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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로마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40 추천 수 0 2020.12.01 18: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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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8:12-25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22706 설교보기 :https://youtu.be/rQ11FBmuK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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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 2020년 7월19일

 

탄식하며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라는 오늘 설교 제목은 롬 8:23절에 나오는 내용을 따온 겁니다. NIV 영어 성경은 “몸의 속량”을 “the redemption of our bodies”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직역으로 몸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공동번역은 속량을 해방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 “아포루트로시스”는 속량, 구원, 해방이라는 뜻으로 두루두루 쓰입니다. 우리는 보통 구원이라고 말하거나 영혼 구원이라고 주로 말하지 몸의 구원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굳이 “몸의 구원”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23절).

 

공동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의역이라서 우리 귀에 훨씬 부드럽게 들릴 겁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포함하여 로마 교회의 기독교인들이 모두 속으로 탄식한다고 말합니다. “탄식한다.”라는 우리말 성경의 표현은 아주 강하게 들립니다. 탄식한다는 말과 기다린다는 말은 사실은 같은 뜻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탄식할 수밖에 없으니 구원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겁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성령의 첫 열매를 받았지만, 즉 생명 구원을 선물로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실제 삶에서는 구원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세상살이에서의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다고 해도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 상황을 가리켜서 바울은 탄식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이 탄식은 기독교인에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면서 함께 고통을 겪는다고 말합니다. 탄식이라는 단어를 NIV 성경은 “신음하다”라는 뜻의 groan으로 번역했고, 루터 성경은 “갈망하다”라는 뜻의 sehnen으로 번역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는 이유는, 또는 신음하는 이유는 피조물이 허무에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바울은 세상 만물의 운명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허무에 떨어진다는 말은 죽는다는 뜻입니다. 장미꽃이 아름답지만 시들어 땅에 떨어진 꽃잎은 허무합니다. 수백 년을 사는 나무도 결국은 죽습니다. 지구도 허무에 떨어지고 하늘의 별들도 허무에 떨어집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 순간에서 무수한 피조물이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를 피조물의 탄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탄식의 실존에서 기독교인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탄식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실존은 궁극적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가리키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그런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매일 먹어야만 삽니다. 하루에 한 번만 먹지 않고 세 번이나 먹습니다. 거기서 경제적인 폭력도 발생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많이 배우고 교양을 쌓아도 인격적으로 불완전합니다. 교만을 떼어낼 수가 없습니다. 성적인 욕망 역시 때에 따라서 폭력적으로 나타납니다. 이게 인간 삶의 이율배반입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성적인 욕망이 제거되거나 식욕이 완전히 없어진다면 폭력은 없어지겠지만 인간 자체가 지구에서 사라질 겁니다. 이런 일들이 다 탄식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실존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인도 예외가 아니라서 바울은 피조물의 탄식과 기독교인의 탄식을 동시에 언급했습니다.

 

현실 초월, 혹은 도피

초기 기독교인 중에서 어떤 이들은 이런 문제를 열광주의 방식으로 해결했습니다. 자신들은 이미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았기에 탄식할만한 일들에서 자유로워졌다는 주장입니다. 가장 적합한 예를 들면 제가 중고등 학생 시절에 경험했던 부흥회입니다. 열광적으로 손뼉 치면서 찬송가를 반복해서 부릅니다. 감정이 점점 더 뜨거워집니다. 종교적인 무아경(엑스터시)에 빠집니다. 일시적이나마 현실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약간 세련된 방식으로는 신비주의가 있습니다. 사막으로 나가거나 수도원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신비롭게 경험하는 사람들은 이전투구처럼 돌아가는 세상의 일을 깔끔하게 잊을 수 있습니다. 식욕도 잊고 성적 욕망도 잊고 부활과 영광만 생각합니다. 열광주의와 신비주의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현실을 초월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초월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신앙을 부정적으로 보면 현실 도피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초월입니까, 도피입니까.


바울은 열광적이고 신비적인 신앙의 깊이를 본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3절에서 육신대로 살지 말고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그래야만 산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열광적이고 신비적인 신앙을 가리키는 문장입니다.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양자, 즉 하나님이 자녀라는 기독교인의 경험은 겉으로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서 그 사실을 증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신앙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성령의 증언보다는 이성과 합리성의 증언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가려면 초월적인 요소가 분명히 필요합니다. 이성과 합리성을 뛰어넘는 경험 없이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빠 아버지”라는 말이 입에서 나옵니까? 입으로 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영혼 안에 이런 경험이 자리하고 있을까요? 그럴 때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지점에서 정말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당연히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과 역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탄식이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몸의 탄식과 신음을 외면하고 영혼만 즐거워하면 된다고 바울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피조물 전체의 탄식 안에서 우리 기독교인도 몸을 갖고 살아야 하기에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몸의 구원이라는 표현에서 몸은 헬라어 “소마”의 번역입니다. 소마는 단백질로서의 육체를 가리키는 헬라어 “사르크스”와 달리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몸을 가리킵니다. 소마는 내 머리카락이나 손톱이나 코와 입과 팔다리 같은 형태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영혼과 결합하여 그 사람만의 인격을 가능하게 하는 구성요소를 가리킵니다. 그게 없으면 그 사람의 고유한 인격도 사라지는 어떤 것입니다. 저의 인격과 심리와 정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불구하고 신음하면서 살아갑니다. 인격 전체를 가리키는 몸의 구원을 저는 기다립니다.

 

희망과 구원

그 기다림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십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거나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거나 하늘나라에서 왕 노릇을 하는 게 구원이라고 하면 말이 되지만 어떻게 기다림을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냐고 말입니다. 제 말이 아니라 바울의 말입니다.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말한 뒤에 이어서 24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희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라고 말합니다. 희망은 기다림입니다. 바울은 고전 13:13절에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 희망 사랑 이 세 자기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희망(엘피스)은 영원한 세 가지 중에 속합니다. 세상의 다른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희망은 막연한 게 아니라 몸의 구원을 향한 실질적이고 강렬한 기다림입니다.

몸의 구원은 실질적이지만 눈에 보이는 건 아닙니다. 바울은 눈에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NIV 성경은 이 문장을 “이미 소유한 것을 누가 희망하는가?”라고 번역했습니다. 재미있는 번역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 마지막 절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앞에서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 신앙의 방향을 제시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영적인 실존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 문장을 저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2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바라면”이라는 표현은 우리말로 “원하면”이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게 아니라 “희망하면”(엘피조멘)이라는 뜻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은 총체적인 인격이 완성되는 사건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여전히 완전하지 못하기에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몸의 구원을 갈망하고 기다리고 희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면서 살아간다는 게 현대 사회에서 가당키나 할까요? 보이는 것만을 희망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상에서 말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최근에 다시 아파트 가격 급등 문제로 사회가 혼란스럽습니다. 정부와 여당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사실은 전국의 아파트 가격이 급등하는 건 아니고 주로 서울의 강남 지역의 아파트가 문제이니까 다른 지역 사람들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데도 이런 문제가 나왔다 하면 전국이 들썩거립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모두 서울의 강남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고 사는 것 같습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관심이 없는데도 매스컴이 부추기는지도 모릅니다. 부동산 문제와 국가 경제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제가 설교 시간에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제가 잘 알지도 못합니다. 다만 아파트와 이를 통한 재화 관리가 우리 눈에 가장 잘 보이는 것이라서 사람들이 빠져든다는 사실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놀이를 비유로 들겠습니다.


여기 여러 명의 어린아이가 모여서 구슬치기 놀이를 합니다. 그들은 그 놀이에 정신이 팔려서 배가 고픈 것도 모릅니다. 싸우기도 하고 다치기도 합니다. 속임수를 쓰는 아이도 있고, 주먹질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힘 있는 친구에게 아첨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구슬을 많이 모은 아이는 뻐기고, 잃은 아이는 기가 죽습니다. 아이들의 구슬치기와 어른들의 아파트 재테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핵심적으로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1) 아이들에게는 구슬이 자신들의 삶에서 절대적이고, 어른에게는 재화가 절대적입니다. 자신들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대상을 통해서 구원을 경험합니다. 2) 구슬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오며, 아파트 재테크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옵니다. 놀이에 불과한 구슬치기와 달리 돈벌이는 목숨이 달려 있으니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친구들에게 구슬을 나눠주는 아이들처럼 당신도 재산을 다 나눠줄 수 있냐고 질문할 분들이 계신가요? 제가 그런 결단을 내리지 않아도 모든 걸 손에서 내려놓을 순간은 옵니다. 여러분도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 순간이 오직 전까지 최소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심정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문제도 결국은 피조물의 탄식에 속하는 일이겠지요.

 

기다림

바울은 보지 못하는 몸의 구원을 희망한다면 “참음으로 기다리라.”고 권고합니다.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강력한 명령입니다. 전쟁 중 보초에게 졸음이 와도 참고 아침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부대장의 명령과 같습니다. 기다리면서 살기는 힘듭니다. 우리 앞에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서 하나님 안에서 통합적인 생명체가 되는 그 순간을 기다린다는 말은 너무 멀리 느껴집니다. 지금 여러분이 무엇을 실제로 기다리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취업 준비생은 취업할 순간을, 결혼하고 싶은 분은 결혼한 순간을, 직장에서 승진하기 원하는 분은 승진이 발표될 순간을 기다립니다. 늙거나 외톨이가 되어서 이런 급한 일들이 없는 사람들은 삶을 허전하게 느낍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그런 울림 없이도 얼마든지 인생을 재미있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제가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기도해야 하겠지요.


바울은 그냥 기다린다고 말하지 않고 “참음으로” 기다린다고 표현했습니다. “참음으로”를 NIV 성경은 “끈기 있게”라는 뜻의 patiently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의 어근인 patient는 환자라는 의미이다). 몸의 구원을 기다리는 일은 낭만적인 게 아닙니다. 무조건 열광적인 믿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인용한 17절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이 “몸의 구원”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데에 마음을 주면서 삽니다. 교회당을 크게 짓는다거나 장로가 된다거나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서, 또는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 황금 면류관을 받는다는 희망으로 신앙생활의 동력을 얻습니다. 이런 일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좋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이런 일들은 주변적인 의미만 있습니다. 몸의 구원을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몸의 구원을 기다린다는 바울의 호소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십니까? 저는 두려운 마음이 들 정도로 새로운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늘 소란스럽고 피곤하고 지루한지를 오늘의 말씀에서 더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그 누구도 몸의 신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그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서로를 연민과 연대감으로 대할 수 있고, 화해할 수 있을 겁니다. 더 나아가서 궁극적으로 몸의 구원을 희망하면서 인내하고 기다릴 겁니다. 그 희망과 기다림이 기독교가 제시할 수 있는 구원의 실체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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