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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3042 추천 수 0 2009.07.02 15: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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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8:1-4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96 / 1990.02.18 
“이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사도행전 18:1-4

오늘 우리가 생각할 말씀은 바울이 아테네를 떠나서 고린도에 이르는 장면입니다. 고린도에 이르러서 아굴라라 하는 유대인을 만나서 함께 장막을 만드는 일을 했다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깨우쳐야 하고 결론으로 가져야 할 내용 속에 들어있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파헤쳐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본문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을 가지실지 모르지만 사실 이 본문은 바울이 얼마나 처절하고 좌절된 상황에 있는가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지금 여기 고린도까지 오도록 여행한 도시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테네 그리고 여기 고린도에 이르도록 그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원래부터 이쪽은 그의 전도여행의 목적지로 삼고 있지도 않았던 곳입니다. 1차 전도여행때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을 세우고 그리고 2차 전도여행은 1차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행 중에 교회가 아직 설립되지 않은 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도 그중에 들어 있었습니다마는 주의 영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해서 소아시아에서의 사역을 중단하고 강제로 이 그리스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에서는 귀신들린 점장이의 귀신을 쫓아내는 바람에 그 주인의 고소를 받아 매맞고 투옥되었다가 풀려 났었습니다. 그리고 그 빌립보 지경을 황급히 벗어나서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는데 거기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반대해서 저자의 괴악한 사람들을 동원해서 그를 몰아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하기 좋게 얘기하면 오늘날 시장의 깡패들입니다. 그 불량배들에게 몰려서 베뢰아로 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데살로니가에서 거기까지 원정을 옵니다. 바울의 전도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원정을 오는 바람에 거기서도 황급히 아테네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물론 각 곳에서 신자를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렇게 승리하고 형통해 있는 것은 아닌 것이 사실입니다.

나중에 여러분 집에 가셔서 세계지도에서 그리스 쪽을 좀 잘 보아주시면 그리스는 이 당시에 절반으로 나눠서 윗 지방을 마게도냐라고 하고 아래지방을 아가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처음에 들렸던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는 그 북부에 모여 있는 도시들입니다마는 이 아테네는 아가야에 속한 남부지방으로 상당히 밑에 위치해 있습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예를 들자면 경기도 지방에서 경기도, 인천, 수원, 이렇게 활동을 하다가 저 목포쯤으로 도망을 간 셈입니다. 상당히 멀리 도망갔기에 거기까지는 쫓아오지 않은 셈입니다. 그러나 거기서는 17:32에 나오는 바와 같이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했다고 하는 바와 같이 조롱만 받고 그렇게 획기할 만한 어떤 결론을 얻어내지 못해서 지금 고린도에 이르렀습니다. 계속 반대를 당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 있었고 지치고 낙심한 상태에서 고린도에 이르는 것입니다.

고린도는 아테네에서 조금 더 남쪽에 있는 섬은 아니지만 거의 섬과 방불합니다. 본토와 가느다란 육로로 붙어 있습니다. 그 육로, 그 가느다랗게 붙어 있는 육로에 이 고린도라는 도시가 있는데 서쪽으로도 바다고 동쪽으로도 바다입니다. 서쪽으로는 이탈리아와 연결이 되고 동쪽으로는 소아시아 반도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이 고린도는 도시의 한쪽면만 항구가 아니라 묘하게도 도시의 양쪽이 항구인 그리고 그 항구마다 다른쪽 상권과 연결되는 아주 천해의 무역항구였습니다. 어디나 그렇듯이 이런 곳은 부와 사치가 극에 달하고 쾌락과 범죄가 만연해 있는 곳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지금 그의 사역에 있어서 지치고 좌절한 모습으로 어쩌면 세상의 부패한 것과 세상의 세력이 가장 드세고 거칠고 높은 도시에 떨구어져 있는 셈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오늘 본문을 이해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굴라를 만나는데 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본도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본도는 소아시아 동북쪽 흑해의 연안의 한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유대인인데 태어나기를 거기서 태어나서 살기를 로마에 가서 살았습니다만 유대인들은 다 로마에서 떠나라는 추방령을 받아서 그 모든 재산권을 포기하고 이 고린도로 온 사람입니다. 왜 고린도로 왔는지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언제나 거지는 농촌으로 가지 않고 도시로 오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도시를 가야 먹고 살 건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가장 낙심한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여기서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최후의 먹고 사는 방법,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텐트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사건 설명을 이쯤 해 놓고 이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연결되는가를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여러분이 바울의 입장에 서 보십시오. 바울은 지금 자기가 원한 것도 아니고 주께서 강권해서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가는 곳마다 누가 준비하고 있고 문이 열리고 좋은 음식으로 준비를 해 줘도 이 일은 벅찬 일입니다. 그런데 가는 데마다 반대하는 자뿐이요, 가는 데마다 난관과 고통과 박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에게 아무리 시간이 주어져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긴 것을 다 말할 틈이 없는데 먹고 사는 일을 위해서 스스로 호구지책으로 장막을 만들고 또 나아가서 일을 해야 되는 입장에 처하게 됐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럴 때 뭐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겠습니까?

제가 이 목회의 길에 들어서면서 가장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이 하나님은 그의 일을 맡긴 사람에게 편안한 길을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신학교에 들어가자 옛날보다 더 병이 들고 저희 부모님들과 저희 형제들도 옛날보다 좀더 이상하게 반대하는 쪽으로 사사건건이 그러고, 가장 가깝고 위로를 해야 되는 사람도 가장 결정적일 때는 칼들고 덤비는 것을 제가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종종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하시지 말라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때려치고 다시 전공을 할까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많습니다. 제가 전기공학 출신입니다. “때려치우고 나가서 무슨 전기방을 차려서 형광등이나 고치고 있을까요?”

말도 안되는 불평을 늘어놓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일 때는 말하자면 무슨 공부를 더 하고 싶을 때 또는 무슨 일을 잘해서 그 길이 잘될 것 같을 때는 오히려 그 길이 막힌다든가 하는 좌절과 실망을 여러 번 당하곤 했습니다.

그 일은 오늘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계획하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더 높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언제나 더 깊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이 제시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원해서 아굴라를 만나지 않습니다. 그가 준비된 사람들에게 영접을 받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면 바울은 아마 아굴라를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같이 일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여기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같이 의지할 곳 없는 곳에서 함께 만난 떨거지 형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굴라가 얼마나 큰 일을 장차 해내느냐 하면 사도행전 18:24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행 18:24-26)

그러니까 이 아굴라가 아볼로를 스카웃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아보로는 그 이후에 이 바우의 사역에 있어서 오른팔 격이 됩니다. 그는 앞에 있는 바와 같이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해서 유력한 지원병이 됩니다. 그리고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합니다마는 바울이 죽은 이후에도 아볼로는 훨씬 더 오래 살아서 아볼로가 히브리서를 쓰지 않았느냐라고 추측하는 학자가 상당수 있습니다. 사실 바울에게는 그가 의도했던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만난 자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한 인도하심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16장에 가시면 아굴라는 이렇게까지 대접을 받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3,4)

아굴라가 어디까지 갔습니까? 이방인의 모든 교회가 감사하는 지위까지 갑니다. 말하자면 바울이 아굴라의 도움을 받았다는 뜻만이 아니라 이 이방인의 모든 교회가 감사할 위치에 가는 아굴라를 바울이 그의 전도사역을 그의 계획대로 추진하였고 영접받으면서 진행되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 내 계획과 내 뜻과 내 생각대로만 갔더라면 얻지 못했을 행복들을 그렇지 않은 쪽으로 밀어붙여졌기 때문에 훨씬 많이 체험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 믿는 것 자체가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처음부터 목표로 한 사람은 100% 없습니다. 언제 믿게 됐습니까? 좌절과 실망을 통해서 믿습니다. 그러면 그 좌절과 실망이 없었더라면 여러분은 얼마나 손해를 볼 뻔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닥치게 하는 고통과 좌절들을 우리의 시선으로 볼 때 불만이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우리가 믿는다면 또한 그의 능력과 은혜와 선하심과 지혜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조금 더 기다려 볼 필요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6장에 가시면 이렇게까지 설명이 됩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 16:19).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쪽 고린도교회를 아굴라로부터 출발을 시키신 셈입니다. 몇번이고 강조드리는 바와 같이 이것은 바울의 계획과 의도에 없었던 일이고 그로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이렇게 하시는가 싶은 회의와 절망에 찬 과정이었는데 결과는 바울이, 아니, 어떤 능력있는 자가 생각을 해도 생각할 수 없었던 멋지고 풍성하고 높은 결과였던 것을 우리가 목도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 하시는 방법에 대해서 배워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을 즐겨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사뭇 다릅니다. 이사야 55장에서도 말하는 바와 같이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고 합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다르다고 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로마서 11:11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오히려 이방인들에게는 유익한 것이 됐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롬 11:11,12)

자, 이 논리를 잘 보셔야 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에게 도움이 됐다 그럽니다. 말하자면 적극적으로 얘기해서 성경은 이 실패, 이 가난함을 굉장히 많이 강조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을 보시면 예수님 자신을 이런 논리로 설명하는 것을 만납니다.

고린도후서 8:9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뭐가 부족하시거나 남의 도움을 받으셔야 될 분이 아닙니다. 그는 창조주시요, 모든 존재하는 것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몸으로 우리가 처한 이 처참한 자리에 찾아 오셨습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도심은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사도 바울의 고린도에서의 모습은 그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가 자신을 위해서 그 어려움을 당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에 처해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유익을 나누기 위하여 그는 부요한 자로되 가난 자리에 보냄을 받습니다. 그래서 여기 오늘 우리가 본 사도행전에서는 그것을 바울이 적극적으로 배웠다는 증거는 없습니다마는 다른 데서는 이것을 배운 것이 이제 드러납니다. 고린도전서 9장 말씀을 봅니다. 나중에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그가 예전에 이 고린도에 왔던 사건을 이제 이런 성경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9:19-22)

자, 여기서 그는 약한 것에 대하여 적극적인 자세를 갖게 됩니다. 이 고린도에 처음 왔을 때에는 그것을 그가 깨달은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되짚어 고린도교회가 설립되고 거기에 편지를 보낼 때쯤에는 그가 예전에 겪었던 것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사용하셨는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 어떤 것인가를 깨우쳐 이런 해석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는 이제 적극적으로 약해지며 적극적으로 가난한 방법을 즐겨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만 가난하고 약한 자를 찾아가며 모든 이에게, 모든 죄악의 억압 속에 있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이 전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제 우리가 묶어 보십시다. 로마서 5장으로 가셔서 이것이 구체적으로 오늘 우리의 신앙적인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을 한번 연결하려고 합니다. 로마서 5:8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8-10)

이 논리를 잘 보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부요한 당신의 자리를 비우시고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의 가난이 우리를 부요케 한 것이라면 그의 부요함은 우리에게 얼마나 더 큰 부요가 되겠습니까? 어떤 부자가 쓰다 버린 물건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버리지 않은 물건 중에서 준 것이면 얼마나 더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내용의 핵심되는 원리입니다. 이것은 앞에 보았던 로마서 11:11 이하의 말씀에도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이방인에게 유익이었다면 이스라엘의 충만은 이방인에게 얼마나 더 큰 도움이 되겠느냐? 이런 원리를 아십니까?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고린도전서 4장으로 가 보십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고전4:6-8)

지금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있는 사람들의 왕노릇하는 문제를 꾸짖고 있습니다. 왜 꾸짖을까요? ‘너희의 왕노릇이 교만으로 갔기 때문이다’라고 꾸짖습니다. 왕노릇 한 것이 왜 교만으로 갔을까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왕노릇하게 된 이유는 우리가 너희에게 전해준 것 때문에 이렇게 된 것 아니냐. 고린도 교인들이 교인이 된 이유가 뭡니까? 사도 바울이 없었으면 저들은 복음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는 그 영광된 약속과 장래의 약속들로 말미암는 이 왕노릇하는 것들을 저들이 알지 못했을 겁니다. 바울의 얘기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느냐. 다 남이 전해줘서 받은 것 아니냐. 너희가 만든 것이 아니지 않느냐. 너희가 우리가 가서 전해준 것으로 신자가 되었고 지금 너희가 알고 있는 것을 얻었다. 너희가 그것을 은혜로 얻었다. 너희가 가난할 때였다. 너희는 그것을 구하지도 않았고 몰랐었다. 그런데 우리 때문에 얻었다. 그러면 이제 아는 자가 되어서는 몰랐을 때보다 더 나아야 될 것 아니냐?” 논리가 맞지 않습니까? “너희가 옛말에는 하나님도 모르고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내세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우리로 말미암아 복음을 너희가 믿고 주를 믿고 하나님을 알게 됐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약속 속에 참여하게 됐다. 그래서 이제 하는 것이 너희들 자랑과 교만이냐? 나는 알고 너희는 모른다라고 얘기하느냐? 너희가 몰랐을 때 이것을 은혜로 얻은 것처럼 그러나 이제는 아는 자 되었으니 옛날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남들에게 유익하며 내 이 복음이 은혜로 주어지고 그것을 얻은 자에게 하나님이 그것을 유익하게 나누라고 하는 명령이 더 깊이 들어간 자로서 하나님이 그것을 유익하게 나누라고 하는 명령이 더 깊이 들어간 자로서 왕노릇 해야 될 것 아니냐?” 아직 무슨 말인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요즈음 신자들을 보면 꼭 이 사람들 같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 신앙을 가지고 지금 이렇게 주일날 딴 것 안하시고 교회 나와서 앉아 있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실패하셨을 때, 좌절하셨을 때, 못 먹고 못 살때 얻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신앙에 대해서도 아시며 그리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다른 모든 면에서 옛날보다 많이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아 주시겠습니까? 예전에는 주를 향한 사랑이 있어도 나누어 줄 것이 없었습니다. 더 열심히 주를 믿고 싶어도 성경을 더 깊이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많은 것을 갖고 계십니다. 성경도 더 많이 알고 도움이 되는 책도 더 많이 보시며 더 많은 물질과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여러 가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보다 훨씬 못해졌습니다. 어떻게 못해졌냐 하면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를 기르는 것처럼 못해졌습니다.

저희가 클 때는 물론 부모님이 잘해 주고 싶어도 여유가 없었습니다. 공부를 잘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을 만큼 각박했습니다. 우리는 죽기 살기로 공부를 했고 그리고 뭘 먹는다는 것은 그때는 세끼 밥만 먹으면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기억나십니까?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못 산다.” 그렇게 키우십니까? 안 키웁니다. 여러분은 자녀와 씨름하기 싫어서 돈으로 때우기 시작을 했습니다. 자녀하고 씨름하기 싫은 겁니다. 그 불평을 돈으로 막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애들을 다 버리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자녀교육에 대하여 얘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바로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자녀교육에서 그렇게 나타난 것이 결국 여러분의 여러분 된 모습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를 들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은 모든 신앙을 때우는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무지할 때 받았던 은혜들이 신앙적으로 부요해지고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으로 그것이 힘있게 밖으로 나타나는 것에 사용되지 않고 자신의 유희만을 즐기고 그리고 나머지 필요한 것은 때우기 시작을 했습니다. 돈으로 제일 많이 때웁니다. 여러분 자식들도 돈으로 입 막고 신앙 생활도 전부 돈으로 막아 버립니다. 제일 치사한 방법입니다. 한국교회는 또 유난히도 헌금 하나는 잘내게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된 것 같은 너무나 떳떳한 얼굴들을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은 남들을 판단하고 지적 교만과 나태속에서 스스로 썩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사실은 더 많은 좌절을 주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것에 대해서 분발하지 않게 됩니다. 저는 이 한국 경제가 망하기를 원합니다. 훨씬 낫습니다. 지금이 훨씬 못합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싫으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보다 배에 기름끼는 것이 좋도록 이미 훈련되어 버렸습니다. 아무도 영적인 사람으로 살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교회가 자꾸 적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얘기해서 죄송합니다만 사실은 약입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돌이키셔야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더 열심히 살아야 됩니다. 신자답게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적극적인 눈을 갖고 보셔야 됩니다. 내가 당한 약함, 내가 당한 좌절로 말미암아 나에게 부딪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내가 신자 되기로 하셔야 됩니다. 묵묵히 긴 싸움을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과 내 존재를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도록 준비된 자세로 있으셔야 됩니다. 이것이 너무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 사기꾼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짜고 저는 여러분에게 정신적인 마취주사를 놓아주는 사람에 불과해질 수 있고 여러분이 내는 헌금으로 먹고 사는 사기꾼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얼마든지 그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도록 서로 노력해야 됩니다. 제가 이런 소리를 하는 한 희망이 있는 겁니다. 어느날 제가 여러분보고 참 잘하십니다라고 하는 날이 있으면 서로 망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 인생의 좌절이 뭐가 있습니까? 보십시오. 그것을 뭘로 풀고 있습니까? 다 돈으로 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안됩니다. 기도로 푸십시오. 그 안에 주님을 동원하십시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의 신자 된 표가 우러나올 계기로 삼으십시오. 제발 돈으로는 막지 마십시오. 집에 가시거든 돈, 주식, 통장 다 모아 불사르십시오. 불사르기 미안하면 교회에 갖다 다 내십시오. 제가 안 갖고 다 다른 데 줄께요. 진짜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다 주겠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이 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신앙이 망하고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이 타격을 받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분명히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라고. 하루 아침에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어떻게 설교 한번 듣고 사람이 획까닥 변합니까? 딱지치기를 하는 겁니까? 그러나 이 싸움을 시작하셔야 됩니다.

한 번 두 번 시도해서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평생을 두고 이를 갈고 이 싸움을 하셔야 됩니다.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벽에 써 붙이십시오. 손바닥에 써 붙이십시오. 화장실에, 냉장고에, 어디에나 써붙이고 잊지 않고 이 싸움을 해야됩니다. 옛날 영어 단어도 그렇게 외웠습니다. 하물며 신앙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사랑하시며 복된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신자다워지십시오. 그것은 영원한 복입니다. 지금 잠시 사는 세상에서의 이 못된 것들에 여러분이 지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당하는 좌절과 약함을 기뻐하시고 그 속에서 주를 동원하시고 주님을 찾아야 할 일들을 확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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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750 마태복음 왜 선교해야 하나? 마28:19~20  조용기 목사  2009-07-11 2123
1749 에배소서 영의 세계 3가지 법칙 엡1:10  이천수 목사  2009-07-10 3270
1748 에배소서 하늘과 땅의 원리 엡1:22  이천수 목사  2009-07-10 2071
1747 고린도전 사랑의 나라 고전13:8~10  이천수 목사  2009-07-08 1774
1746 디모데후 돈보다는 사람을 사랑하자! 딤후3:2  이천수 목사  2009-07-08 2031
1745 누가복음 산자의 하나님' [2] 눅20:34-38  이천수 목사  2009-07-08 2605
1744 요한계시 부활의 능력 계3:21  이천수 목사  2009-07-08 2740
1743 마태복음 뜻이 하늘에서 마6:10  이천수 목사  2009-07-07 2636
1742 에배소서 '우리 모두 한 지체다' 엡5:30  이천수 목사  2009-07-07 2292
1741 마태복음 사망의 포위망을 뚫자 마7:1-10  이천수 목사  2009-07-06 1993
1740 고린도후 삼층천의 축복 고후12:2-5  이천수 목사  2009-07-06 3406
1739 마태복음 사랑이 팔자다 마16:16-18  이천수 목사  2009-07-06 2116
1738 창세기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 창4:1-15  이천수 목사  2009-07-06 2722
1737 야고보서 나를 벗어나자 약1:12  이천수목사  2009-07-06 1952
1736 요한복음 물과 영생수 요4:9-14  강종수 목사  2009-07-06 2100
1735 창세기 돼지 저금통 file 창38:1-19  태승철 목사  2009-07-05 2812
1734 사도행전 바울의 자기 변호 행22:2-5  박영선 목사  2009-07-04 2179
1733 사도행전 기독교적 인간관 행21:37-22:1  박영선 목사  2009-07-04 2396
1732 사도행전 기독교적 역사관 행21:31-36  박영선 목사  2009-07-04 2102
1731 사도행전 흉악한 이리 행20:29-32  박영선 목사  2009-07-04 2182
1730 사도행전 교회의 결심 행20:28-32  박영선 목사  2009-07-02 2005
1729 사도행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근거 행20:6-12  박영선 목사  2009-07-02 2153
1728 사도행전 생명을 살리는 의와 사랑 행20:6-12  박영선 목사  2009-07-02 1978
1727 사도행전 유일한 기준 행19:23-32  박영선 목사  2009-07-02 1936
1726 사도행전 그늘 속의 아볼로 행18:24-28  박영선 목사  2009-07-02 3675
1725 사도행전 출발과 끝 행18:9-11  박영선 목사  2009-07-02 1614
1724 사도행전 의지적 예정 행18:5-11  박영선 목사  2009-07-02 1759
» 사도행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행18:1-4  박영선 목사  2009-07-02 3042
1722 사도행전 철학과 과학 행17:22-31  박영선 목사  2009-07-02 1566
1721 사도행전 코카콜라 행17:16-21  박영선 목사  2009-07-02 2339
1720 사도행전 성경을 상고함 행17:11-14  박영선 목사  2009-07-02 2434
1719 사도행전 주 예수를 믿으라 행16:26-34  박영선 목사  2009-07-02 3445
1718 사도행전 신앙의 구걸 행16:26-34  박영선 목사  2009-07-02 1703
1717 사도행전 기도와 찬송 행16:22-32  박영선 목사  2009-07-02 2202
1716 사도행전 점치는 여인 행16:16-23  박영선 목사  2009-07-01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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