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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508 추천 수 0 2015.11.02 09: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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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6:1-6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6장 1절-6절: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방풍속, 설이나 추석 등은 어떻게 그렇게 잘 지키는지? 조상으로부터 자자손손 대대로 이방풍속 습관을 배우고 내려왔으면 예수를 믿더라도 그 뿌리가 참 안 뽑힌다. 그 이방풍속대로 절차를 밟아서 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잘 모른다고는 하더라도 ‘그거는 지켜야지’ 하는 게 뿌리박혀 있다.


우리가 가견적 육적으로 보면 현재 중동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풍속 습관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자손손 내려온 풍속 습관이기 때문에 한국과는 다르다. 그들이 비록 은밀한 뜻도 모르고 예수를 죽였고 성경 문자대로만 살지만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창조주를 모르는 이방인들보다 그 두뇌가 훨씬 발달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비록 육적으로 문자적으로 율법적으로 성경을 지킨다고 해도 그 지혜지식은 이방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뛰어난 거다. 그런데 왜 지금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방풍속 습관을 따라가는 건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올 때에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을 가리는 것은 ‘표면으로 광채 나는 것은 보지 말아라’ 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을 만나면 육체적으로도 얼굴에 빛이 나는데 하물며 영적 차원은 어떠하겠느냐’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이방풍속을 뿌리 뽑지 못한 사람이 참 많다. 진리신앙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래도 신앙양심에 가책은 느낀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가견적으로 물질축복 개념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예 그런 양심도 없다. 덤덤하다. 그러면서 명절에 고향에 가면서 하는 말인즉 고향 가서 전도 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그게 전도가 되느냐? 예수님도 고향에서 엄청난 고전을 겪고 있는데 ‘예수 예’ 자라는 은밀한 뜻도 모르고, 성격 성질도 못 고치고 있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알아서 전도를 하겠다는 거냐? 성령님이 같이 가면 모르겠지만. 그러나 성령님은 그런 데는 안 가신다. 간다고 하면 거짓 영이 따라간다. 그런데 진리신앙의 본질로 가는 예수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예수를 믿게 해야 되겠느냐’ 하는 방편 면에서는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다.


여기서 명절의 의미를 넓혔다 좁혔다 보면 신앙정신과 사상과 소원적으로 그게 다가간다. ‘명절’ 할 때에 정해진 어느 날짜의 명절도 있지만 약속된 어떤 잔치도 명절의 분위기를 타고 있다. 그걸 알아야 한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쫓아갔다. 그런데 표면적으로 일반적으로 보면 친구들이 남의 고향에 잘 따라가지 않는다. 명절 때는 각자 자기 고향을 찾아간다. 아무 데도 갈 데도 없고 부모형제도 없으면 혹 남의 고향에 따라가는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의 고향에 따라가 봤댔자 따라간 사람이 아는 사람들끼리 인사하고 다닐 때 같이 따라다니기가 참 멋쩍은 거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하러 고향으로 가신다. 천국복음을 전하러 가실 때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 것은 예수님께서 고향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는 건지, 아니면 제자들을 위해서 ‘이런 경우는 하면 안 된다. 이거는 안 맞는다’ 하는 구원도리 이치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제자들을 데리고 고향에 가시는 건지? 후자다. ‘고향에서 전도를 받나, 안 받나’ 하는 걸 제자들에게 알게 해주기 위해서 고향에 데리고 가는 거다.


지금 고향에 가서 전도한다고 명절에 내려가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명절에 고향에 가서 전도를 하면 고향사람들이 그 전도를 받겠느냐? 전도 안 된다. 지금 이걸 가르치기 위해서 본문이 있는 거다.


기독교인들이 명절에 제가 좋아서 고향에 내려가면서 전도하러 간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건 안 되는 거다. 성경이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다. 인간을 창조하신 주님이 증명하는 건데 인간이 뭐가 똑똑해서 된다고 하느냐? 괜히 제가 가고 싶으니까 전도하러 간다고 하며 가지만 전도는커녕 빠지지나 말지.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하러 고향에 가시는데 고향사람들이 어떻게 반응을 할까? 고향사람들은 성경 모세오경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안식일에 회당에서 천국복음을 가르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듣고 놀랐다. ‘이 사람이 어디서 능력 있는 말씀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찜이뇨?’ 그러니까 놀라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런 소리도 못 들어봤다는 것이다. 그런 이치 있는 말씀을 못 들어봤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에서 설교하는 걸 들을 때는 구별 분별해 가며 들어야 한다. 물론 우리교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도 이미 들은 것도 구별 분별해 보고, 쓰레기 같은 티끌이 섞여있는 건지, 순전히 하늘의 이치로 들어가고 있는 건지, 예를 들어서 말씀을 전할 때도 만들어지는 법칙을 가지고 말을 하는 건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교회 와서 들어도 똑같고 저 교회에서 들어도 다 똑같네’ 하는 건 다 아는 얘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어 복 받고 병 고치고’ 이런 말이나, 정치얘기 정세얘기 간증얘기 하는 건 어느 교회나 다 똑같네” 하는 건 누구든지 다 아는 얘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복음도 그런 거냐? 아니다. 땅의 일들은 경험하고 듣기도 하고 손으로 만지고 경험하고 생활해서 얼마든지 보편적으로 다 안다. 그러나 천국복음은 하늘의 뜻 하늘의 이치 하늘의 이해타산 하늘의 지혜지식이다.


능력(권능) 있는 말씀이라는 게 뭐냐? 마치 대형 스피커에서 음악소리가 크게 나면 사람이 가만있어도 속에서 창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것처럼, 막 움직이는 것처럼 목사가 한 마디 하면 내 속에서 뭔가가 막 울렁울렁 하는 게 능력이냐?


능력이 있다는 게 무슨 뜻이냐? 일반적으로 아무나 못하는 것을 하는 걸 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을 능력 있는 말씀이라고 하는데, 능력 있는 말씀이 되려면 말씀의 이치가 분명해야 하고 옳아야 한다.


그런데 본문의 능력은 하늘의 능력이다. 하늘의 능력은 일반적 이해타산을 능가하는, 선악과를 먹고 나온 땅의 지식을 능가하는 하늘의 지식이다. 하늘의 지식은 사람의 심령을 바꿔놓는다.


이런 능력 있는 말씀을 자기가 끄집어 내리거나 무시하거나 발로 밟으면 본인은 본인대로 저주가 들어가고, 그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이 안 되고 무능하고 저질적인 사람이 된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능력 있는 말씀을 줘서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지혜지식적으로 도덕성적으로 성품적으로 많은 사람들 위에 솟은 엘리트가 되게 하라. 돈 잘 벌고 부자 되고 그런 걸 말하면 안 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람이 못되면 그는 망한다.


오늘날 기독교회 목사님들이 교인들을 능력 있는 교인들로 만들어 내야 하는데 거의가 쓰레기가 됐다. 옳고 그름을 전혀 모른다. 이리 ‘우’ 하고 갔다가 저리 ‘우’ 하고 한다.


고향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왜 놀랐느냐? ‘예수님은 집에서 아버지의 목수일 하는 것만 도왔지 로마나 큰 나라에 가서 유학한 일도 없는데 언제 그런 것을 터득했을까?’ 하고 놀랐다.


더러운 귀신들린 자가 1장 21절에서는 ‘나는 당신이 누구신줄 안다.’ ‘어떻게 아느냐?’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라고 했다. 이걸 보면 고향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보다 훨씬 못하구나.


사람들은 세상공부 땅의 공부를 한다. 세상공부는 땅의 공부다. 아무리 인류대학이라도 천국공부는 아니다. 천국공부는 한 마디로 사람공부다. 사람 속 중심 사상, 사람의 사상의 배후의 영들의 활동, 그 사람의 영원 궁극적인 결과, 그 사람의 실상들을 배우는 거다. 기독교에서는 성경을 통해서 이걸 보는 거다.


오늘날 세상 땅 위의 지도자들이 세계 각 나라의 좋다는 그런 데 가서 다 공부를 했다. 그런데도 치고받고 싸우고 욕심내고 한다. 세상공부를 하면 다 유능하고 도덕성이 풍부하고 그렇게 되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가만있지를 못하고 상대를 제압하고 먹어야 공부한 보람을 느낀다.


세상공부는 땅의 공부, 예수님은 하늘의 공부, 하나님 공부, 사람 공부다. 하나님을 알면 사람은 자동적으로 알아진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계의 영물들과 세상 우주만물과 인간을 만드셨고 인간을 거듭나게 해서 하나님을 닮게 하는 것임을 알게 공부를 하는 것이 기독교다. 이렇게 하는 데는 과정이 들어있다.


사람이 참 신비롭다. 사람이 하나님의 신에 감화 감동될 수도 있고, 영물인 악령류들에 감화 감동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냥 되는 게 아니고 어떤 공부를 하느냐에 따라 지식적으로나 취미적으로나 감화성적으로 옮아온다. 짐승은 그런 게 없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영과 육의 결합체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자기 몸이 영과 육의 결합체임을 몰랐다. 우리가 이것만 알아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는 단계가 된 것이다. 이것조차도 모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거다. 이런 사람은 현실에서 먹고 마시고 잠자고 편안히 사는 것이 다 인줄 안다.


이웃사람들도 가만히 보면 전부는 물질적 개념 임시적 개념에 행복의 수를 놓는다. 그러나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거냐? 세상살이가 그런 거냐? 하나님께서 사건 환경적으로 잡아 돌리지, 사람은 그 사건 환경을 이겨나갈 수 있는 지능지수가 못 되지, 그러니 늘 세상 원망이요 남 원망이요 남편 원망이요 아내 원망이요 자식 원망이다. 그러니 이건 지옥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진리이치를 못 깨닫고 여전히 ‘돈 돈’ 하고 있다.


사람은 타락된 지식이지만 그 지식을 가지고 어느 정도 선택할 능력이 있는 것인데 그 능력을 가지고 자기가 잘못된 것을 선택하기 때문에 그 바람에 자기가 죽는 거다.


사람이 하나님의 신에 감화 감동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하면, 천국복음의 이치에 능통하면 그 사람을 세상 땅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따라갈 수가 없다. 사람이지만 말씀에 능통하면 그는 신의 사람이다. 늘 성령의 감화성이 있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리 유명해도 이런 신의 사람은 없다. 산에서 도를 닦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세상 말로 도를 통할수록 세상 사람들은 그를 높이 보지만 성경을 통해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 구원목적에서 보면 세상에서 도를 통한다는 그 사람은 맨 밑바닥이다. 땅속이다.


언젠가 수학공식의 이치를 가지고 사상적으로 말을 했는데, 기준점을 두고 플러스로 가든 마이너스로 가든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기준점에서 더 크게 빗나가게 되는 거다. 그런데 기본구원을 영점으로 기준을 놓고 여기에서 플러스로 올라가면 이룰구원으로 올라가는 거다. 이건 엄청난 희망 소망 건설이다. 그러나 기본구원에서 마이너스로 깊이 깊이 내려갈수록 이건 아주 낮은 거다.


이방종교에 도통이 될수록 그는 엄청나게 낮은 것이다. 아닌 말로 그가 전도되어 말씀을 듣고 올라오려면 얼마나 걸릴지?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의 본질에서 이탈된 상태로 믿었다면 이게 본질로 돌아오려면 세월이 몇 해나 걸릴지?


하나님께서 유대백성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게 해서 70년을 살게 한다고 했고, 실지로 그렇게 되었다. 그곳에서 70년을 살게 하겠다고 한 이유는 그냥 ‘70년 동안 포로로 살게 하리라’ 단순히 그 말만이 아니라 그 말씀 속에는 ‘너희들이 이방이 그렇게 좋으냐? 그러면 내가 직접 너희들이 좋아하는 그곳으로 보내주마. 가서 한 번 살아봐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가서 살아보니 천덕꾸러기 신세다.


그러니 이방나라에서 포로로 살면서 10년 20년의 날마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며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것을 생각해 봐라. 이방 땅에서 70년 동안 살면서 유대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나 싶어서 이방인들의 손을 빌어 유대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걸레일지라도 자주 빨면 행주처럼 하얗지만 행주라도 잘 안 빨면 다른 집의 마루걸레보다 더 더럽다. 걸레라도 자주 빨면 빨기도 쉽고 빨리 깨끗해진다. 그런데 잘 안 빨고 내버려두면 그만 절여져서 이걸 한꺼번에 빨려면 양잿물을 넣어 삶고 두드려 빨아야 한다. 그러다가 그만 헤어지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유대백성들에게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가게 해서 속에 든 죄악성을 뽑도록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말씀에 능통하면 세상 사람들이 못 따라간다. 따라갈 수가 없다. 그 지능지수하며 높은 도덕성에서 나오는 그 기능 지능 면을 못 따라온다.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올 수가 없는 거다. 예수를 믿어도 그런 것을 알고 믿어라.


차원이 높다고 하는 이건 같은 룰에서 차원이 높고 낮다는 게 아니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일반사람들과는 모든 면에서 차원이 다른 것이다.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고 비슷하게 보여도 같은 룰의 사람이 아니다. 차원이 근본이 다르다.


따라서 예수 믿는 자는 자기 근본 기초 터를 잘 알아야 한다. 하나는 하늘의 신령한 영적 차원이고, 하나는 땅의 차원 변질되는 차원 임시적인 차원이다. 그런데 왜 안 믿는 사람을 졸졸 따라가고 왜 안 믿는 사람이 좋아하는 걸 부러워하느냐? 왜 그런 차원에서 사느냐?


솔로몬의 잠언이나 전도서나 아가서나 다윗의 시편이나, 이 외에도 성경 전부는 신령한 영적 차원이다. 신령한 영적 차원은 남녀사랑이라도 굉장히 고상하고 기쁜 것이다. 저질이 아니다.


우리 젊은이들, 하나님의 고상한 사랑을 할 것 같으면 둘이서 주일학교 가르치면서 의논도 하고 계획안도 짜고 하며 서로가 사랑하는 것이라면 참으로 고상한 것이다. 그런데 둘이 만나서 어디로 가느냐? 극장이나 슬슬 돌아다니고, 담배연기 자욱한 다방에 앉아서 잡담이나 나누고, 집에 들어올 줄도 모르고 하면 되겠느냐?


고상한 사랑을 아느냐? 고상한 사랑은, 참 사랑은 모든 걸 다 덮는다. 지나가는 거, 변질된 거, 변질성적인 거, 실수한 거는 다 임시성이니 다 덮어버린다. 그런 걸 가지고 시시콜콜 따진다면 우리는 하나도 못 산다.


그리고 아가페 사랑은 어제 잘못한 거, 일 년 전에 잘못한 거, 십 년 전에 잘못한 거, 그걸 생각하면 안 된다. 사람이 그런 것을 잡고 있으면 발전이 안 된다. 그런 거는 다 지나가는 거다.


세상 사랑도 사랑이기는 하지만 이 사랑은 차원이 낮은 거다. 세상 사랑은 변질될 사랑이다. 다 물질적이고 언젠가는 날아갈 것이다. 우리는 늘 새로운 거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것을 찾을 줄 알아야지 썩고 불타고 바람 불면 날아가고 변질될 것을 왜 찾느냐?


느브갓네살 왕이 12세 소년인 다니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년 다니엘이 왕이 따라올 수 없는 신령한 영적 차원의 고상하고 최고의 높은 하늘의 것을 가졌기 때문에 느브갓네살이 소년 다니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당시 느브갓네살 왕은 120도를 다스리는 세계 최고 강국의 왕인데 이 왕이 다니엘 앞에 와서 엎드렸다.


예수님의 오묘하고 신비막측한 능력 있는 말씀은 바로 실상적인 그 분의 자체적 속성에서 나온 말씀이고 그 능력이다. 천지와 우주만물을 만드신 그 분의 그 능력의 말씀이 사람의 귀로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율법에 능통한 율법사들 서기관들은 세계적인 인물들이었지만 그들이 아는 깊이는 예수님의 깊이와는 다른 거다. 차원이 근원이 다르다.


기독자들이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의 근원을 모르면 성경을 못 깨닫는다. 이걸 모른 채 성경을 해석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해석이 되느냐 하면 세상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끌고 와서 해석을 한다. 이렇게 되면 구절적으로는 성경을 해석한다고 하는 거지만 그 성경을 해석하는 사상의 근원지는 땅이다. 땅의 개념을 가지고 말을 하는 거다.


땅의 개념을 가지고 말을 하면 쉽게 알아들을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듣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의 말씀이라서 성령의 감화로 듣는 거다. 영적 근원의 실상의 활동을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느냐? 일반사람으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실상이고, 예수님에게는 그 실상이 늘 일상이요 보통이다. 예수님의 역사하심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와’ 하고 특별한 거지만 실상이신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게 일상이고 그냥 보통으로 사는 거다. 그런데 일반인간과는 근원이 다르기 때문에, 터가 다르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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