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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두목이 왔다

요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600 추천 수 0 2013.04.10 19:3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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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4:30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2.11.11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이 세상에 두목이 왔다
요14:30

지난주에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다가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요한 공동체에게 하셨다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요한 공동체가 처한 위기상황에 대해서 저들이 지녀야 할 신앙적 가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이길 힘’이기도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외부의 조건들이 너무 나쁘기 때문에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 공동체의 새 계명을 좀 더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의 공동체에 속한 이들은 그들이 믿는 믿음의 양식 때문에 세상 즉, 사회나 종교로부터 박해, 증오, 출교, 추방, 살해의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그들의 믿음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얼마든지 세상과 불화하지 않고 적당히 주고받으며 신앙생활하고 일반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그것은 요한 공동체를 제외한 마태나 누가 공동체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으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놓인 삶의 주변이 그렇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일이 새로운 계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새로운 계명이 되는 것은 그 ‘사랑’의 방식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 때문에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헌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의 ‘사랑’방식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유대인-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 공동체 밖의 사람들이 하는 사랑이란,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아래로 부터의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쉽게 ‘사랑’이라고 하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가진 사람이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하사하듯이 내려 주는, 왕이 신하에게 베푸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도 그런 이해가 있을진대, 고대 사회로 갈수록 ‘사랑’이란 ‘위에서 아래로’수여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사하고, 그걸 다시 사제가 백성에게 하사하고, 사랑을 받은 백성은 다시 그보다 낮은 자에게 하사하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지금도 제도화된 교회에서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축복을 말할 때 곧잘 그런 방식의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는’그런 것으로 말입니다. 그게 제도화 되어 있죠. 그렇게 되면 억눌린 사람들은 ‘영광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나 ‘하늘의 능력을 가진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듯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요한 공동체에게 말합니다. 그렇게 획일적이고 하사하는 제도와 권력으로서의 사랑 말고, 그런 걸 다 평평하게 하고 ‘서로가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사랑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수직의 사랑이 아니라 수평적인 사랑의 관계를 통해 삶의 위기를 극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래서 이게 새 계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방식, 패러다임이 전환된 사랑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비가 넘쳐나는 곳이 아니라 폭력과 배제가 넘쳐났습니다. 적어도 세상을 똑바로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랬습니다. 앞장에서 발에 향유를 붓던 여인의 이야기를 상기해 보세요. 그 여인의 행동을 곱게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비난이었습니다. 이미 제도화된 또는 사회라는 틀 속에 갇힌 사람들은 그런 여인의 태도를 곱게 보지 않고 판단하고 비난했습니다. 그 대표자가 가룟 유다였습니다. 또 배불리 먹고 난 이들이 예수를 왕으로 세우려고 혈안이 되어 찾아 나섰을 때, 그들은 예수를 통해 그들이 미워하는 대상들을 몰아낼 궁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예수는 선한 왕이 되어 악한 왕을 제거하는 그런 식의 사랑과 정치를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즘 교회식으로 하자면,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해서 일단 하늘에 지경을 넓힌 다음에, 그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업을 하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그는 제도를 통해 어쩌고저쩌고 하자는 게 아니었습니다. 네가 곧바로, 네 삶의 현장에서 누군가에게든 대상을 구분하지 말고 실행하라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영광, 영화를 얻은 다음에 그 권력으로써 행하는 식의 사랑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그대로 행하는, 그래서 영광스럽게 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13:32). 출세를 한 다음에, 돈을 번 다음에, 권세를 얻은 다음에 그걸 이용해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여 영광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새 계명의 진수였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위로부터의 사랑이 아니라 아래로 부터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을 통해 흐르는 ‘사랑’의 진의입니다. 이게 당시의 종교가 지닌 이해와 요한 공동체가 해석하는 신앙의 차이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그 뿌리를 둔 신앙 공동체입니까? 당시 제자들은, 제자들을 상징적인 중심으로 받들며 그들의 법통을 잇고 있다고 자부하는 교회들은 제의를 제도화 하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위계적인 질서를 만들고, 그 질서 속에서 사랑도 은혜도 분배해주는 불균등한 구조를 고착시켜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시 유다만이 다른 길을 간 게 아니라, 모든 제자가, 모든 교회가 예수를 배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통렬한 선언이 16:32절입니다.

“이제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제각기 자기 갈 곳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아니 이미 그 때가 왔다.”

요한복음 13장의 글을 보면, 세족과 새 계명 사이에 제자의 배신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흐름이 끊어져 있는 거죠((13:1-2 세족, 13:21-30 배신 예고, 13:31-35 새 계명 선포). 뭔가 심각한 일이 생길 때는 그 조짐이 있는 법입니다. 그 조짐을 중간에 끼워넣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요한복음은 세 편의 설교가 나옵니다(13:31-14:31, 15:1-16:4, 16:4-33). 그런데 그 말씀들의 분위기는 대체로 우울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의 그림자가 뒤덮여 있습니다. 그리고 18장 이후가 예수님이 처형당하는 이야기죠. 앞에 나온 세 편의 설교는 바로 이런 결과에 대한 ‘위로’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파국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14:30절입니다. “이 세상의 두목이 오고 있다.” 여기서 ‘두목’이라는 단어는 8:44에 나오는 악마의 단어와 교환이 가능합니다. 두목은 곧 악마인데, 그는 살인자입니다. 그리고는 유대인들을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두목, 악마는 폭력을 전염시켜 그를 추종하는 자들로 하여금 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비극을 낳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한 공동체가 주지하는 바는 유대인도, 세상도, 심지어 주님의 교회도 그런 악마, 두목에 전염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도화된 권력이 타인에게 폭력이 되어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종교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미 그런 시간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문으로 ‘불가역적 시간’이라고 합니다. 막을 수도 없고, 전도, 되돌릴 시간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수 있느냐? 사람으로서는 안 되고 오직 파라클레토스, 보혜사 성령(세상에 속하지 않는 존재), 오직 하나님께 속한 자가 그들을 위로하고 가르치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현재는 세상의 두목이 활동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견뎌내야 합니다.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려면 새 계명, 아래로 부터의 사랑, 서로 사랑하는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세상을 이기는 법인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제도속의 의무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이 세상을 이기는 유일의 방식입니다. 그걸 요한 공동체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디고 할 것 없이 서로 뜯어먹고 삽니다. 그러면서 ‘내가 많이 가지면 그 때 나눠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 때 사랑하겠다고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우선 내가 먼저 라고 합니다. 이게 이른바 이 시대의 [신자유주의]입니다. 그것은 폭력과 배제를 동반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우선 나만 배부를 수 없기 때문이죠. 교회도 그렇습니다. 신앙도 이렇습니다. 그러나 요한공동체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라’이걸 새 계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두목 밑에서 신앙을 지키고 살아남으려면,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렸습니다.

이걸 좀 더 디테일하게 설명을 해 볼까요?

‘서로사랑하며 보혜사가 오시기를 기다리는 삶’이란, 세상에 살되 세상에 깊숙이 빨려 들어가지 말고 배회하듯이 사는 겁니다. 그것이 요한공동체가 겪고 있는 위기 상황에서의 대안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17:16-19절이 나오는 겁니다.

여기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자입니다. 세상의 질서에 반대하면서, 인간을 서열화하고 종속시키는 규범을 위반하면서, 문명의 바깥에서 빙빙 돌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물위에 뜬 오리처럼, 물속에 있되 물에 빠지지 않는 그런 겁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보냄을 받은 존재가 아닙니까? 질서 밖의 자유를 무한정 향유하는 게 아니라 다시 세상 속에 개입해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시 돌아오는 법’이 또한     “내가 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아래로부터 사랑을 솔선수범 하라는 예수의 권고로부터 세상에 개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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