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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

요한계시 양주섭 목사............... 조회 수 845 추천 수 0 2017.09.12 23: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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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계3:14-22 
설교자 : 양주섭 목사 
참고 : 탈라하시장로교회 http://tallakoreanchurch.net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 (요한계시록 3:14-22/ 3월13일)

 
서론
 
소아시아 7교회에 보낸 예언적 메시지 가운데 마지막 메시지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이렇게 7교회를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은 하나도 받지 않고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에 대해 가난하나 부요한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연약하지만 충스러운 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사데와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은 하나도 받지 않고 책망만 받은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에 대해 살았다는 이름만 가진 교회라며 행함이 없는 믿음을 책망하셨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부요하나 가난한 교회라며 미지근한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한편 에베소 교회는 정통 신앙 고수에는 열심이나 사랑을 상실한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버가모 교회는 고난과 순교의 위기에서 믿음을 굳게 지켜 칭찬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발람과 니골라당의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 있어 책망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7교회중 마지막으로 살펴볼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은 부요하나 가난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교인수도 많고 재정도 많아서 부요하나 내면을 보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성도들 믿음이 형편없는 가난한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사데 교회와 함께 칭찬은 하나도 못받고 책망만 받았습니다. 이러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을 따라 인기를 누리며 물질적 부를 누리는 세속화된 교회를 상징합니다.
 

소아시아 일곱교회는 오늘날 터키 서쪽 지역에 위치해 있는데 에베소부터 라오디게아까지 순서대로 시계방향으로 위치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지난주 나눈 빌라델비아로부터 동남쪽으로 약7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도시인데 라오디게아 라는 말은 B. C. 250년에 안티오쿠스2세(Antiochus II)가 그의 아내 라오디케(Laodice)의 이름에서 유래하여 붙인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굉장히 부유한 도시로 소아시아의 내륙과 바다로 나아가는 관문인 에베소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무역이 발달하였습니다. 로마의 키케로(Cicero)가 재산을 예치하고 현금 거래를 한 일이 있을 정도로 큰 은행이 있는 금융사업이 활발한 도시로 오늘날의 뉴욕이나 홍콩 같은 금융허브 도시였습니다. 한편 라오디게아는 다른 소아시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지진대에 속해 있었으므로 잦은 지진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A. D. 60년 유래없는 큰 지진에도 불구하고 로마 황제의 재정지원을 거절하고 자력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할 정도로 막강한 부를 소유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라오디게아는 양모 산업이 발달하였고, 유명한 의과 대학도 있었는데 이 곳에서 생산된 ‘부르기아 안약’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의약품 이었습니다.
 

본론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4)” 예수 그리스도를 3가지로 소개합니다. 먼저 ‘아멘’으로 소개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세상과 교회에 양다리를 걸치고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차든지 덥든지 순수한 신앙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멘’은 일반적으로 ‘진실한’, ‘확실한’, ‘견고한’ 이라는 뜻으로 주로 문장의 끝에 덧붙여져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동의의 뜻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고유 명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여기 저기 양다리를 걸치지 않고 신실하시고 진실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십자가 사역을 충성되이 완수한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소개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창조주란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모든 창조에 동역하셨고, 만물 전에 계신 자입니다 (요1:1,2).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집과 물질과 먹을 것 등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로 인정할 때 물질만능주의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15-19절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책망과 권면 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5)” 본절은 라오디게아 북쪽 약11km 지점에 위치한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온천수와 라오디게아 동쪽 약16km 지점에 위치한 골로새의 차가운 우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의 유일한 약점은 물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히에라볼리와 골로새에서 물을 끌어다 썼습니다. 히에라볼리에서 솟아난 온천수는 처음에는 매우 뜨겁지만 수로를 통해 흐르는 동안 미지근해집니다. 라오디게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러한 현상을 염두에 두고 요한은 본절에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신앙의 태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풍부한 물질로 인해 태만하기 그지없는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태도가 완전하게 세속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에 있어서는 이러한 어정쩡한 태도가 더 문제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을 갖는 교회는 주님의 책망을 면할 수 업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16)” 본절은 15절에 대한 결과론적 진술입니다. 즉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한 자가 처하게 도리 결국에 대한 주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여기서 ‘미지근하여’는 ‘열성이 없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결코 회색 지대나 중간 지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중에서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6장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앙의 회색 지대에 머물러 있었고 이것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겁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지역에 흐르던 물은 히에라볼리에서 끌어다 쓰는 식어버린 온천수였습니다. 그것도 석회수로를 통과해 오며 석회석이 섞인 것이었습니다. 누구든 이렇게 미지근하고 불순물이 섞인 물을 마시게 되면 입에서 그 물을 토해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 불순물이 섞이 물과도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 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17)” 본절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자기 인식과 그에 대조되는 실상을 폭로합니다. 먼저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인식하였습니다. 확실히 라오디게아 도시는 다른 소아시아 도시들에 비해 부유했습니다. 따라서 그 안에 속해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 역시 물질적으로 풍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영적 상태에 대한 기준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유하기 때문에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해서 자기는 신앙생활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 부요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는 심각한 가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영적인 가난함에 대해 무감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럼 라오디게아 스스로의 평가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평가받은 영적상태에 대한 성적표 내용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처참했습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 벗을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현실을 다섯 가지 시각으로 다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적상태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것벗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8)” 17절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비참한 영적 현실에 대해 지적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본절에서 그에 대한 처방책을 3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번째로 제시하는 처방책은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생각하고 있던 부요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보시는 부요는 달랐습니다. 이러한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불로 연단한 금을 사야만 했습니다. ‘불로 연단한 금’이란 표현은 뜨거운 열을 가하여 ‘불순물이 제거된 정결함’을 상징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물질적 부요에 대한 교만으로 가득한 믿음은 순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의 연단을 필요로 하며 그를 통해 그 믿음은 순전한 믿음으로 변모됩니다. 아리러니컬 하게도 신앙생활은 편안한 환경에서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고난과 역경 가운데 신앙이 성장하고 더욱 강해지는 것입니다.성도는 불로 연단한 금 같은 믿음으로 자기 영혼을 부요하게 해야 합니다.
 

두번째 처방은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벌거 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가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단이라면 본절은 그에 대한 처방입니다. 이것은 당시 라오디게아가 양모의 명산지였음을 배경으로 한 교훈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양모의 명산지로서 그곳 사람들이 입고 다닌 의복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인들도 멋진 의복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멋진 육신의 의복은 걸쳤을지 몰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의복은 입지 않았습니다. 쉽게 얘기해 자신들은 모르지만 영적인 눈으로 볼때 완전히 벌거벗고 다닌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입어야 할 것을 흰 옷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벌거벗은 사람이 세간 사람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치욕을 당하듯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서는 영적으로 벌거벗은 자들이 수치를 당하여 그곳에 들어오지 못하는 결과를 맞게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죄의 더러움을 가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칭의(justification)를 가리키는 흰 옷을 사서 입어 영적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입을 옷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의의 옷입니다.
 

세번째 처방은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라오디게아의 명물 ‘부르기아 안약’을 배경으로 한 교훈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지닌 가장 근원적인 영혼의 질병은 자신들의 영적 처지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영적 소경됨을 치료할 안약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안약인 성령의 신령한 은사를 받아 영적인 일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19)” 지금까지 주님은 어느 교회보다도 더 신랄하게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한 번 택하신 자기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이것을 신학자 칼빈은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잘못된 길을 갈 때 책망하여 징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신명기8장5절에도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만약 잘못해도 책망 받지 않는 성도는 이미 주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20-22절은 편지를 마치면서 모든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약속 및 성령의 말씀 청종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0)”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새신자 전도초청시 사용하는 구절로 해석하는데 사실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이들은 이미 신앙생활을 한지 한참된 기신자들이 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처럼 주님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친 세상적 교인들에게 이제는 너희 마음 문을 열고 그 안에 주님만을 주인으로 모시라는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너희의 마음에 어둠과 세상의 정욕이 주인되었다면 이제는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셔서 너희 마음속의 어둠과 미움과 시기와 질병과 정욕을 모두 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능력과 위로와 평안으로 가득채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문 밖에서 서서 두드리고 계시다고 언급합니다. 한 번 두드리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두드리십니다. 그리고 마음 문을 여는 자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긴밀한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멀리서 지나가는 연예인 보듯 한번 보는 것과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식사를 나누며 교제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까기도 예수님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 머무는 신앙생활 가운데 있는 분이 있다면 이제는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교제하시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1)”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보좌에 앉혀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리라는 약속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22)”아멘.
 

결론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하신 말씀과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이 세대는 물질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세대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물질만능주의는 교회 안에까지 침투하여 많은 성도들이 실제로 하나님과 물질 사이에 서서 적당히 신앙 생활을 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라오디게아에 주시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봐야 합니다. 열심을 내서 회개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게 될 줄로 믿습니다.

 

[출처] 탈라하시 장로교회 - http://tallakoreanchurch.net/gnu/bbs/board.php?bo_table=s2_1&wr_id=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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