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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구원

이사야 최만자............... 조회 수 1767 추천 수 0 2008.06.06 20:4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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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42:3-4 
설교자 : 최만자 원장 
참고 : 새길교회 
새해도 어느새 한달이 훌쩍 지나가고 있습니다. 금년이 1999년인데 이를 999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 민속에 아홉수를 잘 넘겨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10년을 넘길 때마다 인생에 대한 느낌이 달라지고 한 대를 넘을 때마다 그 때에 따르는 희망과 불안과 긴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아홉 수를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금년은 그 아홉수가 세번씩이나 들어 있으니 위험이 세배로 더 하고 긴장감이 더 클 수밖에 없겠습니다. 아홉수의 위험을 증명하듯 지구 종말론이 떠돌고도 있습니다. 특히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가 1999년 7월에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예언했습니다. 일본 과학자는 실험결과 종말일은 7월이 아니라 99년 8월 18일 이라고도 합니다.

지금 예상되는 지구 곳곳에서 일어날 전쟁의 위기- 중동지역의 전쟁위기는 계속되고 있고, 또 일본이 신 가이드 라인을 주창하면서 자국 방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군국화를 강화하는 상황은 동북아와 한반도의 긴장을 크게 유발하고 있습니다. 또 이미 컴퓨터가 99란 숫자를 작동 정지 명령어로 오인해 장애를 일으키는 99버그로 예고된 Y2K의 대혼란, 노동시장의 재편과 경쟁격화에 따른 금융혼란, 실업증가라는 고통의 지속, 핵폐기물 방치로 인한 환경 재앙의 공포, 생명복제로 인한 생명과 인간에 대한 모든 신념의 혼란들이 밀려 올 것으로 예상되는 21세기 앞에 그 징검다리가 되는 1999년은 불안하고 힘든 때가 될 것이라는 생각들이 지배적입니다. 이러한 때 21세기를 전망하고 더구나 제3천년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세계는 어떻게 움직일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를 생각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점에 우리가 지금 먼저 해야할 일을 꼽는다면 20세기에 입은 상처들을 치유하는 일로부터 21세기를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치유하는 일은 뒷치닥거리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고 건강한 미래를 창출해 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세기를 돌아보면 인류는 성장, 발전, 성공, 풍요, 정복, 지배를 목표로 질주하여 왔습니다. 그런 것들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 파랑새를 잡으려고 앞뒤 돌아보지 않고 그것만을 위해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전쟁과 폭력, 독재의 횡포, 핵의 위협, 생태계의 파괴, 인간의 사악해짐 등을 가져 왔으며 살림이 아닌 죽임의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 모두는 상처투성이의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지난 한 세기도 상처로 쌓여 있습니다. 일제의 강점기로 시작한 우리의 20세기 역사는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고, 분단의 비극은 곧 이은 동족 상잔의 전쟁과 서로 증오하며 사는 적대관계의 남북의 대결로, 그리고 북측은 군주적 독재국가로, 남측은 군부 독재정치로 민의 고통과 고난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경제발전을 위한 산업화의 기치 아래 '잘 살아보세'를 외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뺏으면서 이룬 경제발전은 잠시의 풍요를 맛보게 하고는 국가 경제위기로 결말을 내었습니다. 이 역사의 진행 속에 우리는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지금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진 상처들이 어떤 것들일까 생각해 봅니다. 수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가장 깊은 상처는 상실의 상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상실한 것들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나의 상실' -자아상실- 입니다. 우리 중에 되고 싶은 '나'로 살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그 상황에서 누구도 '자기'로 살 수 없었습니다. 영토와 주권을 빼앗긴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아를 상실시킨 식민지배의 세월이었습니다. 대표적 예가 정신대 여성들의 인생이겠습니다. 그들의 자아를, 그들의 인생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이 너무 극단적인 예라면 우리 모두의 의식 속에 잠재 유전되고 있는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왜곡된 민족성들입니다. 지금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다는 한국을 사랑한다는 한 일본인(이케하라 마모루)이 쓴 책에서 한국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부정적 모습들을 비판한다는데, 사실 우리의 부정적 면들의 원인과 뿌리는 일제 강점기시대의 유물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해방이후 이데올로기와 분단의 갈등은 분단 조국에 사는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이분되어 입은 상처는 참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깊고도 큰 아픔이 되었습니다. 북한에 아직도 생존해 있는 136명의 전쟁포로들, 국가 보안법에 걸려 목숨을 잃은 이들, 오랜 세월 감옥생활을 산 사람들, 가족을 잃은 이들, 가정이 파괴된 사람들의 상처들은 어떻게 회복되겠습니까? 북한의 굶주린 주민들, 국경지대에서 인신매매 되고 있는 북한 여성들, 남북 이산가족의 한, 비전향 장기수들의 한, 탈북해온 이들의 고통, 힘없는 민족으로 태어나 유랑한 해외동포들의 한, 모든 것들은 자아를 상실한 우리들의 자화상들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겪었던 지독한 가난과 배고픔 때문에 가진 열등감과 왜곡된 심성들, 전쟁으로 인하여 생겨났던 수많은 고아들, 과부들, 양공주들, 이 모든 것들이 분단이 가지고 온 우리들의 상실입니다. 분단은 우리들의 상실의 뿌리요 가장 큰 요인입니다.

상실의 또 하나는 '서정'의 상실입니다. 어느 시인이 80년대 말 당시에 등단한 시들을 분석해 보았더니 거기에는 서정적 언어가 사라졌음을 발견하였다고 했습니다. 별, 하늘, 꿈, 아름다움, 사랑, 정, 등등 우리 마음을 안아주고 다독거리고 품어 주는 언어들이 매말라 버렸습니다. 경제발전을 위해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개발, 개발, 개발로 연이어 온 70-80년대, 그리고 군사 독재의 폭력과 그에 항거하는 투쟁의 연속은 최루탄, 화염병, 닭장차, 안기부, 남산 등의 세월이었습니다. 그 세월에 대학생들은 매일 인권투쟁을 생각해야 했고, 정부는 폭력진압을 생각해야 했고, 부모들은 자녀의 무사귀가를 빌고, 시민들은 편안할 수 있는 세상을 그리워하면서 살고, 공장이 세워지고 도시화가 급속히 이루어 졌어도 사랑과 꿈은 상실되어 갔습니다. 개발로 인해 아파트 부지가 되면서 판자촌이 헐리는 것을 보고 주인공 소녀 영희가 개발회사의 임원에게 몸을 팔면서 딱지를 얻어내는 조세희씨가 쓴 의 이야기가 그 상실의 깊이를 파헤쳤습니다. 그 영희는 딱지로 자기 꿈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자동차가 많이 생산되면서 우리는 출퇴근을 자가용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통근 버스라는 것이 있어서 한 동네에 사는 직원들끼리는 아침, 저녁으로 같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날 아침 속상하던 일들도, 또 기쁜 소식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자가용이 늘어나면서는 모두 각각 기름을 낭비하면서 그것이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 동네에 살아도 큰맘 먹어야 한 번씩 만나게 됩니다.
요즈음 아이들에게 시골을 알게 하려고 주말 농장 학습을 시키기도 합니다. 시멘트 속에서 시멘트만 바라보고 사는 아이들이 상실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어릴 때 멍석 위에서 옥수수나 고구마를 쪄놓고 하늘을 보며 그 초롱초롱 하던 별빛을 바라보던 일들을 기억합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그런 별빛 보기가 참으로 하늘의 별따기 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바라보며, 바람소리를 들으며 읊었던 윤동주의 시는 아마 요즈음 같으면 다른 표현이 되었겠지요.
또 우리가 상실한 것은 고향입니다. 이제 고향의 의미는 신화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인 것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끝없는 개발사업, 그리고 도시화는 농촌과 자연을 붕괴시켰고, 농촌에 있던 이들을 떠돌이로 만들었으며 지역을 떠나 살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40여년 전만해도 국토의 80%가 전통 농촌 마을이었고 20%가 도시였는데 지금은 그 반대입니다. 현재는 인구의 60% 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만드는 소중한 경험들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존재의 뿌리, 자기정체성의 확인 이것은 사람이 평생 살아가면서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상실해가며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절 때만 되면 민족 대이동이 일어납니다.
이런 거시적 차원의 상처들은 곧바로 개인 실존의 삶의 상실이 되었습니다. 모든 형태의 사건들이 자기자신이나 자신과 동일시 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실들이 인간성을 황폐화시키고 모든 관계들을 왜곡시키면서 상처를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상처들을 다 내어놓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정도입니다. 이제 이 상처들을 치유해야하는 과제가 큽니다. 무엇으로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
우리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서본문이 그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예언자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40장∼55장까지는 그 저자를 제2의 이사야라고 합니다. 이사야서 전체 66장을 3부분으로 나누는데, 각각의 내용에 나타나는 시대적 배경과 문체와 신학적 내용의 차이가 크게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을 한 사람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1∼39장까지는 예루살렘 이사야라 부르는데, 그는 대체로 기원전 8세기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였다고 봅니다. 40∼55장은 저자를 알 수는 없지만 그의 활동시기는 기원전 6세기로 보며, 그 활동 무대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현장으로 봅니다.
제2 이사야 메시지의 핵심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제2 이사야가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점이 이전까지의 예언자들의 메시지와 구별이 됩니다. 기원전 8∼7세기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중심으로 예언하였습니다. 아모스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심판예언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책망과 회개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심판예언도 하나님이 파멸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심판예언도 실상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이 근원입니다. 이스라엘의 배반, 범죄, 이런 것들로 인하여 당하게 될 화를 막기 위한 하나님의 경고가 심판예언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예언에서도 언제나 예언자들은 궁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희망을 동시에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제2 이사야에게서는 심판예언은 끝났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붙잡혀 와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제2 이사야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위로를 받을 것이며, 복역의 때가 끝날 것이라는 것,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희망을 잃은 백성의 탄식을 딛고 서서 파멸 중에도 살아 남아 있는 말씀을 그들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제2 이사야에게서는 치유의 구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판예언도 치유예언도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형태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에 대한 배반의 역사라 할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백성이었습니다. 출애굽을 시켜서 가나안에 정착케 하고, 소원대로 왕국을 이루어 주었으나 빈부 격차에 의한 사회분화와 지배자의 오만 등으로 결국 심판을 받아 북왕국은 멸망하였습니다. 유다왕국도 멸망의 시기에 이르러 지도층의 대부분이 포로가 되었고, 산하는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잃었고 황폐해졌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끝없이 배반하는 이스라엘을 끝없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역사입니다. 이제 더 이상 심판 당할 것이 없을 지경이 된 이스라엘에게 이제 하나님은 제2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위로와 희망으로 치유하는 역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2 이사야의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은 일차적으로 민족의 고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아마 상담학에서 공감의 치유방법에 해당될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가 된 이스라엘 민족의 상태는 40:6∼8에서 '풀이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는 구절에서 암시하듯 마르고 시든 꽃과 풀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그들 모습은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등불 같았습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은 부와 권력에 의해 억압당하는 가난하고 도움 받을 곳 없는 상태의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바로 포로된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패배와 좌절에 빠졌고, 이스라엘은 땅, 국가, 성전, 예배 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모습은 상실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비록 포로지에서 모여 탄식의 예배를 드렸다고 해도, 그들이 느끼는 야웨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하는 수치심과 불신이 더 컸기 때문에 그들은 바벨론 만신전의 막강한 신들의 위용 앞에 몸둘 바를 모르고 야웨 하나님을 회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2 이사야는 수치, 패배, 좌절로 얼룩진 민족의 모습을 알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또 받아들이고, 더 깊이 그에 대한 연민을 가집니다. 이것은 empathy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위로한다는 것은 바로 이 공감과 연민으로 할 때 진정한 것이고 또 상처를 회복 치유하는 힘이 됩니다.
제2 이사야의 또 다른 치유 방법은 지금 가지고 있는 상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는 일입니다. 수치, 죄, 열등, 위축, 좌절된 이스라엘의 고난이 지금까지 생각하였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대속적 고난이라는 엄청난 해석입니다. 오늘 본문인 42장은 제2 이사야에 나오는 '종의 노래' 중 한편입니다. 4편의 종의 노래(42:1∼4, 49:1∼6, 50:4∼9, 52:13∼53:12)가 있는데 53장의 수난의 종의 노래도 여기에 속합니다. 이 종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할 사명을 다하는데, 그러나 그는 수난 받는 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수난은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한 대속적인 수난이라고 합니다. 그의 메시지는 종의 노래에서 열방의 빛으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포로생활의 쓰라림을 청산한 다음 이스라엘은 역사의 무대 위에서 야웨의 종으로서 모든 육체가 야웨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임무가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에 지배적이던 고난이 죄의 결과라는 사상을 넘어서는 파격적인 해석인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새로운 존재로 긍정하는 치유일 것입니다.
아마도 이 종의 노래는 제2 이사야의 자전적 이야기일 것으로 대체로 생각합니다. 40:5 이하에 보면 제2 이사야는 박해를 받고 있었고 어떤 법적인 재판에 걸려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고소를 당한 것은 행동이 정치적으로 결코 용납 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방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요동하는 바벨론에게는 일종의 위협이었습니다. 사형언도를 받고 죽음을 앞에 둔 순간, 그의 신앙은 그가 받는 고난과 죽음을 그의 필생사업의 실패로 보지 않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 받는 고난으로서,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들을 야웨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의 일환이라고 대담하게 해석합니다(52:13∼53:12). 그래서 그는 남아 있는 자들에게 무죄한 자의 고난과 죽음으로 인하여 그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죄를 알게 되고 야웨의 구원 계획이 이룩되는지를 고백하게 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그의 자전적 노래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집단으로도 해석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하여 당하는 민족의 고난은 이제 대속적인 의미로 신학화 되었습니다. 이 대속적 고난의 종에 대한 이해는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고난에 대한 해석의 근거로 사용됩니다. 특히 마가복음의 고난의 그리스도 이해는 제2 이사야의 고난의 종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고난의 야웨의 종을 예수의 선구자 혹은 구약의 복음 선포자로 부릅니다.

또 제2 이사야의 치유는 큰 위로와 확실한 희망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의 마르둑 신과 야웨를 군사적 대결로만 견주어 야웨가 패배했다고 여겼으나, 제2 이샤야는 오히려 그것을 뒤집어 말합니다. 제2 이사야는 하나님이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43:19) 선언하고 대제국 바벨론이 패망하고 포로들이 고향 땅에 돌아 갈 수 있는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열린 것을 선언합니다. 포로상태에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할 것이며 예전에 조상들에게 약속한 바를 실현시킬 것임을 전합니다. 제2 이사야가 시작되는 40장에서 보면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를 선포합니다. 여기서 위로는 불행을 달래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도움을 주어 재생시키며 구속을 가져다주는 강한 용어입니다. 그에게는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다는 기대가 넘쳐흐릅니다. 체념 속의 백성을 일깨우고 하나님이 그들을 버렸다거나, 배척하셨거나 더 이상 도울 수 없다고 불평하는 포로민을 반박하면서( 45:9∼13)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가 어떻게 이방의 왕인 고레스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꾸실 수 있겠는가를 보입니다. 41:1∼5절(제1신탁)과 다음 곧 41:8∼13절에서 이방나라에서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보장을 받고 그리고 민족을 고국으로 이끄시는 길의 묘사가 나옵니다. 41:17∼20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놀라운 모습으로 만들며 초원으로 바꾸고 인도하실 것이며, 모든 먼 곳으로부터 그들이 돌아오고, 새로운 출애굽의 놀라운 사건이 될 것을 예언합니다(43:16∼21. 48:1∼11). 파멸의 잿더미에서 놀라운 새것이 솟아날 것이며, 이스라엘은 이제 상실하였던 모든 것들을 회복하게 되고 치유 받아서 건강한 새 역사를 이룰 것임을 말합니다.

제2 이사야는 그의 이와 같은 치유와 희망의 힘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근원하여 있음을 밝힙니다. 그 위로와 희망의 근원이 야웨 하나님이며 그분은 창조주이며 동시에 역사의 주재자이며 구원자임을 드러냅니다. 그 하나님은 바벨론의 신 마르둑보다 위대한 우주와 만물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전파합니다. 포로기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민족적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안팍의 상황변동 속에서, 이스라엘을 각성시키고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인도한 제2 이사야의 하나님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며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엄과 영원하신 분으로서 자연과 역사의 주이시고, 창조자인 동시에 구속자이십니다. 그의 이 같은 하나님 이해는 하나님을 단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적 창조, 우주적 역사, 우주적 구속을 하시는 우주적 하나님으로 확대하면서 성서적 세계관을 확장합니다. 이점에서 또한 그는 다른 예언자들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영존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분임을 인식합니다. 그의 고양된 낙관주의적 신앙 배후에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확실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제2 이사야는 공감과 자기 고난에 대한 재해석 곧 자기 긍정과 위로와 희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며 새 힘을 얻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IMF로 인한 또 많은 상처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치유받고 속히 새로운 날을 건설하기 원합니다. 오늘 제2 이사야가 포로민 이스라엘을 향하여 외친 것과 같은 외침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상실이 주는 아픔과 상처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민이 필요합니다. 민족의 차원이거나 개인의 차원이거나 치유를 위해서 우리는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 연민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상대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서도 그러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상실한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스스로 자신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새롭게 밝혀내는 일, 그러한 가운데서 나와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확신하는 일, 그래서 다른 차원의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새 힘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일 이런 일들이 상처받은 우리를 위한 치유가 될 것입니다. IMF 유민이라는 새 단어가 생기고 있는 때 오늘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그의 위대함에 의지하면서 광야를 초원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치유의 구원을 받고 그 힘으로 세상을 위해 일하여야 하겠습니다.
성공회 대학에서는 신입생 모집 요강에 민주화 투쟁 때 고난받은 이들의 자녀에 대한 특혜제도를 고려한다고 합니다. 이것도 치유의 한 형태일 수 있을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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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2 이사야 절망과 희망-종교개혁 482주년을 맞아 사11:3-9  최만자 원장  2008-06-30 1997
1061 이사야 이사야 -그 작은 가시나무 새 사9:6-7  박창원 형제  2008-06-20 2813
» 이사야 치유의 구원 사42:3-4  최만자 원장  2008-06-06 1767
1059 이사야 고운 모양도 없고 사53:2  박동현 목사  2008-03-17 2262
1058 이사야 어머니 사11:9  민영진 목사  2008-01-24 2099
1057 이사야 하나님과 모성 사49:15  조혜자 자매  2008-01-10 1958
1056 이사야 완악한 백성 사6:6-10  이경숙 교수  2007-12-20 2577
1055 이사야 돌봄과 배려만이 정의가 되는 세상 사11:1-9  최만자 원장  2007-12-05 2409
1054 이사야 뜨거운 눈물의 기도 사38:1-8  한태완 목사  2007-11-23 3689
1053 이사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사11:6-8  조성심 자매  2004-07-13 2523
1052 이사야 아픔을 기억하는 평화의 감수성 사11:6  최순님 자매  2004-07-13 2096
1051 이사야 무고한 자들의 고난 사53:1-9  길희성 교수  2003-04-19 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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