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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적 지극함의 회복을 위하여

아가 최만자............... 조회 수 1896 추천 수 0 2008.01.24 15: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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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아2:7-18 
설교자 : 최만자 원장 
참고 : 새길교회 
우리는 과연 가인의 후예일까요? 폭탄테러, 강간, 사기 등 끊임없이 범람하는 악의 현상들을 보면서 이 질문을 멈출 수 없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도 급증하고 있는 성폭력 사건들의 심각성을 봅니다. 4-5세의 유치원 원아 100여명을 원장이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사건,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용기술을 배우던 열여덟 소녀가 강간당한 후 자살한 사건, 얼마 전 신문지상에 크게 보도되어 충격을 주었던 성폭행 당한 후 임신되어 수업 도중에 출산을 하게 되었던 여중생의 사건, 또 동네 어른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성폭행 당한 초등학교 소녀가 자살한 사건, 그리고 약간 지능이 낮아 보이는 한 소녀를 하숙집 주인 부자와 동네 주방장이 돌아가며 성폭행을 하였는데도 그들이 불구속 기소된 사건 등등 성폭력 사건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갖가지 형태의 성폭력 범죄에 시달려 왔지만 이제는 그 대상이 저연령화되어가고 있으며 더욱이 어리고 사회적으로 힘없는 여자 아이들이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분노하게 합니다.

우리사회가 성 개방이라는 이름아래 오래도록 금기시하던 성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표현하여 온 지도 제법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성에 대한 인식은 건강하기보다는 왜곡된 형태가 지배적이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아래 성이 상품화되고 향락산업의 도구가 되었으며 퇴폐적이고 오락물적인 것으로 전락하였고 거기에 더하여 오랜 군부독재 정치가 남긴 폭력문화속에서 성폭력이 범람하게 되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성폭력 문제를 포괄하여 성문제 전반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만 할 때입니다.

먼저 성에 대한 문제들을 발생시키는 몇 가지 요소들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지금 우리 현실이 성이 지배적인 사회로 되었기 때문에 성과 관련된 문제들이 범람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종교문화는 약화되고 성문화는 강화되는 사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주변에 범람하는 성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화 예술적 내용들이 이를 입증하여 줍니다. 이러한 성 지배적 현실은 신의 죽음을 선포한 거대한 익명의 복합사회, 급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방향감각을 잃고 자아분열을 경험하면서 그 방황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달래고 흔들거리는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확인하려고 하면서 낭만적 성과 쾌락적 성을 신의 자리에 대체시켜 새로운 신화와 우상을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성 지배적 환경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때에 우리가 서있는 현실은 성에 대한 가치의 혼란 그리고 인식의 혼재상태 입니다. 공개적이고 관능적 말초적인 성 문화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아직 성에 대한 봉건적 폐쇄성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인식을 가지고 또 그것을 무의식중에 고수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신분유지와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을 엄격히 통제하면서 특히 여성에게 순결과 정절을 강요하였던 성을 금기시한 봉건적 성개념이 지배적인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낭만적 사랑을 지상최대의 가치로 생각하면서 결혼을 추구하는 근대적 성이해, 그리고 탈 근대의 열망적 관능주의적 성이해 등이 우리 삶 속에 혼재하여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기독교인들은 전통적 금욕주의적 성이해에 율법주의적으로 매달려 있습니다. 극단적인 근본주의적 신앙태도는 극단적으로 성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윤리를 강화하려고 노력하지만 개방된 성문화의 물결 속에서 도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성지배적 가치의식과 성에 대한 이해의 혼재 속에서 형성된 성 자체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성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며 폭력적이게 합니다. 우선 성에 대한 가장 기초적이고 본질적인 이해가 잘못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을 단순히 성기 중심의 성관계로만 연관시켜 이해하는 문제입니다. 성이 성관계를 맺는 인간의 인격과 분리되었을 때 성은 대상화되고 물화되어집니다. 우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문제의 대부분이 성을 대상화하는데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성의 고유성­성(sexuality)이라는 말은 육체적인 측면에만 국한되는 좁은 의미의 성관계와는 구분되어 보다 넓은 의미를 갖는 개념입니다. 물론 성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생물학적인 것임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적 욕구가 배고픔이나 목마름, 그리고 호흡을 하는 것 등과 같은 인간생존을 위한 생물학적이고 필수적 욕구와는 상당히 다른 차원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배고픔이나 목마름 같은 생존의 욕구는 그 필요에 순응해야 하는 자연의 강제적인 지배력을 거의 벗어날 수 없는 자연적 본능입니다. 그러나 성은 이런 자연적 본능의 강제성을 벗어날 수 있는 욕구이며 사회적 인격적 관계의 차원을 그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인간의 성이 갖는 사회적 측면이 무시된다면, 인간의 성은 생리적인 과정이나 본능적인 행위로 축소되고 환원되어 인간의 '본래적인' 특성이 죽어 버리고 다른 동물의 성본능과 하등 다를 바가 없겠습니다. 인간은 의식과 의지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자신의 본능적이고 생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도 하고 현실조건에 상응하여 유보하기도 하고 제어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의 성은 단지 육체의 일부분인 성기에 집중된 성적관계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겠습니다.
성의 이해를 왜곡시키는 또다른 측면은 여성과 남성이 성에 있어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전제하는, 사회가 가진 이중적 성규범에 의한 현상입니다. 즉 남자는 여자보다 생리가 강하고 성욕을 억제할 수 없으며 성욕을 억제할 경우에는 건강에 나쁘다는 식의 이해입니다. 그리고 남자는 성이 강해야 남성답고 그래서 외도나 매춘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오히려 그런 경험이 없는 것을 남성답지 못함으로 수치스럽게 여기며 또 사회도 그렇게 평가합니다. 정력이 좋은 남자는 참 남자다운 남자라고 생각하기에 정력에 좋다면 별짓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여자는 정숙해야하며 성적 욕구가 없으며 성적 욕구가 있는 여자는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여자는 성과 관련된 것에 관심가지는 것도 부끄러운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정력이 강한 남성의 정력이 소모되기 위해서는 상대되는 여성이 필요한데 그 상대는 정숙한 아내가 되어서는 안되므로 야한 매춘 여성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자는 정숙한 여자와 야한 여자로 이분화 되며 남자들은 결혼은 정숙한 아내와 하고 성적 쾌락은 매춘이나 외도를 통하여 만족을 얻습니다. 남성에게는 열려있고 여성에게 닫혀있는 이중적 성규범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남성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성교행위에 집착하여 있는 우리의 성문화로 인하여 인격적 교류보다 생리적, 신체적 성관계가 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이와 같은 이중적 성규범은 사랑이나 결혼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경험에 커다란 차이를 결과하며 이는 곧 성행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고 합니다(장필화, 새로 쓰는 성 이야기). 예를 들면 성과 사랑 그리고 결혼에 대하여 남성은 대체로 그것들을 분리시켜 생각합니다. 남성은 사회적 성공이나 출세가 인생의 큰 비중을 차지하며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 지위를 얻기 때문에 여성만큼 사랑과 결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성은 궁극적으로 결혼을 통하여 지위를 얻기 때문에 사랑과 결혼에 집착합니다. 결국 남성은 몸과 인격과 성과 마음이 융화의 경험을 갖기보다는 부분을 필요에 따라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분열적 경험을 가지며 이는 결국 성을 대상화시키는 태도를 바탕으로 갖게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성과 사랑과 결혼을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려워하며 행복을 가정에서 찾게 되므로 결혼에 큰 비중을 둡니다. 그래서 상대의 남성에게서 적어도 한가지는 존경할 수 있는 경우에야 결혼할 대상으로 결정하며, 그리고 성적 쾌감보다는 상대편과의 친밀과 결속을 더 중요시하며 혼전관계는 불안과 불신으로 두려워합니다. 여자의 성이해는 분열적이 아니라 통합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여자의 욕구는 정숙치 못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애써 억제하고 감추려하며 성관계를 두려워하고 기피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혼과 동시에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며 또한 책임을 모두 지게 됩니다. 이상과 같이 남자와 여자의 성을 중심으로한 사랑과 결혼의 경험은 큰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이중구조를 가지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성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남성과 여성의 성과 사랑에 대한 경험의 차이는 결국 성에 있어서의 남성지배 - 여성종속의 관계를 결과하며 가정 안에서나 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성문화를 만들고 성을 폭력적으로 행사하게 합니다. 성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아니면 여성이 희생됩니다. 그것은 약자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성은 힘이 지배하는 관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이 개방되어 여성에게도 성관계의 자유로운 기회가 주어졌다고 하지만 그러나 공격적 남성, 복종적 여성이라는 전통관념이 바뀌지 않는 한 성기중심, 저질적 성문화가 극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요약하면 성 지배적 가치의식을 가진 사회에서 성에 대한 인식은 혼재되어 있는 가운데 남성중심적 성이해와 남녀관계 구조가 성을 대상화시키고 나아가 폭력적 형태로까지 만들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성폭력에 나타나는 본질적인 왜곡현실은 성폭력이 살인죄에 해당하는 큰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죄를 오히려 뒤집어쓰고 사회적으로 죄인이 되어 소외되어 살게 되는 기이한 현상입니다. 예를 들면 성폭행 당한 유치원 원아들이 다른 유치원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그런 지저분한 아이들이 오면 자기 아이들이 물이 들게 된다'고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동네 어른들에 의해 집단폭행 당한 여중생의 고소에도 불구하고 그 여학생이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과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가해자는 불구속 기소 처분되었으며, 음독한 여중생의 경우에도 동네 주민들이 가해자의 처벌을 가볍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즉 가해자는 도리어 보호받고 피해자는 오히려 벌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가해자들이 별다른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성폭력은 상습적으로 행해집니다. 미성년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도 원인제공의 혐의를 둘진대, 성년이 된 피해여성이 피해자의 권리를 확보해 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실정이 아니겠습니까? 이 피해자들은 자기의 일생을 망칩니다. 수치심, 분노, 소외감 등으로 신경증에 일생을 시달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폭력은 살인죄와 같은 범죄입니다. 특히 여성에 대한 정절윤리가 강한 사회에서 공동체로부터의 소외현상은 여성 본인에게 중벌이 됩니다. 환향녀의 이름이나, 정신대 여성들의 고향공동체와의 영원한 이별을 우리는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여성들은 성폭력 방지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위해 법적 성취의 투쟁을 합니다. 이런 일에 동조하고 협력하는 것이 오늘날의 선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근원적으로 기독교의 대응은 왜곡된 인간관계의 개선을 위해 그 종교적 사명을 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성폭력을 중심으로한 오늘의 사회 병리적 현상을 많이 언급하였지만 결론적으로 하려는 메시지는 결국 인간관계의 문제가 근본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윤리가 포함된 올바른 인간관계, 남녀관계의 제시가 오늘의 기독교가 감당해야 할 지상과제일 것입니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성에 대하여 금기시해 왔고 금욕적 교훈에 집착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여성들의 순결을 원초적으로 강요하면서 억압해온 전통입니다. 출산이외의 성관계를 금지시켜온 전통을 오래도록 유지하여 왔습니다. 중세 크리스천들은 화요일에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이 화요일이라니!'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목요일은 예수의 최후만찬을 기억하는 날이고, 금요일은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는 날이고, 월요일은 먼저간 성도들을 기억하는 날이고 토요일은 마리아를 공경하는 날이고, 주일은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고 등등 성을 억제해야 하는 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성에 대하여 억제하고 억압하는 태도를 가져왔고 그것은 동시에 주로 순결을 지킬 것과 성의 원초적 본능의 억제를 강요당하던 여성들에 대한 억압이었으며, 또한 성을 부정적으로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성은 그 자체로 긍정해야 하는 동시에 성관계의 상호적 동등성이 자연스러운 관계로 인정되어야만, 오늘의 혼재된 성이해와 문제들이 극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의 상호적 관계와 동시에 남녀의 인격적인 상호적 관계를 말하는 성서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아가서 입니다. 아가서는 매우 독특한 입장을 갖는 경전의 한 책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성의 자연스러움과 세속성이 찬양되고 있으며 또한 상호성이 극대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상호성은 자신의 전 존재를 다 바쳐서 지극하게 사랑하는 지극함도 또한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남녀간의 진한 사모의 노래, 구애의 노래, 연인의 자랑, 사랑의 경험의 묘사, 육체적 매력의 묘사 등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아마도 광범위한 시기에 걸쳐 고대근동에서 불려지던 사랑의 노래들이 수집된 책으로 보입니다. 이 저자가 여성이며 아마도 흑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학자들이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이 책이 금욕주의적인 유대-기독교 경전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임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레고리적 해석에 의하여 유대교에서는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로,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해석하여 이 책은 경전에 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책은 고대사회에서 농민들의 결혼식에서 불려졌고 남녀의 세속적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성을 결코 금기적인 것이나 부정적인 것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삶에서의 성에 대한 찬양, 육체의 경험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 원초적 생의 욕구들에 대한 긍정, 가시와 엉겅퀴가 없고, 자연의 재해도 정치적 불안도 없는 세상에서 성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특히 아가서의 상호적 관계는 창세기와의 비교에서 더욱 명백합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인간 아담을 관계적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하여 돕는 배필을 창조합니다. 그때 아담은 여자를 보고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탄성을 지릅니다(창 2: 22-23). 그의 고백에서 보면 남녀간의 동등성과 연대성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가서와 수사적 비교를 해 본다면 아담의 노래는 남성의 소리만 들리고 남성만 주어로 등장하지만 반면 여자는 소리가 없고 대상으로 침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가서에는 남자의 노래와 여자의 노래가 똑같이 들려집니다. 여자는 주어요 자율적인 행동과 표현을 가지며 오히려 사랑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리드합니다.
상호적 관계는 양편 모두에게 자율권이 있음을 말하고 각각 주어가 되며 상대와 함께 하는 관계입니다. 그것은 어느 한쪽만이 힘을 가진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한쪽만이 힘을 가질 때 그것은 소유가 되고 통제하며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되고 맙니다.
사실 기독교 전통에서는 너무나 일방적인 관계와 윤리가 중요하게 평가되었고 또한 적용되어 왔습니다. 가장 이상화하는 아가페의 윤리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 권한도 사실은 상호적 관계성이 배제된 일방적 힘의 형태입니다. 완전자가 불완전자와 유대를 맺는다던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사랑의 관계, 그래서 한쪽은 철저하게 무능해야 하고 무자격자라야 하고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야 성립되는 관계가 기독교에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며, 그리스도인과 이웃과의 관계의 전형이 되어왔습니다. 이 아가페적 사랑의 관계형태는 두 가지 모습으로 인간사회 안에서 확장되었는데 그 하나는 철저한 자기부정과 자기희생을 강요하며 그래서 희생의 전형인 어머니를 신적 사랑인 아가페에 비유하여왔고 여성의 희생이 미화되면서 더 강요되었습니다. 어느 한쪽이 철저히 희생되어야 하는 관계의 강요였고 결국 그것은 피지배 집단에게 요구되는 것인데, 관계형태로서는 어머니와 자식간의 관계모델이 되고 어머니의 희생이 미화되면서 동시에 강요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신적 사랑의 모델은 세상의 지배자의 것이었습니다. 남성, 군주, 자연에 대한 인간의 보살핌, 가난한 자에 대한 부자의 베풂, 권력 없는 자에 대한 권력가의 사랑 등 시혜적으로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것을 사랑의 관계로 해석하였습니다. 인간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존재가 되려고 얼마나 노력하였습니까? 아가페의 사랑은 에로스적 사랑을 보다 열등한 것으로 규정지었습니다. 불평등한 관계 안에 나타난 사랑 그것이 신적 사랑이요 최대의 사랑의 가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희생자체가 덕목이 될 수 없고 최대의 가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맹목적인 희생은 새디스트적 기독교를 만들어 왔을 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도 우리에게 오해되어 해석되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의 희생은 희생 자체에 목적이 있거나 그것을 최대가치화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공동체에서 소외된 민중들이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자기들의 삶속에서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한 그들과의 사랑의 관계 때문에 희생한 것입니다. 절대적인 희생이 관계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을 때 참 사랑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 절대적 희생은 그를 따르고 그로부터 힘을 얻으며 성장하는 민중들의 상호적 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예수의 사랑만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한 그들의 작용을 우리는 간과해 온 것입니다. 무조건 주는 부모의 사랑, 거기에도 주고받음이 있지요. 아이의 웃음, 옹알거림, 생명의 신비가 주는 희열 이런 것이 부모의 사랑을 촉진시킴이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상호적이며 공동적입니다. 이것은 이기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체화되어 있는 자연스러운 주고받음의 관계로서 모든 관계가 언제나 상호적인 관계에 있음을 말하여 줍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행위하는 특성과 이를 받아들이는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정통신학이 전적으로 능동적인 하나님, 전적으로 수동적인 인간, 전적으로 베푸는 그리스도인, 전적으로 받는 이웃의 전형을 만들어 놓았고 상호적 여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관계적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관계 속에 내재하고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힘은 우리와 무관하게 조정, 통제하는 힘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에 하나님의 힘이 더 증가하고 우리에게 그 힘을 주십니다.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은 그분이 무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힘이 사랑의 관계에서 창조된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관계에 있으면 모두가 능동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관계의 동등함, 평등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관계의 상호적 지극함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동등함과 평등함에서 풍기는 대립적 긴장으로부터 벗어나 참으로 깊은 사랑의 인간관계를 갖는 지극함의 상호성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 지극함의 관계는 동학의 한울님 사상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서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의 존귀함을 말하고 그 관계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는데 동학에서는 우리 모두가 한울님을 몸에 모시고 사는 귀한 존재라 하며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 한울님을 모시고 태어나서 사람의 존엄성이 곧 한울님의 존엄성과 같다고 합니다. 인내천의 인간관이지요. 이상적인 사회는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는 사회를 말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의 사상, 다시 말해 사람이 하나님같이 존중받는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이 의식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의 기반이 되지 않을까요? 저는 기독교의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존재이해와 네 몸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에 대한 메시지가 상호적 지극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바로 이 동학의 인내천, 한울님사상을 보완적으로 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를 앞두고 폭력이 증가하고 성폭력이 난무하는 시대, 새로운 사회적 상황에서 쏟아져 나오는 21세기적 약자들의 갈곳 없는 방황, 놀라운 경제발전에서 탈락되는 젊은이들, 컴퓨터 지배 세상에서 나타나는 소외된 사람들의 현상, 그래서 앞으로의 시대는 기술이 극대화될 수록 종교적 영역을 더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도 합니다. 어느 시대가 오건 우리가 나아갈 길은 사람을(약자를­환경권 포함) 지극하게 존중하는 것일 것입니다. 상호적 지극함의 관계로서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며, 이를 위하여 교회의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고, 이 인간성을 얻기 위하여 명상하고 수련하여야 하며, 서로 지극한 관심과 열정과 연민을 가지고 관계의 소중함을 인식하며, 나 너 우리의 문제를 정의롭게 풀기 위하여 뜨거운 마음을 가지는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 넘치는 그러한 인간성과 관계성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다라는 동학의 소리를 경청할 필요성이 큰 시대라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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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2 이사야 절망과 희망-종교개혁 482주년을 맞아 사11:3-9  최만자 원장  2008-06-30 1997
1061 이사야 이사야 -그 작은 가시나무 새 사9:6-7  박창원 형제  2008-06-20 2813
1060 이사야 치유의 구원 사42:3-4  최만자 원장  2008-06-06 1767
1059 이사야 고운 모양도 없고 사53:2  박동현 목사  2008-03-17 2262
1058 이사야 어머니 사11:9  민영진 목사  2008-01-24 2099
1057 이사야 하나님과 모성 사49:15  조혜자 자매  2008-01-10 1958
1056 이사야 완악한 백성 사6:6-10  이경숙 교수  2007-12-20 2577
1055 이사야 돌봄과 배려만이 정의가 되는 세상 사11:1-9  최만자 원장  2007-12-05 2409
1054 이사야 뜨거운 눈물의 기도 사38:1-8  한태완 목사  2007-11-23 3689
1053 이사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사11:6-8  조성심 자매  2004-07-13 2523
1052 이사야 아픔을 기억하는 평화의 감수성 사11:6  최순님 자매  2004-07-13 2096
1051 이사야 무고한 자들의 고난 사53:1-9  길희성 교수  2003-04-19 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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