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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기질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308 추천 수 0 2009.06.29 21: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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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5:36-41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85 / 1989.12.03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사도행전15: 36-41

 

사도행전에 기록된 내용들은 예수님 부활하신 이후에 설립된 초대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이 어떻게 세계로 전파되며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는가 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보면 다른 성경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실인, 복음이 그것을 모르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는가? 또 복음이 전달되는 과정에 실제적으로 어떤 문제들이 생기는가? 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성경보다도 우리 신자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책이라 생각됩니다.

 

오늘도 36절에서 41절에 이르는 이 본문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도움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바나바와 바울이 새로 제2차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 처음 1차 여행 때 같이 갔던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갈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아주 심히 다투어 갈라섰다는 기록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과 바나바라 하면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에 특별히 이 두 사람을 세우고 주께서 준비한 일을 시키라 해서 처음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던 분들이고 둘이 성령에 의해서 지어진 단짝이며 여태껏 한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가 지금 되돌아볼 때 그 이상 훌룡한 분들도 없겠다고 생각되어지는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이 갈라설 만큼 심히 다투었다는 기록을 만나기 때문입닏다.

 

아마 이 다툼에 있어서 바나바보다 바울 쪽이 훨씬 다혈질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바울이 마가라는 요한을 데리고 가는데 반대했던 것은, 첫 번 여행을 떠날 때에 함께 가겠다고 했다가 여행한지 얼마 안되어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간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가에 대한 평가를 좋지 않게 하고 다시 가는 문제에 있어서도 반대 입장에 섰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마가가 다시 가겠다고 한 데는 지난 번 실패를 거울 삼아 좀더 분발하여 그때보다 좀더 나아지고 회복하려는 마음을 가진 신앙적인 열심으로 다시 청했을 텐데 바울은 들어주지 않았고 바나바는 같이 가는 게 어떻겠는가라고 한 걸로 보아, 바나바 쪽이 아무래도 조금 더 인격적으로 온유하고 나은 사람이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과 갈라섬을 통하여 ‘도대체 신앙인은 그의 기질과 성격을 어느 선까지 또 어떻게 갈무리해야 되느냐? ’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뜻밖에 많은 신자들이 그의 성격상의 결함과 신앙과의 관계를 매우 혼동해서 쓸데없는 영적 소모전에 잡혀 있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가 확인할 것은 사람의 기질과 성격을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도 벼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격 자체를 잘못이라 그러거나 그 기질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풍성하시고 부요하시며 다양하신 분이며 그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을 이렇게 전부 다르게 지으셨습니다.

 

성격과 모양과 기호 같은 것을 다 다르게 합니다. 저는 활동적인 반면 주 목사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이 오면 저는 눈싸움을 하자는 편이고 주 목사님은 눈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자는 편입니다. 다 성격상의 차이입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오해가 없어야 되겠습니다. 바울은 회심하기 전의 상태나 회심한 이후의 상태나 다 열정적이었습니다. 우리가 구별하기 좋게 그저 두 부류로 구별한다면 사람 중에는 다혈질이 있고 담즙질이 있습니다. 그 중 바울은 다혈질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할 때도 앞장을 서서 예루살렘뿐 아니라 다메섹까지 가서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고, 스테반의 피를 본 정도로는 마음이 다 안 풀려서 살기가 등등해서 간 사람인데 이제 돌이켜 예수 믿는 사람이 된 다음에도 역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주를 전파하기 위해 어디든지 나섰던 사람입니다.

 

전도 여행도 제일 열심히 했습니다. 오죽하면 서신서 중에 이런 것도 있습니다. ‘주를 위해서 결혼하지 않는 게 낫다.’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집에 앉아서 도손도손 가정을 꾸리는 것도 못 참는 것이지요. 그래서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하라’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우리가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 고 합니다. 다혈질은 그렇습니다. 기뻐 날뛸 때도 펄펄 뛰고 떨어지면 또 한없이 들어가요. 뛰었을 때랑 파묻혔을 때랑 진폭이 아주 큽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바로 그것 때문에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의 성격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낙관적인가, 혹은 비관적인가, 소심한가, 아니면 좀 망상적인가’ 자기 자신을 구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걸 잘못 생각했을 때 신앙상에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이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서 싸움을 하는 것을 너무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한번도 예수를 믿고 나면 다 똑같아진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성령님, 한 교회로 부름을 받습니다. 거기서 하나하나를 자꾸 강조해야 되는 이유는 우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르지 않고 같으면 하나하나라는 얘기를 그렇게 강조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르기 때문에 내적 통일성, 신앙의 통일성을 가지되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다원화 된 것으로 오해할까봐 성경이 그 같은 설명을 그렇게 열심히 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획일화되지 않습니다.

 

종종 우리나라 신자들을 만나보면 유교적 경향을 너무 뿌리 깊게 갖고 있기 때문에 군자적 모습과 신앙인의 모습을 혼동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저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신앙인은 웃지 않는다’ 라고 하면서 ‘성경에 예수님이 웃었다는 기록이 있는가? ’ 하는 것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끔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왜 웃을 수 있게 만드셨겠어요? 왜 간지럼을 타게 하고 허파에 바람을 주었겠어요? 웃으라고 주셨지요. 하나님이 씀모없는 것을 주셨다는 말입니까? 속지 마세요. 농담도 안한다 그럽니다. 농담 안하고 뭐 합니까? 혼자 있을 때 매일 구구단 외우세요? 이런 말도 안되는 오해를 하고 있어요.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많은 것을 허락받았는가를 몰라요. 그래서 금욕적으로 사는 것과 신앙이 깊어지는 것을 동일시하는, 성경이 말한 적이 없는 신자상을 자꾸 만들어 냅니다. 여러분이 어떤 성경 공부 모임이든지 다른 기독교적 신안 모임에 갔을 때 거기 있는 사람들이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하고 있고 획일성을 은근히 강조하면 일단 거기는 틀린 겁니다.

 

이를테면 키가 160cm 이하는 안 받는다. 이러면 이건 틀린 데입니다. 뭐하는 동안은 웃으면 안된다. 이것도 말이 안되는 겁니다. 경건하다는 것과 엄숙하다는 것과, 하나님의 존엄성을 마음속으로 항복한다는 것과 는 시퍼런 얼굴이 되어 가지고 덜덜덜 떨고 있는다는 것과는 다른 겁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오해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래서 바로 이 문제와 연결된 몇 가지 신앙상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풀어 보려고 합니다.

 

이 기질과 성격, 예를 들면 여러분이 다혈질이락도 좋고 담즙질이라도 좋습니다. 그 외에 어떤 성격적인 특별한 무엇을 갖고 계신다해도 좋습니다. 결벽증이 있어도 좋고 혹은 만고강산이라도 좋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기질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히 못을 박아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기질과 성격을 애써 버려야 된다는 틀린 선입관을 갖고 있는 이유의 근거가 되는 것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모두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이 기질과 성격이 죄를 짓는데 이미 물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질 자체가 죄성을 갖고 있다든가 기질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기질과 성격이 늘 다른 쪽 세상과 죄를 짓는 쪽으로 그동안 활동을 해왔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렸을 때부터 예수를 믿었다 할지라도 그건 세상적이고 죄적인 것으로 이미 물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성화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예수를 믿는 것으로부터 여러분이 완전히 성화되는 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때까지 모든 신자들은 예외없이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그이 기질과 성격이 죄 된 활동과 죄 된 일을 도모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질과 성격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 이미 점령되어 있는 죄 된 습관과 죄를 짓는 쾌락에 대한 뿌리 깊은 경험들이 쌓여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회심하여 신다 된 것이 기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방향과 태도와 원리를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자기가 신이요 세상이 보상이었다면 이제 신다 된 자는 하나님이 계신 줄 알아 하나님만이 신이며 하나님의 손에서만 보상을 받는 자로 태도를 변경한 사람입니다. 다혈질이 담즙질로 변하거나 만고강산형이 전력 투구형으로 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 ’ ‘나는 누구인가? ’ ‘누가 최고의 권위자인가’ 에 대해서 깨우침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가졌던 모든 성경과 능력들이 무엇을 향하여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가 달라지는 것이지 그 능려과 기질 자체를 버리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죄와 세상을 향하여 활동하던 것에 익숙했던 과거의 기질과 습성으로 말미암아 이제 새로 바꾼 방향, 새로 바꾼 목적을 수행하는데 나를 방해하는 일로 등장치 못하게 하는 일로서 기질을 절제하라는 것이지 우리 기질과 성격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 재미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참 곤란합니다. 서구에서는 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 중에 최고로 평가 되는 것이 유머 센스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농담을 하면 그 사람을 천박한 사람으로 생각을 하죠? 그러나 서구 사회에서는 유머라는 걸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위트라는 것은 내가 배를 타고 가는데 앞에 나타난 암초를 피해서 가는 기술을 말합니다. 반면 유머란 암초 위까지 물을 챙우고 그 위를 지나가는 걸 일컫는 것입니다. 눈 감으면 코 베가는 게 아니라 눈 뜨고 있는데도 코 베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 싸움 속에서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누구한테 그 한을 갖다가 몰아붙이지고 않고 견디어 내는 실력을 유머라 그럽니다.

 

우는 건 쉽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울며 포기하지 않고, 내가 한 것만큼 대접을 받지 못하고 내가 베푼 호의가 그 진실대로 전달되지 않는 속에서도 그 선행을 계속하며 진심을 유지하는 싸움을 해낸다는 것은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을 웃으면서 해내는 실력을 유머라 그럽니다. 이상하게 유머론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말하자면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서 우리 기질 속에 뿌리 깊이 들어와 있는 죄 된 성품, 죄로 향하는 습관을 몰아내는 것과 인간의 인간 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내신 고급한 수준을 유지하면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신앙적 배짱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원한과 억울함과 절망을 극복해 나가는 일에 있어서 오히려 우리의 기질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은사요 풍성한 선물인간 하는 것을 분명히 깨우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기질 갖고 잘못 싸우는 날에는 아주 쓸모없는 싸움에 휘말리게 됩니다. 기질적, 성격적 차원에서 신앙의 만족과 성격적 만족을 오해하기 시작하면 신앙상의 어려운 싸움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요. 다혈질적인 기질을 갖고 계시다면 예수 믿는 것도 화끈한 것이 좋아 보입니다. 찬송을 불러도 그냥은 못 부르고 박수를 쳐야 된단 말입니다. 이래야 만족을 한다 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는 잘못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마음에 기쁨이 넘칠 때 가만히 않아서 ‘아이, 좋아’ 이러구 있을 수는 없는 겁니다. 너무 좋아서 백두산에 올라가 고함이라도 질러야 되겠는데 어떡해요. 박수라도 쳐야죠. 그렇지만 나에게 신앙적인 만족이 넘쳐 흘러 내 감정을 분발시키는 것과 감정이 분발되어야만 반드시 좋다는 것 때문에 박수를 쳐서 감정을 분발시키는 것과는 얘기가 달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바로 이 문제에 걸려있을까봐 제가 걱정을 하는 겁니다.

 

아주 현실적으로 이런 예를 들어 봅시다. 저희 교회 오신 분들을 두 달에 한 번씩 새신자 환영회를 해서 만나면 소감 중에 꼭 이런 말이 낍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은근히 불만스러운 게 많았는데 여기 소문을 듣고 와보니까 그 불만들이 다 해소됐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뭔가 하면 말하자면 목사님이 말랐다 이것도 좋고 눈이 작은 것도 좋고 다른 교회에서 여러분이 반감을 가졌던 부정적인 모습들이 없는 것이 좋다는 식인데 이건 좀 곤란합니다. 왜 곤란하냐 하면 교회의 설립 목적이나 설교의 목적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 가깝게 만나고 하나님의 요구 앞에 여러분을 점검하게 만들어 여러분이 거룩하게 바뀌며 여러분 안에 있는 생명이 자라나게 하는 것인데, 기껏 ‘나는 교회가 이러지 않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어디를 가도 맘에 안들어 낙심하고 있었는데 여기 오니까 안 그렇더라’ ‘나는 좋다’ 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신앙이란 결국 무얼 안해서 좋다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무엇을 찾아야 하고 그것을 찾는 내 자신의 모자람과 무능력함에 해하여 애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이 문제를 여러분이 잘못하게 되면 역이 성립을 합니다. 여러분이 성격적, 기질적 차원에서 침체되어 있는 것이 영적으로도 침체됐다고 오해를 하는 역이 성립됩니다.

 

기질적인 만족이 영적인 만족으로 오해될 수 있다면 기질적인 침체가 영적인 침체라고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이렇게 가만히 하고 있으면 불안해하는 문제가 많아 지게 됩니다. 중간에 뭐가 하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부흥회를 가끔 하는 모양입니다. 부흥회를 해서 어떻게 한번 카타르시스를 해야 되고 또한 나도 이만큼은 아직 마음속에 열기가 있구나 자족하며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해야 되는 겁니다.

 

이것도 참 난감합니다. 의사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 중에 이런게 있습니다. “보약이 뭐죠? 세끼 밥 먹는 것, 잘 먹고 열심히 생화하시고 잘 자십시오. 이것이 최고의 보약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데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어떤 극적인 문제나 감동과 희열의 극치로 가는 것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덤덤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써 신앙이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녹용 먹고 인삼 먹어서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가 빈사 상태에 놓여 있을 때 먹어야 하는 극단적인 처방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적으로 아주 중병에 걸렸거나 특별히 뭔가를 투여해야 될 때를 제외하고는 정상적인 신자라면 언제나 먹던 것이나 먹고 밤낮 자던 데서 자고 입던 옷 입고 하는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크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라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아, 이거 내가 너무 무덤덤하고 너무 게으른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면 걱정 마십시오. 그것은 게으른 것이 아니라 아주 훌룡한 겁니다. 그때 어떤 자극을 찾아 떠나지 마십시오. 현대인들에게 제일 많은 요구는 여행이라고 한답니다. 왜 현대인들이 여행을 제일 많이 요구하죠? 여행을 통해 새로운 풍물을 접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실상은 현재의 이 틀에 박힌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합니다.

 


한시도 벗어날 수 없는 이 책임, 가정에서의 책임, 회사에서의 책임, 이웃 앞에서의 책임을 훌훌 털어 버리는 1석 3조의 효과를 얻는 것이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거기 가면 내가 누구인 줄을 압니까? 말이 통합니까? 얼굴을 외웁니까? 마음이 편하지요. 여행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피곤한 것입니다만 아무리 피곤해도 바로 그 일상적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의 소원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 생활과 마찬가지로 생활 속에서 우리 신앙이 크도록 하나님이 의도하고 계시고 그 속에 우리가 클 수 있는 많은 영양분들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 생활을 어떻게 하고 싶으냐 하면 그렇게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보다 어느날 갑자기 덩어리지게 받고 싶은 것입니다. 왜그럴까요? 매일하는 것이 훨씬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내해야 되고 끈질겨야 되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요즈음 ㄴ나오는 TV나 광고물이나 영화 같은 것을 보면 배우들이 이쁘기 짝이 없습니다. 옷도 이쁘구요. 왜 그렇죠? 보여 주려고 입은 옷이지 활동하는 옷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중에 나갈 때 앞서 나가는 사람 뒤를 보십시오. 무릎 안쪽이 접히지 않은 바지가 있는가. 입고 다니고, 일한 사람이면 팔꿈치 안쪽이 접히는 법이고 무릎 뒤가 접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선전을 하고 모양내러 나온 옷은 절대 접혀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멋있죠. 왜 모델이 입은 옷은 멋있는데 내가 입은 옷은 멋이 없는가? 물론 옷걸이의 차이도 있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입고 일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입고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리미질한 그대로 나오는 겁니다. 영화나 연극에 나오는 배우들과 거기서 만나는 연인들은 그 장면을 찍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나와서 ‘짠’ 하고 만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만나면 이야기해야지요, 먹어야지요. 어떻게 화장한 그대로 있으며 밤낮 그렇게 옷을 입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그들은 생활이 없다구요. 감상용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이 자라나는 것은 남에게 이쁘게 포장된 것으로 얘기거리가 되는 것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김장하다 나온 복장으로, 세수 안한 얼굴로 그렇게 만나는 것 같은 것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질이 이상형으로 요구하고 있은 어떤 신앙의 모습들과 내가 동떨어져 있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좌절하거나 나는 신앙인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권태롭게까지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이 좀 화끈하고 신선한 맛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고 하면서.

 

여러분 인생에서 화끈하고 신선한 맛이 있으려면 이런 것밖에 없습니다. 애가 갑자기 유괴를 당한다든지 부인이 갑자기 미쳐서 다른 남자와 도망을 간다든지 이러면 갑자기 신선하고 드라마틱해집니다. 진짜 행복이 무엇입니까? 집에 돌아오면 부인이 기다리고 있고 토끼 같은 자식들이 학교 갔다 와서 30점 맞은 산수 시험지 내놓고 하는 것이 가정이지 그 외에 무엇이 또 행복입니까?

 

자식이 어느날 갑자기 “아빠, 나 이번 복권에 당첨이 됐는데 나 이제부터 독립하겠습니다.” 이것이 가정입니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의 기질적인 요구와 혼동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이 기질의 만족을 구하기 위한 심리적인 치료 방법들이 신앙인들에게 너무 많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저도 사실 기독교 교육을 한 사람입니다만 기독교 교육학계에 제일 큰 병은 심리학과 상담학이 너무나 많은 부분을 잠식해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도 상담하자는 사람이 날로 많아지고 있는데 이건 참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심리적인 갈등을 겪고 있을 때, ‘나는 신앙이 이만큼 컸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거기에 못 미치고 이렇게 처져 있습니다’ 라는 느낌이 들었을 때 분명하게 진단해야 되는 것은 먼저 성경의 약속은 사실이요 그 희열과 승리와 충만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그렇지 못한다면 그 목표가 먼 것이요 높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적해 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걸 쌓아 나아가고 도달할 준비를 갖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십년, 십년 해서 안되면 20년, 20년 해서 안되면 30년. 이런 각오를 가지고 기어코 도달하려 해야 되는데, 신앙적 부분에서는 누구나 한번에 뛰어서 거기에 도달하려 합니다.

 

한 번에 울어서, 한 번에 헌금 내서, 한 번 고함 질러서 그 자리에 가려고 합니다. 다 널브러지는 겁니다. 완전히 널브러져 가지고 그 다음에는 그의 기질을 옛날같이 분발시키는 것으로 치료받으려고 그럽니다. ‘옛날에는 내가 감동도 했고 열심도 있었다. 그런데 왜 없어졌을까? 다시 그 첫사랑을 회복해야겠다. 이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식입니다. 이건 안됩니다. 이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어떡합니까? 시행 착오를 겪은 것으로 말미암는 어떤 지혜와 분별력이 있어야지요. ‘아, 이건 한 번에 점프해서 갈 수 있는 목적지가 아니다. 이건 쌓고 쌓아서 가는 것이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루 저녁 영어 사전 갖다 놓고 A서부터 Z까지 한번 쫙 읽어 보면 다 외워집니까? 그런 법은 없습니다. 하고 하고 또 하고 또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도움을 많이 받으셨을, 안현필 씨라는 유명한 영어참고서 저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책 중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오력일체’ 영어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 사람은 손으로 쓴다. 입으로 외운다. 외운 것을 입으로 중어중얼 해 보고 귀로 듣는다. 눈으로 본다. 그래서 이렇게 다섯 가지를 오력일체라고 했습니다. 째려만 봐 가지고는 영어를 못합니다. 수학도 째려 봐 가지고 공부 잘하는 학생을 봤습니까? 풀어야지요. 영어 단어를 째려 봐 가지고는 못합니다. 속으로 암기만 해서도 안되고 쓰고 읽고 말로 하고 귀로 듣고 화장실에 붙여 놓고 천장에 붙여 놓고 어디든지 붙여 놓아야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외워야지요. 안 그래요? 그래서 목적지까지 가야지요.

 

이것을 혼동하지 마세요. 신앙이란 걸 그렇게 단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에 경건한 능력을 쌓아가는 일을 한 번 욱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지금의 병입니다.

 

크게 싸워야 되고 길게 싸워야 되는 싸움인 것입니다. 내가 마음에 결심을 했고 선한 각오를 했다고 해서 목적지에 가 있는 것도 아니요. 그 일이 쉽게 벌어지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결심하고 각오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면 그것을 실천해서 완성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는 내가 갖는 기질적인 습성과 기호와 성격을 모아서 선한 일에 항복시키고 분발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열매 맺고 내 자신이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인내와 냉정함과 성실함을 요구하는 싸움이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분발시키고 어떤 일에 결심시킨 내 성격들이 그것을 완성하는 길을 또 포기케 할 수 있다는 걸 분명히 분석하시고 이 신앙의 싸움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런 갈등들은 없애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은사, 능력, 재주 혹은 성격상의 어떤 결함도 좋고 성격상의 장점도 좋습니다. 그 모든 것이 이제 하나님의 기뻐하심 속에 녹아 나오며 그것을 위하여 초점을 모으고 일사 분란하게 뜻이 모아지는 것으로 여러분을 항복시켜야 됩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은 바나나와 이렇게 피차 갈라 서도록까지 만든 요인이었던 마가를 말년에 가서 다시 부릅니다. 바울이 그가 가졌던 그 다혈질이고 정열적인 성격을, 결국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과 모든 영혼들을 유익케 하는 일 속에서 드디어 극복해 내는 것을 우리가 결론에서 봅니다. 디모데후서 4 : 11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만 지금 나와 같이 있는데 네가 올 때 마가를 내게 보내라 저가 내게 유익한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본문 장면에서도 바나바와 이렇게 심히 다투고 그의 성격적인 문제로 갈라서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일을 포기하거나 집어 던지는 행위로는 가지 않는 것을 주목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이렇듯 성격과 기질이 맞지 않는 사람끼리의 충돌입니다. 그것은 꼭 신앙 생활을 걷어 치우는 데로 불똥이 튑니다. 우리나라 지역별로 볼 때 이 일에 누가 가장 많이 실수를 하느냐 하면 평안도 사람이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에 평안도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평안도 사람이기에 여기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압니다.

 

제가 어는 교회의 집회에 갔었는데 그 교회의 목사님이 평안도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함께 얘기하다가 저도 평안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시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도 사람 있는 곳에 평안도 없지’ 평안도 사람들을 표현하는 말이 ‘맹호출림’ 이라는 것입니다. 맹호가 그냥 수풀에서 뛰어나오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집에 기를 뿌리고 불 확 질러놓고 ‘아, 난 뒤는 없어’ 이건 변명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도 매우 난처합니다. 늘 웃고 늘 부처님 가운데 토막같이 하고 앉아서 ‘난 잘 모르겠는데 이건 좀 이상해’ 이것도 굉장히 곤란합니다. 그가 평소에 너무나 거룩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부드럽게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더 크게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 스스로에게 올무가 되지 않고, 같이 신앙 생활하는 믿음의 권속들에게도 올무가 되지 않게 할 것이며 그리고 이 싸움이 내 기질로 말미암아 좌우되지 않아야 되는 문제요. 신앙은 신앙으로만 쌓아가는 문제인 줄 이제 분명히 하기로 하십시다. 인내를 여러분에게 요구하고 여러분이 혹 욱했을지라도 혹은 침체됐을지라도 그것이 여러분을 신앙 생활과 그 신앙을 쌓아가는 열심히 있는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할 것을 분명히 확인하는 오늘 본문이 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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