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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1936 추천 수 0 2009.07.02 15: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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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9:23-32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102 / 1990.04.08 
“그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자액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라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어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 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사도행전 19 : 23-32

사도행전 19 : 23에서 끝절까지는 은장색 데메드리오라 하는 사람의 사도 바울에 대한 일종의 행패와 그를 반대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르테미스라는 여신을 섬기는 그 신전에 은감실을 만드는 은장색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감실이라는 것은 벽 같은데에 조금 오목하게 만들어서 화분 같은 것을 놓을 수 있도록 하는 작업입니다. 조그만 상자같이 혹은 화분같이 만들어서 그 안에 무슨 신성한 것을 보관하기도 해서 하나의 자기의 신앙을 표현하기도 하고 혹은 어떤 봉헌하는 물건을 넣어두기도 하게끔 만든 것이 감실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현실적으로도 우리가 몇십 번씩 당하는 이 세상의 행패고 복음과 진리에 대한 자연인들의 반응과 방불합니다. 말하자면 불신자의 가장 큰 특징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이 불신자들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해야 됩니다. 우린는 어리석지 않습니다. 우리는 참된 것을 알고 이 사람들같이 무지하지 않습니다. 진리와 생명을 압니다. 그래서 신자란 불신자들이 무지한 것이 공통점인 것같이 마땅히 영원한 목표와 자기가 추구하는 데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확신이라고 해서 어떤 감동과 느낌으로만 요구하지 마시고 알고 있는 것, 진리에 대한 지식이라는 차원에서 여러분이 분며아게 자신을 점검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왜 필요하냐 하면 바로 이런 것이 신앙의 중요한 핵심과 근거로 등장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세상의 유혹과 위협 아래 금방 타협하게 됩니다. 대체 우리가 뭐가 다른가를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위한 지금 걸어가는 인생의 고달픔에 대해서 진저리를 치게 되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잠시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이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당연히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는 담대함과 이해가 없이 왜 예수를 믿는데 고달퍼야 하는가라는, 그저 우는 소리만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내용을 근거로 해서 불신자들이 갖는 어리석음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고 우리가 혹시 거기에서 정확한 답과 분명한 처신을 하지 못하는 것이 있지 않는가 우리 스스로를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조금전에도 말씀드린 것같이 불신자의 공통된 특징은 무지합입니다.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 : 17입니다. 사도 바울이 묘사하는 불신자들의 삶의 모습을 보기로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 4 : 17-20)

허망하다 그럽니다. 허망하다는 것과 헛되다는 것과 망령되다는 것이 복합된 단어입니다. 헛되다는 것은 쉽게 얘기해서 표적 없이 쏘는 활 같은 것입니다. 헛되다는 것은 쉽게 얘기해서 표적 없이 쏘는 활 같은 것입니다. 표적 없이 쏘는 활, 얼마나 헛됩니까? 목표가 없이 총을 쏘고 목표가 없이 화살을 날린다는 것은 헛됩니다. 아무 이유없이 목적없이 하는 것을 조금 더 확대하면 이렇게 됩니다. 목적 없는 인생이란 것은 얼마나 헛된 겁니까? 세상 사람들의 삶은 그저 살아 있으니까 억지로 사는 겁니다. 오늘도 내가 죽지 않았으니까 사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서라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서라는 것은 기껏 만들면 오늘 이 순간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헛되지 않습니다.

거기다 저들은 망령됩니다. 망령되다는 것은 예를 들면 태양을 활로 쏜다든가 태양을 총으로 쏘아서 떨어뜨리려는 것 같은 행동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욕심을 내는 것, 망령된 겁니다. 하나님이 있으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주인인 줄 알고 삽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것같이 무지하고 그 마음이 굳어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자신의 고집대로 삽니다. 세상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헛된 삶을 우리는 매우 탐을 내는 묘한 입장에 있습니다. 신자이면서도 세상이 얼마나 헛된가 하는 것을 우리가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이런 것이 있습니다. TV를 잠깐만 보십시오. 한 10분만 봐도 TV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헛된 소리만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봅니다. 요새 화장품 선전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소피 마르소입니다. 이 여자가 제일 많이 등장을 하는데는 어떤 속임이 있냐 하면 그 화장품을 바르면 그렇게 된다고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광고하는 화장품을 바르면 그 모델같이 됩니까? 그 사람은 그 화장품 안 바릅니다. 소피 마르소는 광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보면 그것을 그렇게 그렇게 될 것같은 충동을 느낍니다.

요새 라면 광고가 많습니다. 그 라면을 먹으면 남편이 그렇게 가정적이 됩니까? 요새 또 자동차 광고가 많습니다. 그 자동차를 타면 그렇게 가정이 행복해지는 겁니까? 아닙니다. 차 사서 싸운 부부를 저에게 이름을 대보라 그러면 전화번호부보다 더 두껍게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광고를 보면서 속습니다.

내가 불행한 이유는 저 화장품을 바르지 않은 탓이요, 저 라면을 먹지 않지 않은 탓이ㅛ, 저 차를 타고 있지 않은 탓 같습니다. 헛됩니다. 그 하장품 바르면 인신매매단의 표적이 되고 그 라면 먹으면 말라 죽고 그 차 타면 사고 납니다. 좋은 차 타고 사고 나면 아파도 덜 아픔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 같은 오해 속에 서로가 서로를 속이면서 살고 있습니다. 바로 에베소서 4장에서는 이렇게 사는 인생과 비교해서 우리가 어떻게 다르냐 하는 것을 그 앞에 있는 13절부터 이렇게 먼저 묘사를 해 놨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 :13-15)

우리는 오늘을 살지 않습니다. 오늘을 삽니다만 오늘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영원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참된 것이라 그럽니다. 참되다는 것은 헛되다는 것의 반대 표현입니다. 이세상을 목표로 해서 헛된 것을 구하는 것과 얼마나 차잉가 나는 것입니까

우리는 사도행전 19장의 본문에서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자기의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영원한 복락을 약속하는 복음과 자기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은혜를 베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은헤를 베푼 하나님의 사랑을 발로 찬 장면을 목도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그렇게 삽니다. 그리고 신자들마저도 거기에 넋을 잃고 있다면 이것은 커다란 사기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사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자기 최면에 걸려 이사기에 빠지는 수가 자주 있습니다. 지금 읽은 에베소서 4장의 이 말씀의 뒷부분으로 가서 보시면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엣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 : 21-24)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 썩어져 가는 것, 헛되다는 것입니다. 참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리 쌓고 모아도 영원하지도 않고 나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고 참된 것이 아닌 거짓된 것을 일컬음입니다.

신자란 그래서 예수를 믿고 영원한 목표가 있고 그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이외에 어떤 오해와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손해 볼 것이 없는 억울할 것이 없는 자리에 와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확인되지 않으면 신자의 기쁨은 참 어렵습니다. 방언을 해야 기쁘고 자식이 학교에 붙어야 기쁘고 병이 꼭 나아야 기쁘고 병이 꼭 나아야 기쁜 식으로 신앙을 요구한다면 신자가 기쁨을 갖기는 참 어렵습니다. 가장 중요한 기쁨을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되고 그리고 그 소중한 책임들을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으로 가 보십시오. 여기서는 이 헛된 일에 대하여 지금 여러분께 소개한 것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묘사가 나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 : 2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라. 이것은 믿는 사람이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구하고 성령으로 사는 자들은 성령으로 행해야 되고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투기하지 말아야 됩니다. 뒤집으면 믿지 않는 자들은 바로 이렇게 삽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까요? 인기 있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 부분이 특별히 두드러집니다.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들, 연예인들, 가수, 탤런트, 배우, 패션 모델 패션 디자이너 이런 사람들은 특별히 이 일에 훨씬 두드러진 특징들을 보이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저들에게 있어서는 특별히 질투와 시기심이 많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큰 정신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정신적으로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가장 간단한 답이 있습니다. 저들이 그들의 삶의 기반을 사람들에게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기반을 둔 것이 왜 저들을 투기하게 하고 불않게 하는 줄 아십니까? 사람은 변덕스럽게 때문입니다. 책을 많이 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고백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좋은 책이다라고 쓴 것은 생각같이 안 팔리고 끄적끄적 해서 내 놓은 책은 의외로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알 수가 없답니다. 옷도 이것은 좋은 옷이다. 그래서 만든 옷은 잘 안 팔리고 어느날 재단을 하다 잘못 해서 싹뚝 잘라서 만든 것은 잘 팔린다고 합니다. 옷이 안 팔려서 화딱지가 나서 동그라미를 더 쳤더니 다음날 다 팔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이란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신뢰를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연예인들의 광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술적 표현에 나타나면 좋지암 그렇지 않은 일반생활에서 그 광기가 나타날 때는 여러 부작용을 낳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왜 그 광기가 있습니까? 믿지 못할 세계에 몸 담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마는 우리나라의 최고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을 볼 때마다 저는 혀를 안 찰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헤어스타일이나 입고 있는 옷이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옷은 왜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사서 입습니까?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이나 영화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어떤 파티가 있어서 입고 나온 옷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게 도대체 옷을 제대로 입은 겁니까? 입다가 어디 놓치고 온 겁니까? 신데렐라가 열두시 지나자 갑자기 입었던 옷이 변한 것 같습니다. 뜯지 않아야 될 곳을 뜯고 가리지 않아야 될 곳을 가리고 도무지 색깔이 서로가 맞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입고 그 자리에 나올 수 없는데 그렇게 입어도 그게 통용되는 이유는 끼리끼리 모였기 때문입니다. 같이 미친 사람끼리 모였으니까 서로 누가 누구를 탓할게 없습니다. 믿지 못할 사람들을 대사으로 그들의 직업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변덕이라는 것은 본인이 본인을 파악할 수 없는데 남이야 어떻게 본인을 파악하겠습니까? 방법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저들은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합니다. 그 불안을 마약을 상습복용 하기도 하고 누구를 질투하고 매장시키는 것으로 그 불안을 해소하기도 하고 턱도 없는 짓을 해서 저들의 불안함을 감춥니다. 느닷없는 공포에 시달리기도 하고 느닷없는 우월감에 광기가 섞인 미친 짓을 하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절대적인 목표도 절대적인 기준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 : 16 이하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재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 : 16-21 상)

이런 짓들을 합니다. 절대 진리와 절대 생명이 없으면, 절대 목표가 없으면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합니다. 저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술 취하고 방탕하며 원수를 맺고 분쟁과 시기와 투기와 싸움 잘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극도의 공포와 불안, 그래서 나타나는 광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 본문에서 데메드리오가 그렇고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의 삶의 형태가 그렇습니다. 자신의 삶의 불안감을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게 되고 그래서 더욱 더 악순환의 연장으로 자신을 괴롭히기도 하고 옆의 사람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로마서 6장으로 가시면 이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성경의 놀ㄹ운 묘사와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롬 6 : 17-21)

21절을 기억하십시오. 그때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조금전에 갈라디아서 5 : 16이하에서도 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육체를 쫓는 자들을 나열할 때 그때 그 묘사도 재미있었습니다. 육체의 일이라 그럽니다. 육체의 여래라 그러지 않습니다. 육체의일은 현저하니 음행과 술수와 당 짓는 것과 분냄과 이렇게 나갑니다. 오직 그것과 반대될 때 오직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것은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자비와 이런 것들이 육체를 쫓는 것과 분명히 구별됩니다.

육체의 열매가 아니고 성령의 열매입니다. 육체는 일이라고만 그럽니다. 일만 했지 열매가 없습니다. 그것은 헛된 것이고 썩어질 것들입니다. 남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위하여 오늘 우리가 얼마나 쉽게 우리의 삶을 포기합니까? 신앙의 삶을 포기하고 저들의 육체를 쫓는 환락과 불안과 공포를 호기심을 갖고 보고 그것을 재미있게 탐내지 않습니까? 우리가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고 그 신앙고백을 갖고 신자라는 이름으로 출발을 했다면 우리가 마땅히 지금 거니는바 이 인생을 사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일들이 영원한 영광의중한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복된 열매를 만드는 과정이기에 지금 절제가 있어야 되고 지금 근신해야 되고 지금 노력할 수밖에 없으며 지금 땀 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당연히 인정해야 됩니다.

지금도 재미있고 그때 가서도 좋은 것 받고 그런 법칙은 세상에도 없습니다. 놀 때 놀고 공부할 때도 놀고 시험 봐서 좋은 성적 얻는 방법은 옆자리에 시험 공부 잘하는 애가 앉고 내가 시력이좋고 그것을 막는 선생님이 없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실력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1장으로 가서 우리의 결론을 학인하십시다. 베드로전서 1 : 3부터 봅니다. “잔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 : 3, 4)

잘 보십시오. 썪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학지 않는 기업이 헛된 것을 위하여, 갈라디아서 5 : 25, 26에서 본 것과 같이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튀하지 마십시오. 큰 차 산 것, 큰 집에 사는 것으로 격동하고 투기하지도 마십시오. 비싼 귀걸이, 목걸이 한 것, 그 개목걸이 때문에 세퍼트가 되고 싶어하지 마십시오. 그것으로 격동을 하지도 말고 격동을 받지도 마십시오. 금욕주의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치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도 마시고 그것을 못한 사람이 그것으로 인해서 침 흘리지도 마십시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1 : 13로 가십시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리라”(벧전 1 : 13-16). 이것이 신자의 마땅한 본분이요, 삶의 자세요, 세상의 유혹과 위협 앞에서 우리를 확인하는 유일한 기준이어야 됩니다. 세상의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마십시오. 저들의 허망한 유혹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우리는 거룩한 자로 부르심을 받았고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더럽지 않은 거룩한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 위하여 지금 훈련받고 준비되고 있는 귀중한 사람들인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더욱 열심히 세월을 아끼며 우리의 신앙을 열심히 준비해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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