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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앞에서

로마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56 추천 수 0 2024.01.25 19: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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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12:14-2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78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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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8d8Xj7KlbIA 
성경본문 : 로마서 12:14-21 
‘악’ 앞에서
, 창조절 1주, 2023년 9월3일
 
바울은 고린도에서 활동하던 56년 초 로마 교회에 관한 소식을 듣고 긴 분량의 글을 작성해서 보냈습니다. 그 글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2천 년 전 바울의 글을 우리가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합니다. 로마서의 핵심 주제는 믿음을 통한 의로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게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정의로운 일을 해야 정의롭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어떻게 정의로워질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비유적으로, 여기 연봉 2천만 원인 사람이 있습니다. 식구는 넷입니다. 월세살이에 빠듯하게 살지만, 연봉 1억 원을 받는 사람보다 더 풍요롭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일용할 양식만으로 정말 만족스럽게 사는 삶의 비결을 알기 때문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혀 새로운 삶의 차원에 들어갔기에 자신들을 의인이라고 여겼습니다.
 
박해하는 자
 
바울이 강조한 의로움으로만 현실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교회 안과 밖에서 갈등, 오해 등등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무시, 모함, 마녀사냥도 당했습니다. 64년에 발생한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빌미로 벌어진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유명합니다. 공교롭게 60년대에 교회의 기둥 역할을 한 바울과 베드로와 야고보가 모두 죽었습니다. 요즘 저는 요한계시록 묵상을 대구성서아카데미의 ‘매일묵상’ 코너에 올리는 중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시간이 조금 더 흐른 90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황제는 도미티아누스입니다. 이때 황제숭배 정책이 더 노골적으로 전개되었고, 그리스도인은 신앙 포기냐 순교냐,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요한은 네로 황제의 환생으로 알려진 도미티아누스를 짐승으로 묘사합니다.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의 노골적인 박해가 본격화하기 전인 40-50년대에 이미 바울은 크고 작은 시련을 경험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과 11장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고후 11:23)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설교 성경 본문에서 바울은 다소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듯이 발언합니다. 먼저 첫 구절인 14절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큰일 난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전혀 귀에 들리지 않을 겁니다. 축복과 저주를 말한 다음에 바울은 15절과 16절에서 즐거워하는 이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마음을 높은 데 두지 말고 낮은 데 두며,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삶을 손익계산서로 생각하지 말고 삶 자체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박해하는 자를 찾아가서 일일이 따진다고 해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에 삶의 에너지를 소진하면 결과 여부에 상관없이 공허해집니다.
 
바울은 17절에서 이 문제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합니다. 우리 교회 예배 마지막 순서인 ‘위탁의 말씀’에 종종 나오는 문구입니다. 이렇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니, 악을 못 본 체하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정의로운 사람은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악에 저항해야 한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이미 오래전 바벨론 문명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원리를 세웠습니다. 이런 원리에 따르면 악은 단호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 글을 쓰던 시대의 로마는 자기들이 악이라고 여기는 대상을 가차 없이 응징했습니다. 그런 일에 주저하거나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하는 태도는 로마 정신에 어긋납니다. 로마 제국은 로마의 안녕, 즉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에 장애가 되는 대상에게 조금도 연민을 느끼지 않고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제압하고 박멸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당한 것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악한 방식으로 갚았습니다. 그게 당시 세상의 작동원리입니다. 그런 일을 용감하게 수행한 사람은 영웅이 됩니다.
 
지금 대한민국 정권은 북한이라는 악을 압도적인 힘으로 제압하는 게 최선이라고 여깁니다. “때려잡자 공산당!”이라는 구호가 먹히던 60-70년대로 돌아간 듯합니다. 뜬금없이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겠다고 합니다. 윤 대통령은 광복절 78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결코 이러한 공산 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 추종 세력들에게 속거나 굴복해서는 안 된다.”라고 외쳤습니다. 제가 신학대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종종 듣던 주장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진정성이 있다 하겠으나, 제 눈에는 풍차를 괴물로 착각해서 창을 빼 들고 돌격하는 돈키호테처럼 보입니다. 북한 체제를 옹호하거나 감쌀 대한민국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북한의 경제력보다 우리 경제력이 수십 배 크고, 군사력도 우리가 월등하고, 국방비는 우리가 최소한 열 배 이상 많습니다. 한미일 안보 경제 동맹 체제는 모기를 잡으려고 대포를 준비하는 격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저를 친북 좌파 목사라고 비난할 사람들도 있겠지요.
 
바울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우리 편에게만 선한 일이 아니라 모두에게 선한 일을 추구하라는 겁니다. 남한만이 아니라 북한에도 선한 일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윈윈’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길이 최선의 길입니다. 그건 말뿐이지 어떻게 적과 ‘윈윈’할 수 있냐, 악인 적이 망해야 선인 우리가 잘 되는 거지, 하고 말할 분도 있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서로에게 잘 되는 방법이 없을까요? 그걸 찾으라고 정치가 있는 게 아닙니까.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이기만 한다면 정치는 필요 없지요. 그냥 전쟁 잘하는 장군만 있으면 됩니다.
 
원수 앞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즉 악한 세력을 악한 방법으로 제압하지 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바울은 조금 더 분명하고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19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바울은 신 32:35절을 근거로 원수를 직접 갚지 말라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권면했습니다. 일단 악에 대한 사적 앙갚음에 대한 제한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이에는 이, 눈에 눈’이라는 명제도 사실은 사적인 앙갚음에 대한 제한입니다. 원수 갚는 일을 개인에게 맡기면 결국에는 힘 약한 사람이 더 크게 당하는 세상이 될 테니까요. 그래도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은 어딘가 꺼림칙합니다. 직장에서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아도 그냥 넘어가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하지 말고 기도만 하라거나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왈가왈부하지 말고 침묵하라는 뜻인가요? 그 가르침이 높은 차원에서는 옳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세상살이에서는 실제로 지킬 수는 없는 가르침 아닌가요?
 
바울이 이렇게 말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직접 원수 갚는 일이 우리의 영혼을 훼손한다는 사실입니다. 원수가 쓰러질 때 순간적으로는 통쾌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전쟁 영화가 많았습니다. 우리나라도 남북전쟁을 직접 경험했고, 월남전에도 국군을 파병했기에 그런 영화가 나오면 많은 관객이 동원됩니다. 미국의 서부개척 당시의 서부활극에도 그런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소위 ‘우리 편’이 몰리다가 악당이나 적군을 물리치는 통쾌한 장면에서 관객은 손뼉을 쳤습니다. 요즘이야 영화관에서 손뼉 치는 일이 없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그랬습니다. 저는 그런 장면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적이라고 하더라도 처참하게 죽으면 사람은 두고두고 그 장면을 잊지 못합니다. 트라우마에 떨어집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미군 중에서 많은 사람이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원수와 적이 쓰러지는 순간에 느끼는 통쾌함은 순간이고 트라우마는 계속됩니다. 가장 난폭한 격투기인 미국의 UFC 영상을 가능하면 여러분이 보지 않기를 권면합니다. 인간의 폭력성이 여지없이 발휘되는 영상을 반복해서 보면 정신적인 어려움이 생길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냥 재미로만 본다고 말하겠으나,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고,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책을 읽으며, 어떤 사람과 관계하느냐에 따라서 전적으로 다른 사람이 됩니다. 당장은 그게 나타나지 않아도 계속되면 결국 나타납니다. 계속 술을 마시는 사람의 정신과 육체 건강이 어떨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파괴적인 동물인가?』에서 인간 문명이 인간을 점점 더 파괴적으로 만들었다고 분석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문명 이전의 인간이 무식하고 교양이 없어서 폭력적이고 파괴적일 것 같으나 실제로는 문명인들이 더 파괴적이라는 사실을 인류 역사를 근거로 설명했습니다. 옛날 전쟁은 직접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싸우기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인터넷 게임을 하듯이 전쟁을 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데에 심적인 부담이 줄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면 크게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이 문명 기술에 의해서 마비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묻지 마 칼부림’ 현상이 더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요?
 
바울이 신명기에서 인용한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라는 말씀을 너무 ‘나이브’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이 작동하지 않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도 화려하게 잘살다가 천수를 다하기도 합니다. 선한 사람이라고 해도 죽을 때까지 고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일본 식민지배 당시에 친일에 앞장섰던 장본인과 그 후손이 계속 떵떵거리면서 살고, 조선독립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했던 이들과 그 후손이 어려운 삶을 면치 못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는다는 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은 이 현실에서 믿기가 힘듭니다. 저도 이에 대해서 분명한 대답을 당장 드릴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라고 말씀드릴 뿐입니다.
 
20절에서 그는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 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라는 겁니다. 일종의 원수 사랑만이 부끄러움을 깨닫게 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잘해주면 상대는 오히려 잘해주는 이를 우습게 보고 더 악랄하게 나오니까요. 북한 형편이 어렵다고 제공한 비료와 식량과 의약품이 핵이 되어 우리를 위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솔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진정성 있게 그들을 돕고 보살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불쌍하니까 돕는 것뿐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형제애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산다는 사실을 뽐내고 싶을 뿐이지 사랑한 게 아닙니다. 사랑했다면 그쪽이 어떻게 나온다고 해도 서운할 게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악의 본질
 
원수를 직접 갚지 말고 하나님 손에 맡겨야 할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훼손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두 번째 이유를 말씀드립니다. 우리 자신이 원수, 또는 악일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악을 척결하려고 나섰는데, 알고 보니 우리 자신이 바로 악이었다면, 또는 원수에게 있던 그 악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있다면 얼마나 황당한 일이겠습니까. 성경은 악의 뿌리가 아주 깊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이야기는 신처럼 눈이 밝아지고 싶다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가리킵니다. 가인의 동생 아벨 살해 사건은 인간의 살인 행위가 아주 근원적이라는 뜻입니다. 가인은 아벨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질투심으로 동생을 죽였습니다. 성경은 모든 악한 행위의 배경에는, 또는 그 심층에는 사탄과 마귀가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악과 죄가 인간에게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악을 척결한다는 말이 얼마나 경솔한 일인지 모릅니다. 민생보다 이념이 우선한다는 말로 좌파 척결을 부추기는 정치 지도자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천박한 겁니다. 2천 년 이어진 기독교 영성과 신학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툭하면 ‘저 사람은 자유주의 신학자야. 좌파 신학자야. 동성애 찬성론자야.’하고 매도하는 행태와 같습니다.
 
우리 자신이 악을 행할 수도 있으니 선과 악을 구별하지 말고, 악을 내버려 두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판단할 때는 판단하고, 저항할 때는 저항하고, 시위에 나설 때는 나서야겠지요. 그건 각자 자기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주체적으로 선택해야 할 몫입니다. 그런 판단과 선택이 사실은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깨어 있으라고 경고합니다. 바르게 선택하기 위해서라도 정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오늘 본문 21절에 나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를 단순히 나쁜 놈 되지 말고 착한 사람 되라는 뜻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기껏해야 도덕적인 가르침으로 보면 그 깊이를 모르는 겁니다. 악은 우리가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착하면서도 동시에 나쁜 마음마저 품곤 합니다. 저를 보더라도 분명한데, 교양 있는 척하면서도 교만합니다. 개혁적이면서도 사적인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선으로 이겨야 합니다. 선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선으로 이기라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기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우선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에 휩싸이는 겁니다. 오늘 본문 앞 구절인 롬 12:9절에서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하라는 뜻입니다.
 
설교 앞 대목에서 저는 로마서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의로움이 곧 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에서 악과 대결할 수 있습니다. 그 악은 다른 이에게도 있고, 우리 자신에게도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악이고 위선이고 원수인지 헷갈릴 때도 적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이 극복되었듯이 악이 굴복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남은 악은 패잔병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악’ 앞에서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눅 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으로 이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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