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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3989 추천 수 0 2009.06.22 16: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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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0:1- 11:18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58.059.060 / 1989.05.21./5.28/6.4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뜻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며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을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사도행전 10:1-23

사도행전 10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이제 주를 믿고, 말하자면 이방으로 복음이 흘러 들어가는 첫 문이 열린 사건으로 중요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을 보시면서 여러분이 이상한 느낌을 가지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넬료가 우선 기도하는 중에 천사의 계시를 받습니다. 가서 시몬을 불러와라 하는 천사의 지시를 받고 베드로를 찾아갑니다. 그때 또 베드로는 환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상한 환상을 목도하게 됩니다. 부정한 짐승들이 보자기 안에 싸여져 내려와 잡아 먹으라는 소리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여태껏 자라온 그들의 신앙의 전통을 따라서 이런 것은 내가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반론을 제기하고 하나님께서 내가 깨끗케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는 말씀이 33번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3번 있고 환상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욥바에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옵니다. 이 환상이 무슨 뜻인가 할 때 또 성령께서 친히 걱정말고 가라 내가 저들을 보냈다 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그래서 가이사랴로 가서 고넬료와 그의 일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베드로가 설교를 하고 설교를 하는 중에 성령이 임하여 저들이 다 성령으로 충만케 하는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그래서 베드로가 저들에게 또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일로 이 사도행전 10장이 끝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보면 잘 조화되지 않는 것 같은 사건 두 가지가 동시에 등장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간섭의 세밀하심입니다. 베드로에게, 고넬료에게, 성령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하시는 일, 또 성령께서 임하셔서 성령충만한 세례를 받는 일, 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이 너무나 풍성하고 또 세밀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시고 성령께서 직접 이 일에 개입을 하신다면 인간이 할 일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어야 되는데 인간이 할 일은 또 할 일 대로 다 번거로운 일이 다 지시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환상을 보고 찾아가고 응답하고 또 가고 그 일들을 또 내가 왜 당신을 찾아왔는가? 하는 얘기를 다 합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실 것이라면 베드로를 불러오라고 하지 말고 거기서 직접 얘기하시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와서 하는 것보다 영광 중에 나타난 천사가 고넬료에게 말하면 얼마나 쉽습니까? 또 베드로에게도 내가 고넬료라는 집에 너를 보내려고 한다라고 직접 말하는 것이 낫지 무슨 이상한 짐승들이 보자기에 싸여 내려와서 우리 말대로 하면 헷갈리게 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가 바로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서 가장 중요한 핵심에 도달하지 못하는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선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도행전 전체 기록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 되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3가지를 고르라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건을 들겠습니까?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3대 사건을 고른다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일 겁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뺄 수 없는 사건일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의 회심. 이것 또한 뺄 수 없습니다. 이제 이 이후로는 결국 사도 바울의 행적이 되기 때문에 바울의 회심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다음 하나가 이 고넬료 사건입니다. 고넬료 사건의 중요한 점은 여기로부터 비로서 이방을 향한 복음의 문이 공식적으로 열리기 때문에 이 사건을 우리가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는 기록의 대부분은 이방인을 향한 것, 즉 땅끝까지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3대 사건 속에 고넬료 사건이 들어가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일로만 이것이 3대 사건으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늘 속는 것은 이렇게 이렇게 해서 바울이 회심했다. 이렇게 이렇게 해서 베드로가 하루에 삼천 명씩이나 회심을 시켰다. 이렇게 해서 아테네까지 바울이 갔다. 아니 로마까지도 갔다. 이런 식으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어떤 결과가 이런 사람의 열심과 이런 방법을 통해서 결실되었다라는 하나의 사업보고서 같은 차원에서 사도행전을 읽으면 가장 중요한 핵심은 놓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원인과 방법, 그것 자체가 갖는 메시지를 놓치게 됩니다. 꽃이라고 해 보십시오. 꽃이라는 것은 하 나무의 생명의 충실함과 아름다움의 대표적인 한 상징입니다. 꽃 하나만이 아니고 꽃이 핀다는 것은 그 나무가 어떻게 그 생명력이 충실하고 풍성하고 충만한가 하는 것의 대표적 상징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꽃만 꺾어서 모아 가지고 있으면 오늘날 우리 사람들이 쉽게 하는 일로서 그렇게 하는 관행일 뿐이지 꽃만 있는 것으로는 생명의 가장 아름다움을 충만하게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한 식물의 아름다움의 대표일 뿐이지 생명력의 충만함의 대표는 어떤 의미에서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꽃만 꺾어가지고 있으면 그 꽃이 핀 나무 전체를 보는 것을 놓칠 위험성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도행전 기록에서 우리가 기억을 해야 되는 것은 거기에 나타난 어떤 결과가 사도 바울이 이렇게 노력을 해서 베드로가 이렇게 충성되어서 이 일이 일어났다라고만 보지 마시고 하나의 꽃을 볼 때 그 꽃이 피어날 만큼 풍성하고 충만한 생명력을 보는 눈을 빼앗기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10장에 나타나는 식으로 얘기를 하자면 아! 이렇게 해서 이방에 복음이 전달되기 시작을 했구나! 아! 그 첫 시작이 베드로와 고넬료로부터 시작이 됐구나. 고넬료가 경건하게 기도를 하고 신앙생활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드디어 구원의 문을 여셨구나. 베드로는 이렇게 늘 준비된 자세로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서 일을 썼구나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가 꽃밖에 볼 줄 모르는 차원입니다. 여기에는 훨씬 더 중요하게 이런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도 말씀 드린 것 같이 왜 이 사건이 번거로울 수밖에 없느냐 하는 답으로서 이런 메시지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의 일을 하시는 데 있어서 결과를 이루어내기 위한 방법으로만 사람을 쓰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 번거로움이 있어야 되는 이유입니다. 환상이 있어야 되고 베드로에게 여러 가지로, 고넬료에게도 여러 가지로, 찾으러 오고 거기까지 가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양쪽을 다 하신 것인데 그런데도 실제로 인간이 해야 되는 부분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생략된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것으로 베드로가 고넬료 집까지 가는 것이 생략되거나 고넬료가 베드로를 불러서 들어야 되는 설교가 생략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사도행전의 3대 기록에서 보는 가장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인,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목표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 생명을 만드시고 자라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완성되는 것을 하나의 인격으로 요구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대접하신다는 것이 여기 숨겨진 메시지입니다.

지난 주에도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문제를 논하면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드디어 회심했다. 그가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생명의 대상인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생명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관심사로서 인간을 보는 내용이고 핵심인가?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라나는 것, 생명체로서 성경에서 취급되고 있고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체가 무슨 동정을 받고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 쪽에서 보면 구걸해야 되고 하는 그런 위치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고자 하고 대등하게 대접하는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생명체입니다.

생명이며 동시에 인격체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려는 대등한 존재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방으로 들어가는 첫 사건에서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같이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주선자이고 그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분입니다만 혼자서 독재자같이 명령을 해서 이 일을 이루어내지 않고 베드로를 설득하고 고넬료를 설득하는 장면이 이렇게 번거롭게 나와있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너를 부르러 올 것이다. 가라. 이것이 아니라 여기 있는 짐승을 잡아 먹어라. 이렇게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 저는 이런 것을 절대 먹지 않는 사람입니다. 내가 깨끗하다고 했는데 네가 거부할 것이냐? 이런 설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대등하게 대접하는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의 가치와 위치가 여기 훨씬 더 중요하게 등장을 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저들로 하여금 회심하게 하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의 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그가 가진 바 생명의 풍성함의 넘쳐남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접한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동역자로 대등하게 인정하고 사랑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자의 자발적인 행위의 결실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사도행전 뒷부분으로 가면 바울이 어떻게 그의 전도 여행을 통해서 많은 도시들에 복음을 전하고 결국 로마에까지 땅끝까지 복음이 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이 말하자면 생명이 생명을 낳는 것이며 동시에 바울이라는 한 인간이 주를 사랑하는 열심으로 주님의 일을 자기의 일처럼 동역한 그 발걸음으로서 기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는 생각 속에서 가장 놀라야 되는 것은 오늘 사도행전 10장 같은 기록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동등하게 대접하기를 기뻐하는 존재다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사건들을 보십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접하시는가 하는 데 있어서 늘 마음속에 구걸해야 되는 종, 하인. 이런 입장으로만 생각하는 버릇이 훨씬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창세기 18장에 가시면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대접하시는가? 하는 부분에 있어서 대표적인 사건을 하나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소돔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강림을 하시는데 그 전에 아브라함을 만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창 18:17-23)

그래서 아브라함이 깎습니다. 몇 명까지 깎습니까? 몇 명만 있으면 멸하지 않겠다로 하나님이 뜻을 낮추십니까? 소돔 고모라 성에 의인이 열명만 있어도 이 성을 멸하지 않기로 하십니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인간이 그의 수족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구정물에 손 담그기 싫어서 우리를 불러서 대신 담그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18절에 내가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입장인가 보십시오. 친구고 우선 동업자고 대등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보실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뒤에 더 확실히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악인을 멸하는 것은 좋지만 그 중에 있는 의인을 악인들의 죄악 때문에 함께 멸하시겠습니까?

의인 오십 명만 있으면 멸하시지 않겠습니까? 거기서 10명 모자라면 어떻합니까? 그래서 깎고 깎아서 열 명까지 내려옵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에 인간이 하는 얘기, 아브라함이 하는 얘기가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에 절충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가지셨던 뜻을 말하자면 인간인 아브라함의 제안으로 말미암아 절충을 하십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과 그 뜻에 어느만한 대접을 받고 있느냐가 여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되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뜻을 한 번 정하셨다가 변괴하시는 변덕스러운 분이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변덕을 부리셨죠?

이건 변덕이라고 그러지 않고 하나님이 관대하시다 그러는 것입니다.

여러분 애가 잘못하여 때리다가 너 지난번에 약속했지. 너 이번에 10등 안에 못 들면 틀림없이 10등에서 떨어진 숫자만큼 떨어진 데 대해서 10대씩 맞기로 했다. 약속했지? 약속했습니다. 그럼 너 맞자. 그래서 데려다 때리다가 18등을 해서 80대를 때리기로 했는데 8대 때리고 측은해서 그만 뒀다고 해서 아! 우리 엄마는 변덕쟁이다 그럽니까? 안 그러죠? 그런 것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가시면 똑같은 사건이 하나 기록이 됩니다. 똑같은 사건이라는 것은 내용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간 동안에 밑에 있는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 숭배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출 32:7-14)

여기서도 모세가 굉장한 역할을 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그라지게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변덕을 부리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제안을 받아 주셨습니다. 관용하시고 그리고 모세의 제안을 받아서 내리시려던 그 화를 거두셔서 그의 자비하심을 더 넓히셨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본 베드로나 여기서 보는 모세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실 어떤 일을 위하여 소모품으로 동원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하나님께서 더불어 의논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지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의논하시고 우리에게 이 일에 동역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보는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일에 동참케 하셔서 말하자면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 동업자가 되는 겁니다. 동업자가 된다는 표현이 좋지 않습니다만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순 이런 생각을 가집니다. 하나님, 무엇 때문에 이렇게 번거롭게 하십니까. 척척 좀 알아서 하시지 않고, 저는 저 갈 길 바쁘고 저 할 일 많으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내가 돈 얼마만큼 떼어서 이 구좌에 넣어 놓을 테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이자를 불려나 주십시오. 이런 심보밖에 없습니다.

욥기 7장으로 가 보십시오. 욥이 하는 얘기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하고 아주 비슷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욥이 굉장한 고난 속에 있을 때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뭐라고 불평을 하는지 보십시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마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사람을 감찰하시는 주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욥 7:17-20). 이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지금 욥이 고난을 당하니까 나중에 하도 고달퍼서 하나님께 이런 원망을 하는 겁니다. 어차피 이 고달픔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당하지 않을 고난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 같은 것을 왜 그렇게 높이 평가해서, 내가 범죄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고 내가 잘못했다고 매를 드십니까? 내버려 두십시오.

쉽게 얘기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톰소여의 모험에 나오는 톰입니다. 톰이 허클베리핀을 제일 부러워합니다. 왜냐하면 학교 가라고 때리는 사람도 없고 옷 깨끗이 입고 있으라 그러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욥이 그 얘기입니다. 하나님, 나 같은 것이 뭐길래 이렇게 관심을 두어서 밥 먹을 때 쩝쩝 소리내지 말라, 사람하고 얘기할 때 눈을 똑바로 떠라, 옷을 입을 때는 단추를 똑바로 채워라 그러십니까? 나 같은 이런 무지렁이 같은 인간을 내버려 두시지 않고 뭘 나 같은 것한테 분초마다 시험을 하시고 침 삼킬 동안도 놓아두시지 않고 이렇게 번거롭게 하셔서 하나님도 골치 아프시고 나도 이렇게 못살게 된 이런 꼴을 당하게 하십니까? 그래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내버려두십시오. 빈 들에 떠다니는 먼지나 지렁이같이 놓아두십시오. 뒤집으면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취급하신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이 문제를 놓치는 겁니다. 하나님 뭐, 그렇게 우리의 인생에 어려운 일을 주시고 고민하게 하시고 안타깝게 하십니까?

하나님, 뭘 원하십니까? 십일조입니까? 제가 딱딱 바치겠습니다. 새벽기도를 하라면 하겠습니다.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귀찮게 좀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신앙인들이 갖는 최고의 소원입니다. 아니, 이번에는 무엇 때문에 찾아오셨습니까? 뭘 하랍니까? 빨리 말하고 가십시오. 지금 바쁩니다. 빨리 고지서나 놓고 가라 이겁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렇게 직접 오시지 말고 전화로 하십시오. 그러면 제가 부쳐 드리겠습니다. 하나 놓고 가십시오. 이런 식입니다.

우리가 목표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목표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시키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시키는 일 속에서도 내가 목표입니다. 그래서 지금 베드로가 하는 일은 베드로가 가서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건 속에서 베드로 자신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그 먼길을 가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주께서 그들에게 간섭하사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 일 속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 커가고 또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는 열심으로 내 모든 일에 자발적으로 여기까지 왔다라는 대접을 받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기록에서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왜 이렇게 중요하냐 하면 여러분 이런 일들을 제대로 파악해야 여러분의 지금 하잘것없이 보이는 생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다 하면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과 같은 놀라운 결실이 있는 일을 해야만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구스 내시를 회심시키고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어떤 커다란 일이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사도행전 기록 자체가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는 사도 바울, 그 일을 하는 베드로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동등한 동역자로 취급을 받는 일에 깊어져 가는 것이 목표라는 것입니까? 누구를 불러냈느냐? 누구를 회심시켰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주께 돌아오게 했느냐?는 이 것들은 부수적인 일들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의 사소한 일들이야말로, 번거로워보이는 일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접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채워나가고 그가 대접하시는 인간으로 빚어져 나가는 모두 중요한 사건 사건들인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자식과 씨름하고 이웃 앞에서 세상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쓰는 것, 자질구레하게 부딪히는 모든 속상하는 일들이야말로 그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나가는 그리고 우리를 그렇게 대접해서 어느날 꿈속에 콱 나타나서 너 또 죄 지을래? 이번에 그냥 죄 지으면 손가락을 하나 뿌러뜨릴 줄 알아라가 아니라 실제로 내가 이게 무슨 사건인지 모르면서 당하는 일들로 말미암아 긴 인생을 통하여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꿔오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죄 안 짓는 하나님의 무슨 깨끗한 소독제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너를 들어서 내가 밥을 먹으려고 그러는데 너 왜 이렇게 숟가락이 더럽냐? 해서 양잿물로 빡빡 닦아오는 식의 존재가 아니고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우리를 조금씩 조금씩 바꾸고 거룩케 하고 완성시켜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기쁨을 나누시기를 원하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겪고 있는 인생의 모든 조건이고 환경이고 지금의 위치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고넬료의 집에 가서 일으키는 이 모든 일이나 여러분이 지금 누구한테 꺼내놔도 꺼낼만한 얘기거리가 될만 한 것이 안되는 그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불러내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값진 피로 여러분을 동등한 가치와 사랑으로 불러 내셨고 이 사도행전 속에서 역사는 사도 바울, 베드로의 일들과 똑같이 여러분의 생애 속에 간섭하셔서 여러분이 만나는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지금 현실에서 부딪히는 일들 속에서 여러분을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고 빚어내고 있는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속하고 있는 환경과 조건과 일들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엄청난 결과를 이룬 놀라운 사건과 절대 가치에 있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고넬료 집안에 전달된 복음의 사건에서 고넬료 집안이나 베드로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대접하시는 놀라운 축복의 모습들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과 능력으로 불러내신 모든 사람에게 허락하시는 동등한 기적이요, 간섭하시는 은혜와 축복의 풍성한 일들입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이 자리까지 와 앉아 있음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그런 주님의 축복된 약속 앞에, 그런 능력의 간섭 속에 있는 것을 기억하셔서 주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대접을 받는 존귀와 영광으로 관쓰는 자리에 가는 과정으로 있는 줄 아시고 감사와 찬송이 여러분 생애에 늘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작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사도행전 10:34-48

가이사랴의 고넬료라 하는 백부장과 그의 가족이 회심하는 사건이 사도행전 10장입니다.

지난 주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미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환상중에 사자를 보내사 베드로를 청하라 하시고 베드로에게도 환상을 보이셔서 가서 만날 준비를 하게 하시고 드디어 가이사랴의 고넬료 집에 가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고 모든 가정이 주를 믿어 구원 얻게 되는 사건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중요한 것은 끝에 베드로가 설교를 하는 중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는 성령 부어 주심을 목도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식의 중요한 사건이 3가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서 전도했을 때 복음을 받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나중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하는 사건이 있고 그리고 여기 고넬료 사건이 있고 나중에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된 에베소 교회에 구원 얻은 백성들 중 바울로 말미암아 안수받아 성령받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들은 종종 일부의 사람들에 의해서는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성령의 세례가 드러나게 증거되는 법이다 하는 주장을 낳는 근거 구절이 되어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기록된 사건들은 각각 다른 이유 때문에 성령 강림과 성령 세례, 혹은 성령 부어주심의 사건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기록된 사마리아 성의 회심 그리고 거기에 구원이 베풀어지고 성령 세례가 부어지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된 표가 민족주의에 의거하지 않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백성된 표는 유대인이어야 됐습니다. 유대인이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된 분명한 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나 주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얻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 백성된 표는 성령님께서 오신 것으로 그 근거가 마련됩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8장에 나타난 사마리아 교회에 내린 성령 강림의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 10장에서의 성령 강림은 좀더 다른 뜻을 가집니다. 오늘 사건을 전체적으로 볼 때 아주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고넬료와 그의 가족의 회심, 구원을 얻게 되는 사건 기록을 보면 기적과 자연스러운 행위가 뒤섞여 있는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환상으로 말씀을 하시고 어떤 사건을 보여주시고 또 나중에 성령을 보내실 수 있는 분이 직접 고넬료에게 말씀하시거나 고넬료를 회심시키시는 일은 안 하시는가? 라고 그때 의문을 제기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말하자면 고넬료의 집안의 구원 얻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기억할 것은 여기서 등장하는 기적들, 즉 좀더 일반적인 표현을 쓰자면, 초월이 담당하는 역할은 무엇이며, 초월과 구별해서 자연이 담당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는 신자로서 깊어가는 데 있어서는 꼭 넘어야 할 중요한 관문 중의 하나입니다. 자고로 인류는 본능적으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자연인이 갖는 종교심의 본질은 초월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 어느 사회, 어느 형태의 종교든지 보면 그 지위를 확보하는 유일한 근거와 힘은 언제나 초월입니다. 무당도 초월로 저들의 위치를 확인합니다. 날이 시퍼런 작두 위에 서서 춤을 춥니다. 자연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제가 자라난 교회에 경건한 믿음의 선배가 계셨는데 지금은 목사가 되셔서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는 믿음의 선배입니다. 영적인 일과 경건한 일에 아주 뛰어나신 선배였습니다. 이미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 아주 신앙이 좋으셨는데 하루는 바로 옆집에 굿판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구경을 갔는데 아! 무당이 작두 위에서 뛰어 놀더니 턱 뛰어 내려와서 식칼로 돼지 머리를 찔러서 뒤집어 세우니까 딱 서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돼지 머리가 제멋대로 생긴건데 식칼로 탁 찍어서 거꾸로 세우자 섭니다. 그래서 이분이 앉았다가 하나님만이 하셔야 될 초월적인 일을 무당이 하는 것이 꼴이 보기 싫어서 "하나님 저걸 넘어뜨려 주십시오." 그런데 정말 딱 넘어지더랍니다. 그러니까 무당이 얼굴이 하얗게 되더니 다시 뭐라고 뭐라고 하더니 다시 찍어가지고 하니까 서더랍니다. 하나님 또 한 번 넘어뜨려 주십시오. 그랬더니 또 딱 넘어지더랍니다. 무당이 눈을 번뜩이면서 관중을 보더니 이중에 예수 믿는 것들 있으면 나가주쇼. 하더랍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왔다 합니다. 그러니까 통쾌한 웃음을 휘날리며 돌아오셨다는 간증을 사석에서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내용 중 하나입니다. 어느 종교를 가서 보셔도 초월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들이 종교에 대해서 본질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중에서도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곳이 천주교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시면 여러분이 잘 보시다시피 여기서 등장하는 초월들, 즉 기적들은 그것 자체가 내용으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본성적인 종교심은 초월을 내용과 대상으로 가지려고 합니다.

신비로움과 두려움, 이것을 신앙의 대상과 내용으로 가지려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의 무속 신앙을 보면 큰 고목나무 같은 데 가서 엎드립니다. 조그마한 갈대 같은 데 가서 엎드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 우리가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는 것 앞에 가서 엎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곰, 사자, 호랑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도 그것입니다. 산, 신령, 하늘, 우리가 보통 두려움을 느끼고 무서움을 느끼는 것,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가장 큰 이유가 거기에 초월적인 어떤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잘못된 것은 초월된 것, 신비한 것, 두려운 것이 내용이고 경배의 대상이라는 것은 종교가 갖는 내용으로서는 너무나 가난한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차원에서도 초월 자체를 신앙의 대상과 내용으로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직까지도 성령의 은사로 방언을 한 사람들이 방언을 했느냐 못 했느냐로만 신앙의 어떤 계급을 매기려고 들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의 오해입니다. 고넬료에게 나타난 환상, 베드로에게 나타난 환상은 그것이 어떤 내용과 어떤 결론으로 몰고가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있지 그것이 내용이나 목적이나 대상으로는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그 초월이 초월된 것으로, 겁주는 것으로 대상이 되거나 신비하다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내용이 되지도 않고 그것은 언제나 화살표와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보통 상을 당하면 그 집을 모르는 경우가 있는데 찾아가면 대강 표시가 있습니다. 여러분 상가 표시 보셨죠? 이 상가 입구, 무슨 김 상가 입구, 박 상가 입구, 하얀 종이에 까맣게 네모테를 두르고 조그맣게 써 놓았는데 그 표시를 보면 모두 상 당한 집을 가리키기 위한 표시인 줄 압니다.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화살표의 방향입니다. 그것으로 사람이 상 당한 집을 가야 합니다. 거기가 목적지입니다. 그런데 그 김 상가 입구라고 쓴 그 종이 앞에서 입 벌리고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그 화살표를 따라서 상 당한 집을 가지 않고 그 화살표 앞에서 입 벌리고 있는 사람은 이제 장의사를 개업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 외엔 그 앞에 서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날 신앙이 꼭 그렇게 되었습니다. 초월이 성경에서 어떤 내용과 목적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하여 있는 것을 놓치면, 즉 신비하다는 것 자체만으로 숭배의 대상이 될 소지가 인간에게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뜻밖에도 이런 일들을 많이 봅니다. 회심하고 나서 옛날에 내가 이렇게 잘못된 생활을 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내가 회개하고 구원을 얻게 됐다고 간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 간증하는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은혜를 베푸시고 어떻게 내가 돌아오게 되었는가에 초점이 있는지 옛날에 얼마나 내가 개판이었느냐가 초점인지 알 수가 없게 되는 때를 봅니다. 왜냐하면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아파 오해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오셨다는 기적의 체험, 즉 초월을 체험했다는 것으로 자기의 가치를 올리려는 실수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경험한 초월적인 것, 즉 자연적으로는 도무지 알지 못할 결론에 어떻게 초월적인 간섭으로 오게 되었느냐가 어느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화살표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한 초월의 크기를 비교할 소지가 얼마든지 있다는 말입니다.

초월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종교적 본성인 중요한 신앙의 대상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상 제일 기승을 부린 때를 중세시대라 그럽니다. 교권이 세상 정권 위에 군림하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그때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종교 재판이라는 것이 있었고 종교 재판은 세상의 어떤 재판보다도 최고의 판결서였습니다. 그런데 종교 재판에도 피고가 마지막 자신을 변호하는 수단으로 이상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즉 무죄를 증명할 결투 신청 권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사건으로는 아이반호가 있습니다. 아이반호라는 작품에 길버트가 사태가 불리해지자 돈 많은 집, 아이작 노인의 딸인 레베카를 붙잡아서 수도원으로 도망을 가서 결혼을 하자고 우깁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완강히 거부하자 마녀로 몰아서 화형을 시키려 합니다. 그러면서 이 길버트 기사가 네가 나와 결혼을 승락만 하면 구출해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그래도 '안하겠다' 해서 사형이 확정되자 그 마지막 방법을 요구합니다. 결투를 신청합니다. 여자거나 나이가 어리거나 나이가 많이 들어서 직접 싸울 수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을 대신할 대전사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대전사로 아이반호가 와서 검사측 고소인 쪽의 대전사인 길버트와 결투를 해서 길버트가 죽는 것으로 그 소설이 끝납니다. 그 당시에 왜 이런 방법을 채택했느냐 하면 결투라는 것, 싸움이라는 것은 힘센 사람과 싸우는 기술이 좋은 사람이 이기겠지만 이것이 옳고 그른 문제를 판결하는 것일 때에는 초월이 이 세상 방법을 간섭해서 그 결과를 낼 것이라고 믿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곳에 판정을 내리고 그러기 위하여 초월적인 간섭을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초월적인 간섭을 하는 힘, 기껏해야 그 정도로 밖에는 초월이 갖는 메시지를 밝혀내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이런 초월성에 그의 신앙의 내용과 근거와 목표를 삼아가지고 우왕좌왕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예를 들면 목사의 아들은 대학에 떨어질 수 있는가 없는가? 이런 것이 왜 중요한 시험거리가 됩니까? 설교 잘하고 신앙 좋고 늘 기도만 하는 목사의 아들이 떨어지는가? 간단합니다. 공부를 못해서 떨어집니다. 그럼 기도한 것은 무엇인가? 기도는 시험하고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속는 것입니다. 신앙의 그 모든 초월이 우리로 하여금 주께서 요구하는 목적지로 가게 하는 필요한 소도구로 등장을 하지 그것 자체에 매달려 있도록은 안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은 내가 요구하기만 하면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몰아부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자리에 도달하도록 하나님이 쓰시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가서 그 힘을 빌려오는 능력으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가 바로 오해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이 고넬료 집안의 회심에는 그 많은 초월적인 사건들, 즉 기적이 도입되고 있지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데로 사람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서 설교를 해야 되는 겁니다.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환상과 사람을 죽음 가운데서 불러내는 기적, 바다 위를 걸으신 것,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시선을 모아서 이 내용으로 보내지고 있지 죽었다가 살았다, 눈이 멀었다가 본다, 허리가 부러져서 꼼짝을 못했는데 기도받고 일어났다. 여기에 머물러 있도록 초월이 동원되는 경우는 기독교에는 없습니다.

이 내용으로 우리를 보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은혜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은혜입니다. 이 은혜라는 말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가진 자가 안 가진 자에게 무엇을 베푸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졌다는 것은 꼭 부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 진리, 능력,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가진 자가 안 가진 자에게, 못 가진 자에게, 가질 수 없는 자에게, 값없이 베푸는 것입니다.

그 베푸시는 이, 그 존재를 가장 잘 설명하기 위해서 은혜라 합니다. 기독교의 본질이 은혜입니다. 은혜란 공짜로 뭐든지 이런 것을 베푸시는 분, 하나님 아버지,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그것을 두렵고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는 분이라는 초월적인 차원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라는 단어로서 이해되는 초월자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신비롭고 두렵고 못하는 것이 없으신 분, 하나님.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사실 정확치 않고 좋지 않습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은혜를 베푸시는 초월자 하나님. 이렇게 보셔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십시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그의 설교의 모든 핵심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입니다. 행복, 구원, 영생은 아닙니다. 물론 지금 제가 말씀드린 행복, 구원, 영생이 기독교의 내용들인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것을 주시고 베푸시고 우리 것이 되게 하시는 분과 떨어져서 하나의 개념으로 남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 얻어내는 대가로 구원과 영생과 행복을 이해하지는 마십시오. 은혜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서 이해된 차원, 그 은혜를 베푸신 이가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 구원, 행복. 이렇게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이, 그 하나님, 주권이 배제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다시 앞의 얘기로 돌아가서 이 문제를 조금 다른 차원에서 풀고 우리의 결론을 다시 또 추적합시다.

중세시대에 초월이라는 것이 너무 압도되고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서 기독교에 아주 치명적인 반발이 생겨납니다. 그것을 자연주의라 합니다. 신학적인 표현을 쓸 때는 신신학 혹은 자유주의 신학이라 합니다. 이것은 그 동안 인류가 가졌던 자연적인 종교적 본성이 초월에 대하여 머리를 숙였던 데 대한 반발인 것입니다. 초월이라고 여겼던 것은 알고 보니 자연적인 현상에 불과한데 인간이 무지해서 무릎을 꿇었더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벼락 같은 것입니다. 벼락은 하나님이 범죄한 자에게 내리시는 초원적인 하나님의 벌주는 방법인 줄 알았더니 전기에 불과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뢰를 피하는 방법은 예수를 잘 믿고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피뢰침만 꽂고 있으면 되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나쁜 짓을 해도 집 굴뚝 위에다 피뢰침만 꽂으면 만사가 오케이입니다.

자연주의로 넘어옵니다. 그러자 종교는 결국 의와 선과 진리를 추구하는 데 불과하다는 관념론으로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장 무서운 적이 이제는 초월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사단이 신자를 공격하는 데 초월로 공격을 했습니다.

무당이 득세를 하고 점쟁이가 맞추고, 초월로 하나님을 찾으러 가기 때문에 초월로 찾아가는 길에 많은 샛길을 둡니다. 하나님 찾아가다가 남산으로 가고, 미아리로 가게 만든 것입니다. 가다가 샛길로 빠지게 사람을 겁줍니다. 부적을 사면 일이 깨끗해지고 예수를 믿으려면 꿈에 나오고 도깨비가 들락거리고 실제로 초월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겁주고 하나님께 가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안 그럽니다. 초월이라는 것이 본질로 이해됐던 인간들이, 과학 문명의 발달로 두려움과 무서운 것 앞에 무릎을 꿇던 사람들이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꼭 있어야 맛이고 천국이 꼭 있어야 되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천국을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추적하는 선의, 박애주의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하며 사람을 막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꼭 교회에 가야 되는가? 교회에 가는 꼭 같은 마음으로 이웃에게 잘하고 성실하게 내 인생을 살고 착하게 사는 이것이 예수의 마음이요, 보살의 마음이 아니겠느냐? 라고 얘기하는 데 이미 귀가 많이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조금 전에도 얘기한 것과 같이 기독교의 본질이 은혜, 즉 은혜를 베푸시는 분, 그 분이 존재와 권위와 의도와 동떨어진 개념으로만 떠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예수를 믿는 기쁨도 주를 사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기쁜 것입니다. 어느 기도원에 갔더니 마음이 사이다가 튀는 것같이 올라오더라는 겁니다. 집사님도 그저 그 기도원에만 가시면 이번에 콜라같이 솟구쳐 올라올 겁니다. 내 마음의 기쁨, 내 마음의 평안, 내가 착한 일을 한 심리적인 보상, 이런 데로 은근히 밀려들어와 버렸다는 겁니다.

이 모든 양면을 치기 위하여 오늘 사도행전 10장은 끝에 이 모든 초월이 화살표 노릇을 해서 은혜를 베푸시는 이와 그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내용으로 몰아갈 뿐 아니라 그 말씀으로 전달된 복음이 개념과 관념과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있는 것임을 선언, 확인하기 위하여 초월자이신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도장을 치는 겁니다. 이것이 고넬료 집안의 회심에 있어 성령 세례가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오늘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할 때 신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두 가지 사조입니다.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가 그렇습니다. 신비주의로 넘어가는 것, 즉 신비롭다든가 놀랍다는 것으로 신앙의 내용과 대상을 삼으려는, 기독교와 전혀 상관없는 무속 신앙으로 빠지지 마시고 또 이것을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이 일하시는 것과 동떨어진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하여 선한 사람이 되고 의로워지고 깨끗해지고 사랑을 행하는 도덕군자가 되는 것으로부터도 여러분은 구별해 내셔야 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알며 그 분의 뜻 안에서 자라나가는 싸움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기독교의 본질을 은혜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오해될 경우 특별히 자연주의에 물든 현대식 생각을 하면 기도가 가장 많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기독교가 살아계신 하나님, 그리고 그의 뜻, 그의 계획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천국이라든가, 하나님이라든가, 상이라든가, 벌이라는 것이 인간을 거룩하게 살게 하고 선하게 살기 위한 격려로서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면 기도가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기도란 독백이 됩니다. 자기 최면이 되고 그리고 더 크게 오염이 되면 기도는 자화자찬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도를 가만히 들으면 자꾸 설명조가 되어 있습니다.

애가 부모한테 와서 용돈 달라는데 자꾸 무슨 논문을 발표하는 식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 제가 사탕을 하나 사먹어야 되겠으니 100원만 주십시오. 이 사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식으로 오늘날 기독교의 기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도들이 너무나 장황하고 너무 잘난 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벌써 자연주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한 번 어느 모임에 갔다가 어느 교회 장로님을 만났는데 그 장로님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지옥 가시 싫어서 믿습니까? 지옥 가기 무서워서 믿으십니까? 왜요? 그랬더니 자기가 아는 어떤 장로님은 치사하게 지옥 가기가 무서워서 예수를 믿는데요 글쎄. 기독교가 그렇게 값싼 것입니까?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러면 장로님은 왜 믿으세요? 하고 물으니까 사람이 거룩하고 멋 있어지는 것, 그리고 훌륭한 것을 위해서 믿는다. 그래야 더 맞지 않습니까? 합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이단이요. 그랬더니 그냥 눈이 나왔다 들어 가더군요. 속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장 많이 속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이 그런 원색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치사하다는 생각이 자꾸 드시죠. 결국 자연주의가 갖는 최대의 문제는 인간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이 납득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을 이유도 없고 기도할 이유도 없습니다. 도움을 청할 이유가 없고 이 세상에서 떳떳이 살다가 떳떳이 죽으리라 이렇게 밖에는 안 갑니다. 떳떳이 돌아가십시오. 떳떳이 지옥에 가셔서 떳떳이 비명 지르시고 영원 무궁토록 고생을 하십시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도전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잇습니다. 조심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 신앙의 설명은 내가 어디에 왔느냐? 무엇을 얻었느냐? 무엇이 진짜냐? 하는 개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게 된 주체자에게 언제나 시선이 돌아가도록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10장 사건 전부가 그렇고 성령 오심에 대해서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행 10:44,45)

여기는 성령이 오신 것이 초점이 아닙니다.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시는구나. 여기에서의 초점은 성령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도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를 잘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우리가 지금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늘 조심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표현 중 가장 핵심이 되는 아주 대표적인 구절을 하나만 더 찾아보고 오늘 설교를 결론 맺으려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1:12로 가십시다. 이제 여기 사도 바울의 신앙 고백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지금까지 한 설교를 염두에 두시고 추적을 해 주십시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2-16)

초점이 어디 있나 보십시오. 이 구절은 늘 이렇게 오해될 수 있습니다. 야! 사도 바울은 겸손하구나. 참, 대단하구나. 그는 어떻게 이런 좋은 신앙을 가졌을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갖고 있는 이 결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어떻게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가?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데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이 자리에 왔는가에 초점이 가 있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온 것도, 하나님이 나의 이 꼴로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은혜 베푸셔서 좌절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찾아 나오게 하려고 나를 세우셨다라고 증거하는 것으로 중요한 내용을 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주로 성경에 기록된 위인들을 만나기만 하면, 예를 들면 바울, 베드로, 모세, 다니엘 이런 사람들을 생각만 하면 약코가 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들은 이렇게 뛰어났는데라고 밖에 비교를 못합니다. 그 사람을 그 자리에 인도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감춰진다는 말입니다. 기도를 방해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용기가 꺾입니다. 도리어 난 이 꼴로는 못 나가. 그 꼴이니까 오셔야 합니다. 난 술 끊기 전에는 못 가. 술을 못 끊으니까 오셔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기침이 계속 나서 병원에 못 가 하는 것하고 똑같은 말입니다. 나 계속 입에서 피가 나와서 병원에 못 가겠어. 왜요? 창피해서. 말이 안 맞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이 바울을 부른 하나님, 오늘 베드로와 고넬료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되게 하시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를 그리로 몰고 가시는 하나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그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모든 능력과 지혜를 동원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다시 용기를 갖고 그 은혜의 부름 앞에 희망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 앞에 나가게 하는데 방해하는 어떤 것들이라도 그것은 시험이요, 올무요, 유혹입니다. 가짜입니다. 지지 마십시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이 결론을 여러분의 결론으로 삼고 갑시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딤전 1:17)

바울에게가 아니고 베드로가 아니고 그것을 베푸시는 이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제 우리를 사랑과 은혜와 긍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복 주시는 하나님, 그것이 오늘 우리가 본 고넬료 집안의 회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베푸신 능력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있게 했고, 여러분을 향하여 열려 잇는 것이요 약속된 것이요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외면하지 마십시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 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아니라”   사도행전 11:15-18

사도 베드로에 의해서시행된 고넬료 집안의 회개는 당시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심각한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11:1 말씀을 보시면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행1:1-3)라고 공격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자신이 그 일을 임의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일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요구하시고 진행시키시고 결과하신 일인가 하는가를 우리가 10장에서 본 바와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그 일에 대한 최종적인 증거로 성령 세례를 제시합니다.

오는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아직도 유대주의라는 껍질을 벗지 못해서 이방인의 구원 얻는 문제에 관한 시비에서 베드로가 한 일이 합당한 일이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일이다라는 항복을 받아내는 증거가 무었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쉽게 성령 세례라 하지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 베드로가 되어진 일을 설명할 때 여러 모양으로 심적 간섭이 있었던 것을 증명합니다. 베드로 자신의 환상, 고넬료가 받은 환상, 그가 그 지시를 따라 사람을 보내고 베드로가 찾아온 사람들을 찾아갈까 망설이는 때 있어서 성령님의 지시, 그 다음에 고넬료 집안에서의 설교 중에 전에 우리가 받은 것과 동일한 성령강림이 있었다 하는 여러가지 증거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즉 성령 세례뿐 아니라 그 앞에 제시된 환상과 여러 가지 신적 개입, 계시 사항들이 여기 나열괴고 있는데 왜 그것들이 앞에 있는 것과 뒤에 있는 성령 세례와 구별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런 것들이 전부 합세해서 베드로가 한 일에 정당함을 변호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만일 베드로가 설교하는 중에 고넬료 집안에 내린 성령강림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일이라는 최종적인 증거였다라고 하면 성령강림의 그 무엇이 증거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일 다만 신비롭고 초월적인 것이라는 것 때문에 신적 제가로 인정이 된다면 앞에 있는 것들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 고넬료가 본 환상, 성령님의 지시에 따라서 그 곳에 가는 일 등과 뒤에 있는 성령 세례가 왜 구별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본문은 베드로가 경험했던 신적인 사건, 신적인 간섭에 의한 인도함보다는 고넬료 집안 식구들에게 내린 이 성령강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모두로 하여금 수긍케 하는 경정적인 증거로 제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 세례라는 것이 그 앞에 있었던 베드로가 본 환상이나 고넬료가 본 환상 같은 환상과 더 구별되고 더 우월한 초월적인 사건이다라고 보기보다는 이 증거가 초월성에 그 근거를 두어 등장하는 거이 아니고 다른 의미 때문에 최종적인 증거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됩니다.

우선 이렇게 추적을 합시다. 성령 세례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그렇게 강경하게 반대하던 모든 초대교회 유대인들을 잠잠케 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한국교회도 근래에 성령 세례라는 것이 모든 교회와 모든 신자들에게 커다란 문제로 등장했었고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문제로 혼란을 빚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에 의하면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행11:16). 이겁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장에 기록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주님의 약속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원래 그 말을 한 첫 번째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마태복음 3장 말씀을 봅시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여기 바로 세례 요한 자신이 예수님과 자신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합니다.

그런데 우선 성령 세례라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요한이 설명한 것으로부터 풀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이 자신과 예수님을 구별하는 것으로써 말할 것입니다. 나와 그는 다르다. 나는 메시야가 아니고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메시야인데 그가 메시야인 표는 나같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성경 세례라는 것이 메시야의 메시야 된 증거로 사용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메시야란 우리를 구원케 하실 분을 말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꺼내시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져내시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일을 이제 이루실 분이 메시야입니다.

그런데 왜 나는 메시야가 아니냐? 그는 물로밖에 세례를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회개케 하는 세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등장했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유대인들은 그들이 가졌던 오해된 선민 사상으로 말미암아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이 이미 하나님의 백성된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저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저들을 돌아보는 일이지 저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 되는 대상이라는 것은 저들이 인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요한이 와서 너희도 이방인과 똑같이 구원이 필요한 족속이다라고 공격을 하는 것이 물세례입니다. 물세례라는 것은 너희도 물로 씻어야 된다. 너희도 더러운 존재다. 너희도 죄인이다. 너희도 구원이 필요한 존재다. 너희도 회개해야 되는 존재다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물세례라는 것을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주는 물세례는 너희도 죄인이다라는 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 성령 세례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표입니다. 요한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도 구원이 필요하다라는 것까지밖에 일을 못하지만 메시야는 우리를 정작 구원해 내실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바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이 성령이 그에게 와 계시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는 메시야가 아니고 이제 메시야가 올 텐데 그 메시야는 너희를 구원할 분이다 하는 것을 하면 나는 물로밖에 세례를 주지 못하지만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다 이겁니다. 물세례라는 것은 그것이 무슨 결과가 아니라 너희는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다라는 표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성령 세례는 성령이 와 있다. 그 분이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0 와 계신다. 구원을 얻었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 됐다라는 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자신과 메시야를 구별하며 세시야의 메시야 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성령 세례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확인하기 위해서 마태복음의 말씀을 계속 보십시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3:7-10)

유대인들아 너희들을 다 구원 얻은 백성이고 너희에게는 구원이 필요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지 말라. 그 말은 너희는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지 말라. 너희도 구원을 얻어야 되는 사람이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 누구를 통해서만 가능하냐? 내가 주는 물세례로가 아니라 메시야가 오시면 그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12). 그래서 여기 성령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는 이제 정작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벌이 있을 뿐입니다. 성령과 불입니다. 성령은 구원받은 표요, 불은 그렇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갈 수밖에 없는 영원한 형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12절에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시리라.”(마3:12)

그래서 성령을 받은 자는 구원을 얻은 자요 그렇지 않은 자는 버려진 자, 불로 심판을 받을 자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일을 하실 분입니다. 이것이 성령 세례가 갖는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이 의미하는 가장 핵심되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설명하면 세례라는 이 말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봅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여기 세례의 두 국면이 등장합니다. 세례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 세례를 받는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이해를 하십니까? 성령으로 충만해진다. 그런 느낌이죠? 성령 안에 내가 잠긴다. 다시 말해서 “baptized with holy spirit.” 이것이 보통 우리가 성ㄹㅇ 세례라고 말할 때 이해하는 표현입니다. 성령으로 받는 세례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았다 그러면 대표적으로 여러분은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을 상상하실 겁니다. 방언을 하고, 마음의 뜨거움이 있고, 예언을 하기도 하는 그런 성령 은사와 함께 연관해서 성령 세례를 일차적으로 이해하실 겁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13에 있는 말씀은 baptized with holy spirit가 아니고 baptized by holy spirit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라는 말 속에는 무엇으로 충만해진다는 끗 외에 그 세례를 받는 그 분에 의해 어디로 옮겨 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령 세례를 받는다는 말 속에는 성령을 받는 것이 있고 성령에 인도함을 받아 어디로 옮겨지는 것인 있습니다.

여기서는 baptized by the holy spirit into the body of the christ로 갑니다. 여기서는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다 이겁니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옮겨져 그리스도의 몸으로 왔다는 것도 성령 세례라 그럽니다.

이 설명이 왜 필요하냐면 세례 요한이 자기의 세례를 설명하는 것과 예수님이 그의 세례를 설명하는 것 속에는 이 두 국면이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이 물이 너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도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겁니다. 이 세례를 받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을 얻는 것으로 이것이 너희를 보내지 못한다 그것은 메시야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과 내가 다른 것이 바로 이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왜 물 세례를 주냐? 나는 너희를 십자가로 보내기 위하여 이 세례를 준다는 것입니다.

너희들도 정신 차려라. 너희가 유대인이라는 것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없다, 즉 구ㅜ언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희의 오해다는 것입니다. 너희도 이 세례를 받음으로 너희가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십자가 앞으로 가라. 이것이 세례 요한의 물세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여 사람은 성령안에 있든지 아니면 불 안에 있든지 둘 중 하나다 이겁니다. 이제 불 가운데 가서 영벌 속에 있든지 성령 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세례는 구원을 결과하나 그것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영벌을 결과로 최종적인 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세례를 받았다 하는 말 속에는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 11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것이 다른 사건보다도 우월한 형태로써 최종적인 재가를 하는 힘과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 고넬료 집안이 이방인인데도 불구하고 찾아가고 우리 유대인에게만 허락된 신앙을 그들에게도 나누려고 했던 이유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저들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무엇으로 하느냐?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더라 이겁니다. 성령 세례라는 것이 경험되고 그 사건의 신비함, 그 사건의 신적 요소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내용 때문에 고넬료 집안 사건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논쟁은 종식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면 우리는 종종 복음서나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와 같은 힘과 간섭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지 않는가? 그때 있었던 기적과 그때 있었던 위로와 격려와 나타남을 주시지 않는가라는 불만을 갖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같이 고넬료 집안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표로 보낸 성령 세례는 사건의 모양 때문에 빋이 나는 것이 아니라 내용 때문에 빛이 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상기하고 그 내용을 확인케 하기 위하여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이 순간도 결단코 하나님의 간섭과 복주심과 우리와 함께 하심이 약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 보십시다. 종종 이런 문제는 신앙을 더 깊이 소유하려는 사람 가운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기적이 아직도 있는가? 하는 아주 원색적인 질문입니다. 기적이 아직도 있는가?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소경이 눈을 뜨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있는가? 물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알게 하시고 약속하신 모든 것을 우리로 하여금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그 내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의 사건을 동시에 병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슫를 보내사 우리를 죄의 사슬과 형벌의 자리에서 꺼내는 것을 우리로 분명히 깨닫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붙잡고 있는 마귀를 쫓아내는 사건들을 훨씬 많이 일으키시고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들을 도입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우리의 영적 상태가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있는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 주를 알며 주의 자녀로 출생한다는 것을 우리로 알 수 있게 보여진 사건에 불과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기적은 오늘날에도 그것보다 더 풍성하게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일입니다. 주를 모르고 영적으로 앉은뱅이, 장님이요, 영적으로 문둥병 걸렸던 자들이 주를 알고 깨끗해지고 주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며 영원한 소망 가운데서 출생하는 일이 매일매일 있습니다. 오늘도 아마 여러분이 그런 일을 시작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무엇으로 나타나기를 소원하느냐 하면 그것이 우리가 감지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육체적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같이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의 핵심과 근거는 초월적인 내용이 아니라 초월 자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비함이 기독교의 근거가 되고 자연을 초월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유일한 내용이 된다면 신비함, 장엄함이 우리를 압도하고 그것이 우리를 몰아가는 것에 불과하지 거기에 무슨 약속, 소망, 믿음이라고 얘기할 것이 없어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이 본문에서 꼭 기억해야 되는 중요한 내용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당시 고넬료 가정에 내렸던 성경강림과 그들이 받았던 성령 세례는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받은 세례, 성령과 불로 받는 세례 중에 성령으로 받는 세례를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알며, 우리가 영원한 소망을 갖고 있으며,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에 가면 그 말씀을 이렇게 멋지게 설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ㅇ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11). 이것은 모든 신자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것을 외적 어떤 사건과 기억할 만한 경험으로 ㅇ받은 것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주를 믿는 모든 신자에게 주의 영이 와 있고 주의 영이 와 있음으로 인하여 그의 존재는 그 자신 혼자가 아닙니다.

신자란 이상한 존재입니다. 신자란 내가 나이면서 동시에 이제 성령님입니다. 나는 나고 동시에 성령님이 와 있습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2:20에서는 사도 바울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인지 그리스도인지 모르게 되는 겁니다. 잘난 척하는 차원에서가 아니고 운명이라는 차원에서, 존재라는 차원에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그런 평가를 받습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나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주님인지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영광된 보좌 우편에 계시다면 나도 거기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7장 마지막에 나타나는 사상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같이 저희도 우리와 하나 되게 하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베푸시는 세례, 주의 사역의 핵심되는 내용입니다.

즉 성령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입니다. 그 둘을 갈라놓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가 저주받을 자리에 갈 수 없는 것같이 사망에 들어갈 수 없는 것같이 우리가 그렇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얘기하는 성령 세례입니다. 물론 성령 세례를 외적인 하나의 신비한 경험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렇게 합니다. 고넬료 집안의 이 일을 왜 밖으로 보여야만 됐습니까? 많은 사람에게 이 내용을 분명케 하기 위해서는 이 일을 바깥으로 보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방인도 하나님이 불렀다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고넬료와 그 식구들 당사자뿐 아니라 베드로도 알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나타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것을 나타내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꼭 우월하다는 끗은 아닙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 봅니다.

요즘 서구식 사고방식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제일 나쁜 것 중 하나가 무분별하게 전통 문화가 혼동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영어로 얘기하면 Thank you라는 말하고 I love you라는 말의 범람입니다.

원리 한국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식이 부모에게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다든가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아시는분 있습니까? 뼈대있는 집안에서 태어나신 분이면 다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가 부모 된 책임을 하는 데 있어 동양 사상은 굉장히 부모의 책임이 강조되어 있고 자식보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라는 것 이상으로 부모가 자식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부모된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아무리 대단한 일을 자식에게 해주어도 그것에 대하여 자식이 고맙다 하면 섭섭한 것입니다. 그러면 너는 내가 그 정도도 안해 줄 줄 알았단 말이냐?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새는 햄버거 하나 사주어도 고마워요 아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더 끔찍한 것은 부부가 종종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얘기를 해야 된다는 이 슬픈 현실입니다. 왜 이런 말을 굳이 해야 됩니까? 관계가 아슬아슬한 것입니다. 오늘 깨질까 내일 헤어질까? 이렇고 있을 때만 “난 당신을 사랑해” 하지 부부란 원래 우리는 헤어지지 못하는 걸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우선 “난 당신을 사랑해” 아침에 자나 깨나 불조심, 자나 깨나 I love you 이런 것은 없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것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헤어질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어간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시지 않는가 하는 뉘앙스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그 정도로밖에는 지금 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가 체험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나뿐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모두 확인하는 방식으로만 나타나야 아, 드디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구원했구나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체험이 있는 사람은 그 수준이기 때문에 체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저는 그 체험이 없죠. 물론 이건 제가 너무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센사람에게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센사람에게 이 성령의 충만, 성령의 세례, 혹은 성령의 힘주심이 나타나는 때는 이런 때입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때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어떤 중요한 일을 맡기려고 할 때 그런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을 맡기려고 할 때라는 데 넘어가지 마십시오. 중요한 일을 맡기에 너무 변변치 못해서 다시 확인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를 가야 되는데 지금부터 갈 거리가 멀어서 주유소에 들러서 기름 넣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체험하셨다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체험하지 않은 사람보다 체험 자체로써 신앙이 우월하다는 것은 완전히 몰상식하신 것입니다.

지금 사도행전 11장 사건을 놓고 지금까지 하는 예기는 결국 성령 세례가 증거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냐?라는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로 나타내었던 외적 사건들이 갖는 내용에 있어서 지금 초대교회와 비교해서 약화된 것이 있냐? 이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살아야 하는 내용 중에서 그때 성령 세례를 충만하게 외적 사건으로 받은 사람과 비교해서 지금 현대교회가 초대교회보다 약화된 것이 있냐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다 널브러져 있냐는 것입니다. 전부 사건으로 쫓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초월성, 신비함, 체험이라는 사건과 모양으로 쫓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큰 시험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속에는 그 사건이 어떤 내용으로 가느냐보다는 인간적 차원에서는 해결될 방법이 없는 신적 개입으로 해결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가지신 그 관심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쓰려는 것입니다.

내일이 우리 애의 대학입학 시험입니다. 그래서 그 전날 철야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이번만 붙게 해주시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이런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일에 신적 개입을 요구함으로써 거기에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 하나님은 내 편이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다. 이것을 확인하려고 그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면 신앙이 아주 개판이 됩니다. 신앙은 지금 당하는 일로 하나님이 나를 성경이 요구하는 그 좌절이 있든 고통이 있든 그것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가 성경과 맞는다면 그 결론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적 개입, 우리가 요구하는 초월적인 방법으로 신적 개입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실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결론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뭘하고 있느냐 하면 성경이 요구하는 결론,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우리의 영적인 깊어짐, 영적인 성숙함이나 거룩함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라는 초월에다만 목표를 두고 신앙의 모든 기초와 내용을 삼고자 합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의 욕심을 걸어놓고 투덜거리는 것만 나옵니다. 말도 안되는 것을 걸어놓고 이것을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해 주면 하나님이 나를 안 사랑하는거다 이겁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히고 있는 단체 중 하나가 베뢰아 파입니다. 누가 그리로 가느냐 하면 일차적으로 병이 들었는데 낫고는 싶지만 병원에서 못 고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일단 내 병 낫게 해주는 것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든 사단이든 어떤 개 뼈다귀;든 다 좋다 이겁니다. 내 병만 낫게 해주면 나는 뭐든지 갖다 주겠다 이겁니다. 그래서 어디든지 간다는 것입니다. 순교라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나는 “내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곳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신앙은 없어지고 나를 영화롭게 하고 내가 소원하는 것을 이루어 준다면 강아지면 어떻고 염소면 어떻고 코브라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제일 무서운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동일한 맥락입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부여주신 목적과 내용으로 성경에 꽉 찬 채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다 알 수 있습니다. 읽어보면 됩니다. 여러분 다 아십니다. 그런데 안하고 있습니다. 왜 안합니까? 지금같이 이렇게 말도 안되는 것을 걸어놓고 하나님과 실랑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람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내 욕심을 걸어놓고 하나님 있나 없나 확인시켜 주세요, 밤낮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이걸 한 번 해결해 보시고 없다면 그만두십시오.

나를 이번에 진급하게 해 주시면 내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고 안해 주면 꽝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갖다 걸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되면 자기가 한 것이고 안되면 하나님 탓이고, 그래서 늘 신자들에게 감사도 없으며 충성도 없으며 오직 투덜대는 것남 남아 있습니다. 모든 잘못된 것은 하나님 탓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얘기합시다. 혹시 여러분 중에 예수를 믿으면 혹 진급이 잘 될까, 걸린 병이 나을까, 좀 잘먹고 잘살게 될까, 애가 공부를 안해도 좋은 학교에 갈까 하는 기대 속에 나왔다면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딴데를 가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제가 분명히 여러분에게 성경적으로 약속할 수 있는 것은 훨씬 고된 인생이 여러분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이 여러분을 고되게 훈련시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과 복주심과 인도하심과 그 어느 것도 그때보다 강화하면 강화했지 약화시킨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복된 약속과 인도하심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의 양식과 자기의 힘으로 삼으며 그것을 살아가기 위한 목표와 원리로 사는 일에는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개하셔야 됩니다. 힘 있는 산 자로 성공하시고 성경이 애기하는 것같이 성령 세례를 받은 자로 성공하시고 성경이 얘기하는 것같이 성령 세례를 받은 자로서의 여러분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하시고 행하셔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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