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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하나님의 인간사 개입의 가능성

하박국 최만자............... 조회 수 2959 추천 수 0 2004.02.12 19:4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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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합3:17-19 
설교자 : 최만자 원장 
참고 : 새길교회 
 우리를 절망시킬 일이 더 이상 남았을까 싶을 정도로 지난 한해는 고통스런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이라크 전쟁의 비극, 대구 지하철 참사의 참혹함, 태풍 매미의 엄청난 할큄, 이란의 지진으로 인한 거대한 죽음의 엄습 등에 아직도 우리 가슴이 에입니다. 이 위에 부패로 얼룩진 정치, 탐욕과 비밀주의, 가족주의로 뒤덮인 기업, 퇴행적 대중문화, 후진적 시민의식 등의 사회상들은 우리를 전율하게까지 합니다. 또한 당면한 고통의 현실들은 실업의 만연, 계층의 양극화, 갖가지 이유를 가지는 자살자 수의 증가, 교육부재의 위기 등 등 어디를 돌아보아도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충격을 주었던 한강에 두 자녀를 내어 던진 한 아버지의 무지막지한 행위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병리적 현상들을 집약하여 보여준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절망을 심화시킨 것은 고통의 현실이 인간사를 넘어 동물세계와 자연으로 확장된 것일 것입니다. 조류독감, 광우병의 확장, 그리고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괴질이 퍼질 것이라는 예고는 로마서의 말씀대로 '만물이 신음하는' 세상임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인생은 참 역설적이게도 절망의 깊은 심연을 경험하는 자리에서 희망을 가장 많이 갈망하게 됩니다. 깊은 절망의 늪에서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제일 요구되는 것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도 간절하게 희망을 찾게 됩니다.    

  어제와 오늘이라는 일상의 순환으로 보면 새해라고 별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래도 시간의 줄에 금을 긋고 한편의 금 밖으로 나와 새로운 시간의 의미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을 보면 새해를 맞는 것은 그나마 절망을 넘어 희망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제는 좋은 날들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과 잘 살아보자는 결단을 하면서 갑신년 새해의 하루하루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희망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겠습니까? 사람들은 희망을 기원하며 새해 첫 해맞이를 가기도 하고 상호 좋은 덕담을 나누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한겨레 2003년 12월 29일자에 실린 '열쇠말 검색 2003'의 6번째 검색 말인 '로또'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우리 국민의 정서가 희망을 대박 터뜨리기에서 찾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글에 실린 내용을 함께 봅니다. 2002년에 새해인사는 "부~자 되세요"였습니다. 그런데 2003년의 새해인사는 "대박 터트리세요."였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전통적 인사가 가지고 있는 '부'에 대한 은유적 표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부에 대한 욕망을 날 것 그대로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 인사에서 우리는 2003년 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인생역전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왔을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로또복권이었습니다. 2002년 12월 7일에 첫 추첨을 시작한 이 로또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 검색 순위 '통합 챔피언'에 올랐으며, 백화점 직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52%가 '로또 당첨'을 새해 소망 1위로 꼽았고, 서점에선 '로또비법' 전수하는 책들이 불티나게 팔렸고 그것과 관련된 정보교환 사이트가 최상 인기를 누렸답니다. 한 당첨자는 직장을 그만두고 강남의 초호화 주상복합 아파트로 이사 가서 살다가 32억원을 사회에 기부하고 이민을 갔는데 그의 신상이야기는 신화가 되고 로또 환상을 키웠다고 합니다. 제 주위에도 어려운 형편에 있는 이들이 '아 로또 복권 당첨되어야 하는데,'라는 한숨을 쉬는 것을 보았습니다. 벤처 신화 등을 보면서 사람들은 '운 좋으면 대박을 맞을 수 있다'는 결과 중심적 사고가 강해졌고, 또 구조조정, 청년실업, 신용불량자, 생계 형 자살 등 2003년 한국사회의 현상들이 그 배경이 될 것입니다. 한 회사원은 매주 1만원씩 로또를 사면서 '회사 사정도 안 좋고 고용이 불안할 때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로또를 산다' 고 합니다. 심광현 중앙대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정상적 방법으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서 서민들이 이런 현실을 만회할 거의 유일한 기회가 로또였을 것' 이라고 분석합니다.  

  경제적 부에 대한 전통적 윤리는 돈 많음을 조금은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부에 대한 욕망을 노골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 경쟁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경제적 부를 추구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문제도 수많은 학원을 보내고 사교육비가 큰 부담이 되어 가정이 파탄 날 지경이 되고(어머니들이 갖가지 알바를 다하고) 원정출산, 이민 등으로 확장되기까지 합니다. 사회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부와 지위를 획득하면 된다는 성공신화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의 추구나 파행적 교육 행태 등이 사회적으로 오히려 정당성을 획득해 나가고 있는 세상에서 절망의 늪은 더 크게 깊게 파이고 있고 대박을 터뜨려 희망을 가지려는 로또 희망 군들의 절망은 더 깊을 것입니다.

  정부도 그러하고 일반인들이 올해 소망을 경제회복에 집중함을 봅니다. 경제가 살아야 모두 살아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경제는 매우 중요하고 꼭 실현되어야 할 과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적 부의 추구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칫 위험합니다. 경제성장이 중요하지만 우리 삶의 정신적 근원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2만 불 경제성장이 희망이라 생각하여 목표를 세우고 추구하지만 1만 불의 건실한 삶이 더 우선되어야 우리나라와 사회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는 김용덕 형제님의 말은 참 적절하고 오늘 사회에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희망을 어디로부터 그리고 어떻게 가져야 할까요? 올해는 북핵 문제가 해결 될 기미를 조금은 보이면서 시작되어 남북문제도 약간의 희망을 가지게도 됩니다만 무엇보다 우리가 어떤 삶을 하는가가 일차적 과제일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대답을 성서의 하박국 예언자의 소리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성서 본문은 어떤 주석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 내 삶의 방식으로 받아도 좋을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 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

  이 본문이 보여주는 상태는 지독한 경제적 빈곤에 처하여 먹을 것조차 없는 궁핍과 씨름하는 사회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목축도 농사도 과수도 전혀 안되는 사회에서 생존을 위협받는 그러한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참고 기다리며 희망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하박국 예언서의 시대 배경을 좀 자세히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박국은 일반적으로 요시야 왕 시대의 제의 예언자로 봅니다. 요시야 왕은 기원전 640-609년 동안 통치했는데 이스라엘 역사상 훌륭한 왕으로 기억됩니다. 솔로몬 왕 이후 이스라엘은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기원전 721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기원전 627년에 앗시리아의  앗수르바니팔 왕이 죽게 되자 앗시리아의 영향력이 약해집니다. 요시아 왕은 이때를 기회로 옛 이스라엘 영토까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민족 회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북부 상당지역을 관리하면서 621년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조국재건과 영적 부흥운동을 펼칩니다. 개혁의 원동력으로 신명기 법전을 채택하여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삶을 강화합니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앗시리아가 쇠퇴하고 바벨론이 부상하는데 앗시리아는 끝까지 바벨론을 공략하기 위해 이집트에 원군을 청합니다. 이집트는 이 기회에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을 자신의 지배영역으로 삼으려는 욕심에서 앗시리아를 도우려고 느고 2세가 군대를 끌고 가게 됩니다(기원전609년). 요시아 왕은 바벨론이 전세에 우세하다고 판단하고 바벨론 편을 들어 느고 2세를 저지하다가 므깃도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도 참 불행한 민족입니다. 요시아 왕이 죽지 않고 나라를 재건하여 나갔더라면 이스라엘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예측불허의 국제정세의 격랑 속에서 약소국가의 운명은 풍전등화같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유다나라는 결국 이집트의 속국이 되고 요시아 왕의 넷째 아들 여호아하스를 백성들이 왕으로 세웠으나 이집트가 3개월 만에 폐위시키고 장남 엘리아김을 여호야김으로 이름을 바꾸어 꼭두각시 왕을 세웁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605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갈그미스에서 이집트 군대를 격파시켜 바벨론이 승리하고 결국 유다는 바벨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조공 바치는 것을 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였고(아마도 이는 기원전 600년에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바벨론이 지는 것을 보고 그랬던 것으로 봅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여호야 김은 그 이전에 죽었거나 살해된 것으로 보이고) 여호야긴(여호야김의 아들)은 항복하고 조정의 관리들과 전문요인들과 함께 유배를 떠납니다. 이것이 1차 바벨론 포로입니다. 유다 국민들은 포로로 간 왕을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했으나 바벨론은 맛다니야(후에 시드기야로 개명)를 세워 자신들의 말을 잘 듣도록 했습니다. 시드기야는 이미 예루살렘이 친 바벨론과 반 바벨론으로 분열되어 있어 자신의 능력으로 통합이 불가능함을 알았고 독립의 쟁취 위한 투쟁이 있어도 실패하였으며 수도, 성읍이 파괴되고, 성전도 파괴되면서 또 한번의 유배를 당하고 기원전 586년에 결국 나라까지 상실하게 됩니다. 이후로 마카비 시대(기원전 160년 경-기원 63년까지)를 제외하고는 1945년 국가 재건 때까지 나라를 잃은 민족으로 유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정세들-정치 혼란, 민심분열, 파벌쟁논, 조공을 위한 혈세 착취, 무죄한 자의 처형으로 피 흘림의 만연, 최종적으로 나라의 상실- 가운데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피폐하였겠습니까? 조공을 바치느라 온갖 악행이 자행되었고 수많은 반대자들의 무고한 피가 뿌려졌습니다. 하박국은 이 포로기 직전 상황을 배경으로 한 예언서입니다. 하박국의 관심은 이 같은 급격한 국제 변화 사회 속에서 의로운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에 있었습니다. 즉 요시아의 죽음과 더불어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개입 하시는가 의문이 제기된 것입니다. 더욱이 개혁의 원리로 채택했던 신명기 법전은 권선징악의 원리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어찌하여 선한 왕 요시아는 요절하고 앗시리아 멍에를 겨우 벗어난 하나님의 백성은 또 다른 무거운 굴욕의 짐을 져야하는가? 의로우신 하나님은 왜 요시아 왕이 오래 살아 그의 개혁이 성공하도록 도와주지 않으시고 악한 이웃들이 판을 치게 내버려 두는가? 요시아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공의성과 악의 승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런 상황에서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하는 생각에서 절망의 탄식을 합니다. 하박국 1장에는 예언자가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 되 질문합니다. 이는 당시 사회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 것이었나를 말한다고 봅니다. 폭력, 악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한 예언자의 몸부림, 희망을 잃은 절망의 몸부림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당대 사람들의 물음은 '하나님 도대체 계십니까?' 였을 것입니다. 하나님 인간역사에 개입하고 계시는 겁니까?  예언자는 절망의 현실에 대한 답을 하나님께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제 예언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답변이 1-2장에 나옵니다. 그 답변을 들은 하박국의 기도가 3장이며 오늘 읽은 본문은 그 마지막 신앙고백의 정리입니다. 첫 번째 답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하나님 야웨가 여전히 인간사를 지배하고 계신다는 확실한 주장을  합니다(1: 5-11).  두 번째 답은 '아무리 더디더라도 믿음으로 기다려라 구원은 확실히 온다는 것입니다(2: 1-3).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4절)고 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대한 재앙 다섯 가지를 말합니다(2:6-20) 3장의 마지막 부분인 오늘 읽은 본문은 결론적으로  아무리 절망의 상황에서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고 희망을 가지면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 하박국의 결론은 아무리 절망이 계속되어도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신앙을 굳게 가지고 성실하게 살며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73편과 욥기도 똑같은 문제를 제시하고 답을 얻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사상이 성서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인간의 절망의 상황에 희망을 가지는 상태를 보인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성서의 이러한 대답은 절망의 극복에 대한 명백한 대답이 아닙니다. 성서는 증명해 낼 수 있는 그러한 명백한 답을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답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개인이나 공동체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살아나가야 할 실존적 답, 믿음 안에서 희망을 가져 절망을 극복하는 삶의 실존적 해답을 제시하여 줍니다. 하박국에도 바로 이러한 실존적 답변이 주어집니다.

  하박국의 메시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공의성과 통치성은 곧 하나님의 역사개입은

  1) 우선 세상만사를 하나님이 지배하신다는 믿음에 둡니다. 인간사가 아무리 제멋대로이고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자신의 뜻을 펴나가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삶의 극한 상황에서 사람을 만나고 인간사에 개입하여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사는 하나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성서는 악의 기원에는 침묵하지만 악의 실존적 현실은 드러내며 그 실존적 종말도 드러냅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박국의 때와 같은 질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공의성과 통치성에 대한 물음을 계속하게 되는 악의 현실이 실존하기 때문입니다. 서두에서  열거하였던 현 절망의 상황들에서 정말 하나님 계십니까하고 물음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행은 가끔씩 우리의 예측과 전혀 상관없이 나아갈 때가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의 승리가 영원하리라 믿었고 우리나라의 독립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믿어 친일론자들이 민족개조론까지 주장하였지만 일제의 패망은 급격히 찾아왔었습니다. 유신독재의 권력의 밤이 영원 할 것 같았지만 1979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였던 일은 발생하고 역사는 바뀌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생사는 누구나 절망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인생은 어쩌면 절망과 희망의 교차를 거듭하면서 진행되고 마감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 인생사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이 거기 개입하여 들어오신다는 사실을 제 신앙의 여정에서 믿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주관적 결론이기 때문에 증명하기 어렵지만 내가 아무 희망이 없다고 고통스러워 할 때 사람이 할 수 없는 다른 길, 때로 이것은 매우 엉뚱한 길이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개입하여 희망을 이어주셨다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호랑이를 피해 나무 위에 올라간 오누이가 계속 올라오는 호랑이를 피할 길이 하늘 밖에 없어 기도하였더니 하늘에서 밧줄을 주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이야기라는 우리의 전래동화에서 보듯 절망의 상황에서 거기 찾아오시고 개입하시는 하늘(하나님)의 다스림을 볼 수 있습니다.  

  2) 하박국서는 또 희망을 주는 하나님의 개입의 가능성을 '기다리는 삶'으로 강조합니다. 이 하나님의 개입은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는 기다림 속에 개입하여 오신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극한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기다리는 삶'을 말하는 것은 일면 잔인한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박국은 자서전적인 고백을 통해 신실한자는 마침내 미래의 구원의 때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신실한 삶-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간사 개입을 드러내는 자리가 된다고 합니다. 고통과 고난의 상황에서 대박의 기회에 삶을 거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삶으로 기다리면 희망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두 대박을 꿈꾸고 또 횡재를 하는 것을 보는 판에 거기 휘말리지 않고 살기란 어려운 일이며 그 자체가 고통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얼마나 기다림이 가능합니까? 이 기다림은 자기 삶의 기준을 곧게 가질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고통을 벗기 위해 쉬운 타협을 선택하지 않고 기다려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나게 되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실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 한 자매님에게 요즈음 아이들 교육문제가 야단인데 많이 걱정되겠고 사교육비 부담도 얼마나 크겠느냐고 했더니 그 자매님은 웃으면서 별 걱정 않고 시류에 휘말리지 않고 자기방식대로 믿음을 가지고 교육자세를 가진다면서 대담하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육문제로 온통 난리를 치는데 학원을 6-10개까지 다닌다고 야단들인데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휩쓸리지 않고 지나면서 그것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학부모들의 아우성만 듣다가 그 말을 듣고 희망을 발견하였습니다.

  곧 이 기다림의 희망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날을 갈망하는 기다림이기 때문입니다. 새날에의 갈망은 지금이 고통인 사람들에게서 강하게 발생됩니다. 현실에서 기약 없이 고달픈 삶을 사는 사람들, 악의 횡포에 힘이 없는 사람들, 폭력과 권력에 짓밟히는 사람들, 차별과 멸시를 당하는 사람들은 새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리고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불의한 현실을 바꾸기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간절히 기다립니다. 새날의 평등을, 새날의 평화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바로 이 새날을 기다리는 기다림이 새 역사를 이루는 자리가 됩니다. 동학의 시작도 바로 오랜 세월 쌓인 민중의 새날에의 열망에서 기인하였던 것입니다.

  새해에도 어쩌면 악과 폭력이 우리 안에 고통을 가져올지 모릅니다. 총선이 있고 남북관계의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하고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희망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희망이 하나님의 세상사 지배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또 그의 통치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삶을 근원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혹 우리에게 절망이 밀려올지라도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역사 개입의 자리를 만들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망을 강하게 말합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개입을 믿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올 해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망 갖기'를 실천해 나가는 것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인간사 개입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입니다. 인간의 깊은 절망 가운데 오시어 새로이 살아갈 희망의 빛을 비추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 새날이기 때문입니다. 새해에는 예수께서 살으신 그 새날을 향하여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절망의 세상에 희망을 보이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다른 이에게 절망을 주는 삶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생각할 때 희망을 생각 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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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5 에스겔 부활의 영 겔37:1-15  길희성 교수  2008-04-02 2177
1084 에스겔 부활의 신앙 겔37:1-12  김종일 형제  2005-02-16 2664
1083 에스겔 교회의 멸망을 막을 사람, 없는가? 겔22:23-31  박득훈 목사  2005-02-01 2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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