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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와 고난

마태복음 조용기............... 조회 수 1937 추천 수 0 2009.04.27 12: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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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1:1-11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4년 4월 4일 주일2부설교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환희와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세계 어느나라나 소도시나 촌락에 가면 연중에 반드시 축제가 있습니다. 그때면 온 시민이나 촌민들이 다나와 축제에 참여하며 큰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기쁨이 그 소도시나 촌민들을 화합하게 하고 단결하여 다가오는 어려움과 고통을 극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라도 큰 고난을 이기려면 큰 환희의 체험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본론]
1. 예수님의 환희 체험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큰 즐거움이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마음속에 넘치는 즐거움이 없었더라면 그 가혹한 십자가를 견딜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환희체험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28절로 3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서 갈릴리를 떠나서 유다지방으로 마지막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세상을 작별하기 위해서 갈릴리를 떠나 유다로 가는 길목에서 주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시는데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이 태양같이 빛났습니다. 상상할수 없는 영광으로 얼굴이 빛나고 그 옷이 희기가 빨래하는 사람이 잘 빨래한 것처럼 희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와서 예수님하고 대화를 하시는데 제자들이 들어보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것과 장사지낸 후 사흘만에 부활할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놀라서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여! 여기있는 것이 좋아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겠나이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겠나이다.” 자기가 그말하면서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구름이 그들을 덮으므로 구름속에 갇히여서 두려워 할 때 음성이 들려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자여 내 기뻐하는 이니 저만 들으라” 그리고 순식간에 구름이 사라지고 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예수님만이 계신 장면을 보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변화산에서 굉장히 큰 환희를 체험하게 된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절에도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땅에 오시기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 영광의 모습을 하나님이 잠시동안 누리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누굽니까? 율법의 대표자 아닙니까? 엘리야는 누굽니까? 선지자의 대표가 아닙니까? 모든 율법은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고난 당할 것을 표시한 것이고, 모든 예언은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대속의 역사를 하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대표인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가 와서 예수님의 관한 하나님의 뜻을 아뢰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그 영혼속에 크나큰 환희와 황홀함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 35절에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하셨는데 베드로는 훗날에 그 경험을 베드로후서 1장 17절로 18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변화산상의 체험으로 예수님은 지극히 큰 존귀와 영광을 체험하게 된것입니다. 이와같은 황홀한 존귀와 영광의 체험이 훗날에 십자가에서 한없는 고통을 당할 때 이를 극복할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고난 당하시기 일주일전에 감람산 벳바게에서 놀라운 체험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삼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보고 말했었습니다. “저 마을에 가서 그곳에 나귀 한 마리와 새끼 나귀가 있는데 그 새끼 나귀를 끌고 오너라. 사람들이 왜그러냐 하거든 우리 주님께서 필요하시다고 하다고 하면 허락할 것이다.” 제자들이 벳바게에 가서 건너편 마을에 가니까 나귀와 나귀 새끼가 있는 것을 보고 새끼를 풀어서 예수님께 가져오니 예수님이 그 나귀 새끼위에 올라탔습니다. 나귀는 조그만한데 그 새끼는 더 작지 않습니까? 아마 예수님이 탔으면 다리가 땅에 질질 끌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 옷을 벗어 깔고 또 나무를 꺾어서 그 나무가지를 예수님이 가는길에 펼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도에 서서 고함을 치고 환영을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때는 유월절이 얼마남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율법에 의하면 예루살렘 주변 30km 지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다 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역사가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시 약 3백만 정도의 인파가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하니 부산시만한 인구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인산인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감람산 벳바게에서 예루살렘까지 거리는 약 3.4km, 10리쯤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10리쯤 되는 길을 걸어가는데 앞에서 환호를 하고 뒤에서 수많은 군중이 따르고 그리고 옷을 벗어서 던지고 나뭇가지를 꺾어서 길에 펴고 장엄했습니다. 온 예루살렘이 떠들썩하고 그곳에 모인 3백여만명이 모두다 이 왠일인가 이 누가 오는 것인가! 그들이 모두다 놀랬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는 갈릴리에서 오신 선지자 예수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한 말씀대로 스가랴 9장 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예언한대로 주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평범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왕으로 입성한 것입니다. 훗날에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오실때에 모든 사람들이 환영할 것을 주님께서 이 자리에 실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굉장한 감격과 영광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줄 것을 그는 기억하고 그때 천군, 천사와 함께 수많은 주의 백성들이 주를 환호할 것을 기억하고 그는 이 예언적인 사건으로 마음속에 큰 위로와 평안을 얻었습니다. 황홀했습니다. 그 황홀한 체험이 그로 하여금 장차 십자가 고난을 능히 짊어질수 있게 한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에 못박히기 일주일전에 수난당하기 엿새전이었습니다.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했는데 갑자기 마리아가 들어와서 나드 한근이 들어있는 옥합을 가져와서 옥합을 바싹 깨어가지고 그 옥합에 나드기름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자기 머리털을 풀어서 발을 닦고 온 방에 나드향기가 가득하고 그 마리아의 얼굴에도 나드 기름이 툭툭 떨어졌습니다. 이 나드는 굉장히 귀한 기름입니다. 히말리야 산맥 인도지방에서 재배된 나드향나무의 뿌리에서 추출한 것인데 이 향유 한근은 3백데나리온에 팔렸는데 이는 노동자 1년 소득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지금 우리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3천만원 정도가 됩니다. 거기에다가 향유를 담았던 옥합은 이집트의 알라버스트론 지방의 산에서 난 돌로 만든 것으로 매우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다합치면 3천만원에서 약 5천만원 가까이 되는 값이 나가는 귀한 옥합을 그냥 깨뜨려서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에 붓고 자기 머리를 풀어서 발을 닦고 그리스도를 경배하니까 가룟유다를 중심으로 해서 제자들이 흥분하고 노했습니다. “이 무슨 낭비인고? 이 귀한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으면 좋을뻔 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꾸짖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기 전에 최후에 굉장한 사랑과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마리아의 사랑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질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게 만들어 준것입니다. 이와같은 예수님은 영광과 황홀의 체험을 하셨기 때문에 그 마음속에 얻은 충만한 기쁨이 십자가를 짊어질수 있었습니다. 그런 황홀과 기쁨의 체험이 없이는 고난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변화산상에 영광과 존귀를 체험하게 하시고 예루살렘 입성때 그 놀라운 군중에 환희와 영광을 체험하게 하시고 마지막으로 인류를 대표해서 마리아가 예수님 베푼 그 흠모와 사랑을 체험하고 깊은 감동을 주님께서 느끼게 해준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제자들의 환희 체험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도 똑같았습니다. 그들이 체험한 환희의 체험 때문에 목숨을 바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당하신 이후에 제자들은 완전히 낙심한 오합지졸이었습니다.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해받으신 이후에 사십일동안 동해번쩍 서해번쩍하고 나타나시면서 흩어진 제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날에 그들이 한곳에 모여 기도할 때 강하고 바람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해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머리에 임하였더니 그들이 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굉장한 황홀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때 체험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 모든 제자들이 다 술취한 것 같았습니다. 안믿는 사람들이 와서 보고 저들이 새술이 취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럴정도로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여 취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이 체험이 있고난 다음에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사도행전 1장 8절대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체험을 하게된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 후에 다가온 큰 핍박과 환란과 죽음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로 37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에 이것을 이길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뼈속까지 성령충만으로 체험하지 않았었으면 제자들은 이 환난과 고난을 이길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는 하나같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당하고, 안드레는 그리스에 가서 전도하다가 X자형의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당하고,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로 목베임을 당해 순교당하고, 요한은 기름 가마에 던져 넣어도 죽지 않자 밧모섬에 유배 되었다가 풀려나 에베소에서 말년까지 복음을 전한 살아있는 순교자로 전해집니다. 빌립은 부르기야에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메달려 순교하고, 바돌로메는 아르메니아와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하고 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찔려 순고하고 마태는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목베임을 당해 순교하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림을 당해 순교하고, 가나안인 시몬은 애굽에서 유대에 돌아와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순교하고, 야고보의 동생 유다는 페르시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순교하고, 가룟유다 대신 12제자 반열에 오른 맛디아는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교회사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는 사도요한 이외에는 모두다 순교당했습니다. 그런 겁쟁이들이 목숨을 바쳐 그리스도의 복음을 피로써 도장 찍을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령충만으로 임하여 황홀한 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어떠한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3.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는 환희 체험

오늘 성도들이 세상을 이길힘이 어디서 생깁니까? 종교를 가졌다고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교육을 잘받았다고 해서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반드시 은혜의 체험이 있어야 세상고난을 이길수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체험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면 그 은혜의 체험의 황홀한 것이 우리를 어떠한 환난이나 고난도 극복하고 이길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삶에서 환희의 체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삶에서 환희의 체험은 성령 충만한 체험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세상 사람들이 술취한것과 같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로 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마음에 부음바 되면 그 황홀한 체험을 통해서 그 이후에는 어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냐 칼이랴 죽음까지라도 이길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도의 대전도자 선다싱은 1889년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힌두교로 선다싱이 14살 때 세상을 떠났으며 죽으면서도 선다싱이 훌륭한 종교가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선다싱은 천재적인 소년으로 15살 때 철학과 종교서적을 읽었고 자기 인생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했습니다. 당시 그는 기독교 학교에 다녔는데 힌두교에도 기독교에도 해결책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독교 교리를 배웠습니다만 인생문제의 해결이 거기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허무하고 절망만이 그를 사로잡아 그는 기독교에 관계된 모든책과 성경도 불태우고 죽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선다싱이 15살 때 어느날밤 애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힌두교의 신이든 기독교의 신이든 제발 대답좀 해주십시오.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때에 비몽사몽간에 그의 방안에 환한 빛이 비취더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째서 너는 나를 괴롭히느냐? 나는 이미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려 너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는데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느냐? 이제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진것처럼 너도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라.” 선다싱은 즉시 그 자리에 엎드렸습니다. 그 후로 선다싱은 놀랍게 변했습니다. 기독교라면 철저히 원수처럼 증오하고 핍박하던 그가 영적인 환희의 체험이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앞장서 수없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인도에서 와서 전도에 말할수 없는 시련과 환난과 핍박을 당했지만은 그가 체험한 환희와 성령충만의 은혜가 넉넉히 이기고 남을수 있게 하고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요한복음 7장 38절처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생수의 강이 넘쳐 흘러야 성공적인 승리의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진리를 깨닫는 체험을 할 때 큰 은혜를 받고 승리할수 있습니다. 머리속에 아무리 성경을 많이 외운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큰 영광과 힘이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우리가 승리로운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했으며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에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도를 듣는자가 복있는 것이 아니라 도를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영국을 18세기 변화시킨 요한웨슬레는 그가 대학시절에 열렬한 신앙인이 되어서 미국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러나 미국선교에서 실패하고 그는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할 일없이 빈둥빈둥 놀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교육을 잘받았고 선교사까지 갔다왔지만 구원받은 체험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감당하지 못해서 선교지에서 도망쳐서 영국 런던으로 돌아오게 된것입니다. 그런데 1738년 5월 24일 런던에 알더스게이트의 경험에 대해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나는 마지못해 친구의 강요에 의해서 알더스게이트의 거리에 모이는 집회에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9시 15분쯤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를 설명하고 있을 때 내 마음속에 이상한 뜨거운 불이 임하여 설레이기 시작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용서를 받고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받는다는 진리가 마음속에 확연하게 깨닫게 되었다.” 전에는 머리로써 읽어서 안 것이 마음속에 부딪혀 오지 않았는데 그날 저녁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고 설레이는 불길이 임하더니만 믿음으로 용서와 의를 얻는다는 진리가 확연히 깨달아지자 그 영혼은 밝은 빛이 비취고 환희가 넘쳐났습니다. 그 길로 그는 일어나서 영국을 변화시키는 복음전도를 시작했습니다. 훗년에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무슨 힘으로 이렇게 위대한 전도를 할수 있었냐?” 할 때 “나는 알더스게이트 그날 이후로 내 마음속에 언제나 성령의 설레이는 불길이 마음속에 있어서 그 불길에 의해서 하나님의 복음 말씀을 전할수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자 성령의 불길이 마음에 설레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것으로 우리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깨달아질 때 그 체험이 그날 이후로 어떠한 시련과 환난도 이길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를 믿고 심적인 삶에서 체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체험, 소망의 체험, 사랑의 체험, 의의 체험, 평강의 체험, 희락의 체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고 말했으며
모라서 14장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했으며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체험하고 우리의 마음속에 소망이 넘쳐나고 평강이 넘쳐나고 희락이 넘쳐나는 체험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체험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냥 형식적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예배하다가 마음속에 얻는 그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이 뼈 아로 새긴 체험으로 돌아오게 될 때 그는 이 세상에 나가서 어떠한 핍박을 받아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이겨나갈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혹은 생활속에 환희의 체험을 해야됩니다.
신병의 치료같은 것 여러분 굉장한 우리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겨 놓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3절로 5절에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우리가 병들어서 고통당할 때 주님의 능력이 와서 우리를 고쳐주는 체험을 하면 이러한 체험은 우리의 일생에 등불이 됩니다. 이 체험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배반하지 않게 만들며 어떠한 어려움에도 믿음으로 나갈수 있게 힘과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놀라운 치료의 체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혹은 고통스러운 문제가 해결될 때 이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부여잡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처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의 삶속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때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혹은 가정적으로 생활과 사업에서 캄캄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때가 있습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도 피할길이 없습니다. 그 절망가운데 부르짖을 때 예수님이 형식적인, 신학적인, 종교적인 주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모습으로 내 생애속에 나타나서 마음에 사망대신에 생명을 주고 어두움 대신에 빛을 비춰주며 위로와 용기와 힘을 주고 그 지팡이로 구원하시고 막대기로 보호하여 주시는 체험을 하게 될 때 그 체험의 황홀한 감격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두고두고 신앙속에 굳세게 서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예수믿고 살아가면서 많은 축복의 체험을 합니다.
시편 1편 3절에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주의 은혜를 체험하고 형통을 체험한 사람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에스겔서 34장 26절로 27절에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엣목을 꺾고 그들로 종을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겠고”
우리 주님은 축복의 주님인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주를 찾는자는 복을 받고 젊은 사자는 굶주릴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좋은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영화배우였던 멜 깁슨은 한때 천주교 신부가 되려고 했지만 그가 1979년에 만든 영화가 크게 흥행하면서 헐리우드 영화사업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 다음 영화도 성공하여 거부가 된 80년대말 그의 삶은 안으로 곪아갔습니다. 술과 마약등 중독이 가능한 것은 모두다 탐닉한 정신적인 파산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텅빈 영혼을 채울수 없는 허무와 무의미와 절망에 시달리다가 35세때 창문밖으로 뛰어 내리고 싶은 자살 충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91년 어느날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결심하고 부시 대통령처럼 성경공부를 통하여 믿음을 회복하고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마음속에 받아 들이고 그리스도에게 그의 생명을 맡기자 놀라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그 알콜중독, 마약중독, 음란의 중독, 세상의 중독에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놀라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 이것을 영화로 만들어야 되겠다고 3천만불의 사재를 틀어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예수님의 수난’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깁슨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를 통독하며 거듭났기 때문에 성경구절을 그대로 영화화했습니다. 한편으로 그를 비난하는 측에 대해 깁슨은 철저하게 자신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사순절 기간에 맞추어 미국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큰 파장을 일으키고 우리 한국에도 4월 2일부터 개봉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깁슨이 이 영화를 만든 것은 자기가 죄악의 수렁에 빠져 헤어날 수 없는 절망에 처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셨다 부활하신 진리를 성경에서 읽고 깨닫고 그리스도에게 그 몸을 던졌을 때 그리스가 그를 변화시켜 주는 큰 체험을 했습니다. 그 체험을 했기 때문에 이 예수를 전도해야 되겠다고 사제 3천만 달러를 던져서 영화를 만들고 비난을 받아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전진할수 있는 힘이 거기에 생겨난 것입니다. 여러분 이론적인 종교적 신앙은 평탄할때는 괜찮아도 큰 시련이 다가오면 모래성같이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큰 환희의 체험으로 삶속에 기록될 때 그것은 거대한 기쁨과 힘이 되어 부딪히는 고난과 역경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려주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그는 한주일 후에는 처참하게 버림을 당하고 채찍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버림받아 극한의 고통속에 죽어야 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도망칠수 있었습니다. 타협하고 헬라로 갈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도중에 변화산성에서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받는 체험을 하시고 그는 예루살렘 입성때 그많은 군중들이 그를 환영하며 환희의 고함치는 소리를 통해서 장차 이땅에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어 오실 것을 그는 몸소 체험하고 환희를 느꼈습니다.
<결론>

마지막때 가장 애틋한 마리아의 사랑, 3천만원이나 되는 기름을 값비싼 옥합에 담은 것을 깨뜨려서 발에 붓고, 머리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고 그를 예배한 그 깊은 사랑과 헌신에 큰 위로와 용기와 기쁨을 얻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고난은 환희의 체험이 있어야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때 세상에 환난과 시험이 많습니다. 마귀는 자기때가 얼마남지 않은줄 알고 온갖 악한 힘을 다 동원해서 우리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때 신앙을 견지하고 이기고 나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체험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체험해야 됩니다. 말씀의 진리를 깨닫는 체험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을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병고침도 체험해야 되고 축복도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속에 황홀한 체험으로 아로 새겨질 때 우리는 어떠한 고통도 감당해 나갈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주님께서 깨어주신 살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시는 것은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종교도 의식도 아니옵니다 주님!
주님의 깨어진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에 천지개벽의 놀라운 변화의 체험을 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확실히 체험하고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죽음이나 칼이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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