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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섹과 싯나의 시대를 넘어

창세기 김기석 목사............... 조회 수 156 추천 수 0 2021.01.04 23:5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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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26:26-33 
설교자 : 김기석 목사 
참고 : 청파감리교회 http://www.chungpa.or.kr 

에섹과 싯나의 시대를 넘어
창26:26-33

(2020/06/21, 성령 강림 후 제3주)


 [아비멜렉이 친구 아훗삿과 군사령관 비골을 데리고, 그랄에서 이삭에게로 왔다. 이삭이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이 나를 미워하여 이렇게 쫓아내고서, 무슨 일로 나에게 왔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심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당신 사이에 평화조약을 맺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와 당신 사이에 언약을 맺읍시다. 우리가 당신을 건드리지 않고, 당신을 잘 대하여, 당신을 평안히 가게 한 것처럼, 당신도 우리를 해롭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분명히 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삭은 그들을 맞아서 잔치를 베풀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그들은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서로 맹세하였으며, 그런 다음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니, 그들이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그 날, 이삭의 종들이 와서, 그들이 판 우물에서 물이 터져나왔다고 보고하였다. 이삭은 그 우물을 세바라고 부르니,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그 우물이 있는 성읍을 브엘세바라고 한다.]


?위기에 처한 평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랜만에 현장 예배를 재개하고 있습니다. 반가움과 설렘도 있지만, 약간의 주저함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시대의 신앙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변화는 불가피합니다. 어떻게 안전하게 지내면서 신앙적 역동성을 잃지 않을까가 관심사입니다. 아무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기에 우리는 조심조심 걸어가면서 방향과 속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 상황이 한국교회 갱신의 계기가 될지, 쇠퇴의 계기가 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서 빛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이끄심을 믿습니다. 가장 참담한 시대에 인간 정신이 얼마나 숭고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던 예언자들이 우리에게 좋은 본이 되고 있습니다. 단절의 시대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더 깊은 일치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코로나 블루, 곧 코로나가 빚어낸 우울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때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총체적 위기에 빠진 북한이 남북 화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해버린 것입니다. 그 섬뜩한 방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북한 사정이 절박하다는 것이겠지요. 한동안 한반도의 평화가 바로 목전에 있는 것처럼 들떴던 적도 있었습니다. 비핵화가 실현되고, 평화협정까지 체결될 거라는 때 이른 낙관론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목표였는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볼모가 되어 있음을 우리는 참담하게 자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민족화해주일입니다. 비록 평화의 불빛은 가물거리고 있지만 화해와 평화의 꿈은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다‘라는 말을 꼭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시편 시인의 탄식이 요즘 새삼스럽게 아프게 다가옵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오랫동안,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구나.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평화를 말할 때에, 그들은 전쟁을 생각한다.“(시120:6-7) 인간은 누가 뭐라 해도 ‘함께 나란히 있는 존재’(Mit-einander-sein)입니다.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지향과 성격과 삶의 방식이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때때로 갈등이 발생하고, 갈등이 증폭되다보면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폭력은 파괴적인 에너지입니다. 그것은 감정적으로 분출되기도 하고, 안으로 스며들어 멍이 되기도 합니다. 만남과 공존은 늘 어렵기만 한 것일까요?


찰리 맥커시의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이진경 옮김)이라는 그림책의 첫 대목은 소년과 두더지가 들판에서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두더지가 말합니다. “난 아주 작아.” “그러네. 그렇지만 네가 이 세상에 있고 없고는 엄청난 차이야.” 단순한 말이지만 울림이 큽니다. 누군가가 이 세상에 있을 권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있음을 기뻐하는 것이 평화의 시작입니다.


?떠돌이 정착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다 한곳에 정착하여 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사정으로 인해 세상을 떠돌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떠돌이는 어떤 의미에서 살갗이 벗겨진 사람입니다. 취약하다는 말입니다. 한 사회에 위기가 닥치면 맨 먼저 위험에 처하는 것이 떠돌이들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난민 혹은 불법체류자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라도 추방당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세상을 떠도는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복을 매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람을 불러 익숙한 세계를 떠나라 하신 하나님은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창12:3b)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약속인 동시에 소명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 또한 동일합니다. 오늘 우리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을 매개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늘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흉년으로 인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삭은 블레셋 땅인 그랄에 터잡고 살았습니다. 터잡고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는 언제든 내쳐질 수 있는 취약한 존재였습니다. 이삭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 많은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주님이 복을 주셔서 그의 재산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양 떼와 소 떼도 늘어나고, 남종과 여종들을 많이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외지인이 누리는 복은 정착민들의 시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이등 시민으로 머무는 한 사람들은 외부자가 자기들 가운데 머무는 것을 허용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을 능가하는 것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노자도 도덕경 58장에서 같은 말을 합니다. “화에는 복이 기대고 있고(禍兮福之所倚) 복에는 화가 엎드려 있다(福兮禍之所伏)“. 많은 이들의 경험이 온축된 문장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아브라함 때 판 이삭의 우물을 흙으로 메워 버립니다. 그리고 그 땅을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 무도한 요구에 맞서 싸우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한 이삭은 그 곳을 떠나 그랄 평원으로 이주합니다. 평원이라고 번역되기는 했지만 ‘내핼nachal’은 ‘급류계곡’ 혹은 ‘와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큰 비가 내리면 언제든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장소였다는 말입니다.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내야 합니다. 그게 삶의 엄중함입니다. 이삭은 그곳에서 아버지 아브라함 때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습니다. 다행히 물들이 솟아났습니다. 그러자 그랄 지방의 목자들이 찾아와 이삭이 자기들의 샘줄기를 가로챘다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게 목초지와 물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의 종들과 그랄의 목자들 사이에 시비가 잦아지자 이삭은 그 샘을 ‘에섹Esek’이라 부릅니다. ‘다툼’이라는 뜻입니다. 이삭의 종들이 또 다른 우물을 파자 그랄의 목자들이 또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싯나Sitnah’라고 불렀습니다. ‘충돌, 반대’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에섹과 싯나는 경쟁을 내면화한 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일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느긋한 평화, 한가로움은 그저 사치일 뿐입니다. 가끔 어린 시절 이발소에서 만나곤 했던 푸쉬킨의 시구가 떠오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다소 진부한 메시지처럼 들리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마음으로 견뎌야 하는 것이 삶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르호봇


 이삭은 또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점점 더 척박한 곳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랄의 목자들도 그곳까지 와서 시비를 걸지는 않았습니다. 이삭은 그 우물을 ‘르호봇Rehoboth’이라고 불렀습니다. ‘넓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넓어서 그런 것인지, 다른 이들과의 경쟁이 치열하지 않기 때문에 붙인 이름인지 모르겠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 삶이 점점 가팔라지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자꾸 위축되고 세상에 대한 원망이 싹틉니다. 이삭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현실을 현실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내곤 했습니다. ‘르호봇’은 어쩌면 그런 그의 마음을 가리키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그의 마음을 지켜준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마음의 중심이 무너지지 않는 한 우리는 비틀거릴망정 아주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어느 날 블레셋의 통치자인 아비멜렉이 친구 아훗삿과 군사령관 비골을 데리고 이삭을 찾아왔습니다. 이삭은 그를 영접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뜻밖에도 평화 조약을 맺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놀랍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심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당신 사이에 평화 조약을 맺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와 당신 사이에 언약을 맺읍시다.”(창26:28)


아비멜렉도 자기 목자들과 이삭의 목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분쟁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 모든 일들은 그의 묵인 하에 벌어진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일의 경과를 지켜보며 이삭이 자기들을 위협할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오히려 그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심을 똑똑히 보았습니다”라고 말함으로 이삭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냅니다.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평화 조약을 맺자고 청합니다. 아비멜렉은 이삭을 자기와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삶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만일 이삭이 갈등 속에서 많은 것을 양보하며 그랄에 머무르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는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하다가 몰락했거나, 그 문화에 동화되기 위해 자기 정체성을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평화를 위한 용기


 미국에서 한인 디아스포라에 속한 채 살았던 신학자 이정용 박사는 이주자들이 미국 사회에서 겪는 일들을 분석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중심 집단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주변화시킴으로써 더욱 의존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중심부 사람들을 의존할수록, 주변부 사람들은 더욱 더 자율성을 잃고 중심부적 가치와 규범과 이념에 순응하게 된다.”(이정용, <마지널리티>, 신재식 옮김, 포이에마, 2014, p.234-5)

이삭이 그랄을 떠나 척박한 곳으로 이주를 감행한 것은 어쩌면 중심부로부터 멀어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호의에 의지해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 살았습니다. 이삭은 유약한 듯 보이지만 실은 단단한 사람입니다. 그 단단함 혹은 당당함이 그를 큰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삭은 평화 조약 제안을 기꺼이 수용합니다. 그리고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습니다. 그것은 평화 조약 성립을 상징하는 의식이었습니다. 함께 먹고 마심을 통해 그들은 우정을 나눈 사이가 되었습니다. 긴 갈등의 시간이 지난 후 평화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그 평화는 언제든 깨질 수도 있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깨질 수 있다 하여 평화를 지레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작은 평화라도 평화는 평화입니다. 그 공존의 경험이 상호 신뢰를 만듭니다. 그런 경험이 축적될 때 항구적인 평화가 가능합니다. 그 날 이삭의 종들이 돌아와 그들이 판 우물에서 물이 터져나왔다고 보고합니다. 평화를 선택한 데 대한 선물일까요? 이삭은 그 우물을 ‘세바Shibah’라고 불렀습니다. ‘맹세’ 혹은 ‘일곱’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영토의 남쪽에 있는 브엘세바는 바로 그 이삭의 우물이 있는 곳입니다. 그 우물은 평화와 공존이 가능함을 일깨워주는 장소인 셈입니다.


이래저래 참 어려운 시기입니다. 남북의 당국자들이 평화의 용기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갈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피차 서운한 것도 있겠지요. 그래도 판을 아예 깨서는 안 됩니다. 아비멜렉과 이삭 사이에 맺어졌던 평화 조약은 에섹과 싯나라는 현실을 통과한 후에 가능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르호봇으로 이끄십니다. 세상을 가르는 담을 온 몸으로 허무셨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시는 우리는 더욱 평화의 꿈을 버릴 수 없습니다. 비록 그 길이 가시밭길이라 해도 그 길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무너졌던 신뢰가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표나 지향을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지만 사탄은 ‘나누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선택할 때 막혔던 샘이 터져나오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 희망으로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생명과 평화를 추구하십시오. 주님이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걷고 계십니다. 골짜기는 메우고, 높은 산은 낮추고, 구부러진 곳은 곧게 하십시오. 한 주간 동안도 만나는 모든 이들 속에 사랑의 기운을 불어넣으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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