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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객관성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1692 추천 수 0 2009.06.26 22: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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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3:13-41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73 / 1989.09.0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아디독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약 사백오십 년간)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가다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갈릴리로 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오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또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 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나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사도행전 13:13-41

모든 설교가 그렇듯이 기독교의 설교는 언재나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 13장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이르도록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전도여행을 다니며 많은 사람을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인도해 냅니다. 그래서 여기 기록된 사도 바울의 설교는 앞에 있었던 베드로의 설교나 스데반의 설교보다 더더욱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도 지금 당장 복음을 전하여 함께 예수를 믿고 싶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남편일 수도 있고 혹은 자식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가장 가까운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놀라는 것은 성경에 있는 대로 아무리 흉내를 내고 열심을 내도 늘 우리가 기대했던 결과에는 미흡한 결과를 보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런 일 때문에 우리 자신은 영력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을 하게 되고 더욱더 장로님이라든가 목사님을 요구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무협지 식으로 얘기해서 기술온 괜찮은데 공력이 부족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식의 발상이 신자들에게 생각보다 많이 있지 않는가 샆습니다.

그래서 여기 사도 바울의 설교를 우리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전하며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하는 차원에서 살펴 보려고 합니다. 그 사도 바울의 설교가 무엇을 전하며 어떻게 전하는가 하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떻게 하면 그 결과를 얻어내는가 하는 차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선 사도 바울의 설교 방법론이라든가 하는 초점을 추적하기 전에 도대체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일반적인 질문으로부터 오늘의 이 내용을 추적해야 되겠습니다. 진리라는 것이 있다면 진리는 진리 된 절대성을 가져야 됩니다. 어느 때는 됐다가 어느 때는 안됐다가 하는 것을 우리는 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리 되는 절대성, 즉 절대적인 권위를 가져야 하고 덧붙여 보편성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은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보편성을 가지지 않고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된다고하면 능력의 차이이지 진리라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라면 절대성을 가져야 하며 보편적 객관성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그것을 가졌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지 의심스로운 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이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비난의 질문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보여 보시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이 진리 되는 것으로 내용을 삼고 있다면 어찌하여 의롭고 선한 것이 정당한 도움을 받지 못하는가,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그가 요구하시는 것에 대하여 상을 주는 분이라면 어찌하여 흉악한 무리들이 권세를 잡고 편하게 살고 있는가 하는 여러 가지 모순되어 보이는 일둘로 인한 당연한 질문 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경진리의 객관성을 의미케 하는 분명한 난제가 있습니다. 바로 이 문제가 오늘 사도 바울의 설교에서 명백하게 설명이 되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은 이 기독교 신앙, 우리가 믿는 기독교적 진리에 절대성과 보편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풍성하고 충분하도록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 그것이 우리가 요구하는 것과는 참으로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 있었던 베드로의 설교나 스데반의 설교를 이 사도 바울의 설교와 비교하면 비슷해 보입니다마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에서 했던 설교는 이것 때문에 시작됐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를 받다 기쁨 속에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일반인들이 너희가 새 술에 취했다고 놀렸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 문제로부터 출발해서 ‘이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은 증거이고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지 아니하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가셨기 때문에 그가 거기서 아버지께 요구하여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으로 우리가 이 성령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망 아래 있지 않고 부활했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일이 만족할 만한 대속 사역이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그를 너희들이 죽였다. 이 예수야말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은 분이고 우리 죄를 다사하셨으며 만족할 만한 구속 사역을 했다는 증거로서 부활하셨고 성령이 오신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다 회개해서 이 분을 믿고 이분을 힘입어 구원을 얻으라’고 설명합니다.

언제나 내용은 그것입니다만 초점이 조금씩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확실성, 충족성을 얘기하며 그분이 메시야였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에 오면 조금 시각을 달리합니다. 스데반 설교의 가장 중요하고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모세에 관한 얘기인데 모세를 등장시키는 이유의 초점은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이 애굽에서 종노릇 할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기 위해 모세를 보내자 너희 선조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에 온 많은 하나님의 종들도 너희 열조들이 받아들인 적이 없다. 너희도 똑같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들의 판단과 너희들의 생각이 옳지 않은 적이 훨씬 많았었다는 것을 기억해서 지금 너희가 옳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것도 혹시 틀리지 않았는가 다시 한 번 생각을 해야 옳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 예수가 메시야이며 너희가 기다리던 분이다. 이 분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옛날에 모세가 왔을 때도 너희들의 열조가 반대하고 많은 선지자를 보냈을 때도 반대한 것과 같이 너희도 지금 꼭 그렇게 하고 있단다.’ 이것이 스데반 설교의 초점이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얘기를 하지만 그분을 설명할 때 무엇을 지적하며 무엇을 증명해 보이려고 했는가 하는 데서는 시각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데 이제 사도 바울의 설교를 살펴보면 바울은 앞에 있는 두 설교와는 훨씬 다른 차원에서 설교를 하게 됩니다. 바울은 스데반이 ‘예수를 믿어라 너희는 너희 열조와 똑같이 예수를 거역하고 있다’ 라고 하는 말을 예전에 직접 들었었고 그렇게 지적한 스데반을 때려 죽인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자기가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바로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13장에서 하는 설교의 진면복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똑같은 설교를 한다고 하면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가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내가 그의 설교를 들었지만 그때는 잘못 알아들었다. 그 이유는 그분이 설교를 할 때 이러저러한 부분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할 때는 이렇게 이렇게 하리라. ’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 아닙니까?  하지만 사도 바울은 사실 스데반이나 베드로가 한 설교와 거의 대동소이한 설교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설교를 똑같이 다시 할 수 있었느냐, 말하자면 자신은 옛날에 그 설교를 듣고도 변화하지 않았으면서 그 설교를 발전시키지도 않고 정교화하지도 않고 어떻게 다시 그 설교를 할수 있었느냐 하는 물움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이메시지가 갖고 있는 초점이 바로 바울이 깨달은 부분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무엇을 깨닫느냐 하면 모든 메시지는 그것을 듣는 사람이 어떻게 알아 듣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13:16-41까지 보시면 처음에는 전부 하나님이 주셨다 보내셨다 하는 말뿐입니다.

‘모세를 보냈다, 사사를 보냈다, 다윗을 세웠다, 요한을 보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 하나님이 주셨다, 보냈다, 이 일을 이루셨다.’ 이것이 주조을 이루고 그 다음에 27-37절까지는 전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 일이 이루어지고 성경에 예언한 대로 이 일이 있었다. 이런 얘기들입니다.

말하자면 같은 내용을 얘기 함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겨홈으로 말미암아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다’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납득을 할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 할 것인가라는 차원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강력하게 찾아오셨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강하게 침입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 되는 기독교적 진리의 절대성과 보편성입니다.

우리가 보통 보편성을 얘기하고 객관성을 얘기하자면 쉽게 얘기해서 ‘내가 주를 찾고 하나님을 알고 싶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오리까?  기도를 하오리이까?  성경을 읽으리이까?  주의 요구하신 법대로 살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야 합니까? ’ 하는 식입니다. 복 받고 병이 낫고 하는 것, 이것이 누리가 우리 마음속에 갖고 있는 진리가 가져야 하는 절대성이요 보편성입니다. 누구나 주를 사모하며 열심을 내면 이 일들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여러분도 생활해 보시면 그런 방향으로 기독교 진리가 훨씬 더 증명되지 않는 것을 경험하셨을 겁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은 어대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찾는 자는 차별이 없으며 누구나 항복하고야 만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진리 됨의 절대성과 보편성이 있습니다.

자, 이것이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근본적인 차이로 말미암은 것임을 우리가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됩니다. 우리는 기독교라는 것을 우리가 찾아가야 되고 우리가 깨우쳐야 되고, 말하자면 세상 식으로 해서, 득도의 과정에 오르는 것으로서 생각합니다. 내가 요구하고 내가 열심을 내면 정답이 오고 깨우쳐져야 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늘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는 미련하며 장님이며 죽은 자라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찾고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라는 방향으로 오지 못하며 하나님 그분을 찾지 못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그런 의미에서 지금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을 기독교 신앙을 의미화하는 삶들입니다. 보통 신신학이라 이름지어지는 것으로서 기독교의 비종교화, 비신화화, 의미화 작업들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히브리 민족의 민족 종교라는 것입니다.어느 민족이나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히브리 민족의 종교가 왜 이렇게 온 세상에 제일 많이 퍼졌느냐?  모든 민족이 가졌던 종교 중에 가장 고급하기 때문이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고급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급하다는 것은 그 정신적 수준, 윤리성과 도덕성에서 고급하다는 것이 되겠지요.

그래서 뭐라고까지 얘기하느냐 하면 어떻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했으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를 건너게 했겠는가?  그것은 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 기록을 했느냐?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 민족과 자기 백성, 특별히 후손들에게 그들이 넘겨 주고 싶은 정신적인 문화유산, 정신적인 고급한 사상을 그들의 말로 아무리 얘기해도 잘 받아 들이지 않을 테니까 그것을 신화화 했다는 것이지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이것 하라고 했다고 함으로써 그 내용을 수납하는 삶들이 종교적 분위기로 인하여 얼른 그 내용을 자기 것으로 수납하게 하기 위하여 종교화, 신화화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더 대표적인 것으로는 예수님을 예로 들면서 예수님이 어떻게 죽었다 살으셨겠는가?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다고 주장하게 된 그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감동의 정도를 읽어 달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살아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여길 만큼 주님의 가르치심에 매료된 그것이 중요한 것이니까 오는날 우리도 천국이 있다 없다, 하나님이 뭘 만들었다, 아니다, 예수님이 정말 살았다, 안 살았다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고급한 정신 문화, 고급한 종교성을 우리도 우리 안에 되살려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이 불트만이라는 학자를 대표로 하는 무서운 비종교화 운동입니다.

이것이 누구한테 가장 전염성이 강하냐 하면 서울대학 출신들한테 강합니다. 지식인들에게 이 사고방식은 굉장히 조심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능성으로부터 출발을 하고 인간이 무엇을 얻는 작업, 무엇을 추구하는 것을 굉장히 가치 있게 ‘내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옳은 것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라는 것을 근간으로 해서 객관성을 요구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에게는 객관성이 없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는 죄의 노예이며 자기가 신이 되어 버린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고 방식은 삐뚤어져 있습니다. 죄에 찌그러져 있습니다. 그는 정당한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객관성, 보편성, 진리의 절대성을 하나님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 쪽에서 제시 하는 것으로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은 어떻게 증명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누구에게 주었는가 하는 점에서입니다. 죄인에게, 그를 찾지 않는 자들에게입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 진리의 보편성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으로 가 보십시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을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2-5)

이 5절 말씀이야말로 예수님의 사역을 대표하는 것이고 그가 하신 사역의 내용, 즉 복음의 진수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며 복음의 진리성이 갖는 절대성과 보편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지 잘 보십시오. 여기 등장하는 모든 설명은 그 스스로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는 무능한 자들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소경이 어떻게 보며 앉은뱅이가 어떻게 일어나며 귀머거리가 어떻게 듣고 문둥이가 어떻게 낫겠습니까?

말하자면 기독교의 진리 됨은 그것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그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지 않고 반대하는 자에게도 복음이 와서 그를 침노한다는 데에 그 보편성이 있다고 성경은 설명하는 셈입니다. 스데반이 한 설교를 듣고 그 설교가 자기를 향한 설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몰랐던 정도가 아니라 거기에 화가 나서 스데반을 죽인 입장이었던 사도 바울이 나중에 깨닫고 자기가 틀렸음을 알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태의연해 보이는 설교를 다시 들고 나서는 이유는, 모든 복음이 갖는 그 진리의 절대성과 보편성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내용이 타당하냐, 타당하지 않느냐로 채색되어 있거나 무장하여 있지 않고 그것 자체로 찾아온다는 것에 그 복음의 복음 된 특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내용상으로 감동을 받지도 않았고 거기서 흥미를 가지지도 못했지만 사도 바울이 깨달았을 것은 ‘그때 내가 하나님을 반대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고 핍박하고 있을 그때에, 즉 여기 식으로 하면 가난한 자였으며 소경이었을 그때에, 복음은 나에게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다메섹도상에서 사건은 일어났지만 거기서 변한 것이 아니라, 빛을 보고서 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데반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쳐들어 오신 그 장면에서 이미 자기가 복음의 사정권 내에 들어갔고 피격 되었고 드디어 그 앞에 꺽꾸러지게 되었더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 바울이 이 자리, 비시디아 안디옥, 지금의 소아시아 터어키의 내부에 있는 여기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도 그 내용이 객관성을 일반인에게 증거해 낼 만한 어떤 논리성이 결여되어 있을지라고 이렇게 자기가 서서 이 말씀을 하는 것으로 여기까지 하나님의 손길이 와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설교가 갖는 힘이고 배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이고 보편성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믿었는가를 되짚어 보십시오. 어느날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어느날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이해하기 좋게 만든 하나의 설명이고 정리한 부분일 뿐이지 가장 결정적인 것은 여러분이 믿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까지 오셨다는 그 사실입니다. 이것 때문에 기독교는 언제나 역사성이라는 것과 함께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시간과 장소입니다. 시간과 장소가 없이는 인간은 존재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곳에 찾아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역사성이라는 것이 배제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전 말씀드린 기독교의 가장 큰 적,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을 의미화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역사성이 없어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을 의미화니까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것이 꼭 십자가일 필요는 없지요. 부처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의미화를 하면 인간은 결국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윤리와 도덕으로 빠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복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윤리성과 도덕성이 혼자 존재 하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복이라든가 심판이라든가 이런 모든 것이 혼자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과 언제나 불가분의 관계로 존재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소경에게, 귀머거리에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차별이 없이 하나님이 찾아 오신다는 데 보편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찾아가신 심령들이 그 앞에 항복한다는 데에 진리의 절대성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도 배운자, 못 배운 자, 가난한 자, 부자, 건강한 자, 병약한 자, 차별이 없이 모두 하나님 앞에 항복되어 나왔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셔서 그 앞에 무릎 꿇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교 신앙, 우리가 믿는 기독교 진리의 보편성이요 절대성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 역사성, 하나님이 찾아 오셨고 나를 만나셨으며 하나님이 나를 항복시키셨다는 이것을 복음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세우지 않고 의미화하게 되면 무엇이 여러분 신앙에서 분리되느냐 하면 이 일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하나님 그분의 주도권, 하나님 그분의 엄위하신 존재가 없어집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자기가 들었을 때도 항복하지 않았던 그 설교를 다시 다른 사람 앞에서 재탕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 때문에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 설교로 상대바이 항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설교를 한다는 것은 여기까지 하나님이 친히 인간을 방문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꾸 기독교 신앙을 의미화하고 도덕성, 윤리성으로만 끌고 가면 하나님은 없어지고 나만 남을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기독교 진리의 보편성을 구하거나 절대성을 구할 때도 무엇을 근거로 구하고 있는가 보십시오. 일반인들이 구하는 방식은 나를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제가 주를 찾고 싶습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렇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시오.’ 이것은 기독교 내용의 종교성, 도덕성, 윤리성 혹은 현실적 필요성을 구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기독교는 증명되지를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압니다 그걸 모르면 우리는 아멘을 할 수가 없고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은혜, 믿음, 순종 그런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그것 자체로는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것 자체가 어떤 도덕성, 윤리성을 가지는 고급한 단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어떤 주인이 있어야만 되는 단어들입니다. 어떤 인격이 있어야만 되는 단어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나를 죽을 자리에서 꺼내 주신 구명지은(救命之恩)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내용 그것을 한 마디로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배제된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만이 주권자이고 일을 시행하신 분이고 주인이십니다. ‘믿음’ 하면 대상이 누구입니까?  ‘순종’은 누구에게 순종한다는 겁니까?  기독교가 쓰는 단어는 절대 윤리성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더욱 행복이라든가 우리가 누리는 어떤 유익한 것들로도 기독교는 일차적인 설명을 거부합니다. 이런 설명은 사실 전도용에 불과합니다. ‘근심, 걱정이 있으십니까?  예수를 믿으세요. 못 고칠 병환 중에 낙심하고 있습니까?  예수 앞에 나오십시오.’

이것은 선전용입니다. 절대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걸 찾아 나오기 때문에 객관성이 자꾸 결여되어 보이는 겁니다.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십일조도 내고 금식 기도도 했습니다. 왜 병이 안 낫는 겁니까? ’ 라고 울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이 언제 그런 계약을 맺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 주권자가 배제되는 것뿐만 아니라 이것이 어디를 향하여 가는 것이냐 하는 목표가 상실되는 것입니다. 목표가 상실되면 목표까지 가기 위한 과정이라는 게 없어지고 그 과정이 없어진다면 절제, 훈련, 인내, 이런 단어가 동원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적, 가장 큰 위험은 아무도 훈련과 절제를, 오는 있는 쓰라린 고난을 감내하지 않은 신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단추를 누르면 척 뭐가 나오듯이 인스탄트 제품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헌금 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주십시도. ’ 이것만 남았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기독교를 필요에 의한 것으로 혹은 조금 고급한 신앙이랍시고 의미화?해서 자위하는 것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지금 일하시는 하나님, 어두운 곳에 빛을 던지시는 하나님, 병든 자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분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실 아무런 힘도 그리고 재주도 없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으로 하여금 자기를 찾아온 것같이, 스데반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같이, 이제 그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면 거기까지 하나님이 방문 하신 것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가 거기 서는 것입니다. 그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이 어눌하며 생긴 것도 별로라고 합니다. 생긴 것도 시원치 않으며 말도 시원치 않는 그가 거기서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몸에 심각한 질병을 지니고 있어서 사람들이 볼 때 아름다운 구석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여기 서서 이 설교를 하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입니다. 내가 서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지금 지점을 개설하신 것입니다. 내가 선 거기까지 지금 빛이 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능력으로 뭔가를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좌절하는 겁니다. 바울이 선 그 자리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며 눈먼자, 귀머거리, 앉은뱅이를 불러 일으키기 위하여 찾아오신 자리인 것처럼 내가 선 그 자리,내가 선 모습이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며 팔을 벌려 사랑하는 그의 심령들을 부르기 위하여 찾아오신 자리요,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보다 열매 맺는 신앙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좀더 힘을 낼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야 마땅합니다. 여러분은 뻔한 얘기를 하십시오. 그저 구태의연해 보이는 얘기를 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으로 열매 맺고 그 완악한 심령을 꺽으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의 그 말과 여러분의 그 모습으로 그 일을 해 내시고야마는 것을 여러분 마읍껏 구경하실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으며 이것보다 더 놀라운 축복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 살아 생전에 마음껏 경험히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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