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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을 담은 ‘질그릇’

고린도후 서진한 목사............... 조회 수 710 추천 수 0 2015.09.25 12:2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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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4:6-7 
설교자 : 서진한 목사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147746 

보물을 담은 ‘질그릇’

(고린도후서 4:6-7)

2013년 10월 27일 주일예배

서진한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편집 주간)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4:6~7)

 

1.

 

여러분은 고린도후서의 이 본문을 어떻게 읽으셨습니까?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자상하게 해설하는 대목으로 읽으셨나요?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셔서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되었는데, 우리는 그 빛 곧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능력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지극히 옳고 타당한 신앙적 설명을 하는 대목으로 말입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바울은 지금 한가로이 해설이나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온 힘을 다해 적들과 이른바 ‘진검승부’를 벌이는 중입니다. 고린도후서 서신 전체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자신을 사도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공격하는 ‘적대자’들, 그리고 슬프게도 거기 부화뇌동하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누가 그리스도의 참 사도인가를 따지는 중입니다. 누가 진정한 사도인가를 놓고 물러설 수 없는 한 판 승부를 펼치는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는 이방세계에서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복음 진리의 기본이 무엇인지 그리고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의 실제적이고 윤리적인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이에 반해 고린도후서는 서신 전체가, 바울이 자신을 참된 사도가 아니라며 매도하고 비난하는 적대자들의 주장의 잘못을 논박하며, 자신의 사도됨을 변호하고, 또 어떤 길이 참 사도와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지를 따지는 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시 바울을 크게 위협한 상대는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방랑 설교자’들의 한 무리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의 말씀을 따라서 두벌 옷도 가지지 않고 여러 곳을 방랑하며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설교자들은 바울이 없을 때 고린도에 나타나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을 단기간에 사로잡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매료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참 사도요 훌륭한 종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달리 탁월한 달변과 열정적인 말솜씨와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로 단박에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모양입니다. 오늘날도 달변에 설교의 카리스마가 넘치는 교회에는 사람이 수만 명씩 모여드는데, 하물며 그 당시야 그 효과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게다가 그들은 신비한 체험을 자랑하고 영적인 은사와 기적 같은 놀라운 일도 보여준 것 같습니다. 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순수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히브리인이었음을 내세웠습니다.

 

이런 것들만 해도 상대하기 벅찬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결정적인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교회의 추천장이었습니다. 바울은 추천장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공식으로 파송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아직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중심이었고 예수를 직접 따랐던 제자들과 사도들이 세운 교회임을 생각한다면, 그 추천장의 위력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추천장은 곧바로 최초 사도집단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력하게 등장한 사람들은 바울은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며, 바울과 그의 가르침을 비난하고 폄하했습니다.

 

바울은 추천장도 없습니다. (3:1) 바울은 사도가 아닙니다. (12:12) 설교는 신통치 않고 말도 잘하지 못합니다. (10:11, 11:6) 말에도 설교에도 카리스마가 없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신령한 은사도 없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자신을 부양하라거나 후원하라는 요구도 못합니다. (11:7, 12:13) 교인들과 대면해 있을 때는 유순하고,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야 강경하게 편지를 쓰는 못난 사람입니다. (10:1, 10) 사실상 그리스도는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13:3)

 

바울은 그들의 비방과 폄하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고린도 교인들 때문에 무척이나 속이 상한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얼마나 화를 내고 있는지는 고린도후서를 찬찬히 읽어보면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 교회를 흔들고 있는 그들은 복음을 왜곡하는 자들이고, 거짓복음을 전하는 자들(11:13)이며,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입니다. (11:15)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추천장을 들고 온 사람들을 거짓복음을 전하는 자들, 더 나아가 사탄의 일꾼으로 규정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당시 교회의 우두머리 집단인 최초 사도 집단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단호합니다. 심지어 추천장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언급합니다. 그래서 종종 바울을 새로 보게 됩니다. 대단히 도발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뒤집어 말하면 상대방은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사는 장사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치켜올리는 (‘추켜올리는’이 바른 표현입니다.) 말을 늘어놓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처럼, 우리가 여러분에게 보일 추천장이나 여러분이 주는 추천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주는 추천장이 필요한 사람들이겠습니까?’가 우리말 어투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우리를 천거하여 주는 추천장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적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읽습니다.” (고후 2:17~3:2, 새번역 성경 2007년판)

 

먹으로 쓴 예루살렘교회의 추천장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고린도 교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추천장이라는 것입니다. 문자가 아니라 삶을 겨냥합니다. 바울 자신에게는 먹이 아니라 영으로 쓰고, 돌판이 아니라 가슴판에 쓴 그리스도의 추천장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3:1~3)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늘 본문, ‘우리는 그 빛 곧 보물을 간직한 질그릇일 뿐이며, 따라서 그 능력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 명징한 주장은, 이 논쟁에서 바울이 날리는 회심의 일격입니다. 권투로 말하자면 케이오 펀치입니다. 이 한 문장으로, 상대방들이 자랑으로 내세운 모든 것을 한낱 질그릇으로 만듭니다.

 

위대한 사도든 아니든 우리는 단지 보잘것없는 질그릇일 뿐입니다. 사도들이 귀하다면 그것은 다만 보물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약점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보기에 진정한 사도인가 아닌가는 얼마나 깊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일격으로 상대방을 제압한 것입니다. ‘너희가 예루살렘 교회의 추천장과 혈통을 자랑하고, 신비한 체험과 영적 능력, 좋은 말솜씨를 내세우지만, 너희는 한낱 질그릇이다!’ 질그릇이 나은들 얼마나 낫겠습니까? 질그릇은 그릇 중에 참으로 흔하고 값싼 그릇입니다. 질그릇이 잘났다고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귀한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자들은 마음이 어두워져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4:4) 그러므로 바울에 따르면, 자신이 질그릇임을 깨닫는 일이 복음의 빛을 보는 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허접한 질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2.

 

오래 전부터 잘 알고 가까이해온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 목사님은 박정희 정권 시절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도시산업선교 활동에 헌신하신 분입니다. 처음 ‘도시산업전도’로 시작한 활동은 ‘도시산업선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 활동은 열악한 노동자들의 의식화에 일조하였고 노조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도시산업선교를 정보조직만 아니라 언론까지 동원하여 무차별 탄압했습니다. 그 당시 텔레비전에서 자주 ‘업선교=기업 도산’이라는 경고 문구를 본 기억이 납니다. 개발독재 정권에 큰 위협이었던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평화시장에서 활동할 때 인명진 목사나 김진홍 목사, 권호경 목사 등도 함께 활동했습니다.

 

아래 이야기는 그 목사님에게서 직접 들은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들은 때로부터 20년도 더 지났으니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한 가문의 가족사라 망설여지는 측면이 있습니다만, 그분이 떳떳하게 하신 이야기고 그분도 이제 연로하고 기억능력에 문제가 생긴 상황이라, 서로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분의 이야기를 말씀드립니다.

 

하루는 나이 서른셋 먹은 조카가 그 목사님을 찾아와서 심각한 얼굴로 물었답니다. “할아버지가 신사참배 때문에 감옥에 갇히신 게 아니라면서요?” 그 목사님의 아버지는, 조카에게는 말하자면 할아버지입니다, 일제강점기에 교회에 시무하는 목사였습니다. 조카는 지금까지 목사였던 할아버지가 신앙심이 깊고 기개가 굳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옥에 갇혀 고생하고 교회도 강제로 사임당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연로한 분에게서 ‘자네 할아버지가 그 때문에 고생한 게 아니야’라는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분 말이 옳다고 말했답니다. 그 조카는 매우 낙담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에 대한 자긍심이 매우 컸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신뢰와 확신이 허물어질 때 사람들은 혼란을 겪습니다. 그 목사님의 아버지는 목사로서 자신이 시무하던 교회의 한 여신도, 가정이 있는 여신도와 사랑(불륜)에 빠졌고, 그것이 문제가 되어 옥살이를 했고 교회도 사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목사직을 박탈당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당시로는 이 지경이면 목사로서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장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조카는 낙담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카의 이야기를 들려준 그 목사님은 도리어 그 아버지 때문에 자신은 목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불륜과 사임 그리고 옥살이의 회오리가 지나간 뒤 어느 날, 아버지는 나이 어린 자신을 자전거 뒤에 싣고 마을을 벗어나 멀리 길을 나섰다고 합니다.

 

한참 만에 도착한 곳은 한센병 환자들의 집단거주지였습니다. 아들은 화들짝 놀라고 아연 긴장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들에게 다가가 고름 나고 썩어가는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들의 손을 붙잡고 만져주고 씻겨주고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그들과 아버지 사이의 태도를 보니, 아버지는 이번에 처음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이곳에 오셨고, 다만 그날 처음으로 아들을 데리고 온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고두고 아버지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손가락질 받고 목사직에서 쫓겨난 형편없는 아버지는, 그러나 한센병자들의 사랑을 받는 좋은 목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그때 그 모습 때문에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결국 목사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그 모습을 알고 있기에 ‘네 할아버지가 신사참배 거부로 옥에 끌려가신 것이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조카의 신뢰와 존경을 단번에 허물어버린 할아버지였지만, 그에게는 참으로 존경스럽고 숭고한 아버지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국기독교사 어느 구석에 기록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그 목사님은 아버지 이야기를 끝내면서 의미있는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그토록 비참하게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면 결코 아들에게 숭고해보였던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아버지의 성정과 평소의 삶을 아는 아들의 평가입니다.

 

3.

 

자신이 세운 화려한 것들이 무너질 때, 사람은 자신의 한계, 자신의 바닥,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란 자기 경력과 힘과 명예가, 자신의 신앙이 ‘돌 위에 돌 하나’ 포개지지 못하고 다 허물어지기 전에는 아마 결코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치장된 자기에 만족하거나, 좀 더 성찰한다 해도 다소간 세월의 때로 덮여서 적당히 보아줄 만한 자기 그 너머를 쳐다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일상의 힘이란 대단해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기와 맨바닥 자기를 분리하기 어려울 만큼 얽어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담한 고통과 고난, 절망은 그 오랜 세월 쌓아온 것, 자기화(自己化)해온 것을 일순에 무너뜨립니다. 살처럼 피부에 단단히 붙어 있던 모든 허식의 옷들이, 세월의 옷들이 벗겨져 내립니다. 거기에는 초라한 몸뚱이가 남습니다.

 

하룻밤에 스승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는 새벽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서, 스승을 말씀을 떠올리며 바깥으로 나가 슬피 통곡했습니다. 수제자, 물위를 걷던 사람, 스승이 지어준 ‘반석’ 넓고 굳건한 바위라는 이름, 모두가 배신하더라도 끝내 스승을 지키겠다던 기개와 용기, 그 모든 것은 하룻밤에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자신의 밑바닥을 본 베드로, 그는 부활하신 스승이 찾아왔을 때, 자신은 죄인이라며 자신을 떠나시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베드로의 말은 아마도 그가 스승 앞에서 한 수많은 말 중에 가장 참된 말이었을 것입니다. 참 자기를 말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순간은 바로 베드로가 참 제자로 거듭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한센병자들을 끌어안은 그 목사님은 여신도와의 불륜과 목사직 박탈과 옥살이와 사회적 몰락을 통하여 자신이 완전히 무너진 그곳에서 자기 존재의 바닥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너진 그곳에서 자신에게 담겨 있던 참 빛을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스스로의 바닥과 그 한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자신이 단지 보잘것없는 질그릇일 뿐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때에 하나님의 보물이 빛난다고 합니다. 우리는 단지 질그릇일 뿐입니다. 질그릇과 보물, 그것은 극명한 대비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빛난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빛나는 그 무엇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빛을 발하는 보물은 그것을 담고 있는 질그릇이 낡을수록 더 빛납니다. 질그릇이 부서지면 보물은 온전히 그 자태를 드러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바울의 글은 이런 생각을 잘 드러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겉사람은 나날이 낡아갑니다.’(4:10~16) 죽음을 짊어지고 죽음에 몸을 맡기고 나날이 낡아가지만, 그것은 진리의 빛이 더 밝게 비추이게 되는 일입니다.

 

4.

 

종교개혁을 상징하는 구호들이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총으로, 오직 성서로!’(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가 그것입니다. ‘오직’이라는 말은 강경한 말입니다. 지배적인 현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당시 교권에 맞서겠다는 뜻입니다. ‘공적’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 사제와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니며,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가 진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오로지 믿음으로 구원받고, 은총으로 용서받으며, 성서만이 신앙 진리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카톨릭 체제를 전면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 구호와 주장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처음’이란 근원이고 시원이며 근본입니다. 아르케입니다. 무오하다는 교황의 절대 권위를 넘어서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사제의 권위, 교회의 제도와 교권, 신앙을 옥죄는 교리체계를 넘어서 처음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잘못된 현존 체계를 넘어서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서 새로이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왜 돌아갑니까? 복음의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복음이라는 보화를 담는 그릇인 교회, 바울의 말로 하면 ‘질그릇’인 교회는 스스로 보화가 되었습니다. 값비싼 보석들로 치장한 화려한 황금그릇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황금그릇의 화려한 빛은 복음진리의 빛을 가려버렸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그 화려한 황금그릇을 깨뜨리고,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 황금그릇을 벗겨내면 거기에는 복음의 빛이 빛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복음 진리를, 그 빛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교회를 질그릇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보화’가 된 것은 천오백 년 전의 가톨릭교회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 역시 황금그릇이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교회는 이제 성공과 권력과 영광만을 탐합니다. 끝없이 높아지려고만 합니다. 교회의 척도는 얼마나 진실하게 예배드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다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스스로 거룩한 곳이 되었습니다. 목사는 제사장인양 합니다.

 

검소한 설교단은 화려한 크리스탈 ‘성구’(설교단이 아니라 거룩한 가구)로 바뀌고, 설교자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보여주는 대형 스크린을 강단 전면에 설치하고, 심지어는 교회 강단 중앙 십자가 위에 박정희의 사진을 걸고 기념예배를 보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장로교회는 강단 중앙에는 십자가와 성서 외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아야 합니다. 설교단도 중앙에 놓아서는 안 됩니다. 설교자, 목사가 중심이 아니라는 신앙적 표현입니다. 중심은 오직 십자가와 말씀입니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 그런 전통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예배당의 강단은 화려한 쇼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교회에, 종교개혁주일은 기념일이 아닙니다. 심판의 날, 회개의 날입니다.

 

고린도후서 본문을 통해서 바울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던지는 경고는 이것입니다. ‘당신들은 단지 보잘것없는 질그릇이다. 당신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능력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당신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다.’

 

이 바울의 경고는 한국교회만 아니라, 그 교회에 속한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여기 앉은 우리는 부도 가지고 있고, 명예도 가지고 있고, 학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신앙도 깊고 신앙의 연륜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가져도 우리는 단지 질그릇일 뿐입니다. 우리가 질그릇이기에 우리에게 담긴 보화는 더욱 더 빛을 발합니다.

 

한국교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분열과 갈등은 ‘내’가 질그릇이 아니라 보화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直指]이 아니라, 내가, 내 신앙이, 내 판단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된 나는 나와 다른 것을 용인할 수 없습니다. 나와 다른 것은 반(反)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별하고 타도하려 합니다. WCC 부산총회를 반대하는 것도 오직 자기네의 판단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내게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이미 오백 년 전의 일입니다. 낡은 역사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우리 가진 모든 것, 우리를 치장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 자신의 밑바닥을 들여다본다면, 그래서 우리가 단지 보잘것없는 질그릇임을 깨닫게 된다면, 종교개혁은 오늘 우리에게 살아 있는 현실이 될 것입니다. 내가 처음 복음을 접했을 때로, 내가 어둠 가운데서 처음 복음의 빛을 보았을 때로, 거룩한 빛 앞에서 감격으로 눈물 흘리며 내 걸음을 돌이켰을 때로, 감격과 기쁨에 충만했던 바로 그때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개혁자의 반열에 서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질그릇일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리에게 담긴 보화가 빛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질그릇이 낡아 부셔져 갈수록 보화의 빛은 더욱 형형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새길교회와 교우 여러분에게서 복음의 진리가 빛을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신앙의 첫 감격이 끊임없이 재생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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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03 시편 사탄을 떨게 하는 찬송 시66:8-20  이한규 목사  2015-09-16 582
12502 시편 다운 상황을 업 시키는 찬양 시66:8-20  이한규 목사  2015-09-16 462
12501 시편 힘든 상황을 극복하는 비결 시66:1-20  이한규 목사  2015-09-16 713
12500 시편 잘 벌고 잘 쓰십시오 시65:1-13  이한규 목사  2015-09-16 345
12499 창세기 사랑 할 때 창29:18-20  강승호 목사  2015-09-16 394
12498 사사기 분명한 사명 의식 삿7:1-25  최장환 목사  2015-09-15 909
12497 디모데전 좋은 관계를 갖는 자 딤전3:1-15  최장환 목사  2015-09-15 568
12496 마가복음 땅 위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막4:28-32  김경형 목사  2015-09-14 494
12495 마가복음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막4:26-27  김경형 목사  2015-09-14 491
12494 고린도전 부활신앙은 속죄의 증거 고전15:17-19  강종수 목사  2015-09-13 401
12493 디모데전 지도자의 자질 딤전3:1-13  한태완 목사  2015-09-12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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