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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진 십자가

누가복음 길희성............... 조회 수 2486 추천 수 0 2008.07.24 2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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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23:26-43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1.3.11 주일설교 
새길교회가 시작한지 14년이나 되었습니다. 보통 과거를 회상하면 언제나 '벌써?'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법인데, 저는 그런 생각이 안 드니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가 너무나 큰 사건들의 연속이기 때문에 14년이라는 세월이 상당히 길게 느껴지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요즈음은 10년이 아니라 1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해야 할 정도로 세상이 빨리 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단도 없고 목사도 없고 건물도 없는 삼무(三無) 교회로 불리는 우리 공동체가 지난 14년 간 걸어온 길이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에 14년의 세월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14년 전의 감동을 되새기면서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것이 창립 기념예배의 의미일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의 기적을 잊지 못하고 그 기억을 자자손손에게 전하고 되새기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듯이, 우리도 14년 전에 감행했던 자그마한 출애굽을 해마다 새롭게 되새기는 것입니다. 숨막히게 답답한 제도교회를 박차고 자유와 은총의 새로운 공동체를 찾아 나섰던 출애굽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교독한 창립취지문처럼: "섬김 받는 교회에서 섬기는 교회로, 직업화된 교역자 중심의 교회에서 공동체적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제도와 율법주의에 매인 교회에서 은총과 자유의 교회로, 닫힌 교회에서 열린 교회로,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쌓아올리는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교회로" 우리는 14년 전에 하나의 출애굽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에 불확실한 생활에 불안하고 지쳐서 오히려 종살이하던 애굽 땅의 생활을 그리워하듯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제도교회에 대한 향수가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때 우리는 현대교회와의 통합을 통해 제도교회의 안정을 구해보기도 했으나, 재차 출애굽의 모험을 강행했습니다. 자유는 부담스러운 것이고,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절감합니다.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유혹이 항시 우리에게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의 한국 기독교를 돌아보건대, 아직도 14년 전의 모습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각종 비리와 추문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14년 전 한국 기독교를 향한 우리의 주된 비판은 교회가 역사의식을 결여한 채 사회적 핵임을 망각하고 도피적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한국 교회의 폐쇄성과 권위주위적 구조, 그 몰역사성과 현실안주성을 문제삼았습니다. 14년이 지난 오늘의 교회는 여전히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탐욕, 비리, 뻔뻔스러움, 도덕적 불감증이 판을 치고 있는 형편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제 갈 때까지 다 갔다는 느낌이 듭니다.
해방 이후 한국 기독교사를 저는 간단히 3 시기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첫째 시기는 교회 다니는 것을 숨기던 시기(50∼60년대)였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소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주위와 잘 어울리지 못하고 튄다는 생각 때문에, 숨어서 혹은 낮은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던 때였으며 기독교인들이 일종의 minority complex를 지녔던 때였습니다. 둘째 시기는 그러던 한국교회가 70∼80년대를 통해 급성장하여 한국 사회의 주류에 진입하면서 교회 다니는 것을 대놓고 알리며 자랑스럽게 여기는 시기(70∼80년대)입니다. 저는 이 시기에 유학을 떠나 없었지만 80년대 초에 귀국해 보니 대낮에 캠퍼스에서 찬송가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고,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한국 교회가 이제 사회의 주류 종교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류가 되면 그 만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터인데, 그런 의식은 없고 교회는 늘어나는데 사회는 밤낮 그 모양 그 꼴이니 교회는 무엇 하러 존재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먹여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역리가 지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하튼 이 시기에는 교회 다니는 것이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은 일이 되었고, 오히려 사회적으로 덕을 보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떳떳이 자기가 신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사람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구나 하고 놀랄 때가 있을 정도로 너나 할 것 없이 다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몇 일 전에 들은 얘기인데, 요즈음 학원 비리로 한창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모 대학의 총장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구한 전통을 가진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아연실색했습니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한국교회는 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드디어 제 3시기로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시기를 교회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시기라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숨기던 시대가 가고, 교회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드러내놓던 시기도 지나가고 이제, 좀 생각이 있고 비판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아직도 교회에 다니십니까?"라고 묻는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교회성장이 멈추고, 뜻 있는 사람들은 교회를 등지게 되고, 각종 추문과 비리로 얼룩진 교회는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회를 구원해야 할 교회가 사회에 의해 퇴출당할 형편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새길교회는 이미 그 징조를 14년 전에 읽었기 때문에 출애굽의 모험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이제 수많은 신자들이 대대적 출애굽을 감행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한국 교회에 감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대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각종 민중교회, 실험교회, 그리고 우리와 같은 대안교회 운동도 그 한 가지 대응이며, 요즈음 급증하고 있는 영성에 대한 높은 관심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80년대까지는 한국 기독교 내에서 소수이지만 독재정권에 저항하면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고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는 노력도 했지만, 90년 한국기독교는 그러한 긴장감마저도 사라지고 덩치만 큰 무기력한 집단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습니다. 비만해질 대로 비만해져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집단처럼 되었고, 자정능력을 상실한 채 기득권 세력을 유지하는 데 급급한 집단이 된 것입니다.
14년 전 우리의 출애굽은 작은 사건이었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나름대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 때 우리가 무슨 용기가 있어서 그렇게 했는지, 그야말로 무슨 배짱으로 목사도 없고 교단도 없는 교회를 시작하려 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엄청난 짓을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역시 그 때는 지금보다 젊었었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막상 출애굽을 하고 보니, 진실하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하게 되었으며, 그러면 그럴수록 후회가 들기도 하고 도망쳐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든 때도 솔직히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요즈음의 저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라면 오늘 아침 성경 말씀에 나오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된 구레네 사람 시몬이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 사람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누구였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왜 예수 곁에 있다가 그런 봉변을 당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단 한 번 복음서에 등장하고는 잊혀지는 존재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단지 구레네 사람이라고만 하는데, 구레네(Cyrene)는 로마 시대에 그리스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정착해 살고 있는 북아프리카의 해안 도시였습니다. 거기에 역시 그리스 말을 사용하는 유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시몬도 물론 그런 유태인 가운데 하나였을 터이지만 이런 것은 우리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시몬이라고 하지만 이 알렉산더가 누군지 루포가 누군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무명성이 우리들의 상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너무 자의적인, 구체적 상상은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단지 사람들이 그를 붙들어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게 했다고 보도하고 있으며, 마가는 그가 시골로부터 올라오는 길에 그 곳을 지나다가, 말하자면 우연히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는 식으로 보도합니다. 그런가 하면, 누가복음에는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들어 억지로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뒤따르게 했다"고 하여 '시골서 예루살렘으로'라는 약간의 구체성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세 복음서가 이구동성으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만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러나 왜 하필 그를 붙잡아서 그랬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정말 우연이었을까요?
첫째, 분명한 것은, 시몬은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큰 행렬에 끼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 행렬은 필경 유월절 제사를 드리려 산지사방에서 올라와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유태인들의 무리였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수께서 유월절이 낀 주간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처형당하셨으니까 그렇습니다. 둘째, 그가 매우 건장한 사람이었을 것 정도는 쉽게 추측이 갑니다. 예수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옆에 있던 한 건장한 청년을 붙잡아서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한 것이지요. 우리는 그림에서 청년 예수 상을 그릴 때 매우 건장한 유대 청년, 그야말로 사나이다운 사람으로 그리지만, 정말 예수가 그랬을까 의심스럽습니다. 궁핍한 촌 갈릴 지방에서 자라나시고, 제 때 식사도 못하시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가 그렇게 건장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야 말로 춥고 배고픈 사람이었으니까, 어쩌다가 누구 집에 초청이라도 받아 가면 체면이나 점잖음은 다 던져 버리고 그야말로 게걸스럽게 잡수셨기에 '먹기를 탐하는 자,' 그야말로 먹보 혹은 식창고(glutton)라는 비난을 받으신 것이 아닐까요?
셋째, 시몬이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을 마가와 마태는 순전히 우연한 사건인 것처럼, 그야말로 재수 없이 곁에 있다가 당한 것으로 묘사하지만, 누가는 다르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뒤를 따랐는데 그 중에 여인들도 많이 있었다"라고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레네 시몬이 결코 우연히 예수 곁에 있다가 그야말로 난데없이 날아오는 돌에 맞듯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이 아니라, 여인들처럼 적어도 의도적으로 예수 근처에 접근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범죄자 근처에 누가 가까이 있기를 원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십자가라는 당시로서는 고약한, 국사범과 같은 자들이나 받는 끔찍한 형벌을 받아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자 곁에 무슨 볼 일이 있다고, 그것도 쉽게 잡힐 정도로 그렇게 가까이 있었겠습니까? 예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왜 나무에 매달리는 저주받은 형벌을 받는 사람 곁에 얼쩡거렸겠냐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를 버리고 도망간 비겁한 제자들은 아무도 예수 곁에 얼쩡거리지 않고 다만 여인들만 예수 뒤를 따르면서 슬퍼하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찡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우리는 적어도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의 처형을 감히 적극적으로 항의하지는 못했지만, 심정적 동조자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 때문에 예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얼쩡거리다가 그만 잡히게 된 것이 아닌가 말입니다. 한 걸음 더 상상력을 발휘해서 생각해보면, 그는 필경 건장한 청년이었기에 굳이 도망치려 했다면 얼마든지 도망갈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냥 못 이기는 척 하며 잡혀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누가 도망가는 사람까지 좇아가 붙잡아서 억지 십자가를 지게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결정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 자신을 비롯하여 여기 모인 형제자매님들의 처지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자취해서 진 사람이 아니고, 억지로 진 자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는 떠났지만 - 마음으로, 신체적으로 -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예수만은 끝내 외면하지 못해 그 곁에서 얼쩡거리다가 그만 잡히게 된 자들이 아닌가, 그래서 억지 십자가를 지게 된 사람들이 아닌가 말입니다. 우리는 결코 교회 곁에서 얼쩡거리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차마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교회 주변을 배회했다 하더라도 교회에 미련이 남아서, 교회라는 것을 잊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한 동안 교회를 아주 잊고 다니지 않았던 사람도 상당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절규하며 죽은 예수만은 잊지 못하고 마음 속에서 그 분 곁을 배회하다가 결국 이렇게 잡힌 신세가 된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을 그렇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했다고 하는데, 우리들로 하여금 이렇게 억지로 지게 한 사람이 누군지 갖가지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친구 따라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신문보고 찾아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모두 자기의 의사, 자기의 결단으로 이렇게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면, 우리가 예수 곁을 배회했다고 하기보다는 그리스도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배회하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놓아주지 않으신 것이지요. 집요하게 우리를 부르고 초대하는 그 음성을 우리는 외면하지 못해 결국 그 곁을 배회하다가 이렇게 생각지도 못 했던 십자가를 지고 예수 뒤를 좇아 골고다 언덕을 힘겹게 오르게 된 것이 아닙니까?
우리 가운데 이런 의문이 들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십자가를 졌단 말인가? 구레네 사람 시몬은 문자 그대로 예수의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졌지만, 우리 새길교회가 말만 많이 했지 정말 예수의 십자가를 진 적이 있으며 골고다 언덕을 오른 적이 있느냐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매 주일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겠다고' 신앙 고백과 결단을 하지만, 실천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일상에 매여 사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난 14년 간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늘 시달려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교회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는 생각, 고난을 통하지 않은 구원은 없다는 생각, 이것 하나만은 우리 교회가 확실하게 우리들 마음 속에 불어넣어 주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정의를 외면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하고도 좋은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뻔뻔스러운 생각만은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우리의 실천은 모자랐지만 실천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 그 부담감이 바로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가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한없는 죄의식, 부족함, 자책감, 부끄러움, 이 부담감이 새길교회 신자들의 십자가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새길교회에 오면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않고 새로운 스트레스를 받고 돌아간다고도 말합니다. 좋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몫, 우리가 지는 최소한의 십자가니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좋다고 찾아오는 것을 보면 때로는 신기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사이비 종교와 진정한 종교를 가르는 단 한 가지 기준이 있다면, 저의 생각으로는 고통과 고민이 있는 종교냐 아니냐 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통과 고민이 없이 낙원만을 약속하는 종교는 거짓 종교, 그야말로 인민의 아편과 같은 종교입니다. 뼈아픈 죄의식과 피나는 수행의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은총의 종교, 공짜만 남발하는 종교는 그야말로 사교, 사기집단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공짜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희생 없이는 구원이 없고 죽음 없이는 참된 생명은 없는 법입니다. 십자가의 고통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 사상계에서 한창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 다석 유영모 선생은 "영원한 인생은 자기부정을 통한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 교회의 근본문제는 바로 이 자기부정의 길, 십자가의 길을 망각했다는 데에 있으며, 모든 문제가 여기로 귀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쉬운 기독교, 공짜 구원, 세상에 과연 그런 것이 있겠습니까?
복음서에 보면 두 형제 얘기가 나옵니다. 형은 아버지의 명을 따라 일터로 가겠다고 약속해 놓고 지키지 않았고, 안 가겠다던 아우는 결국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이 아우와 같은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주를 따르겠다고 철석같이 맹세했던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예수가 골고다로 향하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엉뚱한 구레네 사람만 그 곁에 있다가 대신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우리도 이 아우와 같은 자들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가기 싫어서, 일이 힘들 것이 너무도 뻔하니까 우선 못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그래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적어도 뻔뻔스러운 기독교인은 아니지 않는가 생각해봅니다. 가겠다고 큰소리치면서 안 가는 교인, 아니 가지도 않으면서도 간다고 착각하는 교인들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아우는 중도에 후회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마음 독하게 먹을 걸 괜히 가겠다고 그랬나 보다 하고 말이죠. 왜냐하면 정작 일해보니 어렵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구레네 시몬도 후회를 많이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 때 확 도망쳐 버렸으며 될 것을, 괜히 어물어물하다가 붙잡혀 이 고생을 하는구나 하고 말이죠.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연약한 예수, 야위고 초라한 예수가 그 버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는 것이 측은하고 불쌍한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기가 알기로는 하나님을 극진히 사랑하고 힘없고 가난한 무지랭이 사람들을 사랑한 것 외에는 큰 죄를 진 것 같지도 않아 보이는 데, 이런 끔찍한 형벌을 받는 억울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이 예수에게 동정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록 힘은 들지만 오히려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그 사람을 위해 대신 십자가를 졌다는 사실, 그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는 것에 대해 뿌듯하게 느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다. 세상에 십자가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인들 십자가를 좋아하셨겠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나에게서 멀리 해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십자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학적인 사람, 비정상인일 것입니다. 문제는 일단 어떤 이유에서든 십자가를 지기 시작한 사람은 다시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도망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차마 예수를 잊지 못해 그 곁을 배회하다가 그에 의해 붙잡힌 이상, 다시는 그로부터 도망갈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예수에 붙잡혀 오도가도 못하는 이런 심정을 시인 구상은 '나사렛 예수' 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했습니다:

내가 탯줄에서 떨어지자 맺어져
나의 삶의 바탕이 되고, 길이 되고,
때로는 멀리하고 싶고 귀찮게 여겨지고,
때로는 좌절과 절망까지를 안겨주고,
때로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생판 낯설어 보이는 당신,
당신의 참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중요한 것은 구레네 사람 시몬과 마찬가지로 예수가 바로 우리 곁에서, 아니 우리 앞에서 여전히 골고다의 길을 함께 동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를 알아주시고 고마워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못 다한 고난을 채우려고 애쓰고 있는 우리들과 주님은 항시 함께 계시며 함께 아파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보다도 더 연약한 우리가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비틀거리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보실 때, 우리 주님은 안쓰러워 하시고 미안해하시면서 고난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나 혼자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 형제 자매들이 함께 고난을 나누는 고난의 공동체, 고난의 연대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억지로 진 십자가이긴 하지만, 이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위해 그 분이 지신 십자가에 동참하고 그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오히려 감사하고 때로는 마음 뿌듯해 하기도 합니다. 고난의 길에 정녕 인류 구원의 길이 있고, 죽어야 살수 있다는 진리, 십자가가 있어야 비로소 부활의 영원한 생명의 있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신 그 분에게 고마워 하면서 우리는 오늘도 힘들지만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주님의 뒤를 좇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 형제자매들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우리의 십자가는 훨씬 가벼워지고 억지 십자가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진 십자가도 필경 억지 십자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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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40 마태복음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마5:1-11  강남순 교수  2008-07-24 2723
17339 마태복음 빛과 소금 [1] 마5:13-16  박재순 목사  2008-07-24 3147
17338 요한복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한다 요8:31-38  추응식 형제  2008-07-24 1850
17337 호세아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호13:12-14  김이곤 목사  2008-07-24 2520
17336 요한일서 사랑의 환타지 요일4:16  신옥희 교수  2008-07-24 1902
17335 마태복음 우리들의 자화상 마7:3-5  최만자 자매  2008-07-24 1667
17334 요나 요나와 베드로 욘1:1-3  최창모 교수  2008-07-24 2308
17333 빌립보서 복음의 진전 빌1:12-18  서중석 교수  2008-07-24 2098
17332 에스겔 氣化가 있는 사회 겔37:1-6  권진관 형제  2008-07-26 1924
17331 마가복음 하늘과 땅 사이에서 막4:1-9  서창원 목사  2008-07-26 1746
17330 고린도전 성경은 생명 교과서 고전6:15  우명미 자매  2008-07-26 2107
17329 마태복음 바닥을 친 신앙 마4:1-11  김광수 형제  2008-07-26 1752
17328 마가복음 누가 이 바윗돌을 옮길 것인가? 막16:1-4  최만자 자매  2008-07-26 1509
17327 마태복음 두 지원자 마8:18-22  정진우 목사  2008-07-26 1620
17326 마태복음 주님, 우리가 언제 마25:37-44  민영진 목사  2008-07-26 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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