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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의 독자를 살리심

누가복음 이정원 목사............... 조회 수 338 추천 수 0 2018.09.10 23:5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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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7:11-17 
설교자 : 이정원 목사 
참고 : 2017.10.22 희망의교회 http://hopech.kr 

과부의 독자를 살리심                       

눅7:11-17


  우리가 살면서 절망과 인간의 한계를 가장 절감하는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입니다. 그토록 안타깝게 기도하며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절망을 느끼며 인간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과학과 의학이 놀랍게 발달한 현대에도 죽음에 대한 인간의 대책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절망감과 슬픔과 두려움과 허무함을 줍니다.


  오늘 본문에는 독자를 잃어버린 한 과부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보다 더 불행하고 비참하고 절망적이고 애통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과부의 죽은 독자를 다시 살려주신 것입니다.


    나인 성의 장례 행렬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로 들어가시는 길에 한 장례 행렬과 마주치셨습니다. 그 동네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 과부의 독자가 죽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들”(11-12절)


  이 과부는 먼저 남편을 여의고 외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여자가 한 가정의 생계를 꾸려나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과부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빈곤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과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과부의 외아들은 그녀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이 과부는 오직 이 아들만 바라보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 고단하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그 아들로 인해 그나마 소박한 행복이 있었을 것입니다. 과부의 외아들은 그녀에게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이제 이 과부는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동네 사람들도 이 불쌍하고 가련한 과부를 위해 함께 슬퍼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죽은 아들의 장례식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심


  예수님께서는 외아들을 잃어버리고 슬픔과 절망에 빠진 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13절)


  주님께서는 이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슬픔 당한 이웃을 위로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이웃을 위로하면서 울지 말고 힘을 내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우리는 슬픔 당한 이웃에게 아무 힘이나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을 절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사람을 어떻게 위로하며 도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이 과부를 위로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시며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하셨으며, 더 나아가서 죽은 그녀의 독자를 다시 살려주심으로 그녀를 슬픔과 절망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누가는 이 기사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특별히 ‘주’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누가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권세자, 생명의 주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슬퍼하는 이 과부를 단지 말씀으로만 위로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독자를 살려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소망 없고 가난한 자를 구원하시고 위로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기꺼이 동참하셨으며, 우리를 그 고통과 슬픔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헬라어 단어 스프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ιξομαι)는 본래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애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다, 측은히 여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창자, 내장, 간장’ 등을 의미하는 ‘스프랑크논’(σπλαγχνον)에서 유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 즉 애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얼마나 공감하시며 거기에 동참하셨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이것은 곧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공감하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아들을 잃어버리고 절망 가운데서 슬퍼하는 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죽은 독자를 살려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도 이렇게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의 은혜를 힘입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을 불쌍히 여기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얼마든지 도우시는 은혜를 힘입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외아들을 잃어버리고 슬피 우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는 장례 행렬로 다가오셔서 관에다 손을 대셨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14절)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모든 형편과 슬픔과 절망을 아시고 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사 죽은 독자를 살려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셔서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죽어 관 속에 누워있는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청년에게 마치 잠자는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15절)


  예수님께서 죽은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시자, 가장 슬프고 절망스러웠던 장례식은 가장 기쁘고 복된 축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16절)


  사람들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구약의 큰 선지자들을 생각했습니다. 구약시대에 죽은 사람을 살린 선지자가 두 명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죽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 엘리사는 죽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나인 성 사람들은 그 날 예수님께서 죽은 청년 살리신 이적을 보고, 예수님을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큰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선지자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던 400여 년은 이스라엘의 암흑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위대한 선지자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다시금 이렇게 위대한 선지자를 보내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셨다고 찬양하며 기뻐했던 것입니다.


    생명의 주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죽은 자를 살려주신 일은 세 번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 그리고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 다 죽은 자들에게 마치 자는 자들에게 명령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14하)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눅8:54-55)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11:43-44)


  예수님께서는 마치 죽은 자들이 잠을 자고 있는 자들인 것처럼, 그들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명하실 때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야이로의 딸을 잔다고 하셨으며, 죽은 나사로를 깨우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눅8:52-53)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요11:11-14)


  예수님께는 얼마든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생명의 주이시며, 죽은 자와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으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겐 아무것도,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절망이며 한계인 죽음


  저는 어린 시절 본문의 기사를 읽으면서 큰 충격과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 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거의 다 가난했습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 중에는 아버지가 없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런 가정은 더 가난했습니다. 아마 나인 성의 이 과부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난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 과부에게는 청년이 다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이 과부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의지가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아들이 죽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 과부는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죽은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성지 순례 때 나인 성에 가보았습니다. 한적하고 특별한 것도 없는 작은 동네였습니다. 저는 본문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동네 어귀 삼거리에 서 보았습니다. 아마도 이 거리로 장례 행렬이 지나갔을 것입니다. 절망과 슬픔에 잠겨 울면서 따라가는 과부의 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시는 장면, 죽은 청년을 살려주시는 장면도 눈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신 분이신지 모릅니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자라면서 본문의 기사와 비슷한 일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도회지에서 살다가 목회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어느 깊은 시골로 이사를 갔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겨울 그 동네에 초상이 났습니다. 어떤 가난한 가정의 가장이 죽은 것입니다. 그 날 보았던 장례식을 잊을 수 없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상여도 없이 죽은 사람의 관을 운구하면서 동네 앞 공터를 몇 번이고 돌았습니다. 그 뒤를 고인의 아내가 따라가면서 얼마나 슬퍼하며 통곡했는지 모릅니다. 그 날은 바람이 심하게 불고 눈발이 사납게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 가정에는 아직 어린 자녀들이 세 명이나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이제 저 집은 어떻게 살아갈까 하고 막막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고, 한국도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할 군인을 모집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서도 한 청년이 베트남전에 나가겠다고 군에 지원했습니다. 아마도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던 이 청년은 꽤 많았던 참전 수당을 받기 위해 지원했을 것입니다. 어린 우리는 맘씨 좋은 그 청년에게 전쟁터에 나가면 어떻게 싸울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웃으면서 닭 모이통을 들고서 총알을 이렇게 막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안타깝게도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홀로 남은 그의 어머니는 실성하고 말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런 일들을 보면서 죽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절망적이고 심각한 것인지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죽음보다 더 치명적인 것


  죽음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의 모든 것을 끝장 내버립니다. 죽음은 우리를 얼마나 두렵게 하며 무력하고 비참하게 하며 낙심하게 합니까? 제 경험으로 볼 때,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이 세상은 전혀 딴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산천과 하늘의 색깔도 달라보였습니다. 집은 공허하고 슬픔이 가득한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모든 것들을 절대로 돌이킬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노력이나 다짐으로도 그 절망적이고 슬펐던 상황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은 이렇게 우리에게 치명적인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끝장 내버립니다.


  그러나 이 죽음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 죽음을 가져온 죄입니다. 죽음은 바로 이 죄 때문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이 죄는 사람을 죽게 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멸망을 당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은 후에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더 이상 어떤 소망도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가항력적이고 치명적인 이 죄로부터, 그리고 그 죄가 가져온 죽음과 불행과 절망과 영원한 멸망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당할 소망 없게 된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죄인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주님을 믿기만 하면 죄와 죽음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무궁하신 사랑과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신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날 나인 성 어귀에는 두 행렬이 마주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행렬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마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행렬은 슬픔과 통곡 가운데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을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두 행렬은 이내 마주쳤고, 잠시 멈추었습니다. 잠시 후 두 행렬은 기쁨이 넘치는 하나의 행렬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기쁨 넘치는 행렬이 죽은 외아들로 인해 통곡하며 슬퍼하는 행렬을 삼킨 것입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죽음과 슬픔과 절망을 생명과 기쁨과 소망으로 바꾸어주시는 분이심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습니다. 죄 때문에 우리 인생은 고통과 슬픔과 불안과 두려움과 절망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죄는 마침내 우리를 죽음으로 끌고 가며,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합니다. 이런 죄인들에게는 아무 소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주시고, 이 모든 저주와 멸망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생을 얻었고, 천국 소망을 바라보며 은혜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랍습니까? 구원의 은혜에 대한 뜨거운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천국 소망을 바라보며 오직 충성 다해 주님만 섬겨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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