
1571 마태복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팔복 [10] 마5:3-12  김형국 목사  2009-05-27 2797
1570 야고보서 시험이 없는 자는 성도가 아니다 약1:12-13  강종수 목사  2009-05-24 2345
1569 시편 하나님 중심의 삶 시127:1~2  조용기 목사  2009-05-23 3736
1568 욥기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욥5:7  조용기 목사  2009-05-23 3432
1567 누가복음 기도, 어떻게 할 것인가? 눅18:1~8  조용기 목사  2009-05-23 2271
» 요한복음 마음의 평안 요14:27  조용기 목사  2009-05-23 3005
1565 누가복음 참된 자유와 해방 눅4:16~21  조용기 목사  2009-05-23 2167
1564 창세기 버리고 따르라 창3:1~2  조용기 목사  2009-05-23 1859
1563 갈라디아 종교개혁 참 정신과 우상으로부터의 자유 갈5:1~6  김경재 교수  2009-05-22 2210
1562 룻기 다말과 롯에 대한 오해와 진실 릇4:9~12  이경숙 교수  2009-05-22 2716
1561 예레미야 내 중심에 타는 불 렘20:9  정지석 박사  2009-05-22 1896
1560 마태복음 매일 추수 감사 마6 :24~26  권진관 형제  2009-05-22 2285
1559 시편 함께 고난당하시는 하나님 시116 :1~14  유경재 목사  2009-05-22 1644
1558 마태복음 하나님 나라의 위기 마13:1∼9  임영수 목사  2009-05-21 2012
1557 고린도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고후5:16∼21  임영수 목사  2009-05-21 2677
1556 시편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 시23:1∼6  임영수 목사  2009-05-21 2291
1555 베드로전 기독교 영성 벧전3:15∼16  임영수 목사  2009-05-21 1947
1554 예레미야 우리와 다른 하나님 렘29:10∼14  임영수 목사  2009-05-21 2139
1553 로마서 희망을 잃지 마세요 롬5:3-4  한태완 목사  2009-05-19 1948
1552 시편 희망을 주는 사람 시71:5  한태완 목사  2009-05-19 2629
1551 요한일서 희생 요일3:16  한태완 목사  2009-05-19 1894
1550 마태복음 희생정신 마16:25  한태완 목사  2009-05-19 2241
1549 시편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 시145:14  한태완 목사  2009-05-19 2856
1548 잠언 하나님을 체험하라 잠8:17  강종수 목사  2009-05-17 2044
1547 사도행전 마술과 신앙 file 행13:4-12  정용섭 목사  2009-05-17 2366
1546 레위기 땅을 묵혀라! 레25:1-7  정용섭 목사  2009-05-17 1944
1545 요한복음 예수님을 먹다 요6:52-59  정용섭 목사  2009-05-17 2132
1544 출애굽기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출32:7-14  정용섭 목사  2009-05-17 2288
1543 요한계시 구름 타고 오십니다. 계1:4-8  정용섭 목사  2009-05-17 2006
1542 마가복음 막힘에서 열림으로! 막7:31-37  정용섭 목사  2009-05-16 2465
1541 베드로전 도전과 응전 벧전5:8~9  조용기 목사  2009-05-14 2289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