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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완성과 예수

에배소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505 추천 수 0 2012.09.06 23:4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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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엡4:1-16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2년 8월5일 http://dabia.net/xe/604301 

jys.jpg 정용섭 목사

 

만물의 완성과 예수

엡 4:1-16,

성령강림절후 제10주, 2012년 8월5일

 

오늘 설교 본문인 엡 4:1-16절은 신학적으로 ‘그리스도론적인 교회론’에 해당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 대목에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이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루터성경에는 ‘Die Einheit im Geist und die Vielfalt der Gabe’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영 안에서의 단일성과 은사의 다양성’이라는 뜻입니다. 루터성경이 본문의 핵심을 더 정확하게 요약했습니다. 여기서 은사의 다양성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각각의 신자들은 서로 다른 은사를 받았다는 겁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런 역할을 가리켜 은사라고 합니다. 보통 카리스마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것입니다. 카리스마, 즉 은사에는 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각각 기능이 다를 뿐입니다. 은사의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교회가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영적인 단일성

 

은사의 다양성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영 안에서의 단일성은 이해하기가 좀 까다롭습니다. 은사의 다양성은 눈에 보이지만 영 안에서의 단일성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영적인 단일성에 대해서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봐야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그걸 다 아는 이야기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하나라는 뜻이 아니냐, 좋은 말이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야지 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영적인 공명은 없습니다. 정말 우리가 그 세계를 알고 있을까요? 본문 4-6a를 읽겠습니다. 어떤 느낌이 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모든 것이 하나라고 했습니다. ‘몸이 하나요’라고 할 때의 몸은 역사적인 예수를 가리킵니다. 예수, 성령, 하나님, 믿음, 세례, 소망이 다 하나입니다. 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부르심은 소명입니다. 그 소명이 곧 은사입니다. 그러니 은사는 다양하더라도 영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겁니다.

 

특히 6a절이 말하는 ‘하나님도 한 분’이라는 말을 보십시오. 다른 것들은 모두 이 개념에서 나온 겁니다. 본문은 이어서 그 하나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만유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 안의 모든 것들, 하늘의 별들과 그 안의 모든 것들입니다. 만유의 아버지라는 말이 자칫하면 범신론, 또는 다신론처럼 들리지만 에베소서 기자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인 단일성을 말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다고 했습니다. 루터번역은 ‘über allen und durch allen und in allen’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세 전치사가 연속됩니다. 위버, 두르히, 인이 그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만물 너머에, 만물을 통해, 만물 안에 계시는 분이 누굴까요? 자기가 어떤 삶의 토대에서 사는가에 따라서 서로 다른 대답을 할 겁니다. 장자나 노자를 따르는 사람은 그가 바로 도(道)라고 하겠지요. 화이트헤드는 과정이라고 하고, 하이데거는 존재라고 하겠지요. 불교 신자들은 부처라고 할 겁니다. 고대 헬라 철학자들도 대답할 겁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이라고, 데모크리토스는 원소라고 말할 겁니다. 물론 서양철학의 아버지인 탈레스는 물이라고 하겠지요.

 

이런 설명을 듣고 어떤 분들은 성서의 세계가 다른 종교나 철학의 세계와 다를 게 없다는 말이냐, 하나님이 도나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이냐, 하고 불편하게 생각할 겁니다. 불편하게 생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성서와 기독교의 전통이 원래 그렇습니다. 성서 기자들은 외부세계와 완전히 담을 쌓고 사는 고집불통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신탁이 왜 옳은지에 대해서 보편적 진리의 차원에서 끊임없이 성찰했습니다. 만약 오늘의 노자와 장자의 도 개념이 하나님을 변증하는데 필요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이나 생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그 궁극적인 현실성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기자도 당시의 다른 종교, 철학의 용어나 개념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진리의 차원에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시도를 했습니다. 사이비 이단들은 그런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믿으라고 닦달할 뿐입니다.

 

다시 에베소서 기자가 말하는 ‘만물 너머에, 만물을 통해, 만물 안에 계시는 분’이 누군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그런 분이 느껴진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한 단계 더 깊이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은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되시나요? 골치가 아파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이 바로 그런 분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이런 대목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희망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이 대목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대답은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질문하고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의심한다는 게 아니라 궁극적인 생명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오늘 저는 에베소서 기자의 대답을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겠습니다.

 

만물 충만

 

하나님이 만유 너머에, 만유를 통해, 만유 안에 계시다는 말은 모든 것들의 존재 근거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을 통해서 유지되며, 완성됩니다. 왜 만유가 하나님을 통해서만 완성되는지를 설명해야할까요? 아는 분들은 알겠지만 이런 것에 대해서 실감이 가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한번만 짚겠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은 인간의 실존적인 한계를 전제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일종의 질그릇과 같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쾌락을 통해서도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친구나 가족이 옆에서 있어도 외롭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아주 어린아이이거나 인간의 실존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이 둔감해진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렇습니다.

 

여기까지는 철학입니다. 종교 일반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차원입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그 차원을 뛰어넘어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말합니다. 만물의 충만을 이룬 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내리셨다는 말과 오르셨다는 말이 9절에서도 반복해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신 것을 ‘내리셨다.’고 하며, 부활 승천 하시고 하나님이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오르셨다.’고 하는 겁니다. 에베소서는 이것을 시편 68:18을 인용해서 설명했습니다. 그 시편 구절을 예수님의 부활 승천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는 말이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걸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 신자들도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기독론의 문제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고유한 구원론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교와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유대교는 예수를 단순히 선지자 정도로만 압니다. 이슬람교도 비슷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닙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유대인 한 남자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라는 표시도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런 기준에서 행동하다가 삼십대 초반에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당시의 관점으로 보면 십자가에 처형당한 자는 저주를 받은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과 똑같이 인간으로 살았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즉 메시아로 경험했습니다. 이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무엇을 근거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하고 고백한 것일까요? 당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이상하게 보았을지 상상이 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드는 걸 이해하세요. 통일교 신자들은 문선명을 참 부모, 즉 재림주라고 믿습니다. 문선명을 추종하는 이들을 보면 이해가 안 갑니다. 연민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유대교인들로부터 그런 대우를 받았을 겁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이 그만큼 특별한 경험이라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그런 경험은 바로 예수의 부활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부활 경험은 아주 특별한 생명 경험입니다. 마술처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경험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님은 그를 따르던 사람에게만 경험되었습니다.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경험될 수 없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은 신문 기자가 현장을 취재해서 뉴스로 보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시인의 시적 경험, 음악가의 음악 경험을 뉴스처럼 보도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그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 사건이 곧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즉 승천하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신앙이 바로 오늘 설교 본문에도 그대로 반복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가 때가 되어 하늘 위로 오르셨다고 말입니다.

 

본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0b절에서 예수님의 내려오심과 올라가심으로써 만물이 충만하게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충만하다는 말은 완성되었다는 뜻, 또는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이 완성되었습니다. 만물이 완성되었습니다. 물론 아직은 그것이 실증적으로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죽어야 하고, 고뇌하고, 병들고, 늙고, 외롭고, 실수하고, 양심의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무한 순간도 많습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도 많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세상은 여전히 미완성이고, 비어 있는 구석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통해서 존재론적으로는 만물이 완성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이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해결되었으면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기독교 신앙이 공허하게 보이겠지요. 그러나 신앙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만물의 완성이 신비롭게 경험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완성이 여러분의 영혼을 실질적으로 울리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만유 너머에, 만유를 통해서, 만유 안에 계신 하나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의 성육신과 부활을 통해서 만물이 완성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비밀스런 방식으로 그 만물의 완성을 경험하고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13절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까지 이른 사람입니다. 14절 말씀에 따르면 이런 사람은 세상의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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