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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분에 의한 구원

이사야 권진관............... 조회 수 1332 추천 수 0 2008.09.20 23:5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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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32:15-18 
설교자 : 권진관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6.10.15주일설교 

여분에 의한 구원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살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사막은 과수원이 되고 과수원은 수풀이 되리라.) 그 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라. (사막은 법이 통하는 곳이 되고, 과수원은 정의의 터전이 되리라.)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정의는 평화를 가져오고)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법은 영원한 태평성대를 이루리라.)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이사야 32:15~18

위의 말씀을 이렇게 다시 풀어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사야는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백성의 땅에 급기야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내려오면 이스라엘 땅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이스라엘 땅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는데, “드디어 하늘의 영기가 우리 위에 쏟아져 내려 사막은 과수원이 되고 과수원은 넓어져서 모든 숲을 이룰 것이”라고 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오고 추수의 계절이 왔습니다. 추수를 감사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기뻐 찬양하는 계절입니다. 추수의 계절에는 우리는 평화로운 들판을 보며, 풍성한 열매에 기뻐하고, 고개 숙인 벼와 곡식을 보며 대자연이 주는 선물인 평화와 고요함을 만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기뻐할 수만은 없는 때를 맞이하였습니다 갑작스럽게 우리 민족의 영토인 한반도에는 먹구름이 짙게 깔리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반대하고 지켜보는 가운데에서도 핵폭탄 실험을 전격적으로 실행했습니다. 추석 연후로 즐거워하던 우리 민족에게 도둑처럼 닥친 불행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햇볕정책이나 포용정책으로 북한을 어느 정도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우리들의 낙관적인 생각에 여지없이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추수의 감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이번 추수감사주일에 더욱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에게 많은 고난과 불행이 닥쳐왔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 바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 데 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하박국 3:17~18).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가 노래하였듯이 이러한 불행한 시기를 맞았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불행함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름답고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사야의 말씀에서는 불행을 넘어서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수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하는 근거는 바로 하늘의 영기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기가 우리 위에 쏟아져 내리면, 사막이 기름진 밭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밭은 정의와 평화의 터전이 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영기를 받을 때 자연은 축복을 받고 풍성한 소출을 낸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연결되는 것은 그 자연이 정의와 평화를 담아내는 자연이 될 때 안식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추수감사는 인간 세계의 정의와 평화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추수감사는 정의와 평화가 그 땅에 깃들여 있을 때에 가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면, 추수 계절에 감사드려야 하는데 우리 한반도에 평화와 정의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감사할 수 있는 형편이 되고 있지 못합니다. 현재 한반도에는 정의와 평화가 없습니다. 힘의 논리, 핵무기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고, 핵전쟁의 위험은 상존하고 있습니다. 남한 사회가 아무리 결실을 많이 맺고 풍년이 들고, 부자가 되었다고 해도 정의와 평화가 위협받는 이상,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연의 축복은 인간의 정의를 위한 노력, 평화를 위한 노력과 직결되는데, 지금 우리는 그러한 것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진정 감사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사회가 정의롭지 않고, 평화가 없다면 밭은 소출을 내지 않는다는 얘기가 됩니다.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약 50년 동안 한반도는 위태위태한 상태였지만, 그런대로 평화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평화와 정의가 없는 한반도는 좋은 기름진 밭이 소출을 내지 못하는 황무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없는 나라에 어떻게 좋은 추수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추수감사는 정의와 평화가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왜 북한 땅에 계속 흉년이 들고, 좋고 아름다운 밭이 아니라, 자꾸 황무지가 생기는 지 궁금합니다. 혹시 나라 안에 평화가 없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평화로워야 밭을 기름지게 가꾸고 물도 잘 대줄 수 있는데 평화가 없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탈북한 사람들이 남한에 와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남한에 나무가 많다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민둥산만 보다가 남한에 푸른 나무가 꽉 들어찬 산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겠습니다. 산에 나무가 없으니 조그만 홍수가 와도 큰 일이 벌어지는 게 북한의 현실인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저는 독일 통일이 된지 2년이 안 된 때에 동독 지역에 간 적이 있습니다. 통일 후의 동독 지역은 황무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자연은 파괴되고 도시는 잿빛이었습니다. 동독을 지배했던 것은 비밀경찰이었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없으면 자연도 황폐해 진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을 마구 남용한다는 자본주의 국가인 서독은 자연을 보존했던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없으면, 자연의 선물인 결실과 추수는 없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평화스런 보금자리에서 고요한 분위기에서 마음 놓고 살게 되리라”는 말씀을 합니다만은 핵전쟁과 핵폭격의 위기 속에 있는 우리에게 평화스러운 보금자리,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진정한 꿈이며 구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성서 본문을 정한 날은 지난 수요일이었습니다. 오전에 교회로 성서본문을 정하고 설교제목 등을 정해서 보내놓고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와서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까 북한에서 핵실험이 실시되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핵실험 이후의 한반도와 세계 속에 우리가 진입해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는 갈등과 전쟁과 핵공포의 시기로 들어간 것이 아닌가요. 이러한 핵공포의 시기에 들어간 줄 모르고 본문을 정했지만, 결과적으로 오늘의 상황에 가장 잘 들어맞는 본문을 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주 동안에 “우리가 원치 않지만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안 해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갑자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 명예, 지위 이런 모든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고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저도 억울하게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였고 지금도 그런 불안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가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낙관의식 같은 허위위식 속에 빠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되겠지 뭐….” 이런 생각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에서 기독교 우파 측에서는 북한을 비방하고 성토하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평화를 위한 노력에 역부족을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에 모두들 자포자기 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우리 모두는 상황의 변화에 의해 모두 멸망하는 것은 아닌가, 21 세기의 비극이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마는 것은 아닌가 이런 걱정으로 잠이 오지 않는 상황입니다. 지난 1994년도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에 핵전쟁이 일어날 뻔 했었습니다. 그것이 이제는 현실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UN의 결의안이 어느 정도로 나올 것인지 걱정이 됩니다. 지금은 무력 사용을 배제하는 제재안이 나와 있지만 그러나 제재 과정에서 어떤 무력사태가 발전될 지 아무도 모릅니다. 전쟁은 여러 가지의 요인에 의해서 본의 아니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인간들이 모두 예방할 수는 없습니다. 원치 않지만 “어, 어…” 하는 사이에 전쟁으로 빠져 들고 마는 경우를 역사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을 제국의 시대라고 합니다. 미국이라고 하는 제국은 여러 나라와 민족, 그리고 집단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제국의 지배 전략을 펼치고 있습니다. 만약 미국이 일본이나 영국,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파키스탄, 남한 등등을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그리고 제국 지망생인 중국이나 러시아, 그리고 EU를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제국으로서의 지배전략을 펼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국은 여러 집단들을 끌어 들입니다. UN, IMF, World Bank, 심지어 우리나라의 기독교 우파, 네오콘, 뉴 라이트, 정치적 정당 등을 끌어들여서 제국의 지배 정치를 펼칩니다. 미국주의자들이 한 나라에 많으면 많을수록 제국은 작동됩니다. 교회는 이러한 제국의 네트워크의 고리를 끊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연대되어 있는 교회의 조직은 제국의 연대 조직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합니다. 교회는 제국의 힘에 의한 팍스 로마나 혹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아니라, 팍스 크리스티, 즉 그리스도의 평화를 위해 앞장서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교회들, 특히 대형교회들은 어떻습니까? 제국의 첨병에 서서 “부시 만세”, “미국 만세”, “타도 북한”을 외치며 제국의 입장을 강화해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팍스 크리스티는 교회 안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과거의 제국은 직접 지배와 직접 통치를 했지만, 오늘날의 제국은 제국 안에서의 연대를 형성한다고 합니다. 경제, 문화적인 지배를 지향하고 있으며 그 뒤에는 핵우산과 같이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전형적인 제국은 미국입니다. 사실 전형적인 제국은 자기의 네트워크 안에 있는 민족이나 나라들을 보호하는 측면이 있는데 부시 정부 하의 미국 제국은 남한을 위기로 몰아넣는 일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 전에 언론기관에서 설문조사한 것에 의하면, 남한의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미국을 가장 위험한 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미국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볼수록 남한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 미국을 이끄는 강경파 지도자들은 미국을 위해서도 결코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들의 이라크와 이란과 북한에 대한 강경정책은 제국의 네트워크를 오히려 약화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한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그리고 한반도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서 북미 간의 직접적인 대화를 촉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북한은 그 대화의 결과로 핵폐기의 길로 주저 없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한반도에서 군사적인 대립과 위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동시에, 교회와 민간 그리고 정부의 차원에서 한미 간의 대화를 열어 미국을 움직여서 북미가 대화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신학적인 말씀을 하는 것으로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사막이 아름다운 밭으로 되고, 그것이 다시 숲을 이루며, 정의와 평화가 그 속에서 일어나게 하는 그 원인은 바로 하늘의 영기라는 것입니다. 자연과 인간 세상이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영이 내려오면 자연이 축복받아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것은 동시에 인간들 간의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자연과 인위적인 인간 세상 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그것은 하늘의 영에 의해서 하나로 엮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영의 독특한 역할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서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그 영은 자연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어 풍성한 추수를 할 수 있게 하는 영이기도 합니다. 이 영은 인간세상과 자연세상 모두를 아울러서 바른 길로 가게 해 주는 영이요 기운입니다. 옛날 성경에서는 “위에서부터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성신”이라고 하였고, 공동번역에서는 “하늘의 영기”라고 하였습니다. 성신이든 하늘의 영기이든 이 말들은 모두 히브리어의 영을 일컫는 말로 루아흐를 번역한 것입니다.

루아흐는 자연과 인간 세상을 연결시켜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이 영을 교회의 전통에서는 인격으로 이해했으며, 삼위일체의 성령으로 고백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신학자들 사이에 이 성령은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의 그늘에 가려져서 충분이 대접을 받지 못하고 불필요한 존재, 여분의 존재라고 간주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 성령에 대해서 신학적인 자세한 논의를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 루아흐야말로 오늘날 우리 시대에, 이 한반도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루아흐, “하늘의 영기”,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신”은 불필요한 여분인 것 같지만, 그러나 이 여분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추수는 “여분”을 생산하는데, 이 여분으로 나눌 수 있으므로 우리는 구원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추수입니다. 그리고, 루아흐 즉 하나님의 영은 우리들에게 자연과 인간 세상은 결국 하나라는 것, 자연과 나는 결국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동학(東學)과 천도교에서 말하는 물오동포(物吾同胞)를 말합니다. 영을 통해서 사물과 내가 하나요, 같은 동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정의롭게 평화로울 때 자연도 거기에 화합하게 되며, 그리하여 인간이 정의롭게 평화로우면 사막도 아름다운 밭, 과수원이 되고 숲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자연의 모든 현상은 자연 법칙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의 활동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보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그건 하나님의 루아흐가 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자연의 모든 현상 속에 하나님의 루아흐가 참여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 영은 자연 그 자체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영은 자연의 법칙으로 환원될 것이 아니라, 바로 인격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서적인 입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인격적인 존재는 인간 안에 들어와 우리의 인격을 사로잡아 우리를 평화롭게 정의롭게 살도록 인도합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 즉 우리가 우리의 욕심과 무지 속에서 맹목적으로 살다가 정의와 평화에 어긋나는 삶을 영위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늘의 영기, 인격이신 하나님의 생명의 영에 어긋나게 사는 것이며, 그 영에 역행, 대항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자연에게도 깊은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불의하거나 갈등할 때 자연도 황폐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생명의 영을 좇지 않고 제국의 힘, 인간세상의 교만에 의지하다보면, 평화가 없고 정의가 땅에 떨어지고, 그러면 우리의 밭은 황무지와 사막으로 변하고, 우리의 금수강산은 파괴되어, 성경의 말씀처럼 가시덤불과 엉겅퀴만 내놓고 말 것입니다.  

이 생명의 영인 루아흐는 요단강가의 예수에게 비둘기처럼 내려오셨고, 광야로 이끄셨으며, 부활한 예수를 대신하여 예수를 기억하게 하시고, 예수의 일을 제자들이 지속할 수 있도록 함께 하시는 그 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령님이 예수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에 지속적으로 이 세상 속에서 활동하시면서 인간세상과 자연 속에서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이끌어 내신 신적인 존재요, 인격이신 분이라는 것을 고백을 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추수감사절에 이 생명의 영을 기억하며 그 분이 계심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영이 인도하시는 구원의 길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위로부터 오시는 영이 오늘날 핵위기로 얼어붙은 한반도에 정말로 “쏟아져 내려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모든 땅과 그 속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 풍요롭고 평화롭게 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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