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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갈대아 우르와 약속의 가나안 땅을 맞바꾼 아브라함

창세기 궁극이............... 조회 수 2806 추천 수 0 2013.02.16 10:5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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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2:1-5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아브라함 

121-5.

 

1-5: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본토는 기존적인 거. 말씀드린 일이 있지요? 친척은 돌아다니는 거. 취미성. 육적 취미. 아비 집은 등 기대고 있는 거. ‘이것이 아니면 나는 못 산다하는 그 등을 기대고 있는 거. 그게 아비 집이라. 우리는 말씀에 등을 기댈 것이지요?

 

본토 친척 아비 집 이거 안 떠나고 기도하면 모두는 임시적인 기도가 됩니다. 떠나지 않고 그것 달라고 기도하거나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을 달라고 그래도 그건 아니라 그 말이요. 그리고 본토 친척 아비 집 즉, 갈대아 우르 그 자리에서 안 떠나고 있으면 천국이라고 하는 그 천국성은 모두 다 절단 나 버립니다.

 

육신의 죽음이 필연적이라면 영적인 죽음도 필연적으로 오는 겁니다. 육신의 죽음이 왜 있느냐? 영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이요.

 

영적인 것을 붙들고 정평 정가 하면서 살다보면 세상 것은 제대로 되는 겁니다. 세상 것은 신경을 안 써도 신앙생활에 염려 없이 이룰구원에 막힘이 없이 해 나간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영적인 면에서 신경 써나가면 물질적인 것을 주나 안 주나, 많이 준다 적게 준다그거 해석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 당신이 원하시면 어디에 있는 것도 아무리 멀리 있는 것도 그 사람에게 다 동원되게 만들어요. 하나님의 역사가 그래요. 다 동원되게 만들어 버려요.

 

마귀가 제 아무리 달라붙어가지고 찢고 자르고 못살게 굴어도 그 모든 사건의 이치 전부가 구원목적으로 동원되게 돼 있단 말이요. 그러니까 마귀 자기는 아무리 성도에게 원수노릇을 하고 해를 끼친다고 해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마귀를 들어서 성도의 구원이 더 잘 이루어지도록 이렇게 아예 설계가 돼 있단 말이요. 마귀 자기는 그것도 모르는 거지.

 

그러니까 이렇게 한 번 생각해봐요. 예수 믿는 우리가 제 목적대로 세상위주로 살다가 어떤 일이 잘못돼서 사업이 그냥 퇴보가 돼버렸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 방편을 통해서 나의 구원에 대한 것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놔요. 참 그거 묘해요. 구원에 대한 그 역사는 하나님의 예정대로의 막힘이 없어요. 전혀 그대로 돼 나가요. 문제는 인간 자기가 대립이 되니까 고통스럽고 괴롭고 한 거지.

 

히브리서 118절 한 번 읽고 지나갑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자존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 외는 전부 다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이 피조물계에도 신령계에 속하는 피조물과 물질계에 속하는 피조물이 있다. 마귀 천사 이거는 전부 다 신령계에 속하는 피조물이고, 그 외는 다 물질계에 속하는 피조물이지요? 그리고 물질계 속에는 또 비물질성이 있고. 인간의 영은 신령계에 속하고 인간의 육은 물질에 속하고. 피조물 중에 인간이 굉장히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영육 결합체는 오직 인간 자기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 물질계에 속하는 것 중에 불가식적인 것, 비물질인 것이 있는 것처럼 영에 속하는 비물질적인 무형적인 것이 육에도 또 있단 말이요. 우리 이성은 불가식적인 것이고 무형적이고 비물질적인 것이면서 육에 속하고 있습니다. 마음 사상 이성 양심 하는 거 모두 육에 속하는 거예요.

 

일반학자들은 사람의 요소를 구분하는데 있어서 영과 육으로 구분하면서, 영에는 순수한 영과 마음이나 이성 등을 영이라고 말을 하는데 이는 이론상 맞는 것 같으나 실질적으로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성을 영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다가 사선을 넘어갈 때에 육신과 영이 모두 다 천국에 가느냐, 안 그러면 영과 이성만 천국에 가느냐? 이니면 이성은 그대로 있고 영만 천국에 가느냐? 그런 면에서 대부분 구별을 잘 못 하지요. 우리는 영과 이성과 육을 구별해야 됩니다. 물론 우리가 이분설을 받아들이지만 육에서 물질적인 육과 비물질적인 이성으로 나누니까 그렇게 나눌 때는 삼분설이 돼버리지요.

 

에베소 21절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들이다.’ 이 말은 당시 에베소교인들에게만 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성도들 다 포함해서 말씀한 것이지요. ‘허물과 죄로 죽을 뻔이 아니라 죽었다그 말이지요. 죽었던 자라.

 

육은 독약을 마시거나 총칼에 맞으면 죽지요. 그러나 영은 그렇게는 안 죽지요. 총칼이 필요가 없는 거고. 그러나 영은 무엇으로 죽지요? 허물과 죄로 죽는다.

 

이성이 영이라면 현재 미중생자들이 이성이 작용을 해요, 안 해요? 현재 미중생자들도 이성 마음 생각 정신 사상이 작용을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성경에는 죽었던했는데 현재 예수 믿는 자들만이 아니라 현재 예수 믿지 않는 자들도 살아서 육체만 아니라 마음과 이성도 움직이고 있거든. 그러니까 이성은 영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작용하는 것은 아직은 살아있는 거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성은 영이 아니다. 그리고 미중생자들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거나 천국의 소망에 대해서는 있을 수가 없다. ? 영이 죽었으니까. 그러나 이성은 작용하고 있다. 이로 보건데 영은 이성과 신체의 작용과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성은 육에 속한 것인데 보통 보면 사람들이 다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지요?

 

그리고 로마서 8장에 보면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있어서 대립이 된다고 그랬단 말이요. 영은 완전히 독립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는데, 이성은 육신이 살아있을 때만 작용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은 독립성은 아닙니다. 육신이 살아있을 때만 작용을 하는 거니까. 이 이성과 몸은 그 사람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자신의 영에게 구원을 입히는데 필요한 것이다.

 

8:23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는데 우리 믿는 자에게는 이미 양자된 것이 있고, 앞으로 양자될 것이 있습니다. 중생한 영은 이미 양자가 되었고, 육은 양자가 될 것인데 우리의 몸이 되겠습니다. 8:15성령이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영은 이미 양자가 됐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양자된 이 영은 찰나적 단번에 주신 구원을 말하는 것인데 이 영 중생은 단번에 받은 것입니다. 이걸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대형 대행을 입고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적 중보로 된 기본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중보의 사역으로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단절된 것을 연결을 시켰습니다. 대형은 죄를 말함이고 대행은 칭의를 말합니다. 이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영이 영원히 죽지 않는 자로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심사해 보면 죽을 자기가 있는데, 핍박으로 이건 죽기도 하고 그래요. 또 죽었다가 살아난 자기가 있는데 이건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죽일 수가 없다 그 말이요. 자기 속에는 그런 자기가 있습니다. 서머나교회에 예수님이 나타날 때 죽었다가 살아난 주님으로 나타났지요? 어쨌든 죽었다가 살아나면 영원히 죽지를 않습니다. 안 죽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이, 특히 우리 교인들이 어떤 자기를 보호하고 양육시키고 있느냐? 그게 문제지요. 어떤 자기를 보호하고 양육하느냐? 보통 보면 죽어가고 있는 그 자기를 자기로 알고 있지요. 그렇지 않아요? 안 죽을 그 자기를 자기로 알고 살아야 하는 건데 죽을 자기를 자기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시간에 참 자기를 찾아야 되겠지요? 성경만이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생명관을 바꿔놓고 살아야 되겠지요?

 

영이 중생한 자는 육이 범죄 해도 영은 죽지 않습니다. 그러면 육이 죄를 지을 때 영은 어떻게 하고 있느냐? 영은 통분을 한다 그 말이요. 예수님의 통분하는 거와 같습니다. 성도들이 죄를 짓거나 거짓말을 할 때에 우리의 영은 자기의 양심을 두드리지요. 그래서 자기가 거짓말을 하면 거짓말을 한다는 그걸 자기가 느낄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잘못 생각하면 염세주의나 초절주의나 극기주의나 극복주의나 고행주의 자로 살아가기 쉽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 전에 내가 평택에서 개척교회 하려고 그럴 때에 들리는 소리가 장로가 그랬다던가? 저녁마다 산에 올라가서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대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는 그 연습을 한다고? 천주교에서는 고행주의로 나가는 게 있지요? 많아요. 교회 안에도 그런 게 많습니다. 고행주의. ‘자기를 괴롭게 하면 하나님이 긍휼히 보시고 찾아와 주시지 않겠는가하는 어떤 그런 거. 왜 그 어린애들이 밥 안 먹고 있으면 부모가 걱정을 해서 찾아와 주는 것처럼 그런 생각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그 자기는 영원히 안 죽으니까 어쨌든 영의 성장을 위해서 죽을 자기를 잘 보호를 하고 인용을 해야 합니다. 사망계에까지 내주지를 말아야 해요. 사망계에 내주면 안 돼요. 무슨 말인가 하니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게 해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육체도 죽을 것에 내어주면 안 되고, 썩을 것에 내어주면 안 된다 그 말이요. 우리의 몸도 성령님이 계시는 전 아니요?

 

예수님의 육체가 어디서 죽었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었지요. 그 괜히 죽은 건가요? 아니지요. 예수님의 인성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 있지요? 자연생명. 그런데 생각을 해봐요. 예수님도 생명에게 삼킨바 된 그게 아니면 안 되는 거요. 우리와 똑같아요.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100% 삼킨바 되게 살았습니다.

 

또한 우리의 육체는 죄에 감염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죄에 한 번도 감염이 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죽지 않을 수 있었으나 예수님의 죽음은 자원이었단 말이요. 예수님은 안 죽어요. 그런데 자원적으로 죽는단 말이요. 그러니 얼마나 좋겠어. 죽음도 내 마음대로야. 안 죽으려면 안 죽고, 죽으려면 죽고.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 오면 안 죽으려고 하면 안 죽어집니까? 어쨌든 인간이 참 신비롭다. 하나님을 알고 보면, 인간창조의 목적을 보면 굉장히 신비롭다. 참 신비로운 존재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망계에 들어갈 권리가 있지만 인간은 사망계에 들어갈 권리가 없어요. 즉 예수님은 죽고 살 권리가 있지만 우리는 그런 게 없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 예수님의 육신의 생명은 영의 생명에게 전부 다 흡수가 돼버렸습니다. 100%.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육체를 함부로 사망계에 내어주지 말아라. 이성과 몸도 영의 운동에 하나님 말씀에 참예를 시켜라 그 말이지요. 그러면 그게 다 부활 때에 자기 것으로 나온다 그 말입니다. 부활 때는 영체로 단일체로 변화된 것만큼 부활의 능력성으로 더 좋은 부활로 나타나는 거지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떠나라할 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떠났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이게 무슨 말인 것 같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떠나는데 이게 험한 길이 될지, 가시밭길이 될지, 시험의 언덕이 될는지, 앞으로 어떤 일이 다가올는지 그런 건 전혀 안중에도 없는 거요. 그러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고하는 거기에는, 그 말씀을 붙잡고 나가는 거기에는 아브라함은 부요던 가난이던 역경이던 상관없이 간다 그 말이요. 그렇게 믿고 가면 부자 된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그거와 상관이 없단 말이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것은 그런 거와 상관이 없이 가는 거.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가 70여 년 동안 정이 든 곳이고 보금자리가 있는 곳인데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안 버리려면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야 합니다. 말씀을 붙잡으면 떠날 것이 많고 버릴 것이 많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줄은 알지만 그 한 마디 말씀 속에 좋은 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면 떠나지를 못하지요. ‘말씀이냐, 갈대아 우르냐?’ 한 쪽을 붙잡으면 한 쪽이 울고. 그 누구요? 심순애와 이수일? 그래, 돈을 붙잡자니 무엇이 울어? 사랑이 울고. 사랑을 붙잡자니 무엇이 울어? 우리가 그게 얘기니까 그렇지 그런 사건이 오면 그게 행복일까, 고통일까? 말씀을 붙잡으려면 세상이 울고, 세상을 붙잡으려면 말씀이 울고. 참 어느 쪽으로 붙잡아야지?

 

아마 꾀 많은 성도는 말씀을 안 붙든다가 아니고 세상을 먼저 딱 붙들어놓고. 말씀은 좀 차차. 그렇지요? 이거는 말씀을 붙든 거요, 안 붙든 거요? 혹 나중에 말씀을 붙잡는다고 해도 말씀을 붙잡은 거요? 그래요. 그건 벌써 한 물 갔지. 우리가 한 물 가게 예수 믿는 게 많지? ‘, 요거다. 정말 내가 말씀을 만났다. 주님을 발견했다했을 때는 즉각적인 그게 탁 있어야 멋있지요. 그렇지 않아요? 안 그래요? 그런데 차차. 나중, 뜸 좀 들이고하는 이건 한 물 간 거지.

 

참 그게 이제 인간의 약은 꾀라 그럴까, 간사한 거라 그럴까? 인간이 그런다면 우리 주님도 그 자기에게 마찬가지로 대해줘요. 그와 같이 대할 수밖에 없어. 알고 보면 자기의 행동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진하게 오고, 안 오고 하는 그게 있어요.

 

우리는 가치를 잘 잡아야 되겠는데, 아브라함의 그 수권범위 내에 있는 재산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그거는 언제 버려져도 버려질 거고, 모두 임시성이 되는 거지요. 그러나 말씀을 붙잡으면 하나님이 계시는 겁니다. 말씀을 붙잡아 놓으면 점점 더 깊이 하나님을 발견하게 돼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 자신이 붙들려지지요. 그러니까 말씀과 하나님과는 연결이 돼 있는 거지요.

 

우리가 그런 것을 많이 봅니다. 전파가 날아온다 그랬을 때에 그 전파를 탐지하는 기계를 딱 대면 날아오는 전파의 방향을 알게 되지요. 이북에서 넘어온 스파이들이 통신할 때에 남의 집 모퉁이나 아니면 산에서 전파를 띠운단 말이요. 신호를 띠우면 한국 정보기관에서는 벌써 통신안테나가 있잖아요? 전파는 어느 쪽에서 쏘던 나오는 방향이 있기 때문에 전파 탐지기로 전파가 날아오는 쪽으로 선을 그어. 그리고 이쪽으로도 선을 그어. 그러면 딱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있단 말이다. 그 지점에서 전파를 쏘고 있는 거지요. 어쨌든 말씀을 붙잡으면 하나님 자체를 붙잡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버리면 하나님을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성령은 반드시 구원을 건설해 나간다는 것. 구원건설이 빠진 성령을 받았다 하는 건 악령 받은 겁니다. 알겠어요? 악령 악신은 구원건설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거냐, 저거냐하는 그 선택적인 면에서 갈대아 우르와 말씀을 바꾼 거지요. 갈대아 우르를 주고 말씀을 가진 것. 또 다른 말로 하면 예수 믿으면서 내 사업 잘 되게 해 달라. 내 집안 잘 되게 해 달라. 내 생활 풍족케 해 달라하는 그것과 말씀과 바꿨다 그 말이요.

 

사실 진리대로 사는 것에는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진리대로 사는 데에는 조건이 필요가 없다. 옳은 길이기 때문에 진리대로만 가면 되는 거예요. 성공 실패는 불문에 붙이고 진리대로 가면 되는 거지 조건이 필요가 없어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성공 실패 그런 건 나 알 바가 아니다. 그건 불문에 붙이고 다만 말씀만 붙들고 나간다.

 

역대 선진들이 말씀을 붙잡고 나가다 감옥과 처형장에도 들어갔지요. ‘꼭 부요를 주시거니하고 가는 것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하는 것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요. 그러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다하는 이거는 무슨 일이 올는지 모르나 그러나 각오를 하고 가는 것. 예수 믿으면서 부자 되겠다. 뭐 잘 되겠다그게 아니고 예수 믿으면서 내가 순교를 당하는 게 오더라도 그런 걸 다 각오하고 가는 것.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서 각오 속에는 거지가 돼가지고 죽을 각오, 순교당해서 죽을 각오 그 이상 어떤 각오를 더 해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말씀 붙잡고 안 놓친다하는 그 각오. 아브라함이 이렇게 앞으로 나가는 거란 말이요. 잘 될 걸 계산해놓고 잘 믿으면 어떻게 해 주겠지하는 그런 것 전부 다 불문에 다 붙여버렸다. 옳기 때문에 가는 거지 내가 그런 걸 달란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고, 안 달란다고 해서 안 주고 그런 게 아니란 말이요. 가다가 보니 상황이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고. 그러나 거기서도 계속 앞으로 나가는 것. 옳은 것만 붙잡고 나가는 것. 참 어렵지? 어렵지 않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안 올 줄 믿습니다. 만사 나쁜 사건이 안 올 줄 믿습니다그게 아니고 무슨 일이든지 각오하고 가는 것.

 

그 왜 그런 성경구절 잘 갖다 붙이지. 원수들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간다고? 그런 거 잘 붙이지? 그런 걸 만사형통이라고 갖다 붙이지. 그런 게 아니라 그 말이요.

 

사실 우리가 실력적인 의미로서 능력적인 의미로서 볼 때에 자주 싸우고 많이 싸우는 사람이 싸움의 능력자가 되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싸움이 많을수록 좋지요. 싸움에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말씀을 붙들어 놓으면 그와 같은 정신으로 가게 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아브라함은 벌써 70대 노인이고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가는데 그걸 이루어준다고 해서 그거 쳐다보고 가는 건 아니라 그 말이요. 말씀이 좋아서 간다. ‘앞으로 너 잘 되게 해 주겠다. 어떻게 잘 되게 해 주겠다하는 게 있어도 그건 들을 필요가 없고 말씀이 좋기 때문에 그것만 붙잡고 가는 것. 이제 친척들을 다 내버리고 나그네로 떠나는 거지요?

 

참 우리가 아브라함을 보면 대단한 겁니다. 불신자 입장에서 보면 미친 거고. 그렇지요? 생각을 해봐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자기 집이 있지, 농토도 있지. 그렇지 않아요? 또 형제들도 있고 일가친척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떠나라그럴 때에 뭐 참 집 매각한다는 방을 써 붙여서 토지매매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떠나라그 말씀을 딱 듣고 그 이튿날 떠났나? 며칠 있다가 떠났다는 건 없지요? 그래, 떠났단 말이요. 여러분들이 그거 이해가 가겠어요?

 

우리가 이런 걸 간혹 볼 수 있어요. 말씀을 한 번을 들었는데도 하나님 말씀에 미친 사람이 있지요? 우리가 이걸 좋게 한 번 생각을 하면, 그래서 자기 집 다 팔고 교회 옆으로 이사 오는 사람도 간혹 있지요? , 그거 참 얼마나 멋있어. ‘아이고, 목사님이야 좋지 그 사람은 얼마나 걱정일까?’ 그래요? 참 그런 성도들이 간혹 있어요. 아주 참 멋있어. 그런 성도는 예수를 멋있게 믿을 성도야. 아주 맵고 짠 데가 있고, 끊는 데가 있기 때문에 참 멋있어.

 

생각을 해봐요. 여러분들, 아브라함이 버리고 온 민족이 많을까요, 신앙의 후손으로 얻은 민족이 많을까요? 어느 쪽이 많지요? 확실히 그렇습니까? 그래서 부모형제를 버리는 자는 여러 배를 받고하는 그 말씀이 있습니까? 성경에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으리라.’ 이거 굉장한 거 아니야? 아브라함은 그 결과를 모르고 갔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것을 계시적으로 보는 겁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안 버리고 안 떠났다고 한다면 그 결과를 볼 수 있을까요? 확실히 그렇습니까? 그 결과는 못 봅니다. 고작 해봐야 자기 고향에서 살다가 죽을 때 일가친척들이 메고 가는 그것밖에 더 있겠어요? 우리가 가치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보면 말씀을 붙잡고 가는 그 결과성이 크다 그 말이요. 유익이 아주 큰 겁니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하는 이거는 크게 불리어지는 거예요. 가나안 땅에 오기 전에는 갈대아 우르에서만, 그것도 아브라함 자기 동네에서만 아브라함 할아버지하고 불림을 받았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브라함의 이름이 어디까지 퍼져있어요? 온 세계적으로 퍼져 있습니까? 그리고 온 세계뿐만 아니고 신령계까지 아브라함의 이름이 퍼져 있지요. 예수 믿고 하늘나라에 들어간 자 치고 아브라함을 모르고 천국에 들어간 자가 있을까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서 지옥에까지도 아브라함의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까? , 그 얼마나 멋있느냐? 그 이름이 그렇게 유명한 것을 보니까 아브라함이 박사입니까?

 

가만 보면 지금도 아브라함의 이름이 자꾸 선전이 돼 나가고 있지요? 그렇지 않아요? 오고 오는 교회에서 얼마나 많이 퍼져나가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이 빈 말이 아니란 말이요. ‘너의 이름을 창대케 해 주리라하는 이게 실지란 말이요. ‘아브라함 그 때 당시만 있다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지금도 우리들의 입으로부터 온 성도의 입에서 너의 이름을 창대케 해 주리라.’ 참 그 멋있잖아요?

 

어때요? 하나님께서 우리 O전도사에게 찾아와서 너의 이름을 창대케 해주리라. 갈대아 우르 같은 세상을 떠나라그 말씀 들려왔어요, 안 들려왔어요? 보나마나 그 말씀 들려온 지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지금 떠났는지 안 떠났는지 모르겠어. 아닌 말로 온 성도들의 입에서 , OOO교회 유OO전도사하고 그 이름이 나간다면 모르긴 해도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하고 한국교회 성도들이 죄다 한 번씩 왔다 갈 걸? 안 그럴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틀림이 없어요.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그 신실성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세상에서도 보면 정치적으로 이름난 자 많지요? 과학자로서 이름난 자 많고, 예술가로서 이름난 자 많아. 그러나 그런 거는 세계적으로 이름이 많이 나더라도 전부 다 가치 없는 이름들이고 현 세상에서뿐이야. 천국에서는 알아주지를 않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그 말씀을 붙잡고 순종해 나가면 그는 생명적으로 진리적으로 분량적으로 가치적으로 영원히 영원히 하나도 손해날 것이 없다 그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되어서 수복자가 시복자로 축복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너로 말미암아 복의 기관이 되겠다.’ 수복자로서의 시복자로 또 됐단 말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성도의 하나의 모델인데 세상에서 사람을 찾고 사람을 꼽는다면, 세상에서 꼭 있어야 할 사람을 꼽는다면 누구겠지요? 아브라함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믿는 나로 말미암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일반적인 축복이던 영적인 축복이던 복이 나갈 수도 있는 거라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 성도라고 하는 게 하나님 앞에 엄청난 존재가 아니겠느냐? 너희들은 세상에서 꼭 있어야 하고 꼭 필요한 자들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이냐 그 말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몸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 뭐 나 같은 자, 불신자도 알아주지 않고이렇게 할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창조의 목적을 생각할 때에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가 자기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요. 엄청난 존재다. 날 위해서 이 세상을 다 창조했고.

 

내가 사는 동네에 다 불신자들이고 이방인들이고 믿는 자는 자기 딱 하나가 있으면 말미암아 그 동네에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진다는 게 얼마나 그 굉장한 겁니까? 그러니까 이런 자기인 줄 알고 하나님 앞에 자기 존재를 신분을 위치를 잘 생각하면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시간에도 아브라함을 들어서 저희들에게 아브라함의 신앙의 발걸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 후에 아브라함에게 내리어지고 주어진 모든 가치 있는 축복들을 우리는 보고 확신할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역사적으로 동원이 돼서 지나간 그 아브라함을 보고도 저희들은 왜 그것을 못 믿는지요? 아버지 하나님, 믿음 없는 저희들 용서해 주시고 큰 믿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날 저희들에게도 하신 말씀인 줄 믿습니다. 그 말씀대로 따라 살다보면 저희들이 신앙의 눈으로 볼진대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축복 그 말씀 붙잡고 따라가는 자들에게도 임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한 그 말씀에 순종하고 떠나는, 아브라함처럼 역시 그렇게 살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함께할지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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