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28 추천 수 0 2023.12.10 09:40:41
.........
성경본문 : 눅21:10-19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2110-19: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14: 잡히는 것도 역사적으로 잡혀가는 게 있고, 영적으로 보면 비진리들 앞에 끌려가는 것도 있다. 그러니까 뒤의 것은 하나님의 주권섭리로 보면 참 옳은 것을 증거 되게 만들려는 사건이 된다. 그래서 14절의 말씀은 평소에 하나님과 친분이 있게 지내면, 진리본질의 사람으로 늘 자기를 거룩 되게 하고 있으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들 앞에서 대답할 말을 미리 준비할 것이 없다. 염려 걱정할 것이 없다하는 것은 평소에 바로 살았다면 어떠한 어려운 일이 생겨도 바로 된 그대로 말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염려 걱정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막힘이 있게 살았다는 증거다. 그러니 불안한 거다. 또한 그들 앞에서 할 말을 미리 준비할 것이 없다하는 것은 예수님 당신이 알아서 책임을 지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평소에 크고 작은 일에 말씀대로 살겠다고 목숨을 대놓고 살았으니 주님 당신이 책임을 안 지면 누가 질 것이냐?

 

:28:에서도 보지만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는 말씀인데, 당신의 말씀에는 당신의 이름이 걸려있는 거다. 그래서 그 말씀은 추호도 틀림이 없다. 모든 역사의 진행도 당신의 말씀대로 추호도 틀림이 없이 진행이 되는 것이고, 그 역사 가운데 살면서 말씀을 존귀히 여기고 받들고 사는 그 자에게는 주님의 보호가 있다는 말씀이다.

 

주님의 보호를 받으려면 자기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의사단일로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보호가 되는 건데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그러지를 않고 자기 주관성대로 신념적 신앙으로 살고 있다. 자기 파워로 살고 있다. 말씀의 파워로 살아야 하겠는데 자기 개인에서 나오는 신념적 신앙으로 살고 있다.

 

신의적 신앙으로 그 분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게 아닌 말씀의 깨달음이 없이 자기 속에서 나오는 어떤 결심이나 각오 이런 자기의 신념은 금방 사라진다. 그러나 자기의 신념이라도 그 신념이 말씀에 의해서 자기의 옛사람이 죽어지고 말씀으로 다시 살아나서 그 생명적 신앙으로 된 신념이라면 염려 걱정을 하지 않게 된다.

 

예수 믿는 자기의 신념은 일반사람들에게도 다 있는 거다. 말하자면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가 기준을 세워놓고 그것을 이루기를 원하는데 자기는 예수를 믿으니까 하나님, 내가 이렇게 할 테니 도와주십시오하면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뤄주실 것을 확신하는 것은 신의적 신앙이 아닌 일반사람들도 다 가지고 있는 자기의 신념에 불과한 것이다. 말씀의 신앙은 말씀을 붙자고 그 말씀을 따라 자기의 목숨을 걸고 나가는 거다. 이건 신의적 신앙이다. 그러니 그 뒤는 하나님 당신이 책임을 져주시는 거다. 이건 세상 사람들의 신념과는 다른 거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신념적 신앙이 참 많다.

 

예수님께서 어느 성도에게 내가 책임을 지겠다라고 말씀을 하실 정도라면 그 성도가 평소에 어떻게 살았구나하는 걸 느끼게 된다. 이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뤄가는 이룰구원으로 살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환난과 핍박과 박해를 받았겠는지? 세상 사람들은 소원 목적은 땅의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땅에서 살지만 그 소원 목적 그 모든 이해타산 평가 판단은 천국으로 내려져 있다. 그러니 안 믿는 사람들과는 목적적으로 다르다. 목적적으로 다르니 개념도 다르고, 판단을 내리는 것도 다르다. 그러니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 환난 핍박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의 주관성에 맞춰 들어가 있다면 여기는 핍박이 없다. 예수님께서 당시에 유대 종교인들이 하자는 대로 했다면 핍박이 없다. 그런데 당신의 오신 목적이, 당신의 전 생애 전 인격 전폭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만이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기로 작정된 백성들이 구원을 얻게 돼 있다. 하나라도 틀리면, 흠과 티가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안 된다. 그러니 이 삶을 살자니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 핍박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고, 그 삶이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심정을 모른다면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님 말씀을 안 듣고 제 멋대로 하고자 하는 식으로 믿게 된다. 자기 편한대로 예수를 믿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성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은 부모님의 말씀을 따르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거다. 말씀을 따라 산다고 해서 자기의 생애가 없어지는 거냐?

 

청년들이 군대에 2, 3년 군대생활을 하는 걸 썩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다. 일반적이지만 군대의 단체생활에서 규모 있는 생활, 법도가 있는 생활, 상관에 대한, 부하에 대한 올바른 처신이 몸에 잘 익혀져 나오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함부로 살지를 않는다. 군대에 가면 배울 게 많다. 전우애라든지, 단체생활이라든지, 나 하나가 잘못함으로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지 않게 해야 하겠다는 조심성 등을 배울 수 있다.

 

교회에서도 정신적으로 보면 마찬가지다. 내가 하나 잘못함으로 온 교회 교인들이 욕을 얻어먹고, 교회가 욕을 얻어먹고, 위로 올라가서 주님이 욕을 얻어먹고 이런 게 있다. 이렇게 되면 전도문이 막히고, 그러면 자기 스스로도 신앙이 도태가 된다.

 

이런 건 자기 양심 속에서 증거가 돼 나온다. 일반사회에서는 사람만 속이면 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양심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 속이겠느냐? 그리고 양심을 속여진 자기의 언행심사는 은연중에 튀어나오게 된다. 그러면 그런 자기를 누가 좋아하겠느냐?

 

예수님으로부터 보장을 받는 사람들은 신앙 믿음이 변치 않고, 다시 말하면 신앙정절과 신앙의 정조를 잘 지켜 나온 자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박해자들이 그 진리성도를 대항하거나 변박하지 못하도록 그 성도에게 놀라운 지혜의 말씀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은 변함이 없다. 성경말씀은 하나님 당신의 말씀이기 때문에 변함이 없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긍정적인 약속을 받도록 해야지 부정적인 약속을 받도록 하면 안 된다. 부정적인 약속이란 다른 말로 하면 재앙이고 심판이라는 말이다.

 

:에 보면 스데반에게 지혜의 성령으로 대답케 하신 것을 볼 수 있고, :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에 손을 대어 말을 하게 해 주셨다. 입에 손을 댔다는 것은 당신의 말을 넣어준다는 것이다.

 

진리의 성도가 증거를 할 때 박해자들은 그 소리를 듣고 자기의 양심이 자기에게 말을 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진리이치는 분명하기 때문에 반박을 할 수 없는 거다.

 

예수님이 박해자들에게 잡혔는데 실상은 만능의 능력자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들에게 잡혀준 것이다. 그 때 대제사장들, 성전의 군관들, 장로들, 하속들, 무리들이 예수님을 잡아 빌라도에게로 데리고 가서 예수님의 죄를 찾아서 심판해 달라고 했는데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못 찾는다. 예수님이 신앙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었느냐? 일반적인 죄를 지었느냐? 주님은 죄도 없지만 진리도 모르는 빌라도의 수준에서는 주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는 거다.

 

그런데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롯에게로 보냈다. 그동안 헤롯과 빌라도는 뭐가 틀어졌는지 서로가 원수 사이였는데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롯에게로 보내는 바람에 둘이서 화해가 됐다. 그 참 이상하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냈는데, 이 헤롯은 그동안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기도 하고, 이적기사를 행하는 것을 직접 보고 싶기도 했기 때문에 자기에게로 보내진 예수님에게 이적기사를 행하면 너를 놓아주겠다는 식으로 여러 말로 어르고 협박하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헤롯이 여러 말로 협박을 함에도 헤롯의 말에 대해 한 마디도 대답을 안 했다. 왜 한 마디도 대답을 안 했을까? 묻는 게 말 같지를 않아서?

 

그 이전에 이 헤롯이 주님께서 보낸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을 죽였다. 이 헤롯이 세례요한 선지자의 말을 잘 들었다면 그의 물음에 대답을 잘 해 주겠는데 이 헤롯이 선지자를 죽여 버렸으니, 예수님이 보낸 종을 죽여 버렸으니 한 마디도 대답할 필요가 없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이걸 오늘날 계시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진리의 종의 말씀은 예수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네 마음을 닦아주는 말씀인데 이걸 네가 죽여 버렸으니, 옳은 진리이치를 네가 죽여 버렸으니 너희 마음은 닦이지를 않는 것이니 그런 너에게 무슨 말을 한들 네가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그러니 그런 자에게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안 해 주시는 것이다. 해 봐야 못 알아듣는다. 말씀을 안 하시는 것은 말을 해 줘도 네가 못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말씀을 알아듣는 신앙이 있고, 못 알아듣는 신앙이 있다.

 

자기가 말씀을 잘 못 알아듣는다면 자기 속에 뭘 죽였나를 생각을 하라. 자기가 말씀의 옳은 이치를 죽이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는 깨달음의 역사가 들어갈 텐데 그러지를 않고 자기에게 오는 옳은 이치를 죽여 버린다면 그건 없는 거다. 쉽게 말하면 너는 죽을 때까지 예수님의 말씀의 깨달음은 없다. 깨달음의 구원이 없다. 그러니 성경의 은밀한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만큼 자기에게 손해가 나는 거다. 주님과의 의사불통으로 산다 그 말이다. 내가 기도할 때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통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응답을 받아야 하겠는데 그게 없다. 의사불통이다. 의사불통은 막혔다 그 말이다. 주님과의 의사불통인데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그렇게 되면 안 믿을 수는 없는 거고, 자기는 캄캄할 수밖에 없다. 예수 믿는 게 처절하다. 그렇게 예수 믿지 말아라.

 

진리의 성도가 증거를 할 때 박해자들이 자기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게 성령님의 역사다. 진리이치가 분명하게 들리기 때문에 변박을 할 수 없는 거다. 입이 다물어진다. 유구무언이라.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전할 때 담대해야 하고 두려워하거나 떨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세상적으로 믿는 교인들은 세상과 비진리와 연합이기 때문에 그런 자들에게는 본문의 약속은 없다. 그렇게 예수 믿어서 신앙적인 면에서 하나님과의 의사불통이고 깨달음도 없다고 하면 교회 다니는 게 뭐냐? 맨날 밥 잘 먹고 돈 잘 벌고 세상 편히 살고 그것밖에 없다. 그런 신앙 믿음을 어디에 쓰겠느냐? 이건 안 믿는 사람과 소원 목적이 똑같다.

 

예수님은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하신다. 천국복음은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다. 따라서 예수 믿는 성도들이 전하는 복음도 천국복음이어야 한다. 천국복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이치로 들어간다. 이게 천국복음이다. 땅의 일, 세상의 일, 그 목적에 속한 게 아니다. 목적을 그렇게 세상에 두면 세상 불탈 때 다 타버린다. 이건 심판이다. 세상을 소원 목적하면 심판에 들어간다.

 

진리성도들의 복음전도는 세상의 그 어떤 권세를 빼앗으려는 게 아니라 민족과 혈통과 국경을 초월하고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인간을 죄에서 풀어내는 것이다. 죄에서 풀어낸다는 것은 이미 지은 죄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의사단일이 아닌 것은 죄인데,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하나 둘 맞춰지며 자꾸 죄에서 풀어지는 거다. 세상의 이해타산 평가성 질, 이건 다 하나님 앞에 죄인데 여기에서 자꾸 풀려난다. 예수 믿는 사람은 기본적으로는 죽은 영이 살아나서 죄와 사망에서 풀려났지만 죽은 영이 살아났다고 해도 여전히 예수 믿기 전의 세속 악습이 들어있는데 깨달으면서 이런 것에서 자꾸 풀려난다. 말하자면 걸레를 좋은 물에 자꾸 빨면 자꾸 깨끗해지는 건데, 세제를 풀어서 빨아도 때가 안 빠지면 그 다음에는 방망이가 들어간다. 걸레도 방망이에게 하도 얻어맞으면 그만 헤어져 버린다. 일반생활 속에 예수 믿는 이치가 다 들어있다. 정치계에도 들어있고, 사시사철 속에도 들어있고, 사건 속에도 들어있다.

 

인간을 죄에서 풀어내는 것이 복음전도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자들이 선교한다고 외국에 나가서 뭘 전할까? 그 나라에 독재가 있다면 거기에 대한 공박성, 다시 말하면 기독교 안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정치면에 공박을 하게 된다. 그러면 민주주의는 하나님의 법이냐? 아니다. 그리고 저질적인 기독교인들이 이방신을 믿는 식으로 복음을 전한다. 미신 식으로 전한다. 그러니 사람이 우매해진다. 이건 사람을 하나님의 재앙에 더 들어가게 만드는 거다. 일반적으로 볼 때도 원 저럴 수가 있나하는 짓을 하게 된다. 그러니 지탄을 받고 쫓겨나고 한다.

 

예수님의 복음은 땅에 속한 게 아니다. 순전히 하늘에 속한 것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건 천국복음을 받는다면 사람이 정확하게 나온다. 그래서 정치를 하는 사람도 이 진리말씀을 받으면 사람이 정확해지기 때문에 사회가 바로 되려면 먼저 교육이 바로 들어가야겠다하게 된다. 그러면 주님 오실 때까지 얻어맞지 않고 편히 천국 가게 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게 얻어맞지를 않으면 정신을 못 차린다. 애들도 꼭 얻어맞아야 말을 잘 듣는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날렵한 쇠가 되려면 풀무 속에 들어가고 망치로 얻어맞아야 날카롭고 쓸 만한 칼이 되듯이 사람은 얻어맞아야 사람이 되는 모양이다. ‘나는 안 얻어맞는다그런 큰소리 하지 말아라. 그러다 얻어맞는다.

 

귀신은 누구나에 관계없이 들어간다. ‘어느 나라 사람에게는 더 잘 들어가고, 어느 나라 사람에게는 안 들어가고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성이 안 돼 있으면 그 사람의 성격을 따라 얼마든지 들어간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말씀 깨달음으로 성격 성질을 얼른 고쳐라.

 

그리고 어느 나라 사람이, 어느 시대 사람이 귀신을 좇아낼 수 있느냐? 설령 누가 어떤 사람에게 들어간 귀신을 쫓아냈다고 할지라도 귀신이 떠나간 사람의 성격이 안 고쳐지면 귀신이 떠난 것 같으나 아니다. 환경만 조성이 되면 또 들어가서 그 사람을 뒤집어 놓게 된다.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신령천국에서 오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참 사람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다. 불을 끌 때 소방관이 방화복을 입고 꺼야지 일반사람이 그냥 불을 끄려고 하다가는 그 불이 자기에게로 옮겨 붙는 것처럼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되지도 않은 채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다가는 그 귀신이 자기에게 들어올 수 있다.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려면 자신이 죄와 상관이 없어야 하고, 죄를 이긴 분이어야 하고, 사망을 이긴 분이어야 하고, 유혹과 미혹을 다 이긴 분이어야 한다. 그런 분이라야 사람을 죄에서 해방을 시킬 수 있는 거다. 그러지 않고 이런 것들을 이긴 것이 없이 마귀에게 넘어간 자라면 그 자에게는 죄성이 들어있기 때문에 사람을 죄에서 해방은커녕 자기가 죄에 점점 더 물들어 버린다.

 

사람을 죄에서 해방을 시키려면 죄와 관계가 없어야 하고 오히려 죄를 정복하고 이긴 자가 해방을 시킬 수 있는 것인데 어느 종교가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킬 수 있느냐? 예수님 외에는 없다. 어느 사람도, 석가도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다 죄 아래 들어있다. 예수님 외에 죄를 이긴 자는 없다. 우리가 예수 믿는 가치를 알아야 한다. 사람을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나가게 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온전한 성품이란 죄를 이길 수 있는 그런 성품들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믿는 교인들보다 안 믿는 교인이 더 많다.

 

일반적인 죄는 행동을 해야만 죄라고 나타나지만 예수 믿는 면에서는 우리가 생명과를 안 먹으면 죄가 들어간다. 새로운 공기를 안 마시면 죽는다. 자꾸 갈아 마셔야 한다. 그런 것처럼. 이 죄는 눈에 안 보인다. 말씀에 불순종을 하는 죄는 안 보이고 모르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서도 죄를 짓고, 성경을 가지고도 죄를 짓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모세오경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인데도 죄를 짓고, 예수를 잡아 죽였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말씀의 내용 면에서 알맹이인 옳은 진리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서도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으니 이게 하나님 앞에 죄다. 이 죄는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모르고 있고, 가르쳐 줘도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눈에 보이는 죄는 일대 일, 무기 연장 행동으로 짓는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만 언행심사에서 하나님의 의사단일이 아닌 죄는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죄인데도 죄인 줄을 모르고 있다.

 

죄를 죄인 줄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양심이 기준이 돼 있는데, 그 양심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이 아니므로 그 자체가 죄가 된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의 양심대로 했기 때문에 죄가 아닌 것으로 안다. 우리는 진리를 따르는 양심이라야 옳은 거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도 진리를 안 따르는 양심이 허다하다. 그 양심은 종교성적으로 눈에 보이는 면이 기준으로 돼 있기 때문에 옳은 진리이치와는 대립성을 띠고 있다. 그래서 안 맞는다.

 

그래서 보면 예수 믿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자기 양심에 찔리면 하나님의 뜻에 맞춰 회개를 하고 바로 잡으려고 하지를 않고 내 마음에 안 든다하면서 안 받아들인다. 그게 싫어서 자기 마음에 맞는 교회로 옮겨간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예수기준은 필요가 없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과 자기 마음이 같다면 모르겠지만 자기가 진리 자체화 실상화로 안 된 주제에 종교적인 양심을 가지고 열심히 주일을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됐다고 보면 안 되는 거다. 주일을 지켰느냐? 거기에서 더 들어가 옳은 진리이치를 자기 인격화 시킨다면 이건 주님을 만난 사람이다. 예배를 바로 한 사람이다. 만났기 때문에 한 이치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예배라는 속에 이게 없다. 순서만 지키고 프로그램만 재미있게 하는 것뿐이지 말씀 깨달은 것은 없다.

 

이방인들은 사람을 상해하는 것만 죄라고 인정을 한다. 그런데 바리새교인들은 율법을 어긴 것을 죄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질에서 이질적인 것을 죄라고 한다. 다르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본질적인 것이 없는 사람에게 천국본질을 가르쳐서 그 사람이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 속에 이질성으로 된 것은 자동적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기 때문에 진리본질이 아닌 것은 자동적으로 드러나 버린다. 아무리 진짜라고 해도 진짜가 아닌 것은 말씀의 이치에서 자동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지식에도 이치가 있고, 지혜에도 이치가 있고, 선 사랑 거룩 진실 하나님의 도덕성에도 본질로 된 이치가 들어가 있다. 의와 주권, 즉 능력성에도 그 이치가 들어있다. 그 바른 것이 나갈 때 그것을 바로만 듣고 잘만 들으면 자동적으로 자기 속에서 판단이 나버린다. 그런데 그렇게 구별 분별이 되는 자기의 양심을 짓밟아 버린다면 너는 앙화다. 너는 재앙이다. 진리 앞에서 자동적으로 드러나고 알게 되었는데 그걸 고치려고 하지 않는 죄를 짓고 있구나.

 

인간창조의 목적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본질의 의사단일성의 구원의 이치를 모르면 그 사람은 성령님의 역사와, 사단 마귀의 역사를 분별을 못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어디에 가서 은혜를 받았다고 할 때 그 집회의 성격을 보면 이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구나하는 게 드러난다. 그게 참 은혜인지, 아니면 자기의 감정에서 솟아나는 흥분으로 울고불고 한 건지가 드러난다.

 

은혜를 받았다는 게 뭐냐? 말씀의 이치를 한 이치라도 깨달았다면 이게 은혜를 받은 거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안 믿을 때라도 억울한 일로 산이나 바닷가에 가서 실컷 울어버리면 마음이 시원하다. 이게 은혜를 받은 거냐? 울면 은혜를 받는 거냐?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는 이거와는 다르다. 말씀의 이치가 명확히 깨달아지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임했다. 앞으로 희망이 있다. 이게 은혜다. 그 깨달음의 말씀의 이치를 짓밟지 말아라. 그 말씀의 이치가 자기 속에 떨어져서 생명의 씨앗이 돼서 네 속에서 크게 자라고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돼 나가는 거다. 이게 성령님의 역사다.

 

말씀의 이치는 순전히 위로부터 오는 거다. 자기가 생각하는 생각 속에서 되는 게 아니라 말씀의 이치가 분별이 되는 것이 은혜다. 그런데 자기 쪽에서 마음에서 뭔가를 불러일으키려고 하는 인적인 요소가 있다. 이건 아니다. 진리이치를 맛본 사람은 그 맛이 너무 좋기 때문에 그 맛을 다시 보려고 자꾸 말씀을 찾게 되는데 이건 성령님의 역사다. 이게 처음사랑이다. ‘첫 사랑이 아니라 처음사랑이다. 처음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처음사랑이다. 진리이치의 깨달음이 그렇다. 그러나 진리이치의 은혜를 못 받은 사람은 거기에 잘 못 들어간다.

 

우리가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을 분별을 해야 하는데, 예수를 믿어도 이것을 분별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하늘의 생각과 땅의 생각이 있는데, 자기의 생각의 뿌리가 위에서 된 건지 땅에서 된 건지 분별을 못하는 사람이 참 많다.

 

바람이 낮은 데서 부는 게 있고 높은 데서 부는 게 있는데, 낮은 바람은 자꾸 아래쪽으로 들어간다. 습한 바람은 자꾸 지하실로 들어간다. 이 바람은 지상의 모든 먼지를 자꾸 지하로 끌고 들어간다. 그래서 사람이 거기에서 살면 몸에 병이 든다.

 

바리새교인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의 율법대로 하나님 뜻대로 한다고 했지만 그들은 영적 면의 지식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과 의사단일이 되지 못한 채 성경을 가지고 예수를 죽이는 일을 자꾸 하게 된다. 그런 것처럼 성경을 문자대로만 고집을 하게 되면 성경말씀 속에 들어있는 은밀계시의 이치를 자꾸 죽이게 된다. 안 받아들인다. 그래서 성경의 은밀계시는 모른 채 세상 육적으로 나가는 그런 데서 예수를 믿다가 여기로 온 사람은 여기서 이 말씀을 들을 때 전하는 말씀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설교의 내용이 성경 어느 구절인가하고 자꾸 성경을 뒤지고 있다.

 

성경의 은밀한 뜻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가지고 자타의 구원을 죽이는 꼴이 된다. 구원에 관해 알지 못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예수 죽이고, 바로 믿는 진리성도에게 환난과 핍박을 주게 돼 있다. ‘안 된다가 아니라 주게 돼 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8057 마태복음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13:31-33,44-50  정용섭 목사  2023-12-10 101
18056 창세기 여기 계신 하나님 창28:10-19  정용섭 목사  2023-12-10 102
18055 로마서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8:11-11  정용섭 목사  2023-12-10 63
18054 마태복음 영혼의 안식 마11:16-19  정용섭 목사  2023-12-10 68
18053 창세기 인신 제사의 유혹 창22:1-14  정용섭 목사  2023-12-10 45
18052 마태복음 두려워하지 말라! 마10:24~33  정용섭 목사  2023-12-10 87
18051 로마서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5:1-8  정용섭 목사  2023-12-10 61
18050 창세기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12:1-9  정용섭 목사  2023-12-10 50
18049 마태복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28:16-20  정용섭 목사  2023-12-10 38
18048 요한복음 평화-파송-성령-사죄 요20:19-23  정용섭 목사  2023-12-10 38
» 누가복음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눅21:10-19  김경형목사  2023-12-10 28
18046 요한복음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요6:34-35  김경형목사  2023-12-10 41
18045 시편 은혜에 감사하라 시103:1-5  강승호목사  2023-12-07 158
18044 히브리서 소멸하는 불 히12:18-29  배장섭 목사  2023-12-06 87
18043 이사야 야훼를 경외하라 사5:24-30  강승호목사  2023-12-06 50
18042 누가복음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눅21:9-13  김경형목사  2023-12-03 37
18041 요한복음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6:32-34  김경형목사  2023-12-03 24
18040 마가복음 등경위에 등불 막4:21-25  강승호목사  2023-11-28 92
18039 누가복음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눅21:9-19  김경형목사  2023-11-26 53
18038 요한복음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6:30-32  김경형목사  2023-11-26 37
18037 마가복음 죄는 지옥의 고통 막9:42-50  강승호목사  2023-11-24 41
18036 데살로전 건강한 신앙 살전2:13-14  강승호목사  2023-11-22 191
18035 열왕기하 슬피 우는 왕 왕하20:1-7  강승호목사  2023-11-21 79
18034 누가복음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눅21:5-9  김경형목사  2023-11-19 57
18033 요한복음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요6:29-31  김경형목사  2023-11-19 72
18032 누가복음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눅21:5-9  김경형목사  2023-11-12 85
18031 요한복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요6:28-29  김경형목사  2023-11-12 129
18030 말라기 예배가 귀찮은 백성 말1:10-14  강승호목사  2023-11-08 171
18029 누가복음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눅21:1-6  김경형목사  2023-11-05 40
18028 요한복음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8:22-29  김경형목사  2023-11-05 36
18027 잠언 복 있는 자가 되라 잠3:21-26  강승호목사  2023-11-04 201
18026 마태복음 십자가 예수 마27:45-50  강승호목사  2023-10-31 115
18025 누가복음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눅21:1-4  김경형목사  2023-10-29 93
18024 요한복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6:27  김경형목사  2023-10-29 89
18023 사무엘상 (계시보기)먼저 신을 벗어야 죽은고기를 살리는 운동을 할수 있다 마4:19  김경형목사  2023-10-27 92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