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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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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4:25-27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425-27: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 스스로 진리를 따라가지 않는 자를 본문을 생각하면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하겠느냐? 자기 스스로 버림을 받는 것이다. 진리의 포기는 자기 스스로 버림을 받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진리란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가는 것이다.

 

 

진리란다면 다른 사람은 다 안 따라 오더라도 자기는 가야 한다. 그러니까 진리를 따르는 여기에는 민주주의가 없는 거다. 만주주의 식으로 따르는 게 아니다. 진리가 독권 독단 독주이듯이 진리를 따르는 자기도 뒤에서 남이 따라오건 말건 자기 자세는 같아야 한다.

 

 

자기 집안 식구나 친구에게 진리로 가자고 가자고 해도 안 가면 어떻게 하나? 그것은 그들 본인이 스스로 버림을 받고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권고자는 자기 혼자라도 가야 한다. ‘남이 안 가니, 부모가 안 가니 나도 안 가련다하는 사상은 진리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거다.

 

 

우리가 룻을 생각해 보면 룻의 고향은 모압이다. 룻이 모압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시어머니를 따라간 것이냐, 룻이 하나님을 붙잡고 가다보니 시어머니도 그 길을 가기 때문에 같이 가게 된 것이냐? 후자다.

 

 

룻이 모압을 버리고 가니까 모압에서 받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믿어지느냐? 실력이 없는 사람이 아무리 세상 것을 잡고 있어도 우리는 하나도 부러울 게 못 된다. 왜냐하면 그런 건 언젠가 내가 버리고 갈 것이고, 또한 그들이 나를 버리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잡고 가면 진리로부터 모든 게 다 나온다.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구태여 세상 축복 축복말할 필요가 없다. 말을 하면 오히려 이상해진다. 말을 안 해도 따라올 것을 따라올 것으로 말을 하게 되면 오히려 이상해진다.

 

 

구약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허다한 무리들,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 허다한 무리들. 이들이 과연 물질선, 인정선, 생명선을 다 초월하고 따랐을까?

 

 

본문에도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믿음 있고 열심 있는 사람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안 믿는 사람이 볼 때도 가룟유다가 예수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고 있으면서 속에는 돈 계산을 하고 있다. 세상계산을 하고 있다. 예수로 인해서 얼마나 돈이 들어오느냐? 들어오는 대로 그것을 가지고 달아나려고.

 

 

이건 성경에 그렇게 기록이 돼 있으니까 누구나 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것을 구걸한다면 이는 가룟유다와 똑같은 건데 이걸 알까? 이런 사람은 가령 세상 것으로 풍족해지면 100% 예수를 버리게 돼 있다. 또한 이런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서 자기의 계획대로 안 되면 또 예수를 팔아먹게 돼 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팔아먹게 돼 있다. 그 교훈을 팔아먹게 돼 있고, 진리의 신앙정조를 세상과 맞바꾸어 팔아먹게 돼 있다. 세상과 맞바꾸게 돼 있다. 원리가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열심 있구나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따르는 사람들 속은 다르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속 중심을 다 아신다. 다 죄 아래 놓여있고, 어둡고, 어리석고, 저질이고, 넓지 못하고, 비뚤어져 있고, 굽어져 있고, 악취가 나고, 각종 병적이고 한 인간들의 마음을 왜 모르시겠느냐?

 

 

우리는 이런 걸 정확히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정확한 기준적인 답을 알면 틀린 것도 알게 된다. 산수 셈을 가지고, 수학공식을 가지고 신앙의 질을 생각해 보면, 5+5=10. 이 문제의 정답이 10이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그 외는 쓴 답은 다 틀린 답인 것을 안다. 정확한 답만 알면 틀린 답은 알게 되는 거다.

 

 

그러면 5+5=9를 쓰고, 5+5=11을 썼다면 이건 얼마나 틀린 거냐? 다 틀린 거냐, 하나만 틀린 거냐? 정답이 10인데 9를 썼다면 하나가 틀린 거고, 11을 썼어도 하나가 틀린 거냐? 하나만 틀린 게 아니라 다 틀린 거다. 그런데 교회가 답을 안 쓴 것만 틀린 줄로 알지 틀린 답을 썼는데 911로 쓴 것은 완전히 틀린 게 아니라 약간 틀린 것이라는 식으로 신앙을 생각을 한다.

 

 

신앙은 질이다. 따라서 본질에서 틀린 거면 그 틀린 게 얼마만큼 틀렸던 간 완전히 틀린 거다. 그래서 이걸 깨달으라고, 신앙 믿음의 정확한 것을 가르쳐 주려고 산수가 있는 거다. 그런데 교회가 그렇게 못 보는구나. 비슷하게 보이면 우리와 조금 다르구나한다.

 

 

다른 교회 교인들이 또 다른 교회를 가보면 자기 교회와 비슷하니까 같은 걸로 알지만 우리교회에 와 보면 자기 교회와 뭔가가 다르지, 말씀도 다르지, 예배순서도 다르지 하니까 이단이 아닌가한다. 우리는 이단을 어떻게 보느냐? 본질에서 다르면(틀리면) 죄다 거짓이요 이단이다. 한 개 두 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교인들이 이걸 알까?

 

 

참기름하고 들기름은 근본적으로 다른(틀린) 것이냐, 조금 다른(틀린) 것이냐?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다. 질이 다른 것이다. 들깨와 참깨의 씨가 비슷하냐, 완전히 다른 거냐? 완전히 다르다. 설교가 질적으로 근본적으로 틀리면 안 된다. 설교가 아무리 일반적으로 듣기 좋아도 세상을 가르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그러나 설교가 말이 매끄럽지 못해도 이치가 맞으면 옳은 거다. 그리고 하늘의 정신이면 옳은 거다. 그런데 세상은 이걸 그렇게 보지 못한다.

 

 

그런데 본질임에도 본질에서 미달성은 있는 거다. 그래서 이질에서 미달성의 차원이 있는 거지만 본질이냐, 아니냐하는 면에서는 본질에서 미달성 미숙성이냐, 아니냐하는 거지 이질로 된 것이라면 본질이냐, 이질이냐로 따지는 게 아니다. 질이 그렇다.

 

 

그래서 본질에서 아직 미달성의 차원에 머물고 있으면서 그 사람이 계속 진리를 따르고 듣고 있다면 언젠가 고쳐지겠구나하고 희망적으로 보고 그 사람에게 교훈이 들어가는 거다. 가령 열두 제자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안 따르고 바리새교인들을 따른다면 그건 신앙 믿음이 아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나도 한 자리 해 먹겠다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계속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배우며 진리로 간다면 바꾸어질 가능성이 있는 거다. 희망적이다.

 

 

이런 게 교훈적으로 보면 사람마다 여러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본질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구원의 교훈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고쳐질 가능성이 많다. 그럼에도 안 고쳐지는 건 본인 책임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으냐? 본문대로 본다면 부모도 버리고, 처자도 버리고, 형제도 버리고, 자녀도 버리고, 목숨까지 미워하고. 이렇게 안 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몇 명이나 될까? 몇 십 명, 몇 백 명이 된다면 나도 그 중에 끼어있을까? 예수를 믿는다는 내가 이런 것을 초월했다고 한다면 내가 그들 중에 끼어있을까? 다 초월이 됐을까?

 

 

세상과 세상 것을 소원 목적하는 자들은 세 가지가 다 초월이 안 된다. 오히려 세 가지를 더 많이 가지길 바라며 열심히 믿는 거다. 이방세상은 아예 그런 거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예수님은 왜 다 버리고 따르라고 하는 거냐? 안 버리면 안 따라지는 것이냐? 뒤의 것을 잡고 있으면 앞으로는 못 가는 게 확실하냐? 그렇다면 뒤의 것을 놓아야 앞으로 갈 수가 있는 거다. 땅의 것을 놓아야 하늘로 갈 수 있는 거다. 이치다. 이치로 보지 못하면 못 깨닫는다. 못 깨달으면 가진 것 같으나 다 빼앗기게 돼 있다. 이치만 바로 잡으면 다 가지게 된다.

 

 

부모를 붙잡으면 너는 죽는다. 처와 형제자매를 붙잡으면 너는 죽는다. 그게 네 기준이 아니다. 그걸 붙잡는 게 네가 살 길이 아니다. 네가 살 수 있는 길, 부모형제 처와 자녀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주님을 붙들어라. 살리려고 하는 거다. 글자적으로 보면 부모형제 처와 자식을 누가 다 만들었느냐? 다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왜 버리라고 하느냐? 사람이 사는데 그게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도 사람이 지혜롭게 살려면 머리에서 깨우쳐져야 한다. 머리에서 깨우쳐지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남에게 다 빼앗기게 돼 있다. 쉽게 말하면 세상에서 머리가 약삭빠른 자가 다 갖고 가게 돼 있다. 세상은 그런 너를 이용해서 네 것을 다 빼앗아 가고자 한다. 그러니 너는 예수를 붙들어라. 하나님의 지혜를 붙들어라. 그래야 안 뺏기고, 간수하게 되고, 보전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버리라고 하시는데, 당신이 주셔놓고 왜 버리라고 하는 거냐? 버리라고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고, 예수 당신만을 따르라고 하실 때는 따르는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버린 것에 비할 바가 아닌 더 좋은 것이 있기 때문에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구원. 구원이 아닌 것은 붙잡지 말아라.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 뭘 붙잡은 것이냐? 라합은 술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님들로부터 두 정탐꾼이 온 소식을 들었다. 이 두 정탐꾼은 말하자면 복음을 가지고 온 것이다. 천국복음, 하늘의 소식을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라합은 그걸 알고 믿었다. 그래서 두 정탐꾼을 살리고 라합과 온 식구가 다 살았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그게 안 믿어진다. 눈앞에 나타나는 코앞의 것만 보이지 저 멀리 있는 것, 더 크고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은 안 보인다. 그 참 이상하다. 선악과 따먹은 지식이 기준이 돼서 그렇다. 예수 믿어 세상살이 편하게 살려는 그 목적에 대고 예수를 믿으니 어떻게 머리가 열리겠느냐?

 

 

버려라.’ 왜 버려야 하느냐?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 받은 세상은 전부는 사망 아래요, 죄 아래요, 죽고, 죽었고, 죽어가고, 죽은 것밖에 없다. 부모형제라도 다 그렇다. 다 선악과 따먹은 기준으로 들어가 있다. 안 믿는 부모형제들의 말을 들어보면 어떻게 먹고 사느냐? 돈 많이 버느냐? 부자로 살아야지전부는 그거다. 그거 빼놓고는 대화가 없다. 그거라야 대화가 되고 재미가 있고 그런 거다.

 

 

세상은 전부가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그 자리에서 임시적인 행복을 맛보려고 한다. 그러니 가족 간이라도 물질을 놓고 재산을 놓고 이해타산을 따지는 부모형제라면 아예 말도 걸지 말아라. 그건 사람이 아니다. 부모형제들끼리 물질 이해타산을 가지고 내 돈 내놔라.’ 이게 말이 되느냐? 성경에 보면 형제는 어려울 때를 위해서 났다고 했다. 다른 형제가 없으면 그냥 줘라. 그런데 그걸 주네, 안 주네하며 법정에 서고. 그게 무슨 형제냐? 남도 안 그런다.

 

 

세상은 다 물질을 가지고 사람을 논한다. 우리는 이런 건 아예 의논의 대상이 안 된다. 더군다나 믿음으로 논할 대상은 더욱 더 안 된다.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에서 뜰 거냐? 그건 아니다. 다양한 방편으로 그런 걸 정복이 들어가야 한다. ? 사람을 살리고 건지려니까.

 

 

성경에 예수님이 문둥이를 고쳤다. 문둥이는 오각의 오감성에 문제가 돼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모양 형체가 아니다. 괴물이다. 문둥이는 사람의 모양새는 정상적인 그대로이지만 정신적으로 영의 눈으로 보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신상태, 정서상태, 도덕적 상태가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도덕적 상태를 말해주는 거다.

 

 

문둥이는 문둥이지 사람이 아니다. 온전케 되는 게 사람이다. 도둑놈이 사람이냐? 사람이 아닌 도둑놈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하나님 앞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이게 참 사람이다. 그래서 이걸 깨닫게 하려고 성경에 예수님께서 문둥이를 고쳐서 참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놓는 거다. 성경을 깨달을 때는 이게 들어가는 거다. 목사님들의 설교 속에는 이게 하나하나 들어가는 거다. 그래야 사람모습을 갖추는 거다. 말씀 속에서 이치로 살이 붙을 데는 살이 붙고, 그 다음에 오각의 오감성이 바로 되어 들어가도록 붙는 거다.

 

 

우리가 모양은 제각기 반듯하게 생겼지만 영의 눈으로 보면 온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마음이 꾸부러져 있고, 꼬부라져 있고, 꼬불꼬불 돼 있고, 별의 별 사람이 많다. 그걸 고쳐야 한다. 그걸 고쳐달라고 하라.

 

 

세상에는 죽어가는 것, 죽은 것밖에 없다. 지식도 그렇다. 세상에 속한 모든 부귀공명 영광 권세 행복 전부는 죄 아래 있다. 죄 아래의 것은 다 사망이다. 그래서 인간 속에 땅의 것으로 생산이 된 것은 즉, 인간이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게 땅의 것으로 생산된 것, 비진리를 먹고 땅의 것으로 생산된 것, ‘예수 믿어서 부자 되자하는 이것은 다 땅에서 생산된 거다. 그 단체가 커지면 그게 계:에 있는 땅의 짐승이다. 땅의 짐승의 성질이 그렇다.

 

 

왜 그걸 짐승이라고 하느냐? 그건 천국에 속한 것이 아니라 본능에 속한 것이다. 신앙하는 목적의 질이 그렇다. 그래서 그걸 짐승이라고 하는 거다. 우리에게도 그런 게 있지만 우리는 그걸 목적으로 사는 게 아니라 그런 건 전부가 사람을 살리면 면에 이용 활용물이다. 그런데 짐승들은 그게 목적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근본이 다른 거다. 목적이 다른 거다. 예수님도 밥도 먹고 옷도 입고 했지만 삶의 근본이 다르고 목적이 다르다.

 

 

땅의 것으로 생산된 것은 전부는 죽는다. 사망이요 심판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셨으니 죄 아래, 사망 아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가는 것은 없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만 부지런히 하셨느냐? 우리를 위한 구원사역으로 살리는 일만 부지런히 하셨다. 예수님에게는 하늘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죽는 것이 없다. 하늘의 것이 하는 일은 전부는 살리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온 사람은 살리는 일을 한다. 하나님께서 보낸 옳은 종은 전부는 살리는 일을 한다.

 

 

땅의 것이 들어가면 죽는 거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 거다. 그 소원 목적을 따먹으면 너는 죽는 거다. 하늘의 것으로 살지를 못한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모형제 처와 자식을 다 버리라는 것은 뭘 주려고 그러는 거냐? 하늘의 것, 영생을 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땅의 것으로 대화가 되고, 땅의 것으로 소원 목적을 하고, 땅의 것에 제물이 되기를 바라고, 땅의 것에 목숨을 바쳐서 죽기를 바란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이 말하자면 부자 되어 살다가 죽으라고 하느냐, 가난하게 살다가 죽으라고 하느냐? 세상에서 부자가 되어서 마음 것 누리고, 돈 많이 벌어서 쌓아놓고 살다가 죽으라고 한다. 또 그러는 걸 다 좋게 여긴다.

 

 

안 믿는 세상 어느 부모로부터 너는 생명과 먹고 하늘의 사람, 주님과 같은 사람이 되어 살다가 가거라하는 말을 들어봤느냐? 아마 못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목사님마저 축복기도를 해도 물질을 구하는 기도를 해 준다. 농촌에서는 돼지가 새끼를 낳아도 안수 축복기도를 해 준단다. 그게 뭐냐? 이건 미신이다.

 

 

예수님에게는 죽어가는 게 없다. 전부는 살리는 거다. 안 살리면 주님에게는 죄다. 주님은 살리는 거다. 전부가 살리고 구원이고 영생이 되도록 통과한다. 주님에게는 안 살리는 게 있다면 허물이요 죄가 되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은 우리를 위해서 마귀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사셨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이겼으니 우리에게도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것을 가르쳐준 거다. 죄를 이길 수 있는 걸 가르쳐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길을 가다가도 꼭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야 만이 뒤에 오는 사람을 보고 조심을 하라고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사망을 이겼으니 세상의 유혹과 미혹을 이겼고, 또 사망을 이겼으니 예수님의 언행심사는 전부가 영생이고 생명이다. 영생과 생명 안에는 영능의 실력이 있고, 영원한 생명적 존귀영광성도 그 안에 다 들어있는 거다.

 

 

이 예수님의 한 마디라면 산천초목이 안 움직이는 게 있느냐? 요나를 집어삼키라고 하니까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 그러니 패역성이 강한 요나 때문에 물고기가 생고생을 한다. 이처럼 만물은 인간들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 :에서부터 인간들에게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지배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안 되니 짐승들이 고통을 받고 하는 거다. 돼지나 소나 닭에게 병이 오고 하는 건 인간 때문에 오는 거다. 인간이 다스리지를 못해서.

 

 

여기서 우리가 선택을 한다면 사망보다 생명이다. 임시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이고. 네가 살고자 하느냐, 죽고자 하느냐? 우선적으로 선택을 바로 하라는 것이다. 선택을 잘못하면 죽는다. 그 다음에 할 것은 교훈적으로 바른 것을 선택을 해야 한다.

 

 

예수님의 교훈은 세 가지 초월성이 들어있는데, 그러나 세상 거짓된 교회 인도자들은 이 세 가지 초월이 안 되도록 교인들을 이 세 가지에 더 집착하도록 만들어 놓는다.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갈까, 거짓 인도자에게로 갈까? 예수님께로는 잘 안 간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거짓 인도자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구절을 쓰듯이 마귀도 성경구절을 이용하는 거다. 교인들은 거짓된 인도자들이 성경구절을 쓰는 것을 보고 그도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보는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고 볼 수 있겠느냐? 세 가지를 초월을 못하고 죄 아래 사망 아래 살고 있는데 이것을 영생이고 생명이라고 볼 수 있겠느냐?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세 가지를 초월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죄 아래 사망 아래 있는 사람들을 영생권 생명권 안으로 낚아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거짓 종들은 사람을 낚아다가 더 지옥자식으로 만들어 놓는다. 즉 물질성에 더 잡아넣어서 세상이라는 시궁창에 처박는 거다. 그런데 교인들이 그걸 모른다.

 

 

목사님들 세계에서도 세 가지를 초월을 못하면 사람을 낚지를 못하는 거다. 생각을 해 봐라. 진리를 따른다고 하는 목사님이나 교인들이 일가친척이나 부모형제들 집에 가서 자꾸 돈 소리나 하고 세상소리나 한다면 진리를 가지고 사람이 낚아지겠느냐? 안 된다.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어디서 낚아 올리느냐? 세 가지를 초월을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성이니, 거기에서 그 사람을 하나님 쪽으로 낚아 올리는 것이다. 정신적 사상적으로 주님 닮는 쪽으로 낚아 올리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하는 게 낚아 올리는 거냐? 이건 낚아 올리는 게 아니라 세상이라는 시궁창에, 불타는 곳에 처박는 것이다. 신앙의 질이 그렇다.

 

 

그러면 예수만 따르면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 세상도 따르다가 예수님이 부르면 , 여기 있소하고 있다가 할 일이 없으면 또 세상으로 갔다가 그런 식으로 살아야만 살 수 있는 거냐? 세상을 누가 지었느냐? 세상은 누구 것이냐?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해서 거지가 되는 거냐? 하도 안 믿으니까 중동의 이스라엘이 온 세계의 재권을 다 붙잡고 있는 걸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 그래도 안 믿겠느냐 그 말이다.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그런데 예수 믿고 세상에서 부자 된다하는 말은 기쁘게 들리고, ‘세 가지를 초월하고 사람이 사는 세계가 옳은 것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온전의 성품의 사람이 돼야 구원이고 참 사람이 되는 것이니 참 사람으로 구원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자하면 왜 이 말은 마귀의 말로 들리느냐? 그 귀가 어떻게 된 거냐? 왜 그게 마귀의 말로 들리고 이단자의 말로 들릴까?

 

 

주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것도 사람의 두뇌가 어떻게 작용을 해서 믿어지는 건지 신비스럽고, 옳은 진리가 안 믿어지는 것도 그 두뇌가 어떻게 작용을 해서 안 믿어지는 건지 참 신비스럽다. 그게 누구 탓이냐? 사람 탓이냐, 성령님 탓이냐? 내가 말씀대로 믿고 바로 가려고 하는데, 내 속에서는 소원성이 바로 믿으려고 하는데 성령님이 그 마음을 자꾸 빼앗는다면 이건 성령 탓이 된다. 그런데 인간 자기가 뭔가 속에서 세상 쪽으로 저울추가 내려져 있다면 그런 내 속에서는 성령님이 역사를 할 수가 없는 거다.

 

 

그러니까 내 속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런 내 옆에서 마귀가 속삭이니까 내가 마귀를 좇아서 안 믿는 것이라면 이게 누구 탁이냐? 자기 탓이냐, 마귀 탓이냐? 인간 자기 탓이다. 인간 자기에게는, 특히 믿는 자들에게는 자유가 있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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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92 누가복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않는 자도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눅14:25-30  김경형목사  2022-12-25 106
17691 요한복음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요3:36  김경형목사  2022-12-25 112
17690 미가 야훼께서 원하시는 자 미6:6-8  강승호목사  2022-12-23 121
17689 열왕기하 (계시보기)엘리야의 능력이 엘리사에게로. 왕하2:11  김경형목사  2022-12-21 106
17688 마태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마1:18-25  강승호목사  2022-12-19 360
17687 요한복음 (계시보기)누가 택자이고 누가 불택자인가? 요3:16  김경형목사  2022-12-18 47
» 누가복음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눅14:25-27  김경형목사  2022-12-18 74
17685 요한복음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3:35  김경형목사  2022-12-18 43
17684 누가복음 주의 길을 예비하라 눅3:1-6  강승호목사  2022-12-14 198
17683 호세아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11:1-11  정용섭 목사  2022-12-12 126
17682 누가복음 성령을 주시리! 눅11:1-13  정용섭 목사  2022-12-12 118
17681 아모스 말씀’이 없는 시대 암8:1~12  정용섭 목사  2022-12-12 150
17680 골로새서 아들의 나라 골1:1-14  정용섭 목사  2022-12-12 81
17679 누가복음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10:1-11, 16-20,  정용섭 목사  2022-12-12 99
17678 누가복음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9:57-62  정용섭 목사  2022-12-12 83
17677 열왕기상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19:1-4, 8-15  정용섭 목사  2022-12-12 97
17676 요한복음 성령이여 오소서! 요16:12-15  정용섭 목사  2022-12-12 89
17675 창세기 (계시보기)생명과를 먹어야 그리스도성이 입혀진다. 창2:16-17  김경형목사  2022-12-12 31
17674 누가복음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눅14:21-27  김경형목사  2022-12-11 109
17673 요한복음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요3:31-34  김경형목사  2022-12-11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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