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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58-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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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6장 58절-63절: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58절: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 안에 생명이 있느냐? 없다. 사람들이 이 떡을 먹고도 죽은 것은 이 만나에는 생명이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이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준 의미가 뭘까? 먹고 죽으라는 거냐, 먹고 죽지 말라는 거냐, 아니면 미래적으로 하늘로부터 오실 예수님을 비유적으로 상징하는 거냐?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를 먹은 자들은 죽었지만 예수님을 먹는 자는 죽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 당신은 생명의 떡이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생명을 먹게 하신다.
성경은 전부가 계시다. 그래서 성경의 인물이 좋은 사람이던 나쁜 사람이던, 믿음이 있는 사람이던 없는 사람이던 그것을 보는 내 쪽에서는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를 하는 게 아니라 그 판단을 자기에게 내려야 한다. 성경을 이렇게 보는 게 계시로 보는 거다.
사람들에게는 남을 정죄하는 습성이 있어서 예를 들면 성경의 가룟유다를 보고 ‘나쁜 놈이니 지옥에 갔다’ 라고 한다. 성경에 글자적으로 가룟유다가 지옥에 갔다는 말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의 인식이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 라고 생각을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다. 그러나 성경에 가룟유다를 기록해 놓은 것은 가룟유다를 정죄하라는 게 아니라 ‘예수 믿는 네 속에도 예수님을 돈과 바꿔먹는 요소가 들어있으면 너도 가룟유다와 같다’ 라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었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고 한다면 그때의 당신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영접지 않고 죽였는데 이들은 어디로 갔느냐? 이들이 지옥에 갔다고 정죄하라고 이들을 성경에 기록을 한 거냐, 지금의 나에게 ‘네가 이 성경을 보고 너의 신앙의 위치와 차원이 어느 수준인지를 알아서 구원을 죽이는 일을 하지 말아라’ 라고 하는 거냐? 후자다.
성경에 오만 사람이 다 나오듯이 예수 믿는 사람도 여러 층이니 우리는 이런 저런 사람들의 잘못이 보일 때 일단은 나에게도 그런 잘못이 없는지 찾아야 한다. 자기 눈의 들보를 그대로 둔 채 남의 말만 하는 것은 잘못된 거다. 먼저 자기부터 살펴본 후에 회개를 하고 바로 잡은 후에 다른 사람에게 권고를 해야 한다.
만나는 물질적인 양식으로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고 계시로 하늘로부터 주신 거다. 이 계시를 따라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자체화 실상화로 될 의사 단일적, 인격적, 결합적, 생명적인 우리의 양식이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물질의 양식을 주신 것은 미래적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하늘로부터 보내겠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그래서 교회 인도자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교인들에게 세상을 주면 절대로 안 된다. ‘예수 믿고 세상에서 부자 되자’ 라고 하면서 교인들을 사역적으로 몰아가는 것은 썩은 양식을 주는 거다. 믿는 우리에게는 먹어야 할 양식이 있고, 먹지 말아야 할 양식이 있다.
세상의 지식은 배워서 모든 물질을 이용하고 활용하고 풀어 먹는 지식이다. 성경은 성도를 주님의 의사, 주님의 생명, 그 분의 인격, 그 분의 성품과 결합을 하게 한다. 그래서 교회의 교훈은 주님의 생명이치가 나와서 교인들이 바른 이해타산과 가치판단을 해서 의사적으로 주님과 결합이 되게 해야 한다. 교회는 일을 시키는 곳이 아니다. 시:에서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고 하는 것은 나그네 세상에서 길을 갈 때 주님과 의사단일이요 결합을 하라는 거다. 이런 교훈을 교회에서 먹지 못하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지 못한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우리에게 만물을 보여주는 것은 너는 배우고 터득하고 알아야 할 존재라는 거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농사를 지어도 이치를 잘 알면 수입이 많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얕은 바닷가에서 발만 담그고 찰랑찰랑 한다. 그러나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얕은 물에서는 재미가 없기 때문에 깊은 데로 들어간다. 잠수를 잘하는 사람은 헤엄을 치면서 먹을 것도 가지고 나온다. 깊은 바다로 나가는 사람은 수입이 많다. 고기도 크다. 물론 계시는 약간 다르지만 주님이 깊은 데 그물을 던지라고 했다. 그래야 수입이 많다.
이런 걸 이치적으로 잘 생각해 봐라. 예수를 믿어도 얕은 물가에서 노는 사람처럼 신앙이 깊지 않으면 생각도 얕고, 모든 사고방식이 얕다. 이런 사람과 사귀면 얻어먹을 게 없다. 그러면 신앙 면에서 얕고 깊은 게 무엇을 의미하는 거냐? 성경에서 ‘크다 작다. 높다 낮다’ 하는 것은 신앙의 정신 사상의 진함이나 강함을 말하는 거다. 하나님의 것은 굉장히 깊고 높고 넓고 강하다. 안 믿는 사람의 생각의 수준과, 진리이치를 아는 사람의 생각의 수준은 그 질이 땅과 하늘이다.
자기가 예수 믿으면서 한 이치를 깨달으면 두 이치가 깨달아지고, 두 이치가 깨달아지면 네 이치가 깨달아지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런데 처음 하나가 트이기가 어렵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물질적인 사고방식의 설교를 들으면 백날 들어봐야 이치가 하나도 안 열린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의 수준과 같아진다. ‘너의 연소함을 우습게 보지 못하게 하라’고 했듯이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한 이치라도 깨달아서 아무나 우습게 보지 않게 해야 한다. 믿는 사람이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많이 알면 사람이 많이 알아진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세상의 학교에서 말하는 철학보다 위다. 일반세상에서 말하는 철학은 사람이 딛고 성장할 수 있는 바닥이 없다. 주님을 향해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없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세상의 이방종교도 바닥이 없다. 사람이 안고 서고 보전이 될 수 있는 바닥이 없다. 사람을 굳게 바로 세울 반석은 주님밖에 없다. 이방세상은 자신들의 종교가 옳은 것으로 알고 신봉하지만 창조의 목적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59절: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떡을 먹고 살고 죽고 하는 것과 생명과 영생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셨고,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셨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고, 귀신들린 자와 중풍병자와 각색 병자를 고치셨다. 그래서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활동의 중심지처럼 보인다.
‘가버나움’의 뜻은 ‘많은 위로를 받았다’ 라는 뜻인데,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고치고 하신 게 많기 때문에 이곳의 사람들이 주님의 위로를 많이 받은 거다.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은 동리가 왜 마11: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가 되었을까? 이들이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 겸손하고 성령의 열매가 맺혀져야 할 텐데 아마도 고개를 쳐들고 남을 정죄하고 ‘내가 믿음이 있노라’ 라고 하면서 교만했던 듯하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 하늘의 많은 은혜를 받고도 주님과 영적 인격적 생명적 결합이 없구나. 주님과의 밀착성이 없구나.
믿는 사람이 속성과 성품적으로 주님과 밀착성을 가지면 겸손한 사람이요 희망이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믿었어도 주님의 의사단일에 밀착성이 없으면 믿는다고 하는 가치가 없다. 일반적으로도 많은 것을 듣고 배워서 많이 알수록 사람이 겸손해야 덕이 있는 것처럼 우리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자기가 먼저 믿고 오랫동안 믿었다고 해서 다른 교인을 못 견디게 해서 쫓아낸 일은 없느냐? 먼저 믿은 사람은 모든 언행심사에 모범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주님께 밀착시켜야 한다. 이 일을 억압 강압으로 하면 안 된다.
60절-63절: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사람들이 말을 할 때는 그 중심이, 그 뿌리가 영이 아니면 육으로 되어있다. 천국이 아니면 세상 땅이다. 구원이 아니면 비구원이다. 영원이 아니면 임시적이다. 영에 속한 말이 아니면 육에 속한 말이니 육에 속한 말을 할 때는 그 목적 역시 세상과 세상에 속한 거다. 세상에 뿌리를 박고 나온 말은 세상에 이해타산을 둔 것이라서 육의 생각, 세상생각, 물질생각, 변질이 되는 생각이다. 그러나 영에 속한 말은 천국에 뿌리를 박고 나온 말이라서 그 효력이 영원히 간다.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예수님은 신령한 천국에서 오셨으니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셨던 천국으로 가신다는 말이다. 천국에 올라가시는 것은 영의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이 일을 성공하고 가는 거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얻어서 오래 오래 사는 것에 소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이런 생각이 영인지 육인지 분별을 못한다. 안 믿는 사람들은 분별을 할 지식도 없고, 능력도 없고, 수준도 안 된다. 안 믿는 사람들이 물질세상의 것에 소원 목적을 두고 살면서 이것을 이뤘다고 해도 고작 해봐야 자기에게 백 년 안팎밖에 효력을 주지 못한다.
지진이 우리에게 뭘 깨닫게 해 주느냐? 흔들릴 것을 기초로 삼고 신앙을 하지 말라는 거다. 땅에 기초를 둔 신앙을 가지지 말라는 거다. 세상 소원 목적하는 신앙을 가지지 말라는 거다. 그러나 못 깨달으면 흔들릴 세상 것에 목적을 두고 살다가 이로 인해 죽으면서도 자기가 왜 죽는지를 모른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가 말하는 게 영의 생각인지 육의 생각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고, 설교를 들으면서 어디에 뿌리를 박고 하는 설교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성경에 이것을 알 수 있도록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을 분명히 말씀을 해 놨기 때문에 자기가 조금만 신경을 쓰면 알 수 있는 건데 모르는 사람이 많다.
믿는 사람은 자기의 언행심사가 생명에 속하는 건지 사망에 속하는 건지 모르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믿고 따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당신처럼 모든 이해타산을 하늘의 것으로 가지라는 거다. 그런데 교회에서 세상 것을 가지라고 한다면 불에 탈 심판을 누적시키는 거다.
세상 땅의 생각밖에 모르는 사람은 참 살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진리의 종이 선악과 따먹고 나온 육의 기준, 세상기준, 자기 기준으로 사는 자기에게 하나님 기준, 생명의 기준, 영의 기준에 맞춰서 살라고 하면 마음이 상해서 가버린다. 수십 년을 예수를 믿어도 이 모양이라면 이 사람은 주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
온 교회 교인들이 육의 것을 구하고 육으로 산다면 교인들 각자의 믿음이 잘못된 거냐, 교회 전체가 잘못된 거냐? 후자다. 교회 전체가 이렇게 된 것은 그 교회 목사가 잘못 가르쳤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건데, 그 교회 교인들은 계속해서 잘못된 교훈을 받아왔기 때문에 자기 교회의 목사가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말세가 되면 거짓 종이 많이 나온다고 했으니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신실한 종이 있고, 마귀가 보낸 종이 있는 거다. 성경에 있다고 했으니 우리는 목사가 가르치는 교훈을 구별 분별해야 한다. 구별 분별을 안 하고 믿게 되면 목사에게 이용당하고, 빼앗기고, 다 도둑을 맞게 되고, 목사와 함께 망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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