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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열왕기하 정용섭 목사............... 조회 수 342 추천 수 0 2018.04.02 22:5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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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왕하2:1-1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62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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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12, 주현절 후 여섯째 주일, 2018년 2월11일

 

1.여호와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2.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3.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이르되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하니라 4.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매 5.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6.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가니라 7.선지자의 제자 오십 명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서 있더니 8.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 9.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10.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 11.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12.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 중에서 초자연적 기적을 가장 많이 보인 이는 기원전 9세기에 활동한 엘리야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집에서 밀가루와 기름이 동나지 않게 했다거나 죽은 아이를 살리기도 하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번제물을 태우기도 했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파란만장했던 한평생을 끝내야 할 순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죽을 때는 대개 자식이나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는 그런 예측과 전혀 다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인 왕하 2:1절 이하에 자세하게 묘사되었습니다.

 

엘리야의 승천 전승


엘리야는 다른 장소로 자리를 옮길 생각으로 제자 엘리사에게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길갈보다 벧엘이 죽음을 맞기에 더 적절한 곳으로 여겼을 수도 있고, 길갈의 선지자 학교를 엘리사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죽기 전에 벧엘의 선지자 학교에 가서 제자들을 만나볼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엘리사는 당연히 스승의 말을 따라야했지만 예상 외로 대꾸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왕하 2:2). 이와 똑같은 대화가 앞으로도 두 번이나 더 반복됩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와 함께 벧엘로 왔습니다. 벧엘 선지자 학교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고 묻자 엘리사는 이미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아무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일렀습니다. 엘리야는 여기서 다시 길갈에서 엘리사에게 한 말을 똑같이 합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을 다시 여리고로 보내시니 엘리사는 벧엘에 머물러 있으라는 겁니다. 엘리사 역시 길갈에서 했던 똑같은 대꾸를 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함께 여리고로 갔습니다. 여리고에도 선지자 학교가 있었습니다. 벧엘에서 일어났던 똑같은 일이 여기서 반복됩니다. 학생들이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죽음에 대해서 말했고, 엘리사는 그들에게 잠잠하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다시 엘리사에게 요단으로 가야겠으니 엘리사는 이곳 여리고에 남으라고 했으나 엘리사는 그럴 수 없다고 강변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요단으로 갔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선지자 학교 학생들 50명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엘리야는 겉옷을 말아서 물을 쳤습니다. 이는 마치 모세가 홍해 앞에서 지팡이로 홍해를 내리치는 모습과 같습니다. 요단 강물이 갈라지면서 바닥이 드러났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강을 건너 광야로 갔습니다. 이제 정말 마지막 순간이 온 것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자신을 이렇게 따라붙은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엘리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9절). 스승의 영적 카리스마를 자신에게 물려달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자신을 데려가는 것을 엘리사가 보면 그런 능력이 주어질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로 올라갑니다. 엘리야의 마지막 순간을 본문 11,12절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장면을 그린 명화도 많습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앞에서 똑같은 이야기가 지루하게 반복되다가 이 대목에서 급진전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사의 고함이 우리에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지킨 아버지와 같았다는 사실을 저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엘리야는 하늘로 실제로 올라간 것일까요? 이것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여기서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어떤 사건을 신문보도처럼 기술한 게 아니라 종교적인 언어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불수레와 불말들은 종교적인 언어입니다. 수레이면 수레이지 불수레는 없습니다. 말이면 말이지 불말은 없습니다. 성경에서 ‘불’은 신(神)현현을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출 3:2에서 보듯이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현상은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출 24:17절에도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역이 이루어진 시내 산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맹렬한 불같이 보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 30:27, 합 3:5, 신 33:2 등등, 여러 구절도 그렇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강을 건너 광야로 들어왔을 때 뜨거운 바람과 황사 현상이 강하게 일어서 지척을 분간하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 현상이 상당한 시간 지속되자 엘리사는 그 순간에 엘리사를 놓쳤습니다. 마치 불수레와 불말이 들이닥쳐서 엘리야를 하늘로 끌어올린 것처럼 느꼈을 겁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초자연적인 카리스마가 강력했던 엘리야이니 죽을 때도 그에 못지않은 신비한 능력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리야가 보통사람처럼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언젠가 다시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막 9:2 이하에 나오는 변화산 이야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실제로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주에 대한 공부를 최소한이라고 한 사람이라면 그걸 사실 그대로 믿지 않을 겁니다.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은 종교적인 의미입니다. 시적인 의미입니다. 예술적인 의미입니다. 이시영 시인의 아주 짧은 시 ‘벼꽃’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가 번쩍 눈을 뜨니/ 무논의 벼꽃들이 활짝 피어난다’ 시인은 개구리의 껌뻑이는 눈에서 자연의 절묘한 힘을 느낀 것입니다. 이 시를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시를 모르는 사람이고, 자연의 신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엘리야가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대대손손 전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주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무식쟁이가 아니라 삶의 결정적인 한 순간을 비밀스러운 언어로 표현해낼 줄 아는 거룩한 시인들이고 거룩한 예술가들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늘이란?


기독교 신앙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의 두 번째 단락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사도신경보다 더 중요한 ‘주기도’의 첫 문장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하늘은 엘리야가 올라갔다는 바로 그 하늘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이 하늘을 우주의 한 공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공간으로서의 하늘에는 엘리야도 없고, 예수님도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빅뱅 순간에 만들어진 흑암물질만 있습니다. 고대인들이 우주 공간을 하늘이라고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오늘 우리는 그런 생각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고대 성경시대 사람들도 우주 공간으로서의 하늘을 절대화하지 않았습니다. 계 21:1절에 따르면 그 하늘도 상대적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구약의 창조 신앙에 따르면 하늘도 역시 땅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이 그 피조물의 한 곳에 제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오늘의 물리학에 의하면 우리가 대상으로 보는 하늘만이 하늘이 아니라 지구를 포함한 모든 것이 다 하늘입니다. 하늘도 하늘이고, 땅도 하늘입니다. 거꾸로 말해서 하늘도 땅이고, 땅도 땅입니다. 하늘과 땅이 다른 게 아니라 모든 것이 다 똑같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입니다. 따라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은 공간이동을 했다는 게 아니라 세상을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 전혀 새로운 차원이 곧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한 사람은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늘에 올라간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통치가 가장 우선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은 창조와 창조의 유지와 그 완성입니다. 그것은 곧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는 생명을 파괴하는 힘들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부정하는 힘들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세력, 인간을 이념과 체제에 굴복시키는 세력, 전쟁과 증오와 혐오를 부추기는 세력입니다. 이런 세력이 막강하기도 하고 매혹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거기에 적응하는 데만 신경을 쓰면서 삽니다. 그것의 종교적 형태가 바로 예수님 당시의 율법주의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율법이 부정하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는 걸 피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기준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통치에 그의 영혼이 온전히 붙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일이 벌어지는 순간까지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에만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운명에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인 고후 4:6절이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빛이 비치라는 말씀은 창조 사건을 가리킵니다. 창조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생명의 절정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관념적인 것이라고 매도합니다. 그들은 요령껏, 또는 성실한 노력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을 생명이라고 여깁니다. 한 마디로 재미있게 사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영혼의 불을 밝히면서 생명 충만과 그 발현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자신의 운명과 이 세상과 사회에서 훼손되지 않고 완성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일에 투신합니다. 그게 당장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라는 사실을, 즉 승천의 삶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남북분단 체제의 극복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의 완성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인간의 구체적인 삶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각각의 영역에서 비인간화가 극복되어야 합니다. 이중에서 저는 오늘의 정치 문제를, 특히 남북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대한민국 국가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이슈이기 때문입니다. 남북이 분단체제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는 창조 신앙에 속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음과 같은 저의 꿈을 똑같이 꾸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대구에서 케이티엑스를 타고 서울과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서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모스크바에 들린 뒤에 폴란드를 거쳐 베를린과 파리까지, 그리고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 기차로 여행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지금 불가능한 이유가 다 정치적인 것이니 정치적으로 해결하면 안 될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남과 북의 관계입니다. 어떻게 해야만 우리는 하늘에 올라간 사람처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남북의 평화를 실현해낼 수 있을까요?


남북대화가 단초입니다. 지난 10년에 걸친 두 정권 시절에 남북대화가 끊겼습니다. 민간 교류도 막히고, 금강산 길도 막히고, 심지어 개성공단도 폐쇄되었습니다. 대화를 하려면 일단 상대방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북한을 마녀처럼 생각합니다. 마녀는 사냥의 대상이지 대화의 상대는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툭하면 종북좌파, 또는 좌빨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게 바로 마녀사냥입니다. 요즘 20대 젊은이들도 북한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인 것 같습니다. 이틀 전에 시작된 평창 올림픽의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반대하는 젊은이들도 많습니다. 이에 편승해서 자유한국당의 아무개 국회의원은 국제올림픽 위원회에 반대 서한을 발송하기도 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행동입니다. 그런 행동은 지나치지만 북한이 늘 골칫거리인 것만은 분명하니 대화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상 외로 많습니다. 북한이 오죽 했으면 유엔의 제재를 받겠습니까.


우리가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가장 이유는 그들이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본토까지 사정권 안에 들어오는 미사일도 개발했다고 합니다. 전 세계 모든 나라가 반대하는 핵무기 개발에 북한이 매달린 이유는 그것만이 자신들의 유일한 생존전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론 그들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태의 중심에 미국이 있습니다. 북한은 지금도 미국과 전쟁 중에 있는 겁니다. 6.25 전쟁이 지금 휴전 상태일 뿐이지 완전히 끝난 게 아닙니다. 그래서 미군이 여전히 남한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미국과 휴전협정을 넘어서 종전협정, 즉 평화협정을 맺자고 주장합니다. 미국은 북한을 향해서 평화협정 운운하기 전에 먼저 핵무기를 포기하라고 합니다. 이런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남한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전시작전권도 없는 한국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미국이 북한에게 먼저 핵무기를 포기해야만 대화하겠다고 말하지만,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하기 전에도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미군은 왜 남한에 70년 가까이 주둔하고 있을까요? 이런 문제까지 말하는 것은 설교자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라서 그만 두겠습니다. 핵심은 남한과 북한이 분단체제를 넘어서서 평화공존의 길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이런 작업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남북 냉전이 심화되고, 긴장이 높아지는 게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집단이 나라 안과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남북관계를 전향적으로 풀어내는 일이 정치인들의 몫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시민들은 선동 세력에게 세뇌당하거나 부화뇌동하지 말고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완성하실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하고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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