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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저금통

창세기 태승철 목사............... 조회 수 2812 추천 수 0 2009.07.05 00:3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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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38:1-19 
설교자 : 태승철 목사 
참고 : http://blog.daum.net/lifestyle01/7625825 

  돼지저금통 안에 우리가 동전만 집어넣지는 않습니다. 동전을 집어넣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때로는 천 원짜리나 만 원짜리 지폐도 집어넣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금년이 황금의 돼지띠라고 해서 돼지 저금통에 금칠을 해가지고 연초에 아주 유행했어요. 저희 집에도 어느 길 잃은 황금돼지저금통 한 마리가 선물로 들어오게 되었어요. 아이 방에 저금통을 놓았는데 만 원짜리 돈을 집어넣을 때는 항상 접어서 집어넣어야 됩니다. 접지 않으면 들어가지 않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시지요. 돼지저금통 안에 접혀진 만 원짜리가 한 100개가 들어있다, 50개가 들어있다고 생각해보면 비록 접어져있지만 그 돈의 가치는 그대로 그 안에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서 돼지저금통의 비유를 언급하며 함께 생각하고 싶은 것이 바로 내가 돼지저금통이 아니냐? 저처럼 뚱뚱해서 돼지라는 별명을 어렸을 때 갖기도 했지만 뚱뚱해서 돼지저금통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돈이 접혀지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고 접혀져있지만 돈의 가치가 그대로 다 있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좀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받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왜 돼지저금통에 들어간 돈 이야기를 하느냐?

인간의 죄라고 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접혀져있고 내 안에 그대로 머물러서 남아있지만 그 가치는 그대로 만원이 유지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비록 돈이 펴지듯이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어도, 악한 행동을 드러내서 하지는 않았어도, 내 안에 접혀져있는 죄악의 근성은 그 값어치가 펼쳐졌을 때나 접혀져서 들어있을 때나 똑같다는 이야깁니다.

돼지저금통을 깨고 꺼내서 돈을 쫙 펴가지고 물건을 살 때만이 만 원짜리가 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안에 접혀져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그러니까 내 인격이 뭐냐? 돼지저금통과 같이 내 죄악이 접혀져가지고 아직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내안에 가득히 담겨있는 그런 돼지저금통과 같은 인격이라는 겁니다.

자, 이점을 이야기해 놓고 오늘 이야기를 한번 살펴봅니다. 요셉의 이야기,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렸다는 언급이 나온 뒤에 곧바로 네 번째 아들 유다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유다 이야기가 38장에서 끝나자마자 그 다음에 곧바로 또 39장에 요셉이야기를 또 시작합니다. 왜 성경은 이렇게 뜬금없는 삽입구절들을 많이 집어넣어요. 왜 그럴까요?

지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시대에 이어서 열두 아들의 시대가 이제 전개되는데 열두 아들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어서 전개시켜가지만 사실을 그 내용이 유다라는 겁니다. 유다가 이 모든 역사의 알맹이라는 겁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장황하게 진행되겠습니다. 그리고 요셉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살았던 그 믿음과 신앙의 가치는 영원히 고귀한 것입니다, 또 영원히 표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사적인 의미에서 전체 역사를 보고 또 이 구약의 모든 역사가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향해가고 있는 구원의 역사라고 볼 때 이 요셉이야기조차도 유다로 이어지는 혈통과 역사이야기의 한 주변의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에요. 그 알맹이를 싸고 있는 보호막과 같은 껍데기와 같은 위치에 놓여져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열두 아들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고 유다이야기가 불쑥 갑자기 요셉이야기 속에 삽입되어 나타나는 것은 열두 아들로 이루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진행되겠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부가 바로 사실은 예수님의 혈통이 시작되는 유다이야기에요.

유다가 알맹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다음에 요셉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유다로 이어져나간다는 것이에요. 예수님을 정점으로 볼 때 예수님께로 도달하는 예수님이 목표지점인 그 역사의 줄거리를 지금 제대로 찾아주고 있는 그런 과정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러분이 읽어서 아시겠지만 같이 아침에 읽기가 정말 낯 뜨거운 것 아닙니까? 유다가 아이를 낳는데 세 아들을 낳습니다. 근데 첫째아들 엘이 죽습니다.

부인을 얻었는데 유다가 며느리를 본 거지요? 다말이라는 며느리를 봤는데 자식이 없이 죽습니다. 그러니까 그 유다의 장손 엘의 가문이 끊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계대결혼이라고 하는데 그 자식 없이 죽은 형을 대신해서 동생이 형수를 데리고 살아야 됩니다.

그게 그 당시의 풍습이에요. 그래서 유다가문의 장손의 혈통이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가게끔 하는 결혼 풍습이 있었는데 그 엘의 동생 오난이 그만 동침을 하면서 임신을 피해버립니다. 임신의 가능성을 제거해버립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괘씸해서 둘째아들을 죽입니다. 이제 아들이 하나 남았는데 아직 어립니다. 그러니까 유다가 다말 며느리에게 친정집에 가서 있어라, 셋째아들 셀이 아직 어리니까 셀이 다 큰 다음에 너하고 결혼하게 해서 아이를 낳게 해서 대를 이어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 있어라.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말만 그런 거지 사실은 다말을 떼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왜 그러잖아요?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살다가 이 유다가 보기에는 다말이라는 여자가 너무 세어가지고 자기 아들을 다 잡아먹는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자기 집안에서 떼어냈습니다. 그리고 셀이 컸는데도 약속을 이행하지 않습니다. 근데 마침 다말이 그걸 마음에 두고 있는데 시아버지가 자기가 사는 동네의 양떼를 보기 위해서 올라온다는 얘기를 듣고 창녀복장을 하고 얼굴을 가립니다. 그래서 그 길목에 앉아있다고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잠자리를 같이하고 아기를 갖게 된다고 하는데 까지 우리가 읽은 겁니다. 이것 참 이렇게 황당할 수가 있어요?

아니 아무리 악하고 못되고 부패하고 타락해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요? 나중에 보면 유다가 며느리가 두 아들이 다 죽고 혼자 남아있는 상태에서 아기를 가졌다고 해서 끌어내어다가 돌로 쳐 불로 태워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때도 도덕적 원칙이 있었던 것이에요. 근데 시아버지가 이 유다가 창녀로 알고 창녀 집에 갔다는 것도 용납하기 쉽지가 않고, 뭐 우리 중에 혹시 이보다 더한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 있겠습니다만 보편적으로 볼 때 이거 용납하기가 쉽지 않지요? 더군다나 지금 유다가 어떠냐 하면 예수님이 탄생할 때까지의 족보를 이어가는 시작점을 얘기해 주고 있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그 족보의 시작이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만 열두 아들 중에 알맹이가 된다는 유다족속에서 예수님의 가계를 이어가기 위한 고리가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면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동침을 해서 난 아들로 또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베레스가 나오면서.

이게 납득이 가요? 이걸 또 왜 성경은 기록하는 것이며, 그냥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동침했다는 얘기를 안 써도 되잖아요? 그냥 유다와 다말이 아기를 낳았다고 해도 될 텐데 왜 그대로 다 드러내고 있을까요? 저는 중국의 현종이 양귀비에게 빠져서 정사를 뒤로하고 나라를 망쳐먹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그 양귀비가 현종의 며느리라는 얘기는 나중에 알았거든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다말이 유다의 며느리라는 걸 얘기 안 해도 되잖아요? 이걸 굳이 왜 얘기할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여기서 성경은 아주 중요한 얘기를 우리에게 해 주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돼지저금통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족보라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해서 육체를 입으시는데 그 육체를 입으시는 예수님을 담는 그릇이 이 세상의 족보입니다.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이 오시는 걸 담는 그릇이 족보인데 그 족보가 유다와 다말이 난 아기라고 하는 고리가 하나 생깁니다. 뿐만 아닙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족보를 보면 기생 라합, 기생이라는 것은 창녀입니다. 며느리 다말은 창녀 짓을 해서 시아버지와 동침해서 아기를 낳고 기생 라합은 아예 창녀에요. 창녀 일을 하다가 이방족속으로 있다가 예수님의 족보에 끼어들어 와서 아기를 낳게 되고, 또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습니다. 자기 아내에게서 낳아야지 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낳은 것이 예수님의 족보에 끼어드느냐 말입니다. 이게 뭘 말하는 것이겠어요?

이런 타락상과 부패함이.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자라서 성경을 제쳐놓더라도 성경이 말하는 십계명이나 예수님의 교훈은 제쳐놓더라도 유교적 문화권 안에서 유교적 윤리를 배운 사람으로서 정말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이런 이야기들이 더군다나 다른 분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나는 그 족보에 끼어드는 이유가 뭡니까? 한 가지 집고 넘어갑시다.

물론 이러한 타락한 본성이, 이런 타락한 피가 예수님의 몸이나 예수님의 마음이나 예수님의 영혼에 끼어들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유전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사실을 예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동정녀의 뱃속에 잉태되었기 때문에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으로 그런 죄악 된 본성이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일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이렇게 추악한 일이 벌어졌다는 얘기에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의 족보 전체를 하나의 인격으로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이 세상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듯이 내 인격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족보가 이렇게 추악한 도덕적 타락성이 보이는 그런 혈통 안으로 담겨졌다고 하는 뜻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담고 싶고 예수님을 믿고 싶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이렇게 추악하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담겨진다고 하는 이야깁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하세요.

‘병든 자에게 라야 의원이 필요하다. 건강한 사람에게 무슨 의원이 필요하겠느냐?’ 너무나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만 내가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고 아직도 그런대로 괜찮고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더 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진정으로 예수님은 우리 속으로 담겨지실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이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또 다윗이 남의 아내를 빼앗고, 창녀 라합이 또 결탁을 하게 되고 이런 모든 과정들. 내 안에도 창녀적 라합의 근성이 들어있고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합방을 하는 그런 부패성이 내 안에도 들어있고, 다윗이 남의 아내 밧세바를 뺏어서 임신을 해서 솔로몬을 낳게 되는 것과 같은 도덕적 타락의 범죄가 펼쳐지지는 않았어도 돼지저금통 안에 있는 돈이 접혀져있는 것처럼 내 안에 그런 죄악 된 근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예수님은 담겨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죄악을 내가 믿어야 되요.

근데 우리는 돼지저금통 안에 있는 돈이 아직은 펼쳐지지 않았습니다. 꺼내져서 펼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돼지저금통과 같은 내 인격 안에 있는 죄악의 근성이 접혀져 있다고 해서 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100만원이 접혀져 들어가 있다면 쓰지 않았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게 아니지요? 그 돼지 저금통은 100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죄악이 100원어치가 접혀져 있는데 하나도 100만원 중에서 20만원어치도 범죄로 펼쳐지지 않았다고 해도 여전히 내 안에는 100만원의 가치에 해당되는 죄악이 그대로 다 들어있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구원은 내리막길을 달리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높아지려고 하고 잘난 사람이 되려고 하고 남보다 더 의롭게 여김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그런 마음가짐에는 절대로 예수님이 담겨질 수가 없습니다. 자 오늘 요셉이야기 사이에 유다이야기가 끼어들어간 것은 이 구약의 모든 이야기가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가기 때문에 유다 이야기를 끼어 넣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약이야기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방향을 제대로 잡게 하기 위해서. 방향성을 잃어버릴 수가 있으니까. 왜 이런 요셉이야기가 이루어졌느냐? 바로 유다로부터 시작되는 이 예수님의 가문의 혈통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가문, 혈통이 뭐라고요? 예수님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에 내려오시는데 이 세상에서 받아내는 그릇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내가 예수님을 받아내는 그릇은 이런 유다로부터 시작되는 혈통이 갖고 있는 타락성, 이것이 바로 나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어지기 전까지는 예수님은 담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율법사와 대제사장들보다 창기와 세리가 먼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왜? 그들은 펼쳐진 죄악상을 보고 자기가 죄인인 것을 자타가 공인하면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세인들은 속에 감춰져있고 접혀져있는 죄악의 근성이 아직 펼쳐지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의로운 줄 알고 살았습니다. 결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예수님께서 너희도 창기와 세리와 같이, 창기와 세리가 너희와 다른 것은 창기와 세리는 속에 있는 만 원짜리가 펼쳐진 것이고 너희는 속에 있는 만 원짜리가 접혀진 대로 그대로 있다고 자꾸 지적을 하시니까 결국은 예수님을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우리가 이 유다로부터 시작되는 타락한 가문과 혈통의 모습이 바로 내 안에 지금 만 원짜리가 접혀져 있는 상태가 된 것을 절대로 믿지 못하는 한 절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한 그야말로 절대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담겨지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인 이유는 내가 죄악을 깨닫고 내가 올라가려는 마음이 아니라 내려가려는 마음을 가지고 내리막길, 그것도 바닥에 서서 나처럼 악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라야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은 복음이 되고 그 곳에서부터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천국의 삶이 그 내리막길의 끝에서부터 열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 이야기는 우리가 성경을 볼 때나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우리 마음의 방향을 정해줍니다.

위로 가는 게 아닙니다. 내려가는 겁니다. 항상 누구보다 더 내가 악하다는 사실, 누구보다 더 못됐다는 사실, 누구보다 더 모자란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망각하지 않고 깨닫기 전까지는 생수 되시는 예수님, 물 되시는 예수님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시기 때문에 그 예수님과 만나서 웅덩이처럼 함께 고여서 거할 수가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위해서 성경은 오늘 유다 이야기, 이 본래 모습그대로를 다 드러내고 있고 이 유다의 가문에 예수님이 들어오시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방향성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돼지저금통입니다. 누가 우리 믿는 사람 중에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동침을 해서 애를 낳는 집안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펼쳐지지 않았어도 우리 안에는 죄악의 근성이 접혀진 채로 유다와 다말과 다윗이 저지른 범죄와 똑같은 가치가 단지 펼쳐지지만 않았을 뿐이지 밖으로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이지 우리 안에 다 그대로 접혀져서 존재가 똑같은 죄인인 것을 오늘 말씀이 우리를 지적하고 들어오면서 복음에로 우리 마음을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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