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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

갈라디아 류공석 목사............... 조회 수 961 추천 수 0 2016.05.13 23:5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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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2:15-21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
2011년 4월 9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갈라디아서 2:15-21

  가끔 어떤 사람들을 보면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단 말고 정상적인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말이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목사도 있고 선교사도 있다. 겉으로 보면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하는 말이나 생각, 행동을 보면 도대체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서 나는 종종 나에게 질문한다. 나는 제대로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나 하는 질문이다. 여러분들은 어떤가? 정말 제대로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는가?

  제대로 알고 믿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질문들이 있다. 하나님이 무서운가? 무서운 하나님, 잘못하면 벌주는 하나님, 우리를 제약하고 통제하는 하나님으로 생각되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이 말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깊이 와 닿는가? 아니면 그저 성경에서 말하는 말일뿐 공감되지 않는 말인가?

  부자 되고 성공하고 건강하면 복 받은 것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고, 가난하고 사회적으로도 그리 성공하지 못하고 병들고 실패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가? 내가 기도하는 것 응답해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야속하고 원망스럽지는 않은가?

  이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나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림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하는 질문이다. 나의 삶의 안정, 성공,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니면 나의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다 드리면서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나의 왕으로 인정하는 믿음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무언가를 얻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믿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나의 욕심이 반영된 하나님, 나의 상처와 경험과 생각 속에 제한된 하나님으로 있을 뿐이다.

  오늘 이 시간 아주 중요한 질문 셋을 나와 여러분들에게 한다. 첫째,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아니면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림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둘째,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의 생각, 나의 행동, 나의 삶의 주체는 누구인가? 나의 생각과 나의 행동, 내 삶을 이끄는 주체는 누구인가? 나 자신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신가?” 셋째, “나는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한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우리의 믿음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질문이고 우리가 매순간, 그리고 평생 가져야할 질문이다. 이 질문들에 대해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오늘 본문은 그 질문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이라 할 수 있다. 함께 본문을 살펴보면서 우리 스스로도 사도 바울과 같은 답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본문은 지난주에 살펴본 사건, 즉 안디옥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의 연장선에 있다. 베드로가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자리를 피한 것으로 생긴 것인데, 이 안디옥 사건의 중심은 그리스도인들의 신분과 그에 합당한 행위에 대한 것이다. 지난주에 자세히 살펴본 것처럼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 받고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만이 언약 백성이라고 생각했고, 그렇지 못한 이방인들을 배척하고 경멸했었다. 그것이 15절에도 나온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본래 유대인,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이란 뜻으로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구원이 보장된다고 생각했었다.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아주 불순종만 하지 않으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방인은 곧 죄인이었고 우상숭배자요 음란하고 불순종하고 더러운 죄인으로 생각했었다. 그런 이방인이 유대인과 같은 언약 백성이 되려면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가 예수님을 믿게 된 유대인 신자들에게도 남아 있었는데, 이들 유대인 신자들 중 일부가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인과 같은 할례를 요구했고 음식법 등의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지만 우리 유대인들처럼 언약백성을 울타리 안에 들어올 수 있고 율법을 지켜야만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주장은 매우 단호하고 분명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다. 이 믿음으로 언약백성이 되는 것이고 이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것이다.

  그러기에 할례는 더 이상 언약백성이 되는 필요조건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의 관습일 뿐이며, 그러기에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음식법과 같은 문제로 이방인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그러기에 그 믿음 안에서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으며 언약백성이라는 신분에 있어 동등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인데 베드로가 순간적이지만 이 신앙에 합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공개적으로 책망했던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믿음이 그러하고 우리의 신분이 그러하기에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믿는다고 하면서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분으로 만드는 잘못이라는 것이다. 17절을 보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데, 율법의 잣대로 들이대어서 다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신자들, 그리고 그들과 식사를 같이 하는 유대인 신자들은 유대인들의 율법의 잣대로 보면 죄인이 되고 만다.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로 만드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해주셨는데, 다시금 율법의 잣대를 들이밀어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를 죄를 짓게 하는 자로 만드는 행위이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잘못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인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자인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제대로 된 믿음의 확신 가운데 서서 그 믿음에 합당한 생각과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했다. 그 믿음에 합당한 행동을 해왔다. 18절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헐었던 것은 율법의 의이다. 바울은 과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을 통해 의롭게 여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 앞에 의롭게 여김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달았고, 자신도 율법을 더 이상 의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율법을 의의 조건으로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율법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존중했지만 결코 의의 조건으로 삼지는 않았다.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한 사람이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을 사람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운다면, 즉 다시 율법의 의를 내세운다면 그것은 그 스스로 범법자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여셨는데, 그 질서를 버리고 옛 질서를 따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신 새로운 질서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것, 이신칭의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이 없으며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다. 이 새로운 질서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바로 19-20절이다. 먼저 19절을 보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이 말은 둘로 떼어 볼 수 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으며,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뜻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이 말은 3:13과 연관해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율법의 저주를 친히 담당하셨고 그의 백성을 위하여 그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그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통하여 죽으셨다. 그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말의 의미이다.

  두 번째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로마서 7:1과 연관해서 이해할 수 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무어라 하는가? 법은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한다고 했다. 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에만 효력이 있을 뿐 죽으면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당시 유대교의 이해였다. 랍비 문헌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은 죽자마자 계명들을 지켜야할 의무에서 벗어난다.’고 말이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율법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고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은 누구와 관련된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으셨고 율법에 대하여 죽으셨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주어를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고 나라고 하는 것일까? 왜 자기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고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는 것일까? 그 해답이 20절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말이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으셨음에도 주어를 자신으로 한 까닭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분명한 고백이 있다. 예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이고, 이뿐만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고백이다.

  이 고백이 분명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음을 믿는 것이다. 나의 죄로 인해서 내가 죽어야 했는데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나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무엇인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고백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뜻이다. 내가 죽었다는 말이다. 곧 나의 자아가 죽었다는 말이다. 나의 자아가 죽었고 나의 욕심도 죽었고 나의 생각도 죽었다는 것을 말한다.

  내가 죽었다는 말은 나의 주체가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죽었기에 더 이상 내가 나의 주인 아니다. 누구인가? 누가 나의 주인인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께서 이제 나의 주인이시다. 나는 죽었기에 나의 왕좌에서 내려와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시오 나의 왕이 되시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원리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 믿음이 내가 생각하고 내가 추구하고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원리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서론에서 세 가지 질문을 드렸었다. 첫째,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아니면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림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둘째,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의 생각, 나의 행동, 나의 삶의 주체는 누구인가? 나의 생각과 나의 행동, 내 삶을 이끄는 주체는 누구인가? 나 자신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신가?”셋째, “나는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한가?”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는 사람,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 같다.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맞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한다. 삶에 필요한 것들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이유는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필요한 무언가를 구해야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믿음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드리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주저하여 하질 못 한다.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이 왠지 부담스럽고 손해 보는 것 같다.  하나님이 내 것을 다 가져갈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내 것을 내려놓는 순간, 내 것을 다 드리는 순간 내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사랑이 들어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 드려야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죽는다는 말이 바로 그 의미다. 나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다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죽는다는 말의 의미다.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인데 이것을 잘 못 한다. 왠가? 여전히 내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것 같긴 한데 여전히 내가 나의 주인이기에 다 내려놓지 못하고 다 드리지도 못한다. 다 내려놓으면 다 드리면 왠지 손해 볼 것 같고 다 가져가실 것 같은 두려움이 든다.

  그렇지 않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제 내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그러기에 그분께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이다. 그분 앞에 다 내려놓는 것이다. 그럴 때 내 인생은 손해가 아니라 더욱 더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다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평강으로 채워지고 내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사용되는 축복된 인생이 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림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라. 그것이 내가 나의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실제적으로 인정하는 증거다.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실제로도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라. 그렇게 되면 예수님 한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가?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가? 대답할 수 있는가?

  여기서 잠시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를 하자. 유기성 목사님인데, 분당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그분이 쓴 책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20절 말씀에서 따 왔는데 제목이 그 책과 비슷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에 사는 까닭에 아직 책을 구하지 못해 읽어보지 못했는데 꼭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읽어보지 못했지만 유기성 목사님의 고백을 들어본 적이 있다.

  이 분은 3대째 목사다. 참 부러운 복인데, 그래서 어려서부터 목사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가고 목사가 되었단다. 그런데 자신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었단다. 믿기는 했지만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학교에 들어가면 만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목사가 되어서도 그랬단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없이도 목사가 될 수 있고, 심지어 큰 교회 목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랬을 때 그 결과가 어떨지는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그러다가 군목 시절에 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될 수도 있는 수술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런 과정에서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단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전까지 자기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큰 교회의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대형 교회 목사가 되고 유명해지는 것이었단다. 그래서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는 말이 싫었고 이해가 되지 않았단다.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 말은 개척교회나 조그만 목회를 하는 목사들이 하는 말로 여겨졌고 인생의 실패를 맛본 사람들이나 하는 말 정도로 여겼단다.

  그런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보니 모든 것이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십자가가 보이기 시작했고,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게 되었고 자신을 사랑하사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깨닫고 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전까지 자신이 주인 되어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단다.  자기 안에 하나님을 이용하여 성공해 보려는 교활한 야심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자기 안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세상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이 다 들어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후 삶이 변화되었다.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고, 십자가가 정말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을 경험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고, 오늘 본문 20절 말씀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이제는 내가 죽고 예수께서 사는 사람이 되었음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예전에는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는 말이 이해도 되지 않았고 대답도 못했는데 이제는 자신 있게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한가? 이 질문에 대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이해가 되는가? 혹시 부담스럽고 이해되지 않는, 성공하지 못하고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 자신에게도 질문을 해보았다.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기 전에 나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았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이 있는가? 정말 주님께서 나의 모든 영역에서 주인이신가?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가?

  어떨 것 같은가? 그렇다고 고백은 되는 데 힘이 없었다. 분명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린 것 같고 주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고백하고 있고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은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힘이 없었다. 왤까... 생각하고 기도했다.

  부끄럽게도 아직도 찌꺼기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 내려놓고 다 드린 것 같은데 마음 한켠에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있고 욕심도 좀 남아 있고 나 역시 좀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아직도 멀었다. 이 부족한 사람을 사랑으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러면서 나는 왜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는지 다시금 이해가 되었다. 바울이 그러지 않는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왜 날마다 죽어야 한다고 하는가?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그래서 이제는 내가 죽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하면서 왜 여기서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나?

  날마다 확인했다는 말이다. 날마다 십자가 바라보면서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임을 확인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또 다시 내가 살아나 내가 주인 되고 나의 욕심이 살아나 나의 욕심과 생각에 끌려가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날마다 죽어야 한다.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봐야 한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고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시어 사는 사람,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사람으로 굳건히 서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온전히 예수님 한분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저는 죽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 보다 자신 있게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할 수 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는 사람이 되자. 예수로 사는 사람이 되자.

  그리스도께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까지는 좋은데 내가 죽는 것은 왠지 억울할 것 같고 손해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수 있고 이 말이 조금 주눅이 들 수 있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로 더 가까이 나아가서 십자가를 능력으로 만나게 된 사람은 누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죽음을 보게 된다. 마땅히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차원이 아니라 그 예수님과 함께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십자가를 볼 때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내 죄를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회개 가운데서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고 그 십자가의 능력이란 죄를 이기는 능력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십자가를 경험하게 되면 내가 십자가에 죽는 것이 된다. 그것이 나의 자아가 죽는 것이다. 내 욕망이 죽는 것이다. 내 생각이 죽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성령께서 역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이 날마다 죽는다는 고백이다. 그럴 때 날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 되셔서 사시는 것이고 그럴 때 나는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는 이 말은 실패한 사람, 성공하지 못한 사람,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고백이 아니다. 실패자의 고백이 아니라 진정한 성공자의 고백이다. 인생의 성공은 예수님을 소유하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를 가지면 성공한 인생이라 하겠는가? 얼마큼 높아지면 성공한 인생이라 하겠는가? 예수님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쯤 될까? 돈으로 환산할 수조차 없는 가치를 가지신 분이시다. 온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시다. 이 예수님을 소유하는 것, 이 예수님으로 채워지는 것, 이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인 것이다. 믿는가?

  최근에 KAIST에서 학생들이 잇달아 자살을 했다. 3개월 동안 4명이 자살을 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연구 대학이라고 하는 곳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들어보니 새로운 총장의 방침이 무한 경쟁이란다. 성적에 따라 등록금을 차등 적용하고 재수강을 금지하는 등의 경쟁구도로 몰아갔단다. 그것을 견디지 못한 학생들이 자살을 한 것이다. 경쟁만 있었지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요즘 세상을 보면 무섭다. 경쟁을 강요하고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밀어붙인다. 그러다보니 그 사람의 보여지는 능력, 학력, 실적으로 사람들이 평가되고 만다. 인격은 없고 능력만 있다. 그러다보니 능력 지상주의, 학력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 사회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교회까지도 그러하고 신자들까지 그러하다. 하나님은 믿어도 대학 가는 것이라면 예배 좀 쉬어도 된다. 하나님은 엘리트를 사용하신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목사도 능력에 따라 뽑고 학력에 따라 뽑고 외모에 따라 뽑는다. 그럼 조금 능력 부족하고 학력도 부족하고 외모도 부족한 목사는 목회도 못하는가?

  우리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정말 찾으시는 사람은 누구일까? 하나님께서 정말 사용하실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능력 있는 사람, 학벌 좋은 사람, 잘 생긴 사람일까? 능력 있는 사람도 하나님이 쓰시고 학벌 좋은 사람도 쓰시고 잘 생긴 사람도 쓰신다. 그러나 능력이 좀 부족해도, 학벌이 좀 부족해도, 외모가 좀 부족해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쓰신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말 찾으시는 사람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는 사람, 정말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사는 사람,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시고 그 사람을 쓰시며 그런 사람을 통해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치유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자. 열심히 노력하자. 열심히 살자. 그러나 그 무엇보다 힘써야 할 것은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어야 한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라. 십자가를 바라보라.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사람임을 확인하라. 주님께 나의 모든 것 내려놓고 나의 모든 것 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라.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라.

  그럴 때 우리는 능력과 성공과 물질과 외모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축원한다.

* 기도:
날마다 십자가 바라보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음을 확인하게 하소서.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소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나의 모든 것 내려놓고 다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한 사람 되게 하소서. 그래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쓰실 수 있는 사람, 영광 받으실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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