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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만들기

마태복음 안선희 목사............... 조회 수 740 추천 수 0 2015.05.01 22: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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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2:46-50 
설교자 : 안선희 목사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135059 

가족 만들기

(마태복음 12:46-50)

 

2013년 5월 5일 어린이주일 예배

안선희 목사(이화여자대학교 교목/기독교학부 교수)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오늘이 어린이날, 이번 주 수요일은 어버이날이지요. 5월에는 우리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는 달이기도 합니다. 가족에게 선물을 하느라 지출이 늘어난 탓이겠지요. 하지만 가족을 위해서는 자신의 허리띠를 졸라매도 상관없다는 데서 가족 사랑이 물씬 풍겨납니다.

 

자기 가족, 고맙고 감사한 존재입니다. 세상살이에 지치고 상처 받았을 때 가족만큼 위안이 되는 존재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조건을 붙이지 않고 그저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푸근한 안식처가 가정일 것입니다. 해서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우리 한국인에게 가족사랑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에 가족에 대한 헌신과 사랑은 여간해서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가족이 아닌 사람을 돌보아준 이들은 매스컴의 단골 주인공이 됩니다.

 

몇 년 전 유명한 배우가 아이를 입양한 것이 화제가 되어 신문과 방송에 크게 기사화된 적이 있습니다. 혈연관계를 중요시하는 우리사회에서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아이를 입양하여 자신의 자식으로 키운다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배우 외에도 많은 이들이 아이를 입양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가 입양한 아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널리 알린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양부모가 아이를 입양할 때 가장 먼저 관심을 갖는 것이 아이의 혈액형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입양한 아이를 떳떳하게 키우지 못합니다. 주변에서 입양사실을 알게 될까봐, 또한 아이가 자라면서 자신이 입양된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까봐 마음 졸이며 살아갑니다. 해서 그것을 애써 숨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배우는 달랐습니다. 그의 입양사실은 본인의 동의 아래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배우가 자신의 입양사실을 알린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혈족을 중요시하는 우리사회에서 다른 사람이 낳은 아이를 입양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서라는 것입니다.

 

이 배우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혈연만이 가정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사회는 다른 사회에 비해서 과도하게 혈연을 강조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혈연이 아닌 관계는 혈연 앞에서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성서본문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야 할 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가족들이 찾아왔다는 전갈에 대해 예수께서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가족을 만난다는 기쁨에 단숨에 밖으로 뛰어나가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어머니와 형제자매가 찾아왔는데 예수라고 왜 가족이 반갑지 않았겠습니까. 맨발로 달려 나가 얼싸안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담담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되묻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형제자매냐?’

 

여기에 동료인간에 대한 예수의 깊은 배려가 깃들어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를 쫓아다니던 제자들과 무리들은 아예 가족이 없었거나, 아니면 가족과 삶의 터전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가족과 재회하려던 순간에 이런 제자들과 무리들이 느끼게 될 소외감과 상처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기쁨과 행복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초라하게 느끼기 쉽습니다. 예수께서 가족을 만나 즐거워하는 모습 앞에서, 찾아와 줄 가족이 없는 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인간적인 행복감에 빠져들기 전에 자기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느끼게 될 슬픔에 대하여 먼저 생각합니다. 해서 예수께서는 가족이 찾아왔다는 전갈에 대해 담담하다 못해 냉담하게 반응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가족이 주는 안락함과 행복감에 도취한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단란한 가정으로 인해 행복에 겨워하는 동안 그 모습을 보는 우리의 이웃이 자신의 불행을 더 크게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담담한 반응에서 가족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소외시킬 수 없다는 예수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께서 가족을 혈연공동체로만 이해하고 있는 우리와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의 경중을 따져보면 두 번째 사실이 첫 번째 사실보다 더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일생동안 병들고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귀신들린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었습니다. 한데 예수의 가족은 예수의 이런 치유활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에도 나옵니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예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몰고 다니자, 그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당시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하고 다니는 예수를 말리기 위해 예수를 찾아갑니다. 예수를 말로 설득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잡아끌어다가 집에 들어앉히려고 찾아온 것이지요. 어머니와 형제자매가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예수는 함께 있던 무리들을 향해 이렇게 반문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자매냐?’

 

예수께서는 둘러앉은 무리를 바라보며 그들이 바로 자신의 형제자매이며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이 자신의 형제자매이며 어머니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이런 모습의 예수는 자칫 자기를 낳아준 어미도 몰라보는 부도덕한 패륜아로 보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서본문을 차분히 읽어보면 예수의 이러한 행동은 우리 신앙인에게 가정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형제자매냐’라는 물음은 예수께서 정말 답을 몰라서 던지는 질문이 아닐 것입니다. 이 물음은 오히려 전통적인 가정이해에 대한 예수의 회의를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혈연중심의 가정이해를 넘어 설 것을 주장합니다. 예수께서는 대안적인 새로운 가정모델을 제시합니다.

 

예수께서 제시하는 새로운 가정의 기초는 혈연이 아니고 의지입니다. 피가 아니라 뜻이라는 겁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자신의 어머니이고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같은 뜻을 행하는 사람들 모두가 가족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 아무리 같은 피를 나누었다고 하더라도 같은 뜻을 품고 있지 않다면 가정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혈연관계를 통해서만 한 형제, 한 자매가 된다는 것은 예수께는 낡은 가정이해에 불과한 것이지요.

 

예수의 가족이해는 혈연을 숭배하는 우리사회에 깊은 성찰의 기회를 가져다줍니다. 우리사회의 혈연중심주의는 상당한 폐해를 낳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남이야 어떻게 되건 자신의 혈연적 가족만을 생각하는 가족이기주의가 팽배해있습니다. 특히 자기가 낳은 자녀에 대해서 더욱 그러하지요.

 

영화 <마더>를 보셨는지요?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아들이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자 아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행동을 그린 영화입니다. 처음에 아들의 무죄를 의심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후에 아들이 진범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진범이라는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범행현장을 목격한 사람을 살해하면서까지 아들의 무죄를 법적으로 강변하려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 갈등이 고조되고 관객으로 하여금 자기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의 본능이 처절하고 무섭도록 강인하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어머니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로 아들은 풀려나옵니다. 대신 또 다른 정신지체장애인이 살인범으로 지목되기에 이릅니다. 어머니는 아들대신 수감돼있는 그 정신지체장애인을 찾아가 묻습니다. “넌 엄마 없어?” 그렇게 묻고 나서 “넌 엄마 없어서 어떻게 하니?”라고 절규합니다. 안타까움이 배어있는 한탄입니다.

 

어머니가 있는 살인범은 무죄가 되지만 어머니가 없는 무고한 사람은 살인범이 됩니다. 그야말로 “유모무죄, 무모유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혈연주의의 그늘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배우의 연기는 섬뜩할 만큼 우리 한국인의 내면을 잘 표현했지만 혈연의 지지 외에는 세상을 살아갈 어떤 다른 도움도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은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실제로 우리사회의 혈연주의는 많은 폐해를 낳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한국인들은 입양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해서 한국사회의 입양률은 무척 낮은 편이고 이로 인해 고아수출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또한 혈연주의는 기부문화의 정착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자기 가족을 챙기고 나면 기부할 여유가 없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회단체들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혈연중심주의는 다른 나라사람들에 대해서는 민족적 배타주의로 나타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남성들과 결혼한 이주여성에 대해서도 배타적 시선을 거둬들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최근 리틀 싸이로 불릴 만큼 춤을 잘 추는 여덟 살 난 황민우는 베트남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인터넷에 오른 지나친 악성댓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디 인간이란 존재는 혈연으로 엮인 관계가 아니라면 그토록 간절하게 누구를 위해 희생할 수 없고 진심어린 노력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혈연중심적인 가족관에 집착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족문화를 아무런 성찰 없이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살아보니 가족밖에 없더라’는 통속적 신화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깨뜨려야 하겠습니다. 누구보다도 우리 신앙인들이 이런 혈연주의적 신화를 극복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한 것처럼 같은 뜻을 품는 것이 가정의 진정한 기반입니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혈연으로만 맺어진 가정은 진정한 가정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혈연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가족 간에 분란이나 불화는 없어야 마땅하겠지요. 하지만 실상은 어디 그렇습니까? 가족 간의 분란이나 불화 때문에 가족과 연을 끊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한 피를 나누고 있다하더라도 같은 뜻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바람직한 가정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치관이 같은 사람,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같은 사람, 하나의 뜻을 향해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나와 한 가족이 될 수 있다고 예수께서는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농촌에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구호단체를 만들고 그곳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이주여성들의 자녀를 24시간 돌보아주는 어린이집에 모여 사는 어린이들과 그들을 돌보아주시는 수녀님들. 이런 사람들이 하나의 뜻을 중심으로 해서 모인 곳이 예수께서 의도한 새로운 가정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돌봐줄 사람 없어 떠도는 아이들을 모아 양육하며 스스로 아빠가 된 청년, 상대의 자녀를 살갑게 보살펴주는 싱글 맘과 싱글 대디.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사랑으로 보듬어 주는 공동체를 일구는 사람들. 이 모두가 새로운 가정의 이상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자기가족끼리, 자기나라사람끼리 똘똘 뭉치면서 주변이웃들, 다른 나라사람들을 소외시키지 말아야겠습니다.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이주노동자들, 필리핀, 베트남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시집 온 결혼이주여성들. 모두가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소원하는 한 뜻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더불어 한 가족을 이룰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은 타인에 대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울타리를 치기 마련입니다. 그 울타리 안에 머무는 사람들에게는 안정감을 줄 수 있지만, 울타리 밖의 사람들에게는 소외감과 외로움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행복한 인간적인 사회를 이루려면 가족의 경계가 분명해선 곤란합니다. 가족의 울타리, 담장을 허물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을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통해 들고 나는 동적인 집단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습니다. 남자는 혈연을 중시하는 보통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특이한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둘 사이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이런 남자의 요구를 버거워하면서 충족시켜주지 못합니다. 여자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도와줍니다. 설령 비슷한 또래의 남성이라고 하더라도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 자기지갑을 열고 남자친구를 만나는 시간을 아끼면서까지 도와줍니다.

 

남자는 이런 여자 친구를 헤프다고, 실속이 없다고 구박합니다. 남자친구로부터 이런 구박을 받을 때 여자는 자신도 남자친구처럼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남녀관계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다짐해봅니다. 하지만 개방적인 가족문화에서 자란 탓에 이런 다짐은 금방 물거품이 됩니다. 둘 사이에 싸움이 잦아지면서 이 두 남녀는 결국 결별의 길을 밟게 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이 두 사람 가운데 남자가 여자보다 더 현명하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의 판단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의 성서본문에 충실하면 이 두 사람 가운데 여자가 남자보다 더 건강한 가족관을 갖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배타적인 사랑을 하는 남녀만이 가족을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마음이 맞거나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모두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여자를 헤프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헤프다’라는 형용사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오히려 긍정적입니다. ‘헤프다’라는 형용사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기존의 가족관계를 무너뜨릴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의 경우 혈연에 대한 집착을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분위기는 너무도 공고합니다. 살벌한 무한경쟁시대에 결국 믿을 것은 내 핏줄 밖에 없다는 혈연주의는 가정교육을 통해, TV드라마를 통해, 일상적 담론을 통해 시간이 갈수록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교회력으로 보면 우리는 지금 부활절기 끝자락을 지내고 있습니다. 부활은 기존의 사고방식을 고집하는 타성적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자기우리 안에 갇힌 타성적 인간에게 부활은 인간세상과 전혀 무관한 초인간적인 영역에서나 존립가능한 철저한 낯설음입니다.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부활은 기존의 것을 부분적으로 변형한 익숙한 새로움이 아닙니다. 이런 새로움은 진정한 의미의 새로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 진정으로 새로운 것인데 부활은 바로 이렇게 전적으로 새로운 사건입니다.

 

좁다란 지식세계에 갇힌 사람들은 결코 부활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부활을 믿는 사람은 상식선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선입견, 편견, 전이해, 선이해, 상식. 이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인식태도입니다.

 

초대교회 교부 중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 100-165)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유스티누스는 기독교인들이 일요일에 모이는 까닭이 일요일이 예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 날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부활이 어두움과 삶의 모든 문제들을 완전히 극복한 날이라고 설명합니다.

 

부활은 전혀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졌던 일이 실제로 가능해진 사건입니다. 부활을 믿는 공동체는 전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미래의 어떤 가능성을 오늘 여기에서 현재화하고 경험하면서 그것을 증거하고 실천합니다. 부활공동체는 이상적인 것을 구현하기 위해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자명한 사실을 뒤집어버립니다.

 

상식으로 단단히 무장했던 예수의 제자들에게 부활은 상식 밖의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신앙인도 지극히 자명한 상식, 진리로 여겨지는 견해를 뒤집어 보는 사고가 필요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전복적인 사고에로 초대받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거침없이, 두려움 없이 철옹성과 같은 편견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피보다 더 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뜻입니다. 피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더라도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원하는 한 모두가 한 형제, 한 자매, 한 가족입니다. 이것이 한국의 가정의 달에게 기독교의 부활절이 건네주는 메시지입니다.

 

부활을 사는 우리 기독교인은 혈연을 가족과 동일시하는 사고를 뒤집어야 합니다. 무한경쟁시대에 믿을 것이라곤 피붙이, 살붙이밖에 없다는 혈연중심주의를 넘어서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병적인 가족문화입니다. 부활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해서 뭉친 새로운 가족을 희구해야 합니다.

 

가족은 같은 피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은 같은 뜻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어린이날을 맞이한 우리 자녀들에게 예수의 새로운 가족이해를 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전해 받은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유연하게 새로운 가족관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가족이해로 인해 더 큰 자유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주어진 가족의 틀을 넘어 새로운 가족 만들기를 감행해야합니다. 주어진 가족의 틀을 넘어 새로운 가족 만들기에 도전하는 저와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혈연관계만을 생각하며 주변이웃을 너무 배타적으로 대해오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봅니다.

부활의 새로움으로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저희 안에 깊이 뿌리내린 혈연중심주의를 반성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저희 모두가 한 가족, 한 가정임을 깨닫고

저희의 좁디좁은 가족 울타리를 보다 넓게 확장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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