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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과 할례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1803 추천 수 0 2009.06.20 15: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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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7:1-10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43 / 1989.01.29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후에 저희가 나와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사도행전 7 : 1- 10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본적인 생각은 저들은 이미 구원을 얻은 자들이고 저들에게는 구원에 관한 다른 문제가 필요할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은 죄를 씻는 문제가 아니라 이제 그들이 하나님 백성 된 것,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 다른 민족과 다른 것이 완성되는 일, 즉 저들에게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가 아니라 여호수아가 필요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가 선민이라는 것과 그들이 율법을 갖고 있다는 것, 이것들이 저들의 우월감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배척하는 이유가 되었고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된 사람들과 팽팽한 적대관계에 서게 된 이유가 됩니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생각을 이제 스데반 집사가 사도행전 7장에서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전체적인 개괄을 살펴본 바와 같이 스데반은 저들이 갖고 있는 자만심의 근거, 저들이 생각하고 있는 증거들을 저들이 생각하는 것과 성경이 원래 제시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저들이 선민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과 연결된 할례 문제를 가지고 저들의 틀린 생각들을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추적해서 분명하게 파헤치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어떻게 만연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창세기 17장에서 처음으로 할례에 관한 요구가 세워집니다.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창 17 : 1, 2). 그래서 처음에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바꿀 것을 요구하시고 그 다음에 9, 10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 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처음 할례에 대한 언약이 주어집니다. 여기에 있엇던 약속들, 너를 심히 번성케 하고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는 사실은 처음 아브라함을 부를 때부터 한 약속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창세기 12장에 이미 등장을 하고 그런 것이 구체화되고 더 확실하게 아브라함에게 약속되는 것은 15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이제부터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하고 시작합니다.

내가 너를 보니 슬 만하다. 너랑 나랑 합영 회사를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불러 너를 내 백성 삼고 복의 근원으로 만들겠다. 너는 내 말을 지키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부름의 모습입니다. 15장에서 그것을 확인을 했으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이루시고야 말 것을 어떻게 약속하시느냐 하면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갖다 바치라고 하고 제물을 쪼개라 하고 그 쪼갠 사이로 횃불이 지나가십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 사이를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이 언약을 깨는 자는 이렇게 몸이 둘로 쪼개지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저주의 약속을 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약속을 합니다. 이 약속을 위반하는 자는 계약금의 두배를 벌금으로 낸다. 이것을 틀리는 사람은 새끼 손가락을 자른다. 위약에 관한 저주의 약속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요구하는 부분이 아니고 하나님이 홀로 하신 약속입니다.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내가 이것을 틀린다면 내 몸이 이렇게 쪼개져도 좋다. 인간적인 표현이라지만 그런 상징으로 아브라함이 갖다 놓은 쪼갠 고기 사이를 하나님이 혼자 지나가십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이 그 언약을 지킬 만한 근거나 조건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문제에 관한 한 아브라함은 같이 합작할 내놓을 무슨 근거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실패합니다.

15장에서 그 약속을 확인받고서도 16장에서 하갈과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매우 노하십니다. 너는 왜 믿음이 없느냐 하는 지적을 받습니다. 그래서 17장에서 읽은 것같이 99세에 나타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지적하고 나옵니다.

3절에 보시면 자기가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엎드립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라고 바꾸게 하는 것도 이런 뜻입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창 17 : 5)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먼저 주는 것은 네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 그렇게 하라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해줄 테니까 이름부터 먼저 갖고 있어라입니다. 아브라함이란 열국의 아비니까 열 아들의 아비가 아니고 열 고을의 아비도 아니고 열 나라, 열국의 아비는 열 명 열[ + ]자가 아니고 나열한 열( ) 자의 무수한 나라의 아비가 될 것입니다. 아직 친자식은 하나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름으로 불리움을 받을 때마다 자기의 믿음 없었던 것과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에게 이 약속을 하시고 이루겠다고 분명하게 선언하셨는가를 늘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할례 언약을 줍니다. 할례란 요즘식으로 하면 포경수술입니다. 무엇을 상징하느냐 하면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버렸다라는 상징입니다.

이제부터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할 때 그 열국, 네 후손은 너로부터- 생물학적 차원에서의 후손, 혈육관계가 아니고-내가 모아들이고 내가 낳고 내가 보호하는 내가 선택한 사람들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낳고 그 다음 또 이삭이 낳고 낳고 낳고는 우리 쪽에서 볼 때의 얘기고 하나님 쪽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과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약속을 주셔서 그 후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만들어낸 것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했을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고 그 우수한 조상을 우리의 조상으로 해서 우리 민족이 거기서브터 태어난 빼어난 민족이다라는 히틀러식의 생각이 아니고 아브라함도 별 볼일 없었지만 하나님이 부르사 내가 너를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겠다 해서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약속과 긍휼과 자비로 아브라함을 완성시키시고 후손들을 아직까지 만들어내신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부름을 받은 존재들이니라라고 이해해야 되는 것이 할례의 원뜻인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하기 위해서 지금 어떤 이스라엘의 열조들을 언급하고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 요셉, 모세를 들고 있습니다. 너희가 볼 때 요셉이 그 형제들 중에 쓸 만한 사람으로 보였었느냐 이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형제들이 볼 때 요셉은 미움을 받은 사람이라, 팔아서 용돈이나 챙겨 가질 사람으로밖에는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지금 증명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섰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그들의 지도자로 인정한 적이 있느냐? 거부하지 않았었더냐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요셉이나 모세나 너희 민족에서 볼 때도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고 너희들이 볼 때 거절하고 배척할 정도밖에 안됐지만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통해서 너희 나라를 지금 있는 이 시점까지 유지하시고 보존해 오셨다.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줄 수밖에 없었듯이 아브라함이 시원치 않은 사람이었고 너희도 시원치 않은 사람이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논할 때마다 입에 올려야 되는 유명한 이전의 영웅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누구를 들어도 그들이 영웅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유지하고 보전하고 구원해낸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이 하셨다.

너희에게 할례 언약을 주고 선민이라는 이름을 준 것은 너희가 다른 사람들보다 빼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은혜와 자비로 너희를 놓지 않고 사랑과 긍휼 가운데 불러냈다는 뜻이지 나는 남과 다르다라는 뜻으로서 너희가 주장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것이 스데반 집사의 설교의 핵심인 것입니다.

신명기 7장을 보시면 이 사건은 모세의 입을 통해서도 너무나 분명하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됩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넣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니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 신 7 : 6 - 10 )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봐라,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니까 하나님이 애굽에서 꺼내지 않았느냐, 우리가 더 귀하고 값진 족속이니까 애굽왕을 쳐 없애고서라도 우리를 하나님이 빼어내신 것이 아니냐. 모세 얘기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빼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사랑하셨다고 하면 금방 뭐라고 오해할 수 있느냐면  사랑받을 만하니까 그런 것이 아니냐고 말할 것을 미리 예견하듯, 아니다. 너희 열조와 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열조 아브라함부터 계속된 약속입니다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복을 주어 너희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대를 이어 오면서 한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이 뛰어났던들 할례라는 언약이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 국가를 논할 때 제일 뛰어난 사람은 그들의 국부, 시조,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벌써 변변치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할례의 언약이 주어진 이후입니다.

너희를 꺼낸 것은 너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꺼낸 것을 보니까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다. 우리를 택한 것을 보니까 우리가 우수한 족속인가 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할례 언약을 준 것을 보니 우리와 저쪽과는 섞이지 말라 그리고 우리는 우리끼리 보존하고 있다가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완성시키는 날을 고대하고만 있자. 아니다.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갖고 있는 것이 너희의 신앙과 인생의 전 내용이어서는 안된다. 너희가 선택받았다는 것은 잘나서 합격했다. 잘난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가 됐다라고 끝난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를 불렀다는 시작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제부터 너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희와 구별해서 우리를 불렀다. 우리는 너희와 섞이지 않는다. 스데반의 지적이나 성경 전체의 지적은 너희를 부른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는 뜻이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마치 대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한 것과 같습니다. 그 부분은 지금 이 내용하고 비유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다음은 합격통지서를 앞가슴에 붙이고 평생 돌아다니면 무엇합니까. 대학교에 왜 붙는 겁니까. 공부 잘하라고 붙여준 것이지 합격증을 밤낮 가슴 복판에 인쇄해서 다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좋은 대학을 다녔으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렀다는 합격증만 가지고 놀러 다니는 것입니다. 호텔 가서 숙박비 내세요 하면 합격증을 내밉니다. 이것이 무슨 신용카드입니까? 이것은 넌센스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선민으로 택했느냐. 그럼 이제부터 하나님 마음에 들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 어디에나 나옵니다. 예레미야 4장을 보시겠습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 렘 4 : 4 )

할례가 갖는 뜻이 얼마나 분명한가 보십시오. 몸에 할례를 행한 것은 너희가 이제 더 이상 혈육에 의하여 연계된 족속이 아니다. 혈육관계, 혈연관계로써 이어지는 족속이 아니다는 것이 할례입니다. 너희는 아버지가 나를 낳았고 내가 또 아들을 낳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백성 삼은 자로서 하나인 연계를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과 그의 부르심 속에서 하늘나라 백성 된 자로서 하나고 그것이 근거고 원리고 목표입니다.

우리가 한 혈연관계를 가지면 같은 성을 쓰듯이 우리가 신앙 가운데서  한 족속이 되고 백성이 된다면 거기는 영적인 어떤 공통점이 있고 그리고 그 공통점은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할레를 받았다. 그러면 그를 부르신 이의 뜻에 합당한 자가 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할례를 받았다는데 하나님께 왜 속하지 아니하였느냐는 것입니다. 할례란 너흭가 더이상 세상과의 관계로 또는 우리 인간 개인개인 생명이 갖는 혈연적인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바다아 그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복 주심 안에 부름을 받은 자이고 그의 명령을 수행하여 그의 복 주심이 채워져야 할 사람들인데 어찌하여 하나님 싫어하는 일을 하며 하나님 모르는 짓을 하느냐는 겁니다.

예레미야 4장에 나타난 것도, 스데반의 설교도 그겁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겠다고 한 자들을 다 죽였고 오시리라 약속한 메시야도 거부하고 하나님이 너희를 은혜로 부르고 자비로 부르고 긍휼로 불러 그의 백성이 되게 하고 복 주기로 했다. 그래서 메시야를 너희에게 보냈는데 복 받겠다고 나와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그 표로 할례를 행한 자들이 하나님 말씀은 외면하고 그의 보낸 자를 십자가에 못박아 놓고 잘했다고 할 수 있느냐. 이 지적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스데반에게 사실 답변할 말이 없습니다. 저들이 가졌던 생각, 저들의 우월감, 저들이 회개할 것이 있고 저들도 죄인이라고 지적하는 말에 대해서 얼마나 분명했으면 즉시로 스데반을 끌어내다가 돌로 쳐죽였다 그랬습니다.

이 문제의 심각성은 지금 스데반과 유대주의자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갖는 본능적인 종교심, 그리고 본능적인 우월감에 관한 문제 때문에 신앙이 언제나 왜곡되는 가장 중요한 내용들인 것입니다. 오늘 여기 참석하신 여러분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 저촉되고 있는지 모를까봐 두렵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었다.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옛수 믿지 않는 어떤 사람, 쉽게 얘기해서 여러분의 남편 혹은 아내, 여러분의 친구,친척 누구라도 좋습니다. 저 원수는 그렇게 가서 얘기를 해줘도 안 믿는 것입니다. 할 수 없다. 너는 지옥이나 가라.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그대로 유대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굉장히 다른 얘기입니다. 이 얘기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그럽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랑으로 갈 수 없습니다. 나는 믿었다, 넌 안 믿었다. 그래 넌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하고 나는 천국 가는 것이 당연하다.

이 마음이 든다면 즉, 자랑이라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럼 믿지 않는 사람을 향하여 마음으로 너는 믿을까봐 겁난다. 이런 생각이 든다면 여러분은 유대인입니다. 우린 아무도 예수를 믿을 만한 실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자비와 긍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5 : 8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요청하지 않았고 우리의 죄인 된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한 자가 없었다 그럽니다. 하나님 쪽에서 혼자 하신 일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만들어내듯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린 그의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남보다 나으니까 하나님이 불렀겠지라고 생각해도 틀린 것이고 나는 믿었으니까 구원 얻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생각해도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구원했을까가 사실은 정확한 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부름을 받아야 할 이유가 나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비교할 떄없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구원을 얻은 이유는 그렇지 않은 사람과 비교해서 근거와 조건으로서는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여러분과 비교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낫습니까. 그 사람들이 조건적으로 나은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같이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여러분 스스로 잘 아시는 일이지만 어디에서 차이가 나는 줄 아십니까. 믿고 난 다음부터입니다. 믿을 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믿고 난 다음에 우리는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답게 훈련되어 나가고 다듬어져 나가는 것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바로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라. 저들을 부른 이유가 뭡니까. 너희는 내 백성이 되라. 내 계명을 지키고 나의 사랑을 받고 내가 약속한 복을 누리는 자가 되라. 그리로 하나도 안 간 것입니다. 넌 할례 받았냐? 넌 어느 족속이냐? 사람 만나면 그것만 따지는 겁니다. 넌 어느 족속이냐? 넌 유대인이 아니구나. 이방인을 개, 돼지와 똑같이 취급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은 믿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여러분이 어느만큼 하나님 편을 들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으로 자신을 가다듬었는가로 차이가 나야 됩니다. 난 믿었다, 넌 안 믿지. 이것으로 구별하는 것은 유대주의적 발상입니다. 예수를 믿으셨습니까? 교회에 나오십니까? 달라지셨어야 되고 더 달라지셔야 됩니다.

해마다 달라지고 달마다 달라지고 날마다 달라져야 됩니다. 달라지셔야 됩니다. 혀를 끌끌 차면서 어휴 저, 하나님도 모르고 왜 인생을 저렇게 살아, 그러지 말고 그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데 대하여 신경을 쓸 틈이 없도록 여러분 일을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신자로 부름을 받은 여러분의 길을 걸으셔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보시겠습니다. 신약에서 분명히 이 문제를 이렇게 요구하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 5 : 1 - 4 )

유대인들을 향하여 얘기를 합니다. 너희가 할례를 받았다는 것으로 신앙을 대체해서는 안된다. 할례를 준다는 것은 결국 너희를 세상에서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 안에서 관계를 갖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었던 것이다.

예수를 믿고 주 안에 들어와 주를 믿는 자로서 너희의 신앙 인격을, 너희의 존재를, 너희의 목표를 설정하고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뭡니까? 여기 있는 것같이 죄의 종이었던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누구에게 드리든지 그의 종이 됩니다. 죄에게 드려 죄의 종이 되기도 하고 의에 드려 의의 종이 되기도 합니다.

불신자일 때는 죄의 종이었고 우리가 자유인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자유하게 된 것으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꼐 바친 생활이 있으며 그리스도께 순종한 신앙이 있습니까? 그 로마서 6장에서는 갈라디아서 5장에서나 똑같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든가 율법을 들어서 그걸 행하지는 않고 남과 구별만 짓고 우월감 속에서 미련한 생활을 했던 것같이 오늘날 신자들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죽으면 천국 간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진 십자가가 여러분을 죄에서부터 꺼내어 자유인으로 주를 향하여 열심을 품고 섬기는 자로 의의 병기로 드려진 열매를 맺는 생활, 거룩으로 가는 변화와 진전이 있는 생활로 가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일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과 비교해서 자만심과 우월감으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할 수 있습니다. 여기가 어려운 대목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당시에는 다른 사람과 구별될 것이 없었을지 몰라도 믿고 난 다음엔 분명히 달라야 됩니다.오늘날 세상에서 얘기하는 것같이 예수 믿는 것들 꼴보기 싫어서 못 믿겠다라는 얘기에 대해서 여러분이 가슴 아파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남텬이 왜 교회에 안 나옵니까? 여러분 하는 행동이 꼴보기 싫어서 안 나오지 않습니까. 여러분 친구들에게 여러분 예수 믿읍시다라고 얘기할 수가 없죠. 한두 번 이를 갈고 싸운게 아닌데 어떻게 갑자기 웃으면서 교회 갑시다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고 나서 변한 것이 없습니다. 믿지 않는 쪽에서 보면 우린 꼭 유대인입니다.

저희들끼리 모여서 뭐 웃기고 지지고 볶고 자기들끼리 목사니 장로니 하는 것이 나은 것이 없습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을 지금 공격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우리가 지금 세상에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스데반을 때려 죽인 것같이 오늘 한국 기독교계도 이렇게 말한 사람을 때려 죽이고 끼리끼리 눈감고 아웅하고 잘된다 잘된다 하고 살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지금 이 설교가 해당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까지도 안와 있기 때문입니다. 자랑 안합니다. 자랑 안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끔 교회에 나와 그저 마음에 평안을 얻고 그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내세를 위해서 적금 붓는 기분으로 나오는 것이므로 뭐 굳이 안 믿는다고 그럴 것ㅇㅣ 있습니까. 믿는다고 해서 세금 뜯길 것도 없는데. 그런 식으로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한국 국민의 1/4 가까운 인원이 신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한국은 개판이 되고 만 것입니다. 가장 큰 책임은 교회에 있고 가장 큰 이유는 지금 스데반의 설교에서 지적당하는 것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고 자신을 자랑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괜찮아서 십자가를 나한테 허락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평가하십시오.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도 사도 바울식으로 자랑해야 합니다.

지금 본 갈라디아서 6장을 보십시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갈 6 : 11- 15)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십자가가 나에게 적용될 만큼 내가 괜찮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자랑이 아니고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구원을 얻었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안 기쁨이 자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서로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부르시고 그렇게 자비하시고 그렇게 긍휼이 넘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맨 처음 부름을 받은 유대인들이 그 구별을 짓습니다. 은혜와 자비로 부름을 받은 주제에 다른 사람에게는 시험 보자 그러는 것입니다. 돈 내고 들어오라 그리고.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야말로 우리의 모습을 더욱 더 그 모습을 잘 알고 있는 자입니다. 은혜와 자비와 긍휼로 부름받아 이 자리에 있는 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6장에서 이제 얘기하는 것같이 아그립바 왕 앞에 결박된 것을 빼놓고는 당신이 나와 같기를 원합니다. 이 마음이 있으십니까?

바울은 지금 자기가 당하는 고통과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가되느냐 하는 것은 다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느냐, 어떻게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는가? 그것이 얼마나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인가? 그리고 그것을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신 것같이 모두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를 핍박하고 때리는 자들 앞에 저들이 항거하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자기를 심문하는 왕 앞에서 그럽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이렇게 결박된 것을 빼놓고는 당신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변한 것입니다. 주의 마음에 동참하고, 주의 베푸신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인자와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시는 그의 사랑을 알고 그의 백성 된 참다운 표입니다. 할례가 아닙니다. 믿었다가 아닙니다.

이런 마음으로 와 계셔야 됩니다. 그렇게 안와 계신다면 여러분은 자랑하는 수준에 있지 않습니다. 자랑하는 수준에서 한 걸음도 더 들어와 있지 않으므로 기독교가 이 복음과 생명과 이 넘치는 긍휼과 자비와 진리와 생명 되는 것들이 여러분 마음에서 정체되고 여러분을 통하여 발산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도 누리지 못하고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여러분 가운데 있는 빛이 전달되지 못하여 흑암 속에 머물러 있게 되는 현상이 이렇게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은 생애에 하셔야 할 어떤 중요한 문제보다도 이 문제가 중요합니다. 신자답게 사십시오. 주 앞에 부름을 받은 은혜와 긍휼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약속된 모든 복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십자가를 자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을 불러내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 넘치는 자비가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고 여러분을 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쏟아져 나가게 하십시오.

여러분을 보는 사람이 유대인을 만난 사람같이 서서 네가 예수 믿는다면 나는 안 믿겠다. 네가 가는 곳이 천국이라면 나는 너 보기 싫어서 안 가겠다. 그렇게 만들지 마십시오.

혹 지금 상황 같아서는 여러분이 예수를 안 믿었으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신자로서 여러분의 그 동안의 평가와 행동이 무엇인가를 점검해 보십시오. 여기 스데반의 설교가 지적하는 바에서 핑계 댈 것이 없고 보면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을 지적하시고 꾸짖으시는 것은 회개케하며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권면입니다. 아파하지 마시고 돌이키기로 하십시다. 하나님이 좋은 말로 하실 때 여러분 허리를 부러뜨려 침대에 눕히기 전에 돌이키십시오.

겁나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고 자랑이고 환희인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되기 때문에, 누려야 할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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