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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마태복음 강남순 교수............... 조회 수 2723 추천 수 0 2008.07.24 22: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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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1-11 
설교자 : 강남순 교수 
참고 : 새길교회 2001.3.25 주일설교 
기독교 신앙은 패러독스를 받아들이는 것

여러분들 중에는 아마 오늘 설교제목을 보시고서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고난과 금욕, 그리고 회개의 삶에 대하여 말해야 할 이 사순절 기간에, 그런 것들과는 정반대의 주제로 보이는 '행복'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저는 작년 3월에 영국의 캠브리지에 갔었습니다. 제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 미국의 한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어느 교수가 제게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런던에 있는 국립미술관(The 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예수전]을 하는데, 예술과 신학에 대한 책을 쓰고 있던 그 교수는 어느 단체에서 grant를 받아서 그 전시회를 간다며, 제게 영국에 간 김에 하루 이틀 시간을 더 내어서 그 [예수전]을 꼭 보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캠브리지 대학교에서의 모임이 끝나고서, 저는 이틀을 캠브리지에 더 머물면서 런던의 국립미술관에서 하는 [예수전]을 관람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에 관한 그림, 조각등 다양한 나라 사람들이(주로 유럽나라들이었지만) 오랜 시대를 거치면서 표현한 예수에 관한 작품들을 총망라한 규모가 아주 큰 전시회였습니다.
제가 그 전시회를 관람하면서 제 마음속에 강하게 남은 인상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paradox"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도 말했지만,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이 paradox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라는 사실이 다양하게 표현된 예수의 모습을 보며 제 마음속에 더욱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반대라고 생각하는 것들--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 고통과 기쁨, 사랑과 번민, 고난과 행복--이러한 것들이 하나의 그림속에 동시적으로 표현된 작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기예수의 탄생을 그리는 어느 그림은 그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아기 예수가 십자가와 해골위에 누워서 방글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면, 무섭고 끔찍한 주검들 위에 부활의 생명을 의미하는 찬란한 빛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 우주안에 있는 모든 생명의 순환을 거시적으로 볼 때, 사실상 삶과 죽음이 반대말이 될 수 없듯이, 고난과 행복--그것은 기독교에서 반대말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paradox가 바로 신앙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기독교인일 수록 이러한 패라독스를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며, 그러한 성숙한 신앙의 눈을 통해서만이 왜 깊은 절망속에서 희망의 줄기를 찾아 볼 수 있고, 또한 고난속에서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의미를 발견해 낼 수 있는가를 느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고난이 아니라, 사실상 그 고난의 다른 모습일 수도 있는 행복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패러독스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세 가지 불안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며 철학자중의 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폴 틸리히는 그의 {존재에의 용기}(The Courage to Be)라는 책에서 인간은 세 가지 불안(anxiety)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세 가지 불안은 운명과 죽음에의 불안, 공허함과 무의미의 불안, 그리고 죄책감과 비난에 대한 불안입니다. 죽음에의 불안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불안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생물학적으로 무화(extinction)되는 것을 의미하는, 육체를 가진 자신의 완전한 상실이 언젠가는 찾아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에의 인식은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인 불안을 느끼게 합니다. 무의미에 대한 불안은 자신이 모든 의미를 부여하던 것들에서 그 의미가 사라질 것에 대한 불안입니다. 이 불안은 영적인 중심의 상실, 즉 우리의 삶, 우리의 실존적 물음에 대한 답이 상실될 것에 대한 불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도덕적인 자기 승인이 위협받을 때, 이러한 상황은 죄책감에 대한 불안, 자기 거절이나 또는 비난에 대한 불안을 낳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불안들을 넘어서서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사랑'이라는 말처럼 너무나 함부로 많이 쓰여져서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을 별로 생각해 보고 싶지 않을 만큼 가벼운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만, 사실상 그러한 단어들이 여기 저기에서 많이 쓰여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에서는 무엇이 행복이며, 그 행복은 어떻게 얻을 수 있으며, 그 행복을 지속적으로 지킬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인가 등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알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인간의 모든 행위들이란 각기 다른 행복의 내용이나 기준이 있지만, 사실상 행복하기 위한 것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철학자들은 무엇이 행복이며, 우리 인간은 그 행복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시도들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어른들이 된 우리는 '나는 행복한가'라는 물음을 자신에게 던지기를 어색해 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기보다는 다양한 의무들을 해내기 위해서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과 직장에서의 의무들을 수행해 내어야 하는 일상적 삶에서 돌연히 물러 나와서, '나는 행복한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어찌보면 사치스러운, 격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영국에서 몇 년 전에 100명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신이 당신의 인생에서 바라는 가장 커다란 야망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이 답한 것은 "행복하게 되는 것" (To be happy)라는 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 젊은이들의 대부분은 그 무엇보다도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들에게서는 행복한 것인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다른 답을 했다고 합니다. 저도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무엇이 행복인가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 살든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커다란 삶의 목적은 사실상 '어떻게 내가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은 어떤 물질적인 무엇인를 소유함으로서, 또는 권력을 소유함으로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세뇌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사회의 교육이나 또한 우리가 접하는 매스미디어들은 사실상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을 쥐는 것이 행복의 조건인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 Joseph Newton 이라는 사람이 쓴 칼럼을 읽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 방의 창가에 서서 집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공원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작은 소년이 아주 조그만 나비를 잡으려고 좇아 다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아주 작고 아름다운 나비였습니다. 그 나비가 어느 꽃 위에 앉자마자, 그 소년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얼른 손으로 그 나비를 꽉 잡았습니다. 그 소년의 얼굴에 아주 만족스러운 승리의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런데 그 환한 승리의 미소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을 뿐, 자신이 잡은 아름다운 나비를 보기 위해서 손을 펼치던 그 소년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자신이 잡으려고 그토록 애쓰면 쫓아다녔던 작고 아름다운 나비는 그의 손안에서 부스러지고,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망가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손안에서 형체도 없이 부스러져 버린 나비를 들여다보던 그 소년은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단순한 이 이야기를 읽으며, 저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내용들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 인생은 어찌 보면 이렇게 꽉 잡으면 부서지고 말 어떤 것을 일생 좇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행복은 투쟁의 부재(absence of struggle)가 아닌 투쟁을 통하여(through struggle)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인가,' '어디에서 우리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참으로 대답을 찾기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진부하고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성서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예수의 생각을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이라고 부르는 이 본문의 말씀은 영어로 "Beatitude"라고 부르는데, 아시다시피 이 단어는 '지고의 행복'(Supreme Happiness) 이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 '복이 있다'는 영어표현인 'blessed'는 '행복함'(happy)을 의미한다고 여러 주석들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인용사전에서 'happiness'라는 단어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행복이라는 말에 대한 대부분의 인용문들은 굉장히 냉소적인 것들이었습니다. 행복은 우리가 그것을 잡기 전까지만 아주 진짜인 것 같을 뿐, 사실상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이란 사실상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행복에 대한 다양한 인용문들을 읽으면서 저는 그 인용문들의 저자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어떤 투쟁(struggle)이나 어려움이 모두 사라진 상태, 그래서 모든 종류의 긴장이나 압박감이 모두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행복'의 개념이란 사실상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인간이 행복을 찾는다면, 그것은 압박감(pressure)이 모두 사라진 후가 아니라 그 압박감속에서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삶을 유지하고 있는 한 인간은 다양한 종류의 pressure들을 갖게 마련이고, 우리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양한 재난, 사고, 불행을 만날 가능성을 언제나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양태의 삶을 살아가든, 투쟁(struggle)하며 즉 애쓰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작은 투쟁이든 커다란 투쟁이든, 개인적 투쟁이든 또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투쟁이든 인간의 삶은 다양한 투쟁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어떤 주석은 blessed 라는 말이 '기쁨'(joy)을 의미하는 고대 헬라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 '기쁨'이란 아무 것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아주 깊은 내면적 평정과 만족스러움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오늘 읽은 '산상수훈'은 상실감이나 고통스러움 또는 다른 그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Beatitude'에서 말하는 '복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즉 '복을 받음'(blessedness)은 '투쟁의 부재'(the absence of struggle)의 상태가 아니라, '투쟁을 통하여'(through the struggle)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투쟁의 부재란 인간의 삶에서 불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행복을 모든 투쟁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에 그러한 이해는 행복이란 신기루와 같은 허상일 뿐이라는 냉소주의적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행복은 먼 미래에서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두 번째로 예수는 이러한 행복이 지금 얻어질 수 있는 현재적인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유명한 성서주석가중의 한 사람인 William Barclay는 그의 책 {마태의 복음}(The Gospel of Matthew)에서 이 산상수훈에 대하여 아주 흥미로운 발견을 합니다. 그는 '복이 있다'(blessed)라는 구절이 are와 함께 쓰여질 때 (Blessed are those...)많은 영어 성서에서 그 are를 이탤릭 글자로 표기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러한 이탤릭 글자로 표기된 are라고 하는 것은 물론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 동일한 의미로 찾아질 수 있는 단어는 아닙니다만, 성서의 번역자가 이 복음의 의미를 보다 잘 표현하기 위하여 과거형이나 미래형이 아닌 현재형 are라고 하는 단어를 가져온 것이라는 겁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미래에 오는 어떤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here and now) 얻을 수 있는 복,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 이 해석을 통해서 분명해 집니다.
기독교신앙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들은 크리스쳔들이 취할 수 있는 것들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얼마 전 저는 어느 친구와 만났는데, 너무 바빠서 힘들다는 제게 그 친구가 '언제가 되어야 좀 시간이 여유로와 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글쎄 한 열흘정도가 지나면 좀 시간이 날거야."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런 말들은 사실상 10년 전에도 하곤 했습니다. 학위과정에서 공부를 할 때는 그 과정이 끝나면 좀 더 여유있게 지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지금도 여유있는 시간을 갖기가 더욱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 친구와 말하면서 저는 마치 우리가 행복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열흘 후, 한달 후, 또는 일년 후가 되면 여유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지금-여기'가 아니라 이 언덕만 넘으면 행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라면, 사실상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행복이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현재적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현재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지금, 이 복잡한 우리 삶의 한 가운데, 바로 여기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삶의 짐들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어떤 직업을 갖고 살아가든 우리 모두는 각기 짐을 지고 갈아 갑니다. 어떤 이들이 갖고 있는 문제가 나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들은 각기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삶의 짐들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그러한 짐들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짐들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은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 속에, 사실상 우리의 역사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비밀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의 전기를 보면, 사실상 그들의 삶도 다양하고 복잡한 삶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기는 사람들로 살아간 것은 그들이 안고 있는 모든 짐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삶의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 이러한 행복은 어느 소년의 손안에 꽉 잡힌 나비 마냥, 소유하자마자 바로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진정한 행복은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속에, 우리의 영혼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으로 지니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직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
마지막으로 예수는 이러한 행복은 간접적으로 오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한번 예수님이 이 산상수훈을 이야기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은 과연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눈을 반짝이며 예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사회에 살든 사람들이든 인간이 가장 관심하고 있는 것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행복, 그것도 지고의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예수의 산상수훈을 다음과 같이 풀어보았습니다.

자 이제 나는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해야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 말하겠습니다.
--자신의 유한성과 이기성, 그리고 죄성을 깊이 느끼며 하나님께 의존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삶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의로운 삶인가를 고민하며, 그 의를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야 말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평화를 촉진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손해를 보아도 옳은 것을 위해서 일하는,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주 작은 것일 지라도, 정의로운 가정, 정의로운 교회,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세계를 위하여 관심하고 일하는 사람들은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힘 없는 사람들, 아주 작은 사람들이라고 주변으로 밀려난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관심하고, 그들을 위한(for) 삶을 넘어서서 그들과 함께(with) 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스스로 예수께서 말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여러분들의 삶의 조건들에 따라서 만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행복이란 직접적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 다른 인간, 나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
예수가 보여주는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조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러한 것들은 사실상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다른 인간과의 올바른 관계, 그리고 나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진정한 행복은 만져지거나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우리의 손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으로, 우리의 영혼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경험이며, 그것은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우리의 끊임없는 결단과 용기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을 택한다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세계가 말하는 행복에 대한 반역(rebellion)이며, 단절과 고립된 삶에 대한 단호한 '아니오' (No) 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 그리고 동료인간과 올바른 관계맺음을 통해서만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1998년과 99년에 미국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클린톤 대통령의 르윈스키 스캔들이 얼마나 미국뿐 아니라 세계의 관심이었는지를 그곳 TV를 통해서 매일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방영되는 청문회나 클린톤의 여성편력의 문제들을 속속들이 파헤치고 야유하는 다양한 TV 프로그램들을 보며 저는 우선 클린톤과 같이 살아가는 힐러리 클린톤와 그의 딸 첼시의 인권이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전혀 보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힐러리 클린톤은 도대체 어떻게 그 수없이 쏟아지는 야유에 찬 분석들과 비판들을 견디고 있는가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TV에서 저는 힐러리 클린톤이 단독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본 힐러리의 모습을 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기자의 첫 질문에, 가만히 생각하던 힐러리가 조용히 분명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나 자신에게 언제나 묻습니다. '자 오늘 너는 어떻게 살 것인가? 아주 냉소적(cynical)으로 오늘을 살 것인가, 아니면 너에게 주어진 것들을 최선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오늘을 살 것인가?' 그리고 나는 매일 새롭게 후자를 선택하도록 나 자신을 격려합니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마치 새로 태어난 듯이 새로운 선택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나에게 그러한 선택을 할 용기를 줍니다."
저는 지금도 조용하고 단호하게 확신에 찬 모습으로 이 말을 하든 힐러리 클린톤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매일 아침, 언제나 새로 태어난 듯이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한다는 그녀의 모습이 제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새롭게 우리 삶의 크고 작은 방향과 목표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무수한 선택들의 연속들인지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는 아주 냉소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무수한 삶의 문제들 한 가운데서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따르기 위한 노력을 하는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올바른 삶의 길을 위한 선택과 노력을 하는 삶의 여정에서 비로소 우리는 작은, 그러나 진정한 행복들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가 말하는 진정한 행복을 위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이 현실속에서 언제나 승리와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여정 그 자체가 우리의 행복과 희망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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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33 빌립보서 복음의 진전 빌1:12-18  서중석 교수  2008-07-24 2098
17332 에스겔 氣化가 있는 사회 겔37:1-6  권진관 형제  2008-07-26 1924
17331 마가복음 하늘과 땅 사이에서 막4:1-9  서창원 목사  2008-07-26 1746
17330 고린도전 성경은 생명 교과서 고전6:15  우명미 자매  2008-07-26 2107
17329 마태복음 바닥을 친 신앙 마4:1-11  김광수 형제  2008-07-26 1752
17328 마가복음 누가 이 바윗돌을 옮길 것인가? 막16:1-4  최만자 자매  2008-07-26 1509
17327 마태복음 두 지원자 마8:18-22  정진우 목사  2008-07-26 1620
17326 마태복음 주님, 우리가 언제 마25:37-44  민영진 목사  2008-07-26 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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