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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복음으로'(6)"복음 앞에 무릎 꿇다"

요한계시 김영봉 목사............... 조회 수 859 추천 수 0 2015.07.12 23:5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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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계3:20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4년 4월 13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다시 복음으로'(6)"복음 앞에 무릎 꿇다"
(Kneel Down Before the Gospel)
요한계시록(Revelation) 3:20


1.
오늘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 성에 도착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the Palm Sunday)입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금문(the Golden Gate)를 통과해 들어가실 때 무리들이 종려 나무 가지를 꺾어 환영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림)


오늘로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긴 한 주일이 시작됩니다. 이 한 주일 동안에 일어난 일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 한 주일을 '수난주간' 혹은 '고난주간'(the Passion Week)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이라면 이 한 주간 동안 더 깊이 기도하고 때로 금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고 또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주간에 결정적인 사건 두 가지가 일어납니다. 첫째 사건은 금요일에 일어났는데,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 설교를 통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두려워 떨었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죽음을 당했다는 증거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둘째 사건은 일요일에 일어났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 내려가셨던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옛날 몸으로 다시 돌아 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으로 일어나셨습니다. 애벌레가 나비로 변화하듯, 우리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거룩하고 영원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예수님이 단순한 '유대 청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십자가가 우리 모두의 구원이 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완성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롬 5:8)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감리교 교리는 그것을 '선행은총'(先行恩寵, prevenient grace)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앞서서 구원의 길을 마련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2.
이 지점에서 잠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제기하는 질문 중 하나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도 믿지 않을 때 이런 질문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혹은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들어 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왜 예수만 믿어야 구원 받는가? 다른 것은 다 무시하고 왜 예수 믿는 것 하나만을 기준으로 구원과 멸망을 가르는가? 그냥 두면 나름대로 잘 살다 갈 사람에게 왜 예수를 전해 주어 지옥에 가게 만드는가? 그렇다면 차라리 예수를 전해주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것 아닌가?


만일 천국이 있다면, 그 사람이 선하게 살아 온 실력을 기준으로 심판을 해야지, 예수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를 기준으로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예수에 관한 복음을 듣고서 믿지 않았다고 하여 멸망을 당한다면, 차라리 아예 듣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생긴 질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에 대해 몇 가지의 은유(metaphor)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중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는 '죽음'이라는 은유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인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신 반면, 하나님을 떠나 사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것보다 더 심각한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박해에 대해 준비시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마 10:28)


여기서 예수님은 목숨보다 더 큰 생명이 있음을 전제하십니다. 몸은 죽어도 여전히 지속되는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몸은 살아있지만 영혼이 죽어 있으면 이미 죽은 것이나 진배 없습니다. 반면, 영혼이 살아 있다면 몸이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잔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은유는 '노예됨'이라는 은유입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인간은 노예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절대 자유'(absolute freedom)가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존재입니다. 누구에겐가 혹은 어떤 힘엔가 예속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절대 자유'나 혹은 '예속'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유할 수 있도록 돌보아 주는 힘에 예속되느냐, 아니면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힘에 예속되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것이 우리를 노예로 사로잡기 위해 경쟁을 합니다. 무엇이든 우리가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그것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탄이고 다른 하나는 죄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사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악마'(demon) 혹은 '마귀'(devil)라고도 불리는데, 이 단어는 어릴 적에 읽었던 동화나 귀신 이야기와 혼동할 가능성이 높아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탄은 뿔 달린 귀신이 아닙니다. 영적 존재로서 우리가 알아차리기 어려운 방법으로 우리를 속여 하나님을 떠나 살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됩니다. 죄 자체가 힘이 있어서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에 물들어 있어서 죄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탄이 죄를 사용하여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죄 자체가 힘을가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마음은 죄를 탐합니다. 물론, 우리 마음 안에는 선을 따르려는 마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새로 지어지기 전에는 죄의 힘에 짓눌립니다. 그래서 죄의 노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따라서 기독교 복음은 예수라는 엉뚱한 기준으로 심사하여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죽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두면 잘 사는 사람에게 예수를 소개하여 멸망 당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살기에 죽은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을 살리려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기 거부하는 것은 죽음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살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줄 구원자를 뿌리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은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속박되어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고 구원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자녀가 되면 우리를 구속하고 있던 모든 멍에가 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사탄의 속임수가 더 이상 먹히지 않습니다. 죄의 굴레가 힘을 잃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로 지어지고 나면, 우리의 머리를 숙일 대상은 오직 성삼위 하나님 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생기는 죽음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 돌아오고 나면,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진정한 죽음이라는 것을 더 잘 알게 됩니다. 건강하지 못한 습관에 젖어 사는 동안에는 자신이 얼마나 건강하지 못한지 알지 못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떠나 죽음 가운데 살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어떤 상태에 살고 있는지 자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가끔 자신의 삶 속에서 죽음의 냄새를 진하게 맡게 됩니다. 그럴 때면,


"과연 내가 살아 있는가? 사는 것이 이게 전부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혹은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겪게 되는 노예됨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이것도 역시 하나님에게 돌아오고 나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자유를 누리고 보면, 과거에 얼마나 구속을 받고 살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거룩하게 살고 보면, 죄의 노예로 살던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보면, 과거에 사탄에 속아 얼마나 헛되게 살았는지를 깨닫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보면, 우리가 우상으로 삼았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우리를 속박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과 노예됨의 상태에서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번 주어진 고귀한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며, 그 인생의 끝에는 심판과 영원한 멸망이 있습니다. 심판과 멸망은 살아 생전에 냄새로만 맛보던 죽음을 실체로 보는 것입니다. 아, 그 느낌이 어떨까 싶습니다. 살아가면서 가끔 죽음의 냄새를 맡아가며 혹시나 그 냄새의 근원이 자신의 존재 안에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때 얼마나 낭패스럽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길을 찾는 것입니다. 가끔 맡게 되는 죽음의 냄새가 어디에서 나는지를 찾고, 그 상태에서 벗어날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게 해 주겠다는 것이 종교이며 철학입니다. 미개한 시대 혹은 미개한 나라에서도 나름대로 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가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우리 편에서 더듬어 만든 길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인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이 미치지 못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 혹은 그런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런 방법을 통해 죽음과 노예됨의 상태를 벗어나도록 힘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길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무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선한 영향력을 만들어 낸 좋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정 받아 마땅합니다. 그 종교들을 통해서도 유익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처한 죽음과 노예됨의 상태 그리고 그 인생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심판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을 얻을 확실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렸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어야 하는 것이며,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이렇듯,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구원의 길을 완전하게 준비해 두셨습니다. 이제는 이미 준비된 구원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영접'(acceptance)입니다. 복음의 소식 앞에 무릎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열고 "들어와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계 3:20)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마음의 문을 안에서만 열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왜 그러셨는지 전에는 몰랐는데, 인생을 조금 경험하고 보니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free will)가 손상받지 않으려면 마음의 문은 오직 그 마음의 주인만이 열 수 있게 해야 했습니다. 그 문은 주님께서도 열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을 열 때까지 문 바깥에서 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 그분은 우리 안에 오셔서 함께 살아가십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문 바깥에 세워 두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언제까지 주님을 문 바깥에 세워 두실 계획입니까? 문 바깥에서 노크하시면서 여러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분에게 무엇이 필요해서 열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그분이 필요하기에 문을 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탄과 죄의 속박으로부터 풀어 주시고, 어둠과 죽음의 골짜기에서 건져 주시며, 참된 생명의 맛을 누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게 하려고 그러시는 겁니다.


그 구원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느끼신다면, 조용히 물러 앉아 진실하게 마음을 낮추고 기도하십시오. 특별한 기도가 아닙니다. 진실하게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말씀 드리고 여러분의 마음안에 초청하면 됩니다. 과거에 <사영리>(Four Spiritual Laws)라는 전도 책자에서 제시한 짧은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주 예수님, 제게 주님이 필요합니다. 저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의 마음의 문을 열고 당신을 나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저를 만들어 주십시오.


Lord Jesus, I need You. Thank You for dying on the cross for my sins. I open the door of my life and receive You as my Savior and Lord. Thank You for forgiving my sins and giving me eternal life. Take control of the throne of my life. Make me the kind of person You want me to be.


꼭 이대로 기도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내용을 담아 여러분의 말로 기도하면 됩니다. 그렇게 진실하게 기도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 들어 오십니다. 주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오감으로 주님의 임재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느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으니 그렇게 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약속을 의지하고 믿고 행하면 그것이 현실이 됩니다. 알고 보면, 너무도 간단한 일입니다. 너무도 간단하고 단순하기에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작고 사소해 보이는 행동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5.
둘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련해 두신 구원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영접'에 더하여 '동행'(companionship)이 필요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말씀을 다시 보십시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계 3:20)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영접하고 나면 매일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동안에는 나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겁니다. 그 동안에는 나 혼자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가 내 삶 속에 현실로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실패를 합니다. 교우들로부터 가끔 듣는 고민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진실하게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주님을 삶 속에 영접했는데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 같지 않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주님께 제 마음 안에 들어와 달라고 청하는데, 그 때가 지나면 그만입니다. 왜 제게는 주님이 오시지 않는 것일까요?"
그런 분들과 대화를 해 보면, 공통된 문제를 발견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잘 하는데, 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게을리한다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주님을 영접하면 주님께서는 약속대로 우리 마음에 들어 오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주님이 들어와 계신 것이 분명히 느껴집니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잊습니다. 주님께서 와 계신데도 그 사실을 무시하거나 망각합니다. 정신없이 살다 보면 하루 종일 혼자 살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살면 매일같이 주님을 영접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치 귀한 손님을 초대해 응접실에 앉혀 놓고는 다른 일에 정신팔려 손님의 존재를 까맣게 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그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하루 생활 중 가장 기본적이고 평범한 일조차도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동행입니다.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 묵상하는 일에만 주님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주인으로 인정 받으신 다음에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으로 인정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주님께서 무슨 유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일어나기를 원하시기에 그렇게 하십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매일 동행할 때, 어느 순간, 죄로부터 해방되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사탄의 속임수가 눈에 보입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믿어집니다. 그렇게 매일 주님과 함께 동행할 때, 진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맛보게 되고, 진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생명이 주님의 손 안에 있음을 확인합니다. 지금 당장 죽어도 눈 뜨면 하나님 품이라는 사실을 의심없이 믿게 됩니다.


과거, 부흥회에서 부흥사님들이 자주 하던 일이 있습니다. '구원에의 확신'(assurance of salvation)에 대해 설교하다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중, 지금 당장 죽어도 하나님 품에 안길 자신 있는 사람들은 손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일부 열성파 교인들은 손을 번쩍 들지만 대다수는 주저합니다. 그러면 구원의 도리를 한 번 더 설명해 주고는 다시 요청합니다. 그 때쯤에는 음성도 커지고 위협도 합니다. 그러면 대다수가 손을 듭니다. 아직도 손을 들지 못하고 쭈볏대는 사람들에게 부흥사는 호통을 칩니다. "아직도 못 믿겠어! 손 들어! 손 들고 믿어!" 그래서 억지로 손을 듭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난 모르겠어"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지금 당장 죽는다면 하나님의 품에 안길 것으로 믿습니까? 그렇게 믿는 분은 손 들어 보시라고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저는 우리 교회 교우들이 이같은 질문에 대해 손을 번쩍 들거나 우렁찬 소리로 "아멘!"하고 응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모습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 말 없이 그리고 푸근한 표정으로 빙긋이 웃어 대답하기를 바랍니다. 교리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매일 주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그렇게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질문에 대해 '지금 내 안에 주님이 계시는데 그걸 질문이라고 하시오?'라고 대답할 수 있기 바랍니다.


6.
지난 주, 제가 뉴저지에서 목회할 때 알았던 바바라 베일리(Barbara Bailey)라는 친구에게서 메일이 왔습니다. 제 동갑 내기인데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잘 가르쳤던 교인입니다. 친정 아버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친정 아버지도 제가 섬기던 교회를 다녔는데, 우체부로 일하다 은퇴하신, 참 소박하고 진실하고 친절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심을 담아 위로의 글을 보냈습니다.


이틀 후에 다시 메일이 왔습니다. 아버지를 보내고 슬퍼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적어 보냈습니다.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아침에 하나님의 사건이 나에게 일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운명하신 시간에 나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월요일 저녁부터 화요일 아침까지 나는 온 밤을 뒤척이며 자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있는데, 화요일 아침, 한 순간 순백색의 무엇이 내 몸을 감싸 안아 잠시 동안 침대에서 들어 올렸습니다. 매트리스로 내려가려고 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몸이 저절로 다시 침대 위에 뉘어졌고 나는 잠에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알았지요. 그냥 알았습니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목사님은 이해할 줄 믿어요. 분명히 일어났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고, 그것이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아니면 천사든가. 하나님께서 아빠를 보내도록 나를 도우시는 손길이었다고 믿습니다. 아빠가 하나님의 품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내 이야기를 이해할만한 사람이 필요했기에 목사님에게 써 보냅니다.


You know, God has been good through these weeks. I have a God-thing that happened the morning that dad passed away - I believe the moment his soul left. I couldn't sleep well at all Monday night into Tuesday morning. But at one point I KNOW I was enveloped in pure white and lifted off of my bed for a little while. I tried to get back down on the mattress but I couldn't and then I was gently laid back down and fell back asleep. I know that was God. I know it. I don't know that anyone here understands this. I hope you do. It happened. I know it did and I know it was God - angels maybe? I just know it was God helping me through losing my dad. And letting me know Dad was in God's presence. I just needed to let someone know who would understand.


예, 저는 믿습니다. 제 친구 바바라가 매우 합리적이고 지성적이며 똑똑한 여성임을 압니다. 또한 그가 매일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힘쓰는 신실한 주님의 신부임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말한 것을 믿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특별한 때에는 특별한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저도 경험해 왔기에 믿습니다. 신실하게 주님을 믿었던 바바라의 아버지가 죽어서 주님 품에 안긴 것도 구원이지만, 바바라가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사는 것도 구원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이 시간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합니다. 복음 앞에 무릎 꿇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매일 주님과 함께 동행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살고 있음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참된 생명의 근원에서 나오는 생명의 맛을 보실 것이며, 사탄과 죄의 노예 살이로부터 해방될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산다면,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 하고 물으면, 푸근한 미소로 응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 주님과의 동행에 힘쓰면,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임종의 자리에서 든든한 믿음과 푸근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이 알지 못하는 거대한 불행을 보고 겸손히 복음을 나누게 됩니다. 내가 얻은 것이 정말 값진 구원이라면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 침묵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 앞에 무릎 꿇어 복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와 사랑과 헌신으로 복음 앞에 무릎 꿇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의 주님,
저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신 주님,
저희의 마음을 만져 주시어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하시고
주님을 영접하게 하소서.
매일 주님과 동행하게 하시어
이곳에서 구원의 능력을 누리고
죽어 구원을 이루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4년 4월13일 주일 설교 '다시 복음으로'(6)
"복음 앞에 무릎 꿇다"(Kneel Down Before the Gospel)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531장(통 321)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요한계시록 3장 20절을 읽습니다. 또한 로마서 6장 전체를 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구원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요약 (웹싸이트에 있는 말씀 요약을 읽습니다. 10분)
5.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으면 한 가지만 나누어 주십시오.
2)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곧 죽음이요 노예됨이라는 사실을 경험해 본 일이 있습니까? 당신의 경험을 통해 말해 보십시오.
3)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영접한 적이 있습니까? 언제 그렇게 했으며,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안 했다면, 왜 미루고 있습니까?
4) 당신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 얼마나 충실하십니까? 동행의 삶을 통해 당신이 경험한 것을 말해 보십시오.
6. 기도
1) 진정하게 주님을 영접하도록 기도하십시오.
2) 주님과 함께 매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하십시오.
7.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8.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535장(통 325)
9.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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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20 이사야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6:1-8  정용섭 목사  2015-07-16 790
12319 로마서 성령의 도우심 롬8:22-27  정용섭 목사  2015-07-16 813
12318 사도행전 사도의 직무 행1:15-17  정용섭 목사  2015-07-16 613
12317 사무엘하 여호와가 지으시는 집 삼하7:1-14a  강승호 목사  2015-07-15 511
12316 사무엘상 마음을 얻는 길 삼상25:1-22  최장환 목사  2015-07-15 720
12315 에스더 낮아지면 높이신다 에6:1-14  최장환 목사  2015-07-15 719
12314 역대상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상1:1-4  박성철 목사  2015-07-15 354
12313 역대상 그리스도인의 가문 대상1:1-42  박우택 목사  2015-07-15 748
12312 마가복음 나는 무엇을 내 신랑으로 삼고 있는가? 막2:16-20  김경형 목사  2015-07-13 344
12311 마가복음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없나니. 막2:16-20  김경형 목사  2015-07-13 526
12310 요한복음 어머니를 찾습니다(Mothers In Danger of Extintion) 요10:11-15  김영봉 목사  2015-07-12 591
12309 베드로전 거듭난 나그네(A Born-Again Foreigner) 벧전1:17-23  김영봉 목사  2015-07-12 879
12308 고린도전 다시 복음으로'(7)"복음을 살다"(Live the Gospel) 고전15:12-19  김영봉 목사  2015-07-12 791
» 요한계시 다시 복음으로'(6)"복음 앞에 무릎 꿇다" 계3:20  김영봉 목사  2015-07-12 859
12306 로마서 다시 복음으로!' (5)"복음 앞에서 웃다" 롬5:1-11  김영봉 목사  2015-07-12 762
12305 시편 다시 복음으로'(4)"복음 앞에서 울다" 시51:1-12  김영봉 목사  2015-07-12 865
12304 시편 다시 복음으로(2)- "복음 앞에서 떨다" 시29:1-11  김영봉 목사  2015-07-12 955
12303 고린도전 다시 복음으로(1) "복음이라 불리는 이유" 고전15:1-5  김영봉 목사  2015-07-12 1271
12302 요한계시 기도가 향이 되게 하라 계5:8  강종수 목사  2015-07-12 686
12301 시편 거룩한 산에 오를 자가 누구인가? 시24:1-10  강승호 목사  2015-07-11 916
12300 여호수아 우리는 누구를 예배하는가? 수24:14-18  강승호 목사  2015-07-10 702
12299 히브리서 진리는 경험적이다 히5:12-14  강종수 목사  2015-07-09 355
12298 창세기 이룰 수 있는 목표 창25:1-11  최장환 목사  2015-07-08 563
12297 예레애가 남 때문이 아니다 애1:1-15  최장환 목사  2015-07-08 494
12296 사무엘상 하나님의 음성 듣기 삼상3:1-10  이영화 목사  2015-07-05 1112
12295 출애굽기 예배가 중심이 되는 삶 출5:1-9  이영화 목사  2015-07-05 1058
12294 사무엘하 교회를 사랑합니다 삼하7:8-17  이영화 목사  2015-07-05 641
12293 고린도전 우리가 지을 집 고전3:10-15  이영화 목사  2015-07-05 679
12292 이사야 인생의 터널 끝에서 사29:17-24  이영화 목사  2015-07-05 912
12291 신명기 다시 한 번의 감사 신16:9-11  이영화 목사  2015-07-05 916
12290 열왕기하 길은 어디에 왕하24:1-20  신윤식 목사  2015-07-05 530
12289 이사야 메시야 도래 천국 사11:6-9  강승호 목사  2015-07-04 429
12288 출애굽기 감사,기쁨의맥추절 [1] 출34:21-24  강승호 목사  2015-07-03 1310
12287 출애굽기 하나님의 것이 되자 출40:1-33  최장환 목사  2015-07-01 722
12286 마태복음 진정한 통로 [1] 마27:26-44  최장환 목사  2015-07-01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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